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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게 지내던 후배 녀석과의 인터뷰 기사를 쓴 적 있다. 그는 ‘조선족’(? ‘중국동포’? 헷갈린다...)인데, ‘조선족’으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당한 차별의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다. 차별의 기억을 새롭게 끄집어 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게 힘든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그 사람들의 행동도 이해한다”며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오히려 듣는 내가 안타깝고 속상했다. ‘아니, 어쩜 이럴 수가…4가지 없는 ××들’하고 생각하며 혼자 삼켰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나가고 며칠 후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은 인터뷰한 내 후배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모든 ‘조선족’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사돈에 팔촌”까지 들먹이며 “돈에 눈이 멀어 한국에 온 사람들”로 매도했다. 가관이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받았을 후배를 생각하며 댓글을 달아 차분히 설득하려고 애썼다. 나까지 흥분하면 후배가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단 댓글 밑에 먼저 댓글을 쓴 사람이 다시 쓴 악플은 더 가관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댓글들을 후배가 봐버렸고, 후배는 분노를 넘어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자기 말만 내뱉으면 듣는 사람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건가? 자기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차별하고 어떻게 상처를 주는지 안중에도 없는 건가?
이런 *&%$#@!!! 마치 내가 모욕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이런 인간적인 모멸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반사! 너도 한번 당해봐. 눈 앞에 있었으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았을지도 모른다. 너 내 눈 앞에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화가 나더라도 다시 한번 그 악플러를 설득하려고 애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하는 건 그의 ‘쿨함’에 비해 너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차별한 인간은 다른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이 저리도 쿨하게 내질러버리는데, 왜 차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차별당하고 상처받았는지 설명해야 하는 건데? 그것도 상대방이 알아들을지 못 알아먹을지 확신도 들지 않는데. 아니, 못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지. 지금 내가 너의 댓글은 나에게 차별적이었고 너의 차별로 인해 난 이렇게 상처받고 고통받았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는다고 해서 공감을 받아낼 수 있을까? 어림 없는 소리!
그렇다면 저 인간이 저렇게 행동했겠어! ‘차별’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원했던 건,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짧고 강렬하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난 너의 악플로 전혀 상처받거나 주눅들지 않아. 쳇! 그따위 악플,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진부하고 상투적인 악플. 그래, 니 한계는 거기까지야. 차라리 귀엽게 봐줄게’ 정도로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겠지만, 유독 마인드컨트롤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날도 ‘아휴, 이걸 그냥 콱!’하는 생각으로 어떻게 상대방을 쿨하게 제압할까 고심하며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달달 떨고 있었다.
뭐라고 댓글을 달지? “이런 병쉰 새키. 너 완전 병맛. 꺼져.”라고 할까? 아냐 아냐. ‘병신’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니까 차마 내가 쓸 수는 없지. 아님 “걸레같은 년. 더러워. 너 사실 초딩이지? 가서 메이플이나 해라”고 해버릴까? 근데 상대방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가 없잖아. 그리고 왠지 ‘걸레’는 ‘년’이라는 말에만 따라다니는 것 같아 그것도 찜찜하고…초등학생들을 싸잡아 무시한 것 같기도 하고……. 흐음...끙...그럼 “너 사실 오덕후지? 왠지 니가 말하는 게 꼭 오덕하게 말하더라”라고 해버릴까? 아...이것도 쫌...ㅠㅠ
결국 ‘짧고 강렬하게’ 상대를 제압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말들은 대부분 저런 류였다. 물론 나의 ‘쎈스’가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훠얼씬 높지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저마저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했어야 하는 건가! 그런 건가!!! 짧고 강렬한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면, 뭔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상징적인 의미의 말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은 결 국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제압하고자 하는 상대방을 쉽고 간단하게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소수자’로 낙인찍으면서 ‘소수자’에게 붙어 있는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사회적 의미와 편견들을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옮겨다 붙이는 것.
사소한 듯 보이는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런 ‘힘’(사회적 효과)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땐 심지어 부럽기까지 했다!(-_-;; 근데 차별하는 주체에 대해 짧고 강렬하게 제압할 수 있는 말은 없을까? ‘나찌’? ‘호모포비아’? 역시 그런 언어와 사회적 합의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결국 난 악플을 달지 못함으로써 ‘짧고 강렬하게’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그때 난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할까? 아직까지도 물음표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난 후 고 최진실 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도 죽기 전에 악플에 시달렸다지? 다시 한번 상처받았을 후배가 생각났다. 그리고 채 아물지 못한 나의 상처도. 그러다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자신이 누군지 ‘당당히’ 밝히며 자신이 쓴 모든 댓글과 자신의 댓글에 달린 모든 다른 댓글들까지 지워달라고 요구하는 그 사람. 후배의 인터뷰 기사에 기가 막힌 악플을 단 바로 그 사람이었다! 첫 번째로는 그 당당함에 놀랐고, 그 다음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요구를 마음껏 하는 그 뻔뻔함에 놀랐다. 그 사람은 고 최진실 씨의 자살과 그에 따른 ‘악플 관련 수사’가 신경 쓰였는지, 자신이 단 댓글을 모두 지워달라고 했다. 자기가 단 댓글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며. 그리고 자신의 댓글 내용이 언급된 다른 댓글들까지 모두 지워달라고 요구했다. 엥? 이건 뭐야. 그의 요청에 따라 그 자신의 댓글은 지워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쓴 댓글은 안된다고 했더니, 생떼를 쓴다. 이젠 아예 기사 자체를 지워달란다. 너의 무모함에 박수를, 젠장. 그럼 애시당초 왜 그런 댓글을 달았냐고, 당사자가 받았을 상처를 한번쯤은 생각해본 적 없냐고 물어봤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니까 지워주세요. 기사까지 다 지우면 될 거 아니에욧!”이라는 그의 당당함에 다시 한번 헐-, 이런 진상.
* 인터넷 악플에 많이 쓰이는 차별적인 용어들(아 래 용어들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따이루 활동가가 정리해주었습니다. 아래 단어들은 [국어대사전]에 등록된 단어들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는 일단 ‘따이루식’ 해석임을 미리 밝힙니다. 다른 가능한 해석은 댓글로 좀 달아주세요-)
□ 오글거린다 / 오그라든다 / 오글오글 - ‘헐...오글오글 오그라든다’
: 손과 발이 근질근질거리는 느낌처럼 글이 느끼하거나, 닭살스럽거나, 유치할때 쓰는 말.
*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소문’이 있음. 속이 느글느글하다라는 느낌하고 비슷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임.
□ 병쉰 / 병진 - ‘병쉰새키’
: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인 ‘병신’이라는 욕설의 발전(?)한 형태.
□ 병맛 / 병tothe맛 - ‘병맛만화ㅉㅉㅉㅉ’
: ‘병신같은 맛’을 줄여 쓰는 건데 ‘병쉰’ 이런 거와 비슷하지만 이 표현은 보통 만화/동영상/글/사진 뭐 이런 부분에서 주로 쓰임. 말도 안 되거나, 내용이 특이하거나, 재미가 없는 만화를 가리킨다는.
□ 거지같은 년 / 걸레 - ‘더러워, 걸레’
: 위에 거와 비슷하지만 여성들에게 주로 달리는 악플. 창녀같다, 더럽다 뭐 이런 의미로 쓰임.
□ 오덕오덕 / 오덕후 - ‘ㅋㅋㅋㅋㅋ오덕하게 생겼어’
: 원래는 일본만화/애니에 푹 빠져 계신 분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제는 ‘중독자’를 가리키는 말이 됨. 그러다가 요즘에는 ‘여드름 많고 뚱뚱하고 패션 감각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비꼬아서 쓰기도 함.
□ 초딩 - ‘초딩 시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이플이나 해라’
: ‘초등학생’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생각/개념 없이 말하거나 글 쓰는 사람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많이 쓰임. 또한 요즘 패션트랜드를 못 따라가는 사람의 패션을 ‘초딩패션’이라고 놀리는 데도 쓰임.
* 참고로, 난 악플을 막는답시고 내놓은 대안이라는 ‘인터넷실명제’도 완전 반대한다. 입을 막는다고 차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입을 막을 게 아니라 차별을 없애도록 노력해야할 일이다.
** 이 글은 반차별공동행동 웹진 <차.차.차>에도 실린 글입니다.
흡연에 대한 담백한 사유를 바람
산하/ 인권운동 사랑방 반차별팀 자원활동가
● 들어가며
- 담배를 피우며 길을 걸어가는 데 누군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할아버지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린년이 어디서 담배를 피고 지랄이야?”
-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중 쉬는 시간, 건물 입구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지나가던 경찰차가 내 앞에 멈춰서고 갑자기 경찰이 나를 불렀다. “아가씨 몇 년생이에요?” 나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 그걸 왜 물으시는 데요?”, 내가 당돌하게 나가자 멋쩍은 듯 대답했다. “아니 그냥 길에서 담배를 피고 있길래...”. “ 저 88년생 성인인데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대차게 나갔다. 경찰이 말했다. “아니 성인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자가 대낮에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좀 보기가 그렇잖아요 그렇지 않나?” 조수석에 앉아있는 동료에게 긍정을 요구하기 까지 한다. “전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데요. 그럼 담배를 어디서 펴야 되나요?”하고 말하자 “아니, 그냥 좀 보기가 안 좋아서...” 라고 말끝을 흐린 후에 가버렸다.
- 친구와 함께 담배를 피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면서 나에게 뭐라 하신다. “나중에 기형아 태어나려면 어쩌려고 담배를 펴 애 잘못되면 다 여자 탓인데, 애 낳는 몸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건데 그렇게들 담배를 피우나 쯧쯧”
내가 이러한 글을 쓰게 된 까닭은 (여성)흡연자로써 보낸 지난 일 년 동안의 시간이(정확히 말하자면 흡연여성으로 인해 받은 수많은 차별과,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사회적 규범·인식에 대한 스트레스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사례들은 모두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이다. 더 폭력적이거나 더 은밀한 차별과 억압도 많았으나 그 모든 사례를 열거하기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저들의 논리에 따르면 나는 나이가 어린 여자이기 때문에, 그냥 보기가 안 좋으니까, 아이를 낳을 몸이기 때문에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여자는 안 되고 나이가 많은 여자는 되는 이유가 뭘까? 흡연하는 여성의 모습이 길을 가다 차를 세울 만큼 눈엣가시가 되는 이유는?. 남자도 흡연하면 정자가 약해지고 수도 줄어든다는데! 여성 흡연에 대한 억압적 분위기 그리고 여성에게 금연을 요구하는 사회적 담론은 ‘흡연이 아기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방식 즉, 여성의 신체가 ‘아기를 낳는 모체’로써 인식된다는 점에서 성차별 적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여성 흡연 현상과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과정을 살피고 두 번째로 흡연이 여성에게 사회적 금기로 작용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본 후 세 번째로 나의 경험에기반하여 흡연과 젠더관계를 분석하고 더 나아가 내가 바라는 '여성 흡연· 흡연 여성'에 대한 사유를 피력하고자 한다.
● 여성 흡연 실태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흡연 인구는 13억 명으로 1년에 490만명이 담배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흡연 인구는 약 1200만 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흡연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금연 분위기가 일면서 한국인의 20세 이상 성인 흡연률은 남자의 경우 1980년 79.3%에서 2002년 60.5%로 20여 년 만에 18.8% 감소했으나, 20대 여성 흡연율은 1980년 1.4%에서 2002년 8.1%로 6배가량 크게 늘었다.
이처럼 지난 수십 년간 여성 흡연율이 증가한 것은 전 세계적 양상인데, 여성 흡연 인구의 증가는 먼저 선진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흡연자의 총수는 2억명 이상이며, 선진국 여성 평균 흡연율은 25% 전후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된 지난 20년 사이에 여성 흡연 인구가 급속히 증가 하였다.
이렇듯 여성 흡연율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여성의 흡연을 금지하는 법이나 제도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 흡연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흡연 여성의 역사
여자가 번듯이 담배를 피워서 말세라면, 말세는 벌써 옛날에 왔다. 명성황후도 애연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해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간 담배는 포르투갈이 일본에 전했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정조 임금도 즐겨 피운 담배는 양반뿐만 아니라 상민, 천민 그리고 여성과 아이도 즐겼다.-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몹시 많이 피우는데 심지어 네댓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들 까지도 피울 정도여서, 남녀를 막론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하멜 표류기>-
1910년도 담배광고를 보면 임신여성이 궐련을 피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의 습속>이라는 책자에는 담배를 피우는 도구를 성명하는 이가 남성 아닌 여성이며, 부덕을 정숙히 행할 상류층 부인이다. 이밖에 여러 자료에서도 결코 여성의 흡연이 사회적인 금기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언제부터, 왜, 누가, 여성을 흡연에서 배제하기 시작한 걸까?
조선 사회가 보수적이 성격을 띠게 되는 시기는 남존여비와 같은 가부장적 사고가 짙은 사림계열의 성리학자들이 정계를 장악한 18세기 이후부터이다. 형제들이 돌아가며 지내거나 시집간 딸도 모시던 제사를 적장자만이 지내고 상속도 적장자 위주로 이루어 졌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해짐에 따라 여성의 공간은 '집'으로 규정되었으며, 담배에도 예절이 생겼다. - 종은 상전 앞에서, 나이 어린 사람은 윗사람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또한 신분에 따라 담뱃대의 길이가 달라져 양반은 1m가 넘는 담뱃대를 물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근대 사회에서 왜 여성은 흡연에서 배제되었는가.(사)현대사 연구소> -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이 공개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정숙하지 못하다는 범절이 통용되었고, 상류층의 여성들은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지 않음으로써 남 앞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우는 기생이나 주막부녀들과의 신분적 구별을 두었다. 그러나 예외 적으로 가정의 연장자나 과부처럼 '사연이 있는 여인'들 에게는 담배가 허용 되었다. 여기서 기생에 대한 부정적 관념과 이들이 공개적으로 사용한 담배의 결합에서 오는 이미지는 지금까지 여성 흡연자를 제약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가 이후 '양공주'로 이어지면서 직업적 속성이 기생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담배를 허용하는 관행이 점차 관습법처럼 굳어졌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조선이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 할 것을 촉구한 선교사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술과 담배를 축첩이나 노름과 같은 죄악으로 규정하면서, 패가망신의 원이이며 사회적으로 해로운 풍습이며 국가의 재정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화'하기 위해서는 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담배의 해로움을 밝혀낸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되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의 요구를 들 수 있다.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나라의 빚을 갚자는 때에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단연'이었지만 담배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주세와 함께 일제 제정의 40%를 차지했다. 식민지 시절 개화를 주장하고 독립을 염원하던, 민족을 앞세운 선각자들은 '힘을 키워 나라를 되찾자'는 구호아래 여성들을 국민의 어머니로 규정한다. 여성들은 민족의 앞날을 책임질 아이를 근대적으로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자유와 저항의 상징
서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담배가 전래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담배는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의 종교서회는 여성에게 지속적인 입술운동을 하면 턱수염이 날 수 있다고 경고하기까지 했고, 흡연 여성들은 품위가 없는 최하층 여성이거나 창녀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여성 해방 운동의 물결이 일어났을 때 흡연은 여성 해방의 상징이 되었고, 당시 유명한 페미니스트였던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 로라 몬테즈(Lora Momtez)는 공공장소에서 보란 듯이 담배를 피웠다. 영국에서 여성 투표권이 허가된 1920년대 이후 담배 소비는 급속히 성장했고, 미국에서도 여성 투표권이 통과되고 난 후 담배 소비가 급격히 증가했다.
「담배는 숭고하다」를 쓴 리처드 클라인는 "한 사회에서 여성이 어느 정도 흡연권을 누리고 있는가는 보편적 평등의 지표이자 시민 사회 내에서 여성이 전임 회원인가 여부를 가늠 하는 시금석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1980~90년대 패미니스트 사이에서 '담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그들은 양성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담배를 사유하고 소비했다. 그들에게는 여성이 담배 피울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다른 분야에서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임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담배를 선택했다. 정치적 흡연가가 된 것이다.
여자가 숨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더 이상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주제적인 의사표시로 받아들여진다. '공공연하게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여자라면 마땅히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그녀가 빨아대는 모든 담배 연기는 그녀가 호흡하기로, 그것도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호흡을 하기로 결정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리처드 클라인>
● 나오며 +사족
나는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내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임을 드러내고자 흡연을 하는 것인가?
내가 당당히(?) 흡연을 하는 것은 굳이 숨길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따라서 나의 흡연 행위가 저항 또는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물론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강도의 차별을 경험했지만 내가 그 차별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의 상징으로써 흡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일상적인 행위가 누군가에겐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다는 사실이 거북하고. 심한 욕설을 듣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당할 뻔 했던 일련의 경험들이 나를 위축시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담배를 꺼내 물을 때 혹여나 나를 해치거나 쓴 소릴 할 만한 사람이 있지 않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골목길에서 갑자기 아저씨들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얼른 담배를 끄고 모른척하는 내 모습,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정말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시선이 어느덧 내 안으로 들어와 스스로를 검역하고 억압하려 하고 있다는 발견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오히려 ‘자유와 상징’이라는 구호마저 벗어 던지는 그냥 단순하고 명쾌한 그런 사유를 원한다. 별 것 아닌 담배에 여자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 "왜 담배를 피우니?"하고 물으면, "그냥 , 담배가 좋아서."하고 대답할 수 있는,
어떤 사건도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담배가 여자에게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단지 '기호'에 불과한 그런 담백한 사유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참고 문헌>
- 이윤숙. <담배로부터의 해방과 여성의 해방>. 2003.
- 서명숙.「흡연여성 잔혹사」서울: 웅진닷컴 2004.
- 고한나, <일제시대 여성 흡연에 대한 담론 분석>, 서울대 인류학과 석사논문
장애, 여성으로 살아가기
-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김상희씨 인터뷰
대옹
“제 소원이요?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일찍 죽는 것에요”
영화 “말아톤”에서 주인공 엄마의 대사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연 장애를,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볼까? 불구, 불구를 가진 사람, 불행, 불행한 사람, 혼자선 살 수 없는, 그리고 그런 사람?!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면 ‘장애를 올바르게 바라보고 있나’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사회에서 비장애인은 이동에 어려움을 겪지도, 의사소통에 힘겨워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이 장애를 겪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만’을 위한 이동시설이 잘 갖추어지고, ‘그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가 과연 장애 그 자체 때문이라 할 수 있을지 여성장애문제를 고민하는 장애여성 공감의 김상희 활동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애인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오래 되었는데 과거와 비교해 우리 사회가 오늘날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가요? 예전에는 장애를 멀리하고 꺼려하기만 했었던 것에 비해 요즘은 좀 더 가깝게 느끼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 장애문제가 나의 문제로 고민이 되고 있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여기에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려서부터 뇌성마비가 있는데, 제가 어렸을 땐 (장애를) 아이처럼 생각하고, 거부감을 느끼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로 인식을 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과거와 같은 생각도 남아 있긴 하지만 언론 매체에 많이 드러나고 후천적인 장애들도 많아서 서로 다른 세계로 인식하는 생각은 좀 없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도) 불쌍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시선들을 많이 접해오긴 했죠. 장애가 주는 이미지가 워낙 부정적이라 장애를 가진 것만으로도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시선이 아직 많아요.
혹시 직접 겪는 차별이나 피해 같은 것들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뇌성마비 장애도 종류가 굉장히 다양한데 보시다시피 저는 언어장애가 있고 휠체어도 타기 때문에 생활에 보조가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혼자 지하철을 타거나 어딘가를 갈 때 바닥에 물건을 떨어뜨리면 주워달라고 말을 하기가 어려워요. 힘들게 말을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요. 다소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제 말이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귀 기울여 주지 않아요. 언어장애를 낯설게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요. 또, 사람들이 뇌성마비에 대한 편견이 많거든요, 제가 안면근육 마비 장애가 있는데, 사람들은 지적장애로 여기고 처음 만났는데도 (말을 걸때) 마음대로 반말을 하고 그럴 때가 많죠.
낯설게만 생각하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에 반성도 하게 되고 공감도 하게 되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런 식의 생각들이 또 장애와 비장애를 나눠버리고 서로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같은데요. 이런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이분법화가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주체적이지 못하고 , 대상으로서만 규정되는 것을 경험 하시나요? 특히, 장애단체이면서 여성단체인 공감은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문제들이 주체성의 문제에서 더욱 고민스러울 것 같은데요.
또 공감에서는 장애여성의 출산 육아 등에 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희가 왜 ‘장애여성들만 고민을 해야 되는가’를 문제로 제기하고 싶어요. 그 문제는 지금의 결혼제도가 많은 문제점이 있다 생각하고, 그런 이의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장애여성이) 원하는 결혼이라든가 출산을 얘기하기는 참 어렵거든요.
저에겐 결혼이 굉장히 억압적인 제도로 다가오거든요. 결혼이 파트너하고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트너의 가족과도 연결되는 일이잖아요. 그 파트너가 가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역시 주변 사람들과 복잡한 연관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저한테는 억압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아요.
‘장애’라는 것으로 규정짓고서 확실하게 분리시키는 문제가 특히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여성으로서의 역할까지 강요받고 장애 여성에게는 더더욱 고민이 되는 문제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길 해볼까하는 데요? 요즘 장애운동 단체들이 4월20일 장애인의 날까지 대정부투쟁을 선언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감도 참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공감은 어떤 활동에 주로 주목하고 있나요?
저희도 4.20활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장애여성에 관련된 요구안은 많이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여성장애인이 요구하는 목소리를 하나하나 담아내지 못했어요. 일상적으로 하는 고민들인데도, 언어로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예를 들어 주거권 문제에서도 장애인의 주거권을 보장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장애여성에게는 단순히 주거권 보장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거든요. 독립생활 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많은 중증장애 여성이 독립한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분들이 외부로부터 위협받는 경우가 많아요. 밤에 문을 두들겨 본다든가 문을 열어본다든가 하는 위협 말이에요. 또 장애여성문제가 꼭 당사자끼리만 고민을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공유하고 싶은데 장애여성 문제는 장애여성들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좀 아쉽다는 느낌을 받죠.
언어로 장애 여성의 문제를 정리한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문제를 장애 여성만 고민하지 않고 비장애인이나 장애남성도 더 많은 고민들이 공유되는 것이 이런 여성장애의 문제의 언어를 만들고 목소리를 내는데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장애문제해결에 대해 정부적인 차원 외에 바라는 점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장애인 콜택시 아세요? 노란색 봉고차. 저는 혼자 타고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활동보조인이 콜택시를 불러주면 혼자타고 가는데 기사님들이 되게 활동보조를 해주시는 분이 같이 타지 않은 것에 대해 굉장히 불편해 하세요. 왜 같이 가지 않냐고 계속 꼬치꼬치 물어보는 분이 많은데 제가 꼭 누군가 옆에 있어야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제가 언어장애가 있어서 목적지 설명을 잘 못할 수도 있다는 거에 대한 걱정도 하시더라고요. 장애에 대한 두렵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러한 것들을 바꾸어야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 말을 많이 했는데, 가령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인데 그때라고 사람들이 갑자기 관심을 갖고, 인식이 하루 만에 바뀌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건 장애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을 갖고 있어야 인식이 바뀐다고 생각을 해요. 일상적으로 소통을 하고 같이 고민하는 노력이 서로에게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많은 장애인분들이 시설이나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소통을 더 쉽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도 장애여성 운동을 하면서 다양한 장애여성을 만나보고 싶은데, 장애여성분들이 다 어디 숨어 계신지(웃음) 만나 뵙기가 굉장히 쉽지 않아요. 시설에 갇혀 계신 분들도 있을 거고 집에 갇혀 사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뭐 언론에서는 그런 장애인들의 모습을 많이 비추어주고 있잖아요. (동정적이거나 극복만을 강요하는)그런 모습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 단체 같은 경우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었으면 좋겠다.(웃음)
그럼 공감에 대해서 좀 더 소개 해주세요.
공감에서는 지금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 성폭력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베이커리도 하고 장애여성 독립생활 센터도 운영되고 있어요. 그런 활동을 통해서 장애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성폭력문제 중에 지적 장애가 있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많은데 그에 대한 아직 대안이 없어 어떤 대안을 만들지 고민하고 있어요. 또 독립생활 센터에서는 장애여성을 독립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올해엔 장애여성 주거권에 대해 주제를 잡고 활동할 계획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 보다 먼저 죽기를 바라는?! 바랄 수밖에 없는 영화 “말아톤”의 장면은 우리사회의 장애를 바라보는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장애인은 불행하고 우린 동정과 시혜만을 주거나, 혹은 초원이처럼 드라마틱한 극복만을 요구한다. 본인도 장애인이기에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던 김양원 목사가 인권위 비상임위원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런 김 목사의 임신한 장애여성의 낙태 강요와 같은 반인권적 모습에서 우리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더욱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고민하는 제 고민거릴 그냥 써볼까 합니다 하하;
글쓰는게 처음이네요 먼저 소갤하면 반차별팀에서 석진담당하는 대용이라는 활동갑니다!
이 반/차별 프리즘을 쓰면서 뭘 써야할까 고민하다보니 요즘 내가 문득 들은 의문이 생각나더라구요. 지식의 차별?! 이라고해야되나,, 정보 독점에 관련한? 뭐 거창한건 아니고,,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사람과의 알고있는 분야나 배경 환경 다 다르잖아요. 당연히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도 다르고요.
그런데 이런 각자 알고있는 서로다른 정보들 혹은 그 양?질?이 권력관계에 개입되기 시작하면 차별의 순환고리를 만들어내는것 같거든요. 뭐 예를들면, 더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선배는 당연히 후배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것이되는 것이죠. 그래서 선배 혼자 존중받아야되고 우대받아야되는 그것이 선후배라는 권력관계와 맞물려서 일종의 당연하게 여겨지는 권력의 우선관계를 정당화 시켜주는 요소로 작용되는 것이지요. 이 요소로인해서 선배는 물론 후배도 당연하게 차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지요. (혼자만의생각일수도있습니다만)
여기 결정적으로 고민이 드는부분은 정보의 선점이 과연 차별의 정당화를 하는데 정말로 정당한 요소가 될수 있을까 이거든요. 먼저 알고 있는 정보는 공유하면 그 정보는 다른 의미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지식 정보를 창출해내는 기능을 발휘한다면 물론 정보의 선점이 의미가 없어지고 좋겠지요? 그런데 어디 사람맘이 그러하던가요,, 누구나다 나만 알고싶어하고 내가 어렵게 알아낸 정보를 지식을 누구한테 함부로 공짜로 알려주기 싫어하고들 그러잖아요. 어떻게 보면 카피라이트냐 레프트냐의 논쟁과도 맞닿는것도 같은데,, 근데 또 그렇게 선점하는 것에 대한 대가만을 인정하면서 대가를 지불하고 권력을 독점시켜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정보, 지식의 가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달까,, 이런 문제를 현실에서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지식의 선점,독점이 차별의 기제로 작용해버리는 이런 구조를 인정하기에는 제가 말하는 지식,정보가 무슨 학문적 연구를 통해 혹은 이러저런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과는 약간 다른 종류일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고 지금처럼 일종의 자연상태에 맡겨버리는 식의 돈,권력으로 해결해서는 역시 안되보이구요 ,, (에잇 몰라) 하하 이게 무슨짓인지요,, ㅋㅋㅋ 그냥 생각없이 제고민만 써버렸군요 ,,
저에게 힌트를 조금만 주시면 ㅋㅋ,, 제고민에 실마리가 될지도 ,, 읔,,, 여기까지만 쓸께요 ;;
(...) 지금은 그런 기준이 명확하게 섰지만,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얘기하면, 그 사람은 내가 노래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텐데, 내가 상처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공지영 작가는 그런 거 상관없이 옛날 만났던 남자들 얘기를 소설로 만들어내지만.(웃음) 저는 그런 것에서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
(중략)
그럼 인터뷰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시겠어요. (웃음) 하고 나면 꼭 말이 와전되잖아요.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그럴 때도 있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신경 쓰다보면..
피곤하죠?
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걸 감안하고 가야죠. 저는 솔직히 까놓고 호모포비아(homophobia : 동성애 혐오증)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그런 걸 빌미로 저를 공격하는 사람도 많았구요. 제 음악 잘 듣다가 뒤늦게 알고 CD를 부셔버렸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아무밴드>의 <호모포비아>라는 노래 듣고 싫어졌다는 사람 꽤 있더라구요.
좀 웃긴 것 같아요. 늘 말씀드리지만 음악을 음악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제 정치적인 성향이라든가, 그런 거 상관없이 음악은 음악이잖아요. 제가 한나라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웃음) 제가 한나라당 지지한다고 해서 제 음악적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저는 호모포비아지만 게이들 음악도 좋아해요.
호모포비아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하나일 수 있잖아요.
그렇죠. 다양성인데 인정 안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좀 심하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노무현 욕하면 ‘명빠’가 되고 이명박 욕하면 ‘노빠’가 되는 거, 웃기잖아요.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답답해요. 그걸 왜 제 음악에 적용시키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부분은 정말 고쳐져야 할 거 같아요.
그럼 <호모포비아>가 나왔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공격을 더 많이 받았겠네요?
많이 받았는데, 제가 그럴 만한 부분을 던지기도 했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면 널 죽여버릴거야’ 같은 가사도 있으니까(웃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받아들여요. 근데 정치에 민감한 분들은 수용 못 하시더라구요. 솔직히 전 그런게 되게 웃겨요. 물론 이제 별로 신경 안 써요. 제 할 일은 음악 제대로 만드는거고, 그럼 거리낄 것 없다고 생각하니까.
-PAPER 2월호, <뮤지션 이장혁 -이 험한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기> (인터뷰어: 최승우) 중에서
이장혁이라는 뮤지션을 알게 된 지가 나는 얼마 되지가 않았다. ‘스무살’이라는 곡이 꽤 좋고 음악성이 높은 뮤지션이라고 많이 이름을 듣고서 ‘나도 한 번 들어볼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이었다. 내가 저걸 읽은 것은 말이다. 몇 주 전, 지하철에 서서 그보다 더 얼마 전에 꽤 오랜만에 구입한 PAPER를 읽다가 정말 혼자서 화나 죽는 줄 알았다. 그걸 어떻게 풀어내지 못하고 그러고 있다가, 그날 저녁 교보문고에서 J에게 이 얘기를 열라 흥분해서 막막 다 쏟아냈더랬다.
난 저 기사에서, 그리고 이장혁에게서 ‘다양성’의 함정을 알게 되었다. 그건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 맘에 안 들지만 그는 호모포비아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 어디다 ‘다양성’을 갖다 붙이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널 죽여버릴’거라는 협박에 가까운 증오를 보이면서, 그 증오와 폭력에 대해 어떻게 ‘다양성의 시혜’를 베풀수가 있는가! 나는 정말 다양성이 그의 입 위에서 쓰이는 용법을 지켜보며, 나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 마이, 오 마이, 오 마이 갓!
너는 나의 좋은 친구
나는 너의 좋은 친구
거기까지가 아름다워
거기까지가 아름다워
너는 나의 좋은 친구
나는 너의 좋은 친구
니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전까진
사랑한단 말을 하면 널 죽여버릴거야
내게 입맞추려 하면 널 때려줄거야
난 너의 애인이 아니야
-이장혁,
그렇게 본다면 앞선 질문에서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얘기하면, 그 사람은 내가 노래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텐데, 내가 상처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공지영 작가는 그런 거 상관없이 옛날 만났던 남자들 얘기를 소설로 만들어내지만.(웃음) 저는 그런 것에서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라고 말 하는 그의 생각들은 일관적이지가 않다. 저렇게 깊은 호모포비아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그것은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걸까? 저렇게 말 하는 사람이, 그가 증오하는 “호모”들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그 사람들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건데, 그것에 관하여 그에게는 모욕할 ‘다양성’이 주어져 있는가? 그에게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일까? 내가 묻는다면, 그는 그렇게 대답할까? 그리고 공지영 작가를 끌어온 것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이는 부적절한 예시다. 그녀의 소설은 자신이 입은 상처 앞에 자유롭고자, 과거 ‘피해자’이던 자신의 자리에서, 거기서 자신이 겪은 부자유와 ‘피해’를 극복하고자했던 글쓰기 작업이며 그 소설들은 이장혁이 일방적으로 호모포비아적인 강한 메시지를 담은 노래와는 완전히 다르다.
만일 나는 이 인터뷰에서 이장혁이 말했던 그런 게 다양성이라면, 나는 차라리 다양성이라는 말을 옹호하지 않겠다. 그 다양성은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운동에서 그 좋게 쓰이던 다양성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쓰일 수가 있는지.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다양성일까? 타인을 죽이면서, 타인을 상처입히면서 만들어진 음악을 “그저 그건 음악일 뿐이에요. 나와 상관지으려고 하지 말아요.”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그건 완벽히 폭력이다. 나는 부디 앞으로 저런 맥락에서 ‘다양성’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굳이 내게 있어서 저 인터뷰 기사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런 다양성의 무섭고 깊은 함정을 본 것을 나의 유일한 수확이라고 말하겠다.
그는 음악과 뮤지션의 정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고, “웃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방식대로 하자. 나는 지금 그의 음악이 아닌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다. “음악과 별개로”. 내가 영영 그의 음악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내가 그의 음악은 들을 일이란 없을테니까.
하지만 다시 문제는 내게 남았다. 그가 그토록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정치와 그의 작품은 전혀 별개인가? 이 면에서는 내게도 좀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할 것이다. 그건 그의 문제 제기처럼 어려운 문제이며, 어떤 면에서는 애매한 문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아주 사적인 나의 철학에서는, 극도로 호모포비아적인 사람이 만든 음악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의 음악을 전혀 듣고 싶지가 않아졌다.(그럼, 이건 나의 “다양성?”) 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 인용한 인터뷰 뒤에 이어지던 말들에서 관찰한 그는 굉장히 냉소적이고, 어두운 사람이었고 그게 어떤 식으로든 음악에 보여지고 있겠지.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불합리적인’ 증오와 (이른바) 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저렇게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사람이 만든 음악이, 이제 더 이상 내게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그리고 호모포비아 노래는 그가 가지고 있을 아주 다양한 모습들의 매우 단적인 예일 것이고, 내가 이 인터뷰글 외에 이장혁이라는 인물에 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약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긴 글로 지금 그를 비판하고 있는 까닭은, 그건 명빠냐 노빠냐, 한나라냐 진보신당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문제로 내게는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좌냐 우냐의 문제보다, 그에게 지난 촛불시위가 “냄비근성”이라서 "웃긴다"고 했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보다도 이건 더 밑바닥의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우리가 ‘인권’이라고 부르는 게 있는거니까.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성과 감수성과 깊이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예술에게는 아무런 혐의도 있을 수 없다고, 난 말 할 수가 없다. 예술은 그저 '순수'하고 실재와, 현실(real)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그 "환상의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예술도 사람이 있어서 하는거다. 사람이 하는 거고, 사람을 향해있는 것 아닌가? 아닌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 그렇다면 그건 당신의 "다양성"??!! 아무튼 그의 ‘호모포비아’ 노래를 그 관점에서는 난 완전히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장혁 본인이 그렇게 끌고가기도 했지만, “호모포비아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하나일 수 있잖아요.”라고 맞받아치는 페이퍼 기자라니, 두 번째 ‘오 마이!!’ 이번 호부터 이석원의 글이 연재된다고 하기에 샀던건데 PAPER가 원래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였거니와, 아무튼 앞으로 내가 이 잡지를 사서 보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내가 사랑하지만 잘 모르는 이들의 정치적/인권 감수성이 저렇게 낮지 않기를 부디 바랄 뿐이다.(오 제발, 이건 좀 비겁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게 하시길!) 예술이 타인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 마음들과 대면하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열 내지는 않았을 거다. 적어도 아직 나에게 있어, 결코 그건 용납되지가 않는다.

키스해링(Keith Haring)의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그림들이 ‘너무도 무성적(無性的)이기에 오히려 성적(性的)이고, 너무도 정치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정치적이다’라고 생각했다.* 섹슈얼리티의 삭제는, 다원성을 말하면서도 지배적·주도적인 “주체”가 주변을 대상화시키는 포스트모던적인 아량과 관용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뺄셈의 크기가 소수성에 대한 억압과 편견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문제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 <열대병>의 첫 느낌이 바로 그러했다. 등장인물들이 가꿔가는 사랑은 소수적인 사랑이지만(혹은 사랑이기에)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화는 그 소수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퀴어 영화들이 보여주곤 하는 성소수자들의 치열한 정체성 고민이라든가 주변 환경과의 갈등 같은 것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통”의 어머니는 “켕”의 고백이 담긴 쪽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들에게 건네고, 두 사람의 애정행위를 목격한 아주머니는 외려 꽃을 사주라고 부추긴다. 이처럼 영화는 소수자들의 사랑과 생활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뺄셈을 통해 다수자들의 억압과 편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이라는 야수는 끊임없이 ‘자기-검열’의 조련사와 충돌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 양자 사이의 추격전으로 인한 내부의 갈등으로 읽을 수 있다. 영화에서 야수는 ‘통’이자 ‘유령’이고, 조련사는 ‘켕’이기도 하고 ‘군인’이기도 하다. 유령을 사냥하려는 군인의 고독한 기다림과 팽팽한 긴장감은,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표범과 노인의 대결장면을 연상시키면서, 관객의 시각보다는 청각을 자극하고 촉각을 곤두서게 만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흥미로운 장면은 군인이 유령을 살해한 후 호랑이와 대면했을 때이다. 욕망을 제압하고 뿌리 뽑았다고 생각한 그 곳에 또 다른 욕망이(어쩌면 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형태로)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욕망,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에 철퇴를 가하고 있는 국가와 정권의 폭력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스스로 규율하게 되었다. 권력은 자신들에게 친숙한 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위협을 가하면서, 우리 자신이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토목사업에 착수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우리의 욕망들은 결코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 제시한 '안전한' 도로를 벗어나 걷고 또 뛰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설령 그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를 원한다. 소수성은 셈해지는 숫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소수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이고 고정적인 틀에서 끊임없이 이탈하고 탈주하기 때문에 소수적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군인이 호랑이를 응시하며 “이제 노래를 부르자. 행복의 노래를”이라고 읊조리던 것처럼, 우리도 소수적이고자 하는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과의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조련사와 야수를 대면시켜야 한다. 야수를 응시하자. 그리고 그 야수와 함께 나아가자.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바로 그 길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진짜' 우리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by 외뿔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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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언급한 키스해링의 그림들은 섹스나 젠더 모두가 삭제된 작품들에 한정됨을 밝혀둔다. 물론 해링의 그림들 중에는 성기가 노골적으로 묘사된 것들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그림들은 또다른 섹슈얼리티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젠더 없는 섹스, 인격성 없는 섹스가 그것이다.
자신이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그런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정도와 횟수는 다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차별이라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렇다면 차별은 언제 일어나는가? 어떤 대상이 나 홀로 존재할 때 차별은 발생되지 않는다. 차별은 다수의 존재들 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등장하는 것이다. 대상들 간의 비교와 대조는 그들 사이의 어떤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는 곧잘 ‘차별’로 이어지곤 한다.
사례1.
"소수자는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적 편견 속에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데 소수자들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소수자도 사회 주류가 될 수 있고 주류가 됨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 소수자 속에 장애인, 외국인, 트랜스젠더 등이 있다. 이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 자체를 뒤집어놓지는 않는다. 그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차이는 남들이 갖지 못한 개성이다. 그래서 차이를 인정해주면 다양한 개성들이 다양한 능력으로 재창조된다. (...) 이제 더 이상 똑같은 것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름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그리고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국민의식이 필요하다."
- 경향신문, “<희망솟대> ‘차별’에서 ‘차이’로,” (2007.08.30.)
사례2.
"'다름'과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틀림'과 '차별'로 비약시키지 않는다면 가정과 사회는 물론 국가 간의 관계도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헤아려 보면 그 다름과 차이라는 게 하잘 것 없이 작기 마련이고, 그 또한 제 나름의 특성으로 인정해버리면 시비의 소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라진다."
- 연합뉴스, “<연합칼럼> ‘다름’ vs ‘차이’, ‘틀림’ vs ‘차별’,” (2006.10.20.)
우리가 ‘차별’을 사고하고 그 사유를 통해 대안적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위와 같은 논리가 곧잘 동원되곤 한다. 좋다. 차별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너와 내가 다르다는 차이를 “남들이 갖지 못한 개성” 혹은 “제 나름의 특성”으로 인정한다면, “소수자도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고, “시비의 소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라”지며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유레카! 브라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진정으로 의식적인 수준에서 ‘차별’을 ‘차이’로 바꾸기만 한다면 장밋빛 미래사회가 펼쳐질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전환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차별을 사회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만 할 ‘악덕’으로 생각하고 차이를 ‘똘레랑스’(tolérance; 관용)적인 어떤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안이한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오히려 '차별적'이라고 느낀다.
우선, 이러한 입장에는 주장만 있을 뿐 그 내용과 전략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그러한 인식의 변화 혹은 전환을 종용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하고 있다. 의식만 바꾸면 모든 것들이 순조로워 진단다. ‘그래, 진리라는 것은 단순하며 그것은 단지 실천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좋아. 좋다구. 하지만 어떻게 실천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의식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지? 모든 사람들이 바꿔야 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일 년 동안에도 수십 차례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손가락이 앙 물고 있는 또 한 개비의 담배를 발견하곤 하는 나로서는 그러한 주장에 의구심만 일 따름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모든 것들이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는데 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 ‘사회’는 연산 과정 속에 있지 않고 결과 속에서만 힐끗 등장할 뿐이다. 결국 차별을 하는 것도 차별을 당하는 것도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문제일 뿐이며 그 차별 방정식의 해(solution)가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차별이 단지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면 개개인의 의식만 변화 된다면 ‘만사 오케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차별은 단순히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깊이 있고 치밀한 통찰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통감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별 금지를 제도적인 것(즉 ‘법’ 같은 것)으로 명문화 한다면 어떨까? ㅡ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생각해볼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일단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점, 혹은 생각해 볼 것들만을 말해보겠다. 우선 첫째로, 제도로 규정 되는 것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 어디까지가 차별인가? 그리고 차별이라고 공인된 행위들을 금지하는데 무게 추를 둘 것인가, 아니면 차별의 효과들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데 ㅡ 예를 들면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 같은 것 ㅡ 무게 추를 둘 것인가? 등등의 물음에 대해 제도는 어떤 하나의 태도 혹은 입장을 취해야만 제도로서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태도와 입장은 ‘사회 통념’과 ‘상식’이라는 미명 하에 현존 사회의 틀에 부합되는 것들이 선택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 것인가?
둘째로, 제도로 규정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현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의 평등 이념의 기초는 ‘법 앞의 평등’이다. 하지만 법 앞에서의 평등은 곧 ‘법 앞에서 만의 평등’을 의미하게 되고, 법에 관련되지 않은 것에서의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차별금지법”과 같은 것들이 제도화 된다고 하더라도 법망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차별이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며 어쩌면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그것은 아무리 촘촘하게 법 조항들을 짜 넣는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정신과 활동 모두를 단어들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법으로 명문화되지 않은 차별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법으로 환원되면서 국가(특히 사법)에 대한 사회의 종속도는 심화되며 사회의 판단력은 점점 더 흐리멍덩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럴 경우 권리의 요구와 투쟁의 논거 또한 사물화된 어떤 것 혹은 (예를 들면 저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인권선언과 같은) 법화된 무엇만이 인정될 것이며 그렇게 법과 제도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넘어서 사고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각설하고, 다시 돌아가 보자면 위의 사례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차별적일 수 있다. 차별이란 차등을 두어 구별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위계화’(hierarchism)이다. 하지만 이 위계는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되어 있다. 따라서 외면적으로 위계 수준을 평준화 시켰다고 해서 절대로 관계가 평등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는 위계들이 여전히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렇기에, 표면상의 평등을 주장하고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절대로 차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권리를 가진 자들의 기만이고 현실의 사회 구조에 안주하고자 하는 자기 합리화일 수 있다. 그것은 차이를 이야기 하면서 오히려 차이를 없애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차이는 ‘차이들 간의 차이 없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차이에는 사회적인 위계와 권력관계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돌기가 바로 차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권력관계는 그 자체가 사회적이다. 즉 그 위계가 현대 사회 구조와 틀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사회를 벗어나 생활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라는 것을 개인적인 것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차별을 차이로 대치시키고 차이들을 평준화하는 것이 바로 그 드러나지 않은 사회의 권력관계와 위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일이며, 그렇기에 그 자체가 오히려 또 다른 차별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만 단지 인간이 아닌 권리를 가진 시민이 될 수 있다. 헤겔의 보편과 특수에 대한 변증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어떤 사람이 분명한 시민신분을 설명해주는 특수한 사회정치적 정체성을 박탈당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접받지 못하게 된다.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 즉 ‘헐벗은 생명’(bare life)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회 속에서의 혹은 사회라는 체에 의해 걸러진 ‘차이’를 사고하지 않고서 개인의 차이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저 너머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추상적인 ‘보편적 인권’을 말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실질적인 권리의 영역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한 개인이 “인간 일반으로 환원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직업, 성, 시민권, 종교, 민족적 정체성 등과 무관하게 개인에게 속하는 저 ‘보편적 인권들’의 이상적 담지자가 되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으로 개인은 인권을 박탈당한다”는 지젝의 말을 상기해 보라. 따라서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권리’ 요구는 단순한 인간 종의 동일성에 기초한 요구가 아니라 정확히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의 권리를 가지는 시민에 대한 요구이다.
일찍이 맑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동등한 권리”는 “불평등에 대한 권리”라고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 개인들에게 각자의 노동에 비례하여 보상이 돌아가도록 기능하는 ‘기여원칙’(contribution principle)이 생산자들의 천부적 재능의 차이와 부양가족의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오히려 불평등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평등을 위한 불평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차별을 주장했다. 잠깐, 나는 여기서 맑스가 예기한 혁명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혁명이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 속에서 혁명은 요원하기만 하다. 또한 나는 여기서 구체적 전략이나 대안을 이야기 하려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본인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차이들 간의 차이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를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정치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동시에 우리 공동체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영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하나의 공동체나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이들의 사회적 돌기인 차별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드러내야 한다. 단순히 존재를 인정받고 존재가 용인 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차이를 욕망하고 차별을 공격하며 그것을 전유해야 한다. 권리를 가진 이들의 시각에서 보여지는 차이가 아니라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들에 의한,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시각에서 비교하고 대조한, 차이와 차별을 드러내고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통해 투쟁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고 기성 사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공간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 속에서라야 최소한 앞의 사례들과 같은 관계 없는 개인들의 차이 없는 존재 인정 수준을 넘어서서 '다름'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관계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by 외뿔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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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병쉰/병진'을 보니깐 나의.. 한 때, 원치 않게 어찌하다보디 키보드 워리어 뛰어야 했던 일이 생각나는군. 우리 학교 홈페이지에서 총장의 '병신 발언'에 문제 제기 하는 학생들에 관해, '그런 말 정도는 별 일 아니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너무 오바하는 것' 이라는 내용을 쓴 글에 대해 굳이 로긴을 해서 하나만 쓰자, 하고 하나만 썼지. 난 정말, 별 크게 할 생각도 없이 답글 썼었어. 잘 생각이 안 나지만, 그것에 대해 토론해볼 수는 있지 않으냐? 뭐 대충 그런 요지였던 것 같은데 정말.. 결국 말 안 통하는 "선배"라는 결론을 짓게 한 몇 건(이나!!)의 답신을 게시판에서 주고 받았지. 그 답변들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언어는 차별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또한 언어로부터 그러한 차별적인 상황이 재생산되고 오히려 만들어진다' 였는데, 안 통했지 뭐. 심지어, 실컷 인신공격만 받았다는!! 그래서 이렇게, 반차별감수성이 부족할수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이제 생각하면 충분히 그런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왜 몰랐지? 하는 생각.암튼.. 나의 그 뼈아픈 기억이 오랜만에.... 나는군.. 하하
*덧: "메이플이나 해라" 에서의 메이플은 초등학생들이 주로 즐기는 게임인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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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스토리라는 인터넷 게임입니당..;;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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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그라든다는 표현이 그런 위험이 있는 말이었군요.하... 요즘 내가 젤 즐겨하는 표현이었는데. -_-;;; 암튼 조심해야겠다.
아. 근데 올만에 블로그 들어왔더니 완전 멋있어졌네요!!!
글들도 좋고. ㅋㅋ근데 왜 대용 게시물엔 제목이 없는거 ㅋㅋㅋㅋ 반차별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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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실 '메이플'이 어떤 게임인진 잘 모르는데...카트라이더처럼 좀 단순하게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하더라구요. 초등학생들을 타겟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청소년/성인들이 더 많이 한다능..^^;;
그리고 '오그라든다'는...위의 설명은 한 '소문'이라는 거~ 원래 말의 기원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긴 해요. 그래도 그런 게 연상될 수 있다는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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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굳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뉘앙스를 가진 말은 아닌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냥 왠지모르게 부끄럽고 창피할때..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 느낌의 표현에서 시작된게 아니던가....--;;
오덕/덕후도 시작은 오타쿠에서 시작하긴 했으나..
병X처럼 직접적으로 상대를 비난하기보다 풍자적으로 더 많이 쓰이는 듯..
실제로 모 정당엔 덕후위원회가 중앙당 정식위원회로 활동중이고..;;
그이들이 "덕후"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을 쓴 글을 본적이 있는데..
꽤나 많은 고민의 결과였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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