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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별팀님의 [‘누구의’ 폭력이냐? _청올] 에 관련된 글.
위 글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을 덧글에만 덧붙여 달다가, 그 글 논쟁이 폭력/비폭력 얘기로 많이 가기도 해서, 물론 꼭 필요하고 동시에 이루어질 만한 논쟁이라 생각하지만, 차별에 관해 좀더 하고 싶은 말을 보강하느라고, 여기에 연결해 와 새 포스팅으로 남기기로 했다.
용산 참사에서 '살인마'라거나 '폭력'을 행사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 그것을 당한 사람에게 지지하고 연대하는 입장이지,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런 게 전혀 아니라는 것, 그만큼 폭력이나 살인이라는 것을 누가 생각하고 누가 의미 부여하고 구성하느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폭력, 살인, 이렇게 이름붙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정도의 차이에 따라 폭력이냐 아니냐, 또는 효율적이고 필요한 폭력이냐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폭력이냐 같은 식으로 얘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연 어떤 행위를 우리는 폭력이다/살인이다, 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기득권을 포함한 사회의 동의/합의를 얻을 수 있느냐 아니면 벽에 부딪히느냐? 할 때 후자라는 것이 답답할 때가 많다. 여기서 '폭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주체가 있고 그 주체에서 배제된 대상이 있는데, 그 둘 사이에는 엄청난 권력 차이라는 강이 흐른다는 거다.
우리는 용산 참사를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표현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고 보수 언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
'살인'이라는 의미는 그 폭력에 문제제기하는 우리 입장에서, 기득권/힘을 가진 정부/가해자가 허용하지 않은 저항 방식으로, 심지어 대부분의 일반인 중에서 기존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안 된 상태에서, 이름 붙이고 알려 나가는 운동 단계에 있는 것이지, 정부가 마침내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며 살인이었다'라고 참회하고 이후의 그런 일이 없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단계(그렇다 해도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에 이르지는 못했다(아직은). 여전히 재개발과 강제퇴거는 계속되고 있고,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순응하는 게 그나마 편해서 저항을 포기하는 일도 수없이 많고.
- 연쇄살인범이 한 살인은 모두가 당연히 '살인/범죄'라고 받아들이지만 공권력이 한 살인은 '살인'이라고 ('도발적/선정적으로') 말하는 것부터 벽에 부딪치며 끊임없이 설득이 필요하다는 것
- 우리가 전경의 차를 훼손하는 것은 '폭력 시위'라고 이름붙여지고 보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실리지만 전경이 우리의 신체에 직접 위협과 폭행을 가하는 것은 정당한 진압이라고 정부가 주장하는 것. 그리고 정부의 주장이라 함은 즉 구속하고 벌금을 때릴 수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
- 노숙인이 '집회 도구'인 판넬을 발로 차는 것은 모두가 폭력이라(또는 '도발'이라고라도 어쨌든 처벌/응징 가능한 것으로) 쉽게 인식/주장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의 신체에 (그것도 여럿이 달려들어) 직접 폭력을 가하는 것은 '집회 방해자를 제지하기 위한 응당한 권리' 또는 '조금 과잉되고 너무하긴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럴 만했다'는 얘기로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그 건널 수 없는 강에는 공권력과 시민 간의 권력 차이도 있지만, 시민 중에서도 누구나 같은 시민이 아닌 차별의 기제가 작동하는데, 그 당당/뻔뻔함이 마치 공권력이 시민을 대할 때의 그것과도 하나 차이가 없다는 무서움이었다.
그날 판넬을 발로 찬 사람이 허름한 옷차림의 그 사람이 아니라 전/의경 차림의 사람이었더라면?또는 번듯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이었더라면? 또는 백인이었더라면? 또는 외제 차를 몰고 와서 차로 판넬을 박아 몇 개쯤 한꺼번에 쓰러뜨렸더라면? 과연 그날처럼 그렇게 한 사람을 양쪽에서 잡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머리부터 7m를 질질 끌고 가서 내팽개칠 수 있었을까?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 그것이 정부가 사람들을 쥐 잡듯이 몰아쳐서 잡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었다.
- ‘누군가에게는’ ‘어떤 이유가 있다면’ ‘조금쯤’ 함부로 해도 좋은가?
폭력이다/아니다, 라는 이분법으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가도,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가 그 행동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을 때 결국 그 이분법에 의지하게 되는 당혹스러움이란....
용산 참사 추모 집회가 있던 주말 판넬을 세워두고 집회 하던 어떤 이들도 그랬다. 한순간 자신들의 집회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 노숙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술취한 목소리로 허공에 몇 번 화풀이로 소리지르다가, 갑자기 판넬들 세워둔 쪽으로 다가가더니 판넬 하나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두 번째 판넬을 또 차려던 찰나- 그 깃발 아래 서 있던 두 청년이 노숙인을 거칠게 몇 번 밀쳐내는가 싶더니 결국 당하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양쪽에서 붙잡고 땡볕에 하늘을 향해 누운 그의 자세대로 7m 정도를 질질질 바닥에 끌고 와서 내팽개친 것이다. 면티 한 장을 입고 있던 그 아저씨는 티가 들어올려져 등의 맨살도 일부 드러났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유유히 판넬 쪽으로 돌아갔다. 그 노숙인은 한동안 꿈쩍 못하고 뙤약볕에 내버려져 일어나지 못했다. 난 일행을 찾으러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그 순식간의 장면이 충격적이라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최근에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지만 짐작도 가능하듯이, 일반적으로 노숙인들(그때 그 사람도)은 수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지하철역사에선 첫 차가 있는 5시 이전에 무조건 역 밖으로 쫓겨나고, 막차 뒤에나 들어갈 수 있고, 행인들의 소리 등 주변 소음에 잠 못 이루어 술을 마셔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는 경우도 많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조금만 툭 쳐도 픽 쓰러질 수 있다고 한다.
망설이다 결국 이쪽(쓰러져 꼼짝 못하는 사람,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의 얼어붙은 시선)에도 시선이 힐끗힐끗 와 꽂히기에 용기를 내어 그 한 명에게 물었다. 혹시 저 아저씨와 이전에 무슨 다른 사연이 있었나? (그것도) 아니라기에 더 확신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나 그가 노숙인으로 보이고 술도 취해 있었고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며 사람을 친 게 아니라 판넬을 찬 것인데, 그냥 제지만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굳이 저렇게 했어야 하냐는 내 말에 그들은 이런 말들로 받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많이 참은 거다. 보통 같으면 그냥 저렇게 안 보냈고 맞아서 갔을 거다."
"그 사람이 우리 판넬 찬 건 폭력이 아니냐, 언제까지 평화를 외칠(?) 거냐. 우리는 누가 와서 때리면 맞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야 하냐."
"당신 집에 누가 쳐들어와서 접시를 하나씩 둘씩 깨고 있으면 가서 곱게 말로만 '그러지 마세요' 하겠냐"
한명씩 한명씩 끼어들면서 결국 일 대 다의 토론(사실은, 그리고 점점, 그 ‘일’인 나에 대한 집단적 감정적 성토? 같은)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잘되는 토론일 리가 없다. 나중에 가세한 또 한 명은 “아줌마”란 표현을 여러 번 섞으며 반말을 해서 내가 “아줌마라고 말하지 말라. 지금 그 말 욕으로 쓰고 있는 것 알고 있다”고 하니 잠시 그 표현만 빼고 말하는 것 같다가 이내 곧 무시하고 욕으로 활용하며 빈정거리길 계속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골똘한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람은 문득 이렇게도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어서 당사자가 느낄 2차 피해는 생각해 보셨어요? 그 아저씨가 자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걸 보고 느낄 당황이나, 그런 거 생각해 보셨냐구요!” 내가 “그 문제는 저에게만 고민해보라고 말씀하실 건 아니지요”라고 했으나 그는 “거 봐요! 그런 것도 생각 안하고 무슨 말을 해요!”라 하였다;;
언제까지 평화를 외칠 거냐고? 집회를 평화적으로 하는 것이 무조건 모든 사람이 떄리는 대로 맞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권력이 부당하게, 전/의경이나 경찰이 무기 없는 시민을 때리거나 밀어붙이면 맞서 싸울 수 있다. 같이 때릴 수도 있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전경 차를 훼손하는 것 정도도 괜찮다(빈 차라면, 그리고 남성들끼리만 들어가 ‘오줌을 싸는’ 짓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명박산성이 사람들의 발길을 (그야말로) ‘폭력’적으로 원천봉쇄했으니 그것을 뚫어버리든 위를 넘어가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숙인 아저씨는 전/의경이 아니다. 집회 당사자들이 그를 질질질 끌고 간 것은 전의경이 시민을 발로 차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공권력에서 평소 받은 스트레스를 그날 그에게 화풀이하듯 쏟아낸 것처럼 보였다.)
집에 들어와 접시를 깨는 도둑이라면 나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강할 경우가 많을 터이므로, 나는 정당방위를 (그나마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사연에선가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 순간에 내가 너무 놀라고 방어기제가 발동하느라 그 사람이 약한 것을 몰라보고 지나치게 강하게 제지, 아니 제지가 아니라 보복으로서 훨씬 더 심한 정도로 파괴했다면, 나중에라도 사태가 파악되면 미안해져야 할 것이다(물론 이것도 가택침입과 성폭력 위험에 대한 정당방위 등등을 모두 고려하여 엄정히 따질 문제고 내 문제제기에 대한 대항 비유로는 애초에 잘못된 것이지만).
또 한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도 잘못한 점은 있지만 어쩔 수 없기에 해명해야겠어서 나선다. 집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가 없고, 훼방 놓는 사람을 좀 그렇게 한 것이니 이해해야 한다"
이 논리는 미안하지만 용산 참사를 일으킨 정부의 논리와도 똑같이 닮았다. "경제 개발과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 너희 살던 사람들은 나가줘야겠다." 그리고 그들은 나가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았다. 그들의 논리에 정부 정도의 공권력이 보태어진다면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 너무 답답했다. 명백히 존재하는 차이와 차별 상황에서 등장하는 말들. "그 사람만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도 피해자다" "왜 그쪽 편만 드느냐, 그가 잘했다는 것이냐" “그가 먼저 폭력을 썼는데 왜 우리한테만 뭐라고 하냐” "우리가 좀 세게 한 건 인정하지만 (어쨌든) 그가 먼저였다." 다들 낯설지 않은 논리다.
소위 ‘폭력’이라고 하는 것을 누가 행사하냐에 따라 같은 것이 ‘폭력’이라고 이름붙여져 낙인찍히기도 하고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쉽게 합의되기도 한다. 상대의 것을 ‘폭력’이라고까지 이름붙이기가 민망할 때에는 ‘도발’이라는 알쏭달쏭한 죄목(?)으로 이름지어 불러서라도 기어이 폭력("권한에 따른 응징") 행사가 정당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특정 행위나 상황에 대하여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뜻을 부여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은 기존의 ‘합의’나 ‘권한’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내가 기존의 합의나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돌아보는 일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보기에는 물론 참으로 귀찮고 낯설고 피곤한 일이기에 슬쩍 미뤄지기 쉽다... 그리하여 ‘폭력’ 대 ‘폭력’의 대결에서 한쪽의 ‘폭력’은 정당화되고 다른 ‘폭력’(?)은 가차없이 단죄된다. (센 사람이 보기에) 괘씸하다는 이유로.
p. s. 이렇게 공개적으로 고자질하듯 글을 써서 해당 ‘그들’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날은 혼자 수고했으니 쩝;; 내가 계속 ‘그들’이라 칭한 이들에게 이후에는 노숙인에 관련한 영화를 같이 보자고 얘기해볼 가까운 소망을 갖고 있다.
"아이돌"도 이 '세상'을 뜨는구나
2PM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다만 '오후 2시'라는 뜻 밖에는 알지도 못했고, '니가 밉다'와 '어게인 어게인'이 그들의 노래임을 구분하는 것도 굉장히 대단한 것일 만큼 관심이 없다. 그랬던 내가 2PM에 '재범'이라는 사람이 있고, 그가 몇 살이며,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불과 하루 만에.
하루종일 아이돌 그룹 2PM의 재범 탈퇴와 그의 출국에 대한 기사가 포털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2PM의 재범이 4년 전, 연습생이전 시절에 미국 사이트에 올렸던 글에서 "한국인은 정상이 아니다. 내가 하는 저질 랩을 잘한다고 칭찬한다. 정말 멍청하다",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허상이었다" 등의 말을 쓴 것이 4년이 지난 지금 알려져서 구설수에 올랐던 것이다. 구설수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일파만파 퍼져서 혹독한 '국민'들의 비난 세례를 받으며, 그는 결국 오늘 저녁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마치, 급히 이 '한국'에서 쫓겨나듯. 그러한 "한국 비하" 글이 문제로 터지고 난 후, 그는 자신이 4년 전에 그런 글을 썼던 것은 맞지만 그 연습생 시절 가족과, 살던 곳으로부터 혼자 떨어져서 너무 힘들어서 그 자신의 힘듦을 주변 상황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앞날에 대한 불안과 한국에서의 부적응 등으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과문을 올렸으나 여전히 "재범 한국 비하"라는 화제는 끊이지 않았고, 며칠만에 몇 년 동안 오로지 이것만을 바라보고 왔을 그룹에서 탈퇴하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는 꼭 2PM에서 탈퇴해야만 했을까. 그러나 그 물음은 명제로 대답하자. 이 '대한민국' 에서 그는 그룹을 반드시 탈퇴해야만 했고, 그를 탈퇴시켜야만 했다. 나는 그의 사과문이 진심일 거라고도 생각하며, 심정적으로 사실 그를 이해할 수도 있다. 지금보다 4년이나 전, 모든 가까운 사람들과 떨어져 당시 자신이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 막막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는 '연습생'이었던 자신의 불안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내밀한 공간에서 만이라도 그것을 덜어놓고 싶지 않았을까. 너무도 많은 이가 바라는 스타를 꿈꾸지만,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하늘로 올라갈 수 조차 없는 것이 그 세상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느끼고 있었을텐데, 그런 그가 얼마나 불안함과 휩쌓인 10대 후반을 보냈을까?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공교롭게도 나와 그는 동갑이다. 나는 끊임없이 방황하는데,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했을, 그리고 지금보다 더 어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현명하지 못했을 4년 전, 나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닌가. 물론 그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러나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하나. 우리들은 그런 '한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반성할 당분간의 시간마저도 결코 허락할 수가 없었던 것인가? 구석으로 끝끝내 몰아부쳐, 결국은 그 날 당장 미국으로 떠나고야 말게 한 대단한 이 애국심. 아, 이제 새들도 세상을 뜨는 이 나라에는, 연예인도 애국 때문에 나라를 뜨는구나. 나는 두렵다. 지금보다 훨씬 달랐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몇 년 전의 글 몇 편으로 그의 운명을 완전히, 완벽히 바꾸어놓을 정도로 확실한 이 무언가, 그 실체 없지만 이 나라의 곳곳에, 무엇보다도 명징히 실제하는 이 공포감에 몸이 떨린다. 그가 탈퇴를 선언하고몇 시간 되지 않아
부리나케 오후에 올라온 프레시안의 이동연의 글 "2PM 재범 탈퇴, 나는 공포를 느낀다."는 정확히 이 '공포감'을 짚고 있다. 그렇다, 나는 두렵다. 나는 공포를 느낀다.
이 나라에서는 가장 자유분방하고 솔직하다고 여겨지는 아이돌 가수조차 나라를 위해, 애국을 위해 노래 불러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국가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정치적 올바름'이라기 보단 맹목적, 도덕적 애국주의에 빠진 이들을 우리는 아이돌에게서까지 바라야만 하는가?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방식은, 늘 국가와 민족에 헌신을 다 하는 것이어야 하는걸까? 한국의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니, 나의 그 사랑을 "조국"에 돌려주기 위해 국위선양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가? 이 거대한 써클, 한국을 유령처럼 늘 배회하는 애국과 조국에 대한 요청. 우리는 왜 애국이 아니면 안되는가. 나는 이 지나친 애국심이 불편하다. 이 지나친 국가에의 복종과 애정을 강요하고 심지어 명령하는 익명들의 목소리, 그 거대한 목소리가 불편하다.
4년도 더 전에, 나 또한 가수 유승준이 군대 문제로 한국 국적을 포기했을 때 분명 사람들 틈에 끼어서 군중 속에서 그를 향해 애국주의적으로 소리쳤을 것이다. 당신은 비겁하고, 나쁜 것이라고. 그래, 거짓말은 나쁘다 쳐. 하지만 그 때 난 정말 그의 거짓말이 나빴던 걸까? 그 거짓말만 싫었던 걸까? 몰래 국적을 포기한 게 괘씸했던 게 아니라? 한국은 4년도 더 전, 유승준을 강제 출국 시켰던 그 때와 하나도 변한 것 없이 2PM의 재범을 (사실상, 상직적으로) 강제 출국 시켰다. 4년이 지난 후, 그 때와 지금의 자신은 많이 달라졌다고 반성한 재범보다도 한국 사회의 낮은 성숙도를 차라리 더 혹독하게 비판하고 싶다. 여전히 국가(민족)이라는 구도, 끊임없이 "글로벌"과 세계화를 외치지만 한국은 이토록 그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속이 마치 편하고 그것으로 인해 보호받는 듯, 마치 끓여야만 부패하지 않는 듯. 하지만 그런 독하고 해로운 방부제를 넣지 않는다고 해서, 부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국/국가주의에 대한 주제만 나왔다 싶으면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이 되는 우리들은, 이제 조금 자유로워도 되지 않을까.
사실 나는 흔히 '교포 출신(대부분 미국) 연예인'이라고 알려진 이들에 대한 불신감이랄까, 반감이랄까, 하는 감정이 있어왔다. 특히 영어권에서 살다가 와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특히 한국보다 선진국인 나라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교포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의 인기에 붙는 잉여의 권력이자 특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연예인으로서의 끼/실력'와 무관하게 추가로 붙게 되는 일종의, 식민지적 '이미지 마케팅' 처럼 여겨졌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구사하며, 미국(혹은 영어권 어딘가)에서 살다 왔다는 것을 의식하는 이들의 욕망/선망을 잘 이용하는 연예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것은 일면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살기는 미국(혹은 어딘가)에 살았지만, 항상 진심으로 한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해왔어요." 라는 말로 그러한 '상대적 박탈감'(영어를 그들처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고-그러나 하고 싶고- 한국보다 더 "잘 사는" 곳에 살지 못했다는)을 위로해주길 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타국에서 살다가 연예인을 하기 위해서만 한국에 왔을 수도 있고, 실제로 (울 언니가 '교포 출신' 가수 P모에 대해 싫다는 말을 하며)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다가 자신이 살던 곳에 가서 몽땅 다 쓰고, 다시 돌아와서 돈을 벌어가기를 반복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감정적으로 얄밉기는 할지언정, 우리들이 애국과 국가를 느끼기 위해 그들의 음악과 연기를 감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둘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전혀 관련을 맺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망측하고 건방진 상상은, 아직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상상력일까.
몇 십 년전의 극장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애국가를 경청"하곤 "주저 않았"다. 끼룩끼룩, 마치 비웃듯이 혹은 울듯이 새들도 세상을 떴다. 그러고 나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그러나 우리들은 보이지 않지만 극장 화면보다 훨씬 더 큰 그것을 향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맹세를 하고, 애국을 하고, 주저 앉곤 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끼룩끼룩 새들 뿐만 아니라 '아이돌'까지 이 "세상"을 뜬다.
by 꿈의택배
-아 너무 내이야기라,,, 좀 그렇긴 하지만,,,,,일단 씁니다,,,,-
가족관계에 있어서 수많은 조언, 충고, 참견, 간섭 등은 도대체 뉴규에게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강제적인 어떠한 형태의 것으로도 간섭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적절한 형태로(그것이 단순한 정보의 전달에서 강제적인 형태의 간섭까지)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게다가 가족이 경우라면 더욱 심한 간섭과, 잔소리와 같이 갖가지 형태로 더 쉽게 접근해 오지만 더더욱 그런 접근을 막지 않는다. 난 여기서 좀 더 가족 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고민이 든다. 도대체 가족은 나의 어디까지 파고드는 것이 가능하며 왜 가족이 아닌 사람들의 배제는 당연한데 가족은 되는지 말이다.
먼저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길 해보고 싶다.
간혹, 나는 나의 동거인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갑 : 니가 뭔데 이래랴 저래라야! 니가 엄마냐?
을 : 너?! 진짜 니가 미쳤구나? 가족이니까 하는 말에,,, 누나(, 언니, 형)한테 너?
위의 대화에서 갑은 ‘가족 간에도 분명히 권력의 분배는 차이가 있고, 부모의 간섭은 모르겠지만 나머지 사람의 간섭은 배제하겠다’ 을은 ‘가족의 간섭은 정당하다와 가족 중에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존칭어를 써야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 보인다.(갑은 확실하다,,,ㅋ) 그런데 갑의 전제를 살펴보면 가족 간의 권력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타인의 접근, 간섭에 대해서 허용과 배제의 선을 긋고 있는 일관성 없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나이가 더 많고 덜 많고 혹은 적다의 차이? 혹은 날 낳았냐 아니냐? 더 친밀하냐 아니냐? 여기서 갑은 물론 글 쓰는 나이기 때문에 친밀감의 차이는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남는 나이와 출생 이 두 가지를 근거로 타인의 접근을 배제하는 것이 정당한지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갑은 나이만이 아니라 또 부모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두 가지를 모두 복합적으로 염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지도 않은 사람의 간섭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차별적인 태도와 함께 삶의 근거를 오로지 출생에서만 찾는 수동적인 태도가 섞여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인 사상이 수평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출생과 그 출생에 따른 보은의 관계(흔히 말하는 부모님 은혜 같은?!)를 많은 이의 모태신앙처럼 정당화 시켜왔다.
또 을의 전제는 타인의 간섭을 동거인의 관계에서 가족이라는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정당화 시킨다. 을의 말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가족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서로 공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황상 그래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을은 또 우리는 서로가 도움의 주고받음이 필요하다고 공유되어지는 부분에 대해서 접근하고 간섭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을의 전제인 가족 내의 나이에 따른 확실한 존칭구분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불만인 사항이다. 특히 나이에 따른 존칭의 문제는 어디에 가든 한국어의 특징상 어디가나 따라붙는 내용이지만 특히 가족 내라고 말한 것은 가족과 나이가 만나서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족보, 항렬과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가족관에서는 족보를 펼쳐서 자를 대고 쭉 그어보면 대체로 나이와 가족 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그에 따라 처음부터 호칭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항렬과 나이순으로 정해져 있는 이런 호칭에는 당연히 불평등한 권력이 분배 되어있다. (쌍둥이 마져도 호칭을 구분하는 ㄷㄷ) 이런 불평등을 호소하고 반발하는 사람은 예의를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족관인 것이다. 게다가 같은 서열이지만 나이가 많은 언니, 형, 누나에게 대들 듯이 겨우 해보는 ‘너’라는 호칭을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쓴다는 것은 애초에 상상을 해 볼일이 없는 것이다.
난 “가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하기 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를 일컫는 추상적인 정의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흔히 말하는 가족 관계의 뗄 수 없는 인연, 친말감 등에 대한 강조도 가족이니까 인연이고 친밀하다보다는 개별의 관계가 소중한 인연이고 친밀하니까 가족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에겐 어느새 준기,영례 ,미숙과의 관계는 없어지고 엄마,아빠,누나라는 가족관계만 남아있다
P.S우리집에서 보면 실명 별로인거 같아서 가명썻음,,
얼마 전 2학기가 시작되고 첫 원어민수업이 있었다. 첫 시간인 만큼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Sccot은 우리에게 자신의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한국인들은 자기만 보면 where are you from?, how old are you? 또 심심치 않게 미국인이냐고도 묻는다고 하더라고요.(그는 호주인 이랍니다.ㅎ;;)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에게는 나이가 얼마인지, 어디에 사는지,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형제는 있는지, 여자 친구는 있는지 등의 개인 사항을 묻는 경우는 상당히 자연스럽죠. 반면, 외국인들은(주로 서구권) 그러한 개인적인 질문을 받는 것, 하는 것 모두 꺼려하며 심지어는 불쾌하게까지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개인적 질문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또는 그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여기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묻죠. 물론 그러한 질문이 우리의 입장에서 ‘관심 받고 있다’ 라거나 ‘친해지고 싶구나!’ 처럼 친근감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이 차별을 위한 예비과정에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작은 사례로 어디에 사느냐라는 질문에도 강북이냐 강남이냐에 따라 경제적인 정도는 물론 사회적 지위까지 격상되는 듯 여기는 풍조나(주로 트렌디드라마에서 잘 보여 주듯 말이죠..) 일단 똑똑히 알지 못하는 사이라도 나이에 따라서 대번에 하대를 강요당하죠.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결코 무시 못 할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봐요. 이점을 보다 명확히 보기위해서는 위에서 비교되는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일단, 여전히 동양권의 지배적인 사상은 바로 ‘유교’가 아닌가 싶네요. 예전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기사에서 열강의 통치에서 벗어나 신흥공업국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보인 우리나라와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다룬 내용 이였는데, 이들이 동양의 배경사상인 ‘유교’로 인해 강력한 가족주의와 단결, 애국심, 상위자에 대한 충성 등을 이야기하며 성장의 동력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점은 다른 한편에서 혈족외인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개성의 상실이나 자기의식의 부재 등의 문제를 갖고 있죠. 또한 출신성분과 같은 개인사항을 묻는 것에서 아직도 지역감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연고주의가 작용할 수 도 있고요. 그 외에도 학벌이랄지, 부모님의 직업이나 집안의 내력(형제관계나 조상), 나이를 묻음으로(무슨 일만 있으면 “민증까봐~ “라고 하듯.) 학벌차별이나 권위주의, 연령주의(선거법에서 쓰이는 것과 다른.)등의 선입견들이 작용한다는 것이고 사람을 판단 할 때 그 사람 본연의 개성이랄지 능력들의 내적요소가 아닌 명패나 소속, 가문 같은 외적요소가 판단과정에서 효과 한다는 것이죠. 반면 서양권의 지배적인 사상을 꼽자면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간중심사상과 같은 맥락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있으_(비버리지 보고서나 인권신장촉구……._신학에 바탕을 두었던 경제관이 영향을 미친 자본주의가 있죠. 뭐 지금을 한마디로 하면 ‘능력주의’가 아닐까 싶어요. 연령(나이)주의나 혈연-지연 등의 수구권위주의와(좋지 않은 권위주의라고 할까요?단어가ㅎㄷㄷ;) 상이한 모습이죠. 물론 ‘능력주의’가 최상이라고, 무결하다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자면 폐쇄적 개인주의와 그에 따라 인간관계가 상당히 형식적으로 변질될 우려도 있죠. 또한 물질만능주의도 이에 무관하지 않고요. 하지만 적어도 혈연, 지연, 학벌, 나이와 같은 외적 판단 요소들의 영향에서는 자유롭다고 봅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문화 차이라고 볼 수도 있죠. 세계는 결코 일원적이지도 독자적이지도 않는 발전을 보였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근대라는 시대에 접어들어 어떤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발명들로 인류는 점점 작은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점과 단지 거리상의 단축이 아니라 문화의 교류와 공동화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합의를 봐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위처럼 동서양의 비교에서 보듯이 서로 좋기도,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적어도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사람만의 가치(내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죠. 너무 어려워서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지 못해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
#1.
중국에 있을 때였다. 베이징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난 아직 중국어를 공부한지 얼마 안되던 때라 말 한 마디 제대로 하기 어려워하던 때였다.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와, 중국에서 먼저 공부를 시작해 중국어를 쏼라쏼라 유창하게 잘 하던 친구와 함께 이곳저곳 관광지에 놀러다니고 있었다. 한창 친구 녀석들과 부산스럽게 이야기하며 놀러다니고 있었는데, 한 중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헬로. 웨어 아 유 프롬?"
아무래도 하는 말이 다르니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던가보다. 영어로 물어왔다.
나와 한국에서 놀러온 친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에 한 중국어 하던 다른 친구가 중국어로 대답했다. 유창하게.
"니하오. 워먼 총 한궈 라이더."
말을 걸어온 중국인은 호기심이 일었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엥? 그런데 이게 뭐야..?
그 중국인은 계속 영어로 뭐라뭐라 말을 했다!(그 사람은 네이티브 영어 사용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친구는 계속 중국어로 뭐라뭐라 대답을 하고.(그 친구는 영어보다 중국어로 말 하는 게 더 편했을테니까)
지금 이게 뭐 하는 시추에이숀? @.@
#2.
중국에서 여행을 하던 중 지인을 만나러 호텔에 갔다. 그 호텔은 으리으리하게 좋은 호텔이었다.(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쉐라톤호텔!) 왠지 차를 타지 않고 걸어들어가는 게 조금 어색한 호텔이었는데, 배낭여행객답게 허술하고 꾀죄죄한 옷차림으로(배낭여행객의 특권 아닌가!) 호텔에 들어갔다.(배낭은 메고 있지 않았다. 차라리 배낭을 메고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로비를 지나 데스크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호텔 직원이 팔로 막아서며(!) 어디 가냐고 물었다. 중국어로.
"니 취 나-ㄹ?"
호텔에서 손님한테 직원이 팔로 막아서며 어디 가냐고 묻는 게 한 편으로는 매우 놀랍기도 했지만, 별 생각 없이 "사람 좀 만나러 왔다"고 중국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만나러 온 사람 이름이 뭐냐고 또 물었다.
아니, 데스크 가서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도대체 당신이 왜 막아서며 묻는 건데?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만나볼 사람 이름을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은 한국어 이름.
"워 라이 자오 김개똥.(나는 김개똥을 찾으러 왔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의외라는 듯 흠칫 놀라며 "누구?"라며 다시 물었다.
내 입에서 중국어 이름이 나온 게 아니니 당황했겠지.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김, 개, 똥"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지가 데스크에 가서 알아보곤 방번호를 알려주며 구내전화로 전화를 먼저 해보고 확인 후 올라가라고 했다.(원래 비싼 호텔은 다 이런 거? -_-;;)
전화 해서 확인을 했더니 그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날 안내했다. 알고 보니 그 호텔 엘리베이터는 무슨 카드 같은 걸 찍어야 작동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 옷차림이 꾀죄죄하고 그냥 허름한 중국인처럼 보이니까 날 무시했던 것 같다.(외모로 인한 차별!) 나를 무슨 불법침입자처럼 대하다가 외국인임을 알고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그 사람. 괘씸했다. 내가 중국인이었다면 난 더 무시당했을 거 아냐. 그리고 중국인이 '중국인'을 이렇게 무시하고 차별하다니. 재수없어도 유분수!
'내가 처음부터 중국어로 말하지 않고 영어로 말했어도 이 사람이 날 이렇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괘씸한 마음에 영어로 물었다.
"(매우 거만하게)헤이, 익스큐즈미. 왓츠 유어 네임?"(호텔에 불친절 컴플레인할라고)
그랬더니 그 사람은 갑자기 표정이 눈 녹듯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한껏 친절하고 호의적인 목소리로
"폴리. 마이 네임 이즈 폴리"
라고 대답했다.
아...어이 상실. 영어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구나!
#3.
서울에서 진행된 '북한인권 무슨무슨 국제회의'.
화려한 초특급 호텔에서 회의가 진행됐다. 회의 참가하는 것만도 위화감이 팍.
'국제회의'라지만 발표자를 제외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한국인. 게다가 초특급 호텔에 걸맞는 초특급 통역 장비도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 발표하러 나온 한 국회의원 냥반이 평소 과시하지 못했던 자신의 영어 실력을 '국제회의'를 빌어 과시하고 싶었던지 영어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을 대표한다며 여의도에서 깝죽거리는 사람이 한국인이 대부분인 청중 앞에서 영어로...에헤라디야~(언어의 우월성이나 '민족언어/민족문화' 따위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토론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청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고함이 터져나왔다.
"한국어로 해, 한국어로!"
"지금 뭐 하는 거야!"
수구보수 꼰대 할아버지들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꼰대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속이 다 후련했다.
꼰대들의 막강 꼰대질 앞에 의원 냥반도 고개 숙이고 한국어로 발표하는 걸로 바로 변경했다.
#4.
(뭐, 본의 아니게 중국에 있을 때의 경험을 많이 쓰다보니 마치 중국인이 특별히 영어우월주의를 갖고 있고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에 대해 차별적인 것처럼 오해될 수는 있겠으나, 사실 우리 나라도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중국에 대해 더 큰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길! 혹시라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정말정말 죄송. 결국 영어우월주의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고, 한국의 영어우월주의는 중국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다는 거. 한국은 대통령님까지 친히 나서시니 세계 어디든 맞짱 떠도 한국이 이길 판. 결국 이런 현실이 매우 재수없고 차별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영어 조기교육에, 영어학원 열풍에, 영어 조기유학까지...영어, 영어, 영어...
영어 공용어 사용을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는 이 희한한 현실.
영어 잘 하는 사람에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다.
전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영어로 이야기하면 한번 더 돌아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
영어를 잘 하면 왠지 능력있어 보이고, 사람에 대한 호감도 증가한다. 인기도 높아 지는 듯.(쉣!!!)
어딜 가나 어떤 나라 사람을 만나든 일단은 영어로 대화를 하게 된다. 그 중 영어권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많은 경우)
이주민들을 만나도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따지기 전에(혹은 따질 수도 없이) 영어로 말을 한다.(편의상 어쩔 수 없는 면도 확실히 있긴 하다)
대부분의 회의에서 제공되는 통역은 영어.(이것도 뭐 편의상...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영어, 영어, 영어. 편의상 영어만 제공되고, 편의상 영어가 중심이고, 편의상 영어가 제일 멋있어 보이고, 편의상 영어가 제일 능력 있고, 편의상 영어가 주도권을 쥐게 되고, 편의상...)
영어를 잘 하는 서구 출신 사람들은 전세계 어딜 가나 대접받고 인기도 좋고 영어로 먹고 살 수도 있다. 전세계 1등 시민!
연예인을 하더라도 영어 잘 하는 연예인은 다르게 보인다. 설령 그가 한국어는 잘 못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무슨 마을에 가면 거기선 영어로만 이야기해야 한다. 쳇! 마을 이름도 '영어마을'이다.
뭐, 현실이 이러니 영어가 짱 먹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영어', '잉글리시' 말도 왠지 고급스럽고 우아해보인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들은 영어 이외의 다른 외국어와는 확실히 다르다.
편의상! 어쩔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건 분명히 알겠다. 나도 이해하고, 동의한다.(동의할 수밖에 없지...끙)
그치만 억울하다.
영어 이외의 모든 언어가 차별당하는 게 억울하고(한국에서 태어난 게 무슨 죄라고!), 영어 이외 모든 언어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게 한심스럽고, 중요한 자리에서 영어만 나오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주도하는 게 짜증나고, 영어를 잘 못하면 중요한 소통에서 소외되는 것도 화나고, 그러면서도 영어를 잘 하고 싶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도 씁쓸하다구!
아....영어, 영어, 영어. ㅠㅠ
결혼 '못'하는 여자? 결혼 '안'하는 여자!
지금 몇 시간째, 배우 누군가가 결혼 3년 만에 이혼을 했다는 기사가 계속 포털 메일에 뜨고 있다. 대체, 그게 뭐라고! 또 무엇이 그리 궁금하여, 사람들은 그 배우의 이름을 검색어 1위에 띄우고 있는거지? 결혼이 있다면, 이혼도 있는데 그게 이토록 아직까지 유난스러운 일(포털 메인에 1위까지 올릴만한)이 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는 곧, 이혼한 이에 대해, 여전히 어떤 특별한 시선을 내포하고 있기에.
어제는 다가오는 11월에 결혼을 한다는 지인에게 반지를 선물 했다. 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무척 예뻐하길래, 그러면 색깔이 다른 새 반지를 선물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반지와 동봉한 간단한 메모에는 “저는 결혼 제도의 불합리성 등으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00씨의 결혼은 축하해 드릴게요. 꼭 행복하세요.”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을 준 것이 되었다. 비혼주의자가 타인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결혼을 반대하기에 가까운 이들의 결혼식이라도 할지라도 그러한 장소에 결코 가지 않는 식으로 자신의 비혼주의적인 실천을 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결혼식에 대한 초대를 거절하지는 않는다. 비혼주의자인 나는, 타인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결혼해서 정말, 가장 행복하다면 나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겠다. 정말 그 사람이 결혼을 함으로 해서 행복하다면, 진심으로 난 그 행복을 빌어줄 수도 있다. 어차피 모든 이는 자신의 행복을 향해 사는거니까.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결국 ‘결혼 시장’으로 변질되어가는 결혼의 속물성, 사랑을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뭔가 이상한 것, 결혼에서 배제되는 가리어진 존재들, 그 아래에 숨기고 있는 악랄한 여성에 대한 차별(곧, 여성인 내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뜻하는).
동성결혼은 허용하지 않는 이성애중심, 국가중심적 편협함과, 결혼은 남편의 집안으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호주제폐지로 덜해지긴 했더라도, 다만 ‘덜’해진 것이며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통념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등의 가부장성은 한국의 결혼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골격이다. 또한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한국의 결혼제도와 결혼과 관련된 사회의 담론과 분위기들은 비혼인들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결혼제도가 나의 마음을 일찍이 결혼 밖으로 밀어낸다. 결혼하지 않는 (“이기적인”)이는 아직 ‘성인’이 덜 된 것으로 치부되며, 직장에서도 덜 혜택을 누리는 이들이 된다. 가령 기혼인들에게는 비교적 당연하게 주어지는 휴가와 가족 행사와 관련된 보너스가 미/비혼인 자신에게는 ‘눈치 보이는 것’이 되도록 하는 직장 환경에 대해 비판하는 내 친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결혼을 안 한 사람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결혼 못하는 여/남자(=뭐가 문제가 있을까?를 촉수를 곤두세워 끝없이 탐색하게 되고)”라는 수식어가 붙고, 특히 여성에게는 그녀의 어떤 부정적인 반응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무조건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말이 끝내 따라붙고야 만다. 아니, 결혼 하나 안 한 게(안 하겠다고 마음 먹는 게) 뭐가 그렇게 큰 죄라고 이렇게까지 난리란 말인가? 그 뿐 아니라, 방송인 허수경 씨가 ‘싱글맘’ 선언을 하였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은 또 어떠했는지 기억 하는지? 그녀는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아이의 장래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큰 짐을 지운 이기적인 처사"라는 비난에 부딪혔다. “아기는 낳고 싶지만 결혼은 쫌....”이라고 말하는 나에 대해 ‘역정의 목소리’를 높이는(주로 "넌 왜 니 생각만 하고 이기적이니, 아이가 당할 고통은..” 운운하는 것이 주내용임) 나의 언니와 엄마가 그 산 증인이시다! 아버지가 있더라도 없는 것보다 못하다거나,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아버지의 부재’라는 것이 그렇게, 완전 그 아이의 모든 것을 결정할 만큼의 큰 문제란 말인가? 한 아이의 부모 중에 한 명이 없는 경우는 이혼, 죽음 등 다양한 이유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늘 한 쪽의(혹은 두 쪽 다) 부모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드는 사회의 시선, 부모의 부재는 곧 그 아이의 심각한 결핍을 의미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눈, 전적으로 그게 문제다. 또한 생각해보면, 싱글맘에 대한 시선은 남성이 없이 오로지 여성 혼자라는 생각에만 고정되어 있는 듯한데, 결혼을 하지 않고 함께 살며 결혼 제도 밖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경우나, 저런 경우나 사람들의 그런 비판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결혼 밖에서 생겨난 아이라면, 무조건 이상한 눈길로 보는 것이 흔한 경우니까. 누군가 “당신의 이기심으로(결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여성의 ‘편의성’ 등에 관해) 아이의 미래의 불행을 모른 척 하는군요.”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그것을 ‘불행’으로 만드는 사회에 내 아이와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며칠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후, 그의 생전 일기가 공개되었다. 그의 일기에는 현 정권과 그들의 대처방식에 대한 분노, 비판, 경고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 (김대중 정권의 공과 과는 별도로) 그가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 등이 짧은 문장 속에 담겨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내에 대한 관계를 표현한 부분이었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라는, 서거 직전까지도 각별했던 아내를 향한 사랑의 구절들이 그의 일기에는 가득 차있다. 언론들은 연이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기신 그 사랑의 단상에 관하여 보도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언론들의 조악한 플레이를 혐오하는 나에게도 역시 그들의 사랑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꿈꾸는 삶이 그의 일기에 묘사된 삶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닐 것이라고. 결혼하지 않고 80살이 넘더라도 그 오랜 후의 나의 미래 속에, 다만 바라만 보아도 감사하고, 건강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과 사랑을 했기 때문에 행복했던 것처럼. 뭐, 갑자기 이런 ‘사랑 타령’은 이 글에서 뜬금없다고? 내가 볼 때 내 주변의 비혼주의자들 중에는 ‘독신’주의자나 사랑과 사람에 대해 거부하는 냉소주의자들보다는 결혼제도의 불합리성에 저항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결혼 속에서는 그들이 행복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처럼 사랑을 원한다. 나의 더 큰 사랑과 행복을 위해, 나는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려고 한다. 억압 없고 여성인 나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움으로.
written by 영롱 (a.k.a 꿈의택배)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_ 말씨사용 에 대해 이주 노동자 고용주와 인터뷰를 중심으로
얼마 전 꽤나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충격적 경험이란 것은 이전에도 짐작하고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지만 생활에서 맞닥뜨리니 보다 충격적인 분노로 느끼게 되었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다.
그날 역시 늦은 밤이지만 요즘 여름이 그러하듯이 열대야로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그리고 난 한 여름의 모든 짜증을 뒤집어쓴 138버스에 몸을 맡기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두 번째 정류장, 동남 아시아계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려하고 있었다.
기사: “야! 빨리빨리! 빨리 타!”
버스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느꼈을 그의 목소리에 외국인들 역시 놀란 기색으로 후다닥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미처 차비를 준비하지 못 했는지 가방을 앞으로 메고 동전을 찾는듯했다. 이에 ..
기사: “뒤에 사람! 사람! 빨리 들어가!”
물론 그 뒤에 승객들이 기다리는 통에 외국인 승객이 빈 공간으로 재빨리 가야했다. 헌데 내 생각에 이 기사는 너무나 당당하고 망설임 없이 단호한 어조와 반말로 외국인 승객들을 대하고 있었다. 마치 뒤에 사람들만 사람으로 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외국인들한테만 어서 타라고 종용한 것은 아니다. 뒤에 있던 사람인 여성(한국인)승객에게는 “빨리 타세요.” 라고 하지 않는가! 비록 그 억양에서도 친절은 없었지만 ‘타세요’ 라니? 그 여성분은 분명 그 기사님보다 나이 들어 보이지도, 그 여성 역시 앞에 있던 외국인들보다 나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그러한 기사의 태도는 명백하게 그저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느 나라 출신이냐 일 것 이였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 고용주와 인터뷰
․외국인 이주 노동자 고용주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대한 내국인들의 인식을 알아보고 그들에 대한 경어와 반말 사용에 대한 현황과 원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질문? : 외국인 노동자를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A. 걔네에게는 일단 고마움을 느끼지, 한편으로는 걔네들이 힘이 들어도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표현을 못하는걸 알아서 안됐다는 마음도 있지.
그러니까 불법으로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눌러 붙어 있다거나 가야하는데 계속 있는 얘들은 어쨌든 국가 간의 약속을 어겼고 그래서 고통도 받는 게 가엾기도 하지..전부다 자기나라에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하는 건데..
¿질문? :방금 말씀 하실 때 “걔네”라고 하시던데, 그런 것이 혹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주 노동자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하신 말씀인가요?
A. 그건 아니지. 호칭 같은 경우에도 적어도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다, 아니다 알 수 있잖아. 그러면 “야야”는 하면 안 되지, 이름을 부르면서 “~씨” 라고 존칭을 부르지. 뭐 이런 이유에서 나이가 젊은 사람들을 쓰려고도 하지..
반말 쓰거나 거칠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우선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서 그렇지. 볼펜하나 가져오라고 해도 못 알아듣고 두 번, 세 번 다시 말하게 되면 아무래도 목소리도 더 높아지고, 일단 답답하니까 성도 내게 되지. 그래서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이 더 거칠게 대하지 얕잡고.
물론 생각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감안하고 차근차근 잘 대해주지만 많지는 않지.
그리고 다른 이유라면 문화를 모른다는 거지. 사장이 들어오면 일하다가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맞는데 그런 걸 모르지 눈만 껌뻑이고. 밥 먹을 때도 예의라는 것이 있는데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 가르치는 것도 그럴 땐 또 부담이지...
뭐, 다른 이유들도 거의 같지 말이 잘 안 통하니까 배우는 것도 느리고 그러니까 일도 제대로 못하고 분명히 한국 사람하고 차이가 보이고. 한편으로는 외국인들이 타국이다 하고서 마음에 담같은 걸 쌓아서 밉게 굴지도 하지 퉁퉁거린다던지 시간 때우려고 하기도 하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불성실해서 미움 받기도하고, 또..별 말도 아닌데 괜히 과민반응 보이기도 하지. 어떤 상황에 쓰일 수도 있는 말인데 뉘앙스 같은걸 잘 몰라서 오해하기도하지.
¿질문? :그렇다면 앞으로 그런 나쁜 태도(말씨)를 고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A. 잘은 모르겠지만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지. 단속 나오면 몽둥이로 때리고 그러면 다른 한국 사람들도 “아~나라에서도 저러는 구나.”하고 더 얕잡아보기 쉽지.
그런데 하나 분명한 거는 나아지고 있다는 거야. 한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이나 둘 다. 한국 사람들은 이제 어느 정도 외국인들 하고 일을 해보니까. 어느 나라는 어떤 성격인지, 돼지고기 먹는지, 안 먹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으니까 예전보다는 충돌이 좀 적고, 외국인들도 생활을 많이 해봤고 또 오래 한국에 있던 자기나라 사람들한테 이런 저런 애기 들으면서 아는 거지. 뭐를 하면 되고 안 되고, 말투나 일하는 거나..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식의 이해가 서로서로 필요한 거지. 더 나아지려면 한국인 외국인이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누구 통하지 않고 서로가 직접 불만도 들어주고 잘 타이르기도 하면서 나아질 수 있지.
♨결론♨
위의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말씨 혹은 태도의 근거들로는 사회적인 정책에서 그들이 처한 정치적인 지위를 맨 먼저 꼽을 수 있다. 바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인권박탈의 행정에서(출입국관리국&용역깡패) 우리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그들이 죄악적이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대해도 된다.’라는 의식을 갖게 한다. 또한 불법 이주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복지, 법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유독 (개도국)이주 노동자들은 배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주 노동자들의 주된 생활범위인 회사(생산직) 안에서의 반말, 욕설 등의 나쁜(?)말씨가 쓰이는 이유를 찾아보자면, 가장 큰 이유로 ‘소통의 장애’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같은 일을 되풀이해서 말해야하는 점과 그러한 반복적 교육에 대한 부담과 짜증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또한 습득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업무 능력의 미숙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 이 같은 점에서 정부의 산업연수정책이 보다 현실을 고려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소통의 장애'라는 이유가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이유를 망라하여도 그것은 정당한 사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그 같은 문제를 분석하는데에는 도움이 될 것 이다. 정확한 이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성에대한 반감과 상호 문화와 예절에 대한 이해부족이 크게 작용한 바, 이를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BY.기정
고등학생 시절 난 락음악 추종자였다.
처음에 데프레파드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락음악은 건즈 앤 로지즈와 메탈리카를 거쳐 판테라, 슬레이어 등 소위 '하드락', '데쓰메탈' 등으로 뻗어나갔다.
물론 내 주변에만 해도 나보다 훨씬 더 매니악한 락음악의 고수들은 널려있었다. 난 그냥저냥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로 적당히 관심 갖고 음악을 들으며 그들과의 교류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류는 '난 남들과 달라'와 같은 특별한 느낌을 갖게 했다.
확실히 그때 당시 난 락음악은 다른 음악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실 '다르다'기보다는 락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은 '음악도 아니다'고 생각했다고 해야겠지.
가요를 듣는 친구들을 무시하며 "그것도 음악이냐"고 비웃었고, 팝은 물론이고 락 중에서도 본조비와 같은 '말랑말랑한' 락은 변절자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하드한 락일수록 락의 정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고, 대중들의 입맛에 맞춰 자신의 소신을 포기한 다른 음악은 모두 세상과 타협한 비겁자라 생각했다.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락음악을 교류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식(?) 아니, 신념과도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요 중에서는 신해철과 서태지 정도 듣는다고 하면 욕하지 않는...그런 거? ㅋㅋㅋ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친구들끼리 모여 락가수와 락음악을 이야기하며 다른 친구들을 무시하면서 '우리만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난 세상에 순종하는 너희들과는 달라'하며 우월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하면, 완전 오글오글...켁
그런데 웃겼던 건, 그런 상황에서도 룰라의 '날개잃은 천사'와 '3!4!', 신승훈과 이승환의 노래들은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티도 못내고. 좋아한다고 하면 나 역시 변절자가 될 테니까.
그래서 룰라가 TV에 나왔을 땐 TV앞에 자리잡고 앉아 빠져들 것처럼 봤던 기억이 난다. 어차피 내가 찾아서 들은 건 아니니까, 머.
대학 다니면서는 그런 게 아무래도 줄어들었다. 아니, 기본적으로 락에 대한 나의 우월감은 거의 없어졌다고 해야겠지. 여전히 락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 중 하나이긴 했지만.
락음악을 추종하며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라고 느끼기엔...그것 말고도 너무 다른 인간들이 많았다. 이미 우리는 단일하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인지 락음악을 교류하며 적당한 우월감을 공유할 대상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럴 거라면 홍대 앞에 갔겠지. 그러기엔 난, 음악에 대한 열정도 일탈에 대한 용기도 부족했다.
대신 민중가요가 내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었다. 민중가요 이외에는 모두 상업문화라고 생각했다(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고 그게 고등학생 때처럼 우월감이나 특별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다만 SES나 HOT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기엔 뭔가 찝찝한...그런 느낌.
이제는 락음악도 뭐...그냥저냥. 민중가요도 뭐...그럭저럭. 음악에 대한 기호랄 게 없어져버린 것 같기도 하지만, 최근까지도 슈주나, 빅뱅, 소시, 원더걸스, 2NE1, 4 minutes 같은 아이돌그룹들에 대한 선입견은 꽤 강하게 갖고 있었다. 왠지 그런 가수들과 음악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취향이 없어 보이고 싼티나 보인다고 해야할까?^^;; 왠지 "소시의 '소원을 말해봐' 너무 좋지 않아? 수영 짱!"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난 요즘 라틴음악이 좀 좋은 것 같아. 빅토르 하라나 소사같은."이라고 하면 나 자신이 좀더 있어보이는 것 같고 안심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느낌이 너무 부당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4 Minutes이 어때서? Gee를 좋아하는 취향을 싸구려라고 말할 수 있을까? 2NE1을 좋아한다는 사람의 삶에 대해 내가 편견을 가질 수 있을까?
아이돌그룹에 대한 반감이 여성성이 상업화되고, 잘생긴 꽃미남들이 외모로 팔려나가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문화는 그 경계를 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으로 상업화된 상황에 포위되어 매순간 살아가고 있는 걸. 어디에다가 경계를 그어야 할까?
그 경계의 모호함을 핑계로 외모가 상품이 되고 모든 것이 상업화되는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정당한 것일까. 이 역시 다른 한편으론 고민되기도 한다.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난 '싼티 나는' 가수들이 좋다(고 생각해야지). 노래를 좀 못한다고 해도(어차피 확인할 수도 없고) 그들의 퍼포먼스는 재밌고 대단하다. 그들은 '싼티'와 패션리더의 경계에 있는 듯 하지만, 그 구분 자체는 너무 이상하다. 섹시한 여성 연예인에 대한 '창녀'와 '섹시 심볼'이라는 이상한 이중성.
물론 그들은 상업적으로 소비되고 있고, 예술의 진정성이나 그런 걸 갖고 고민하기엔 머리 아프지만, 그들을 막연히 상업화/'싸구려'로 취급하는 건 나 스스로 그들에게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선적이라는 느낌? 내 마음이 그리로 간다면 그걸 부정할 이유가 없다. 물론 성찰을 포기하진 말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요즘 난 2NE1의 I don't care가 좋다! 완전 꽂혔어!ㅋㅋㅋㅋ
아빠/아버지? 표현과 관계 맺기
유진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냐?”
“아버지가 니 친구야? 반말을 쓰게? 부끄러운 줄 알아.”
평소에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남성인 어버이’를 ‘아빠’라고 부르며, 편하게 반말을 쓰던 나인데 저런 꾸중을 듣고 난 후로는 남들 앞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매우 부자연스러웠지만, 아빠라고 부르며 반말로 ‘하늘 같은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혼날 만할 일이고, 부끄러워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왜 어색하게 갑자기 존댓말을 쓰고 아버지라 부르냐고 물으며, 편하게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반말을 쓰고 있다. 서로가 일종의 합의 하에 호칭을 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순간 나의 ‘남성인 어버이’를 부르기 전에 잠시 동안 망설여 진다. 아빠라고 했다가 나를 어린애로 보면 어쩌지, 반말을 썼다가 아빠를 막 대하는 애로 보이면 어쩌지.
아빠는 사전적으로도 어린아이 말로 분류되며, 대체로 10대 후반 즈음부터는 아빠라는 호칭 대신에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사회적으로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관습을 이유로 오히려 서로가 불편해지고, 동등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저어해야 할 일이 아닐까. 현재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른의 말 이상으로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권위적이며 집안의 가장이자, 떠 받들어져야 하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이 들면 아버지로 호칭을 고치고 그를 통해 아버지의 노고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사회 풍조다. 한편,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자녀와 가깝고 편한 관계이며, 가족 내에서 지위도 남성보다 낮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예의나 예절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회적 표현의 정형화된 형태다. 그것은 관계 맺기에 있어서 일종의 ‘예시’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예의나 예절을 무조건적으로 주장하고, 원칙적으로 지키기를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기도 하는 것 같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형태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관계냐에 따라 서로 사용하는 호칭이나 표현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아빠라 부를 때, 관계가 더 편해질 수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에 대해 서로 합의했다면 그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요즘에는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부모에게 경제적/심정적 의존을 떨치지 못한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에 대해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나도 내가 정말로 어리기 때문에 아빠라는 호칭에 대해 서로 편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지금 유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걸까…). 게다가 예의나 예절이 가지고 있는 힘을 완전히 무시하기엔, 그것이 갖고 있는 힘도 너무 크다. 더 나이가 들고 나면 아버지냐 아빠냐를 두고 한참을 고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아빠를 아빠라 부르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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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판넬을 발로 찬 사람이 노숙인이 아니라 전의경이었다면 과연 질질 끌고 가서 내팽개칠 수 있었겠냐고 물었지만 전의경들도 혼자이고 시위대가 다수일 때는 몰매를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시켜 철거민을 살해한 "근본적인" 이유는 누군가는 함부로 죽여도 된다는 생각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부가 사람을 죽이는 동기는 가학증환자여서가 아니라 생존권을 위해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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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정운찬씨같은 분이야 (태생은 잘 모르겠지만) 귀족출신의 귀공자니까 노숙인이 달려와 행패를 부려도 경호원들한테 그냥 놔둬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죠. 하지만 그가 정말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철거민들의 사망원인이 화염병이라고 했을까요. 그 역시 자본의 하수인이 되기로 한 이상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죠. 저는 그런 말에서 훨씬 더 무서운 폭력성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집회인들이 노숙인들에게 저지른 짓이 폭력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정당한 행위였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분명히 폭력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숙인들을 함부로 대했다고 해서 정부가 저지른 짓과 뭐가 다르냐고 하시면 저는 비애를 느낍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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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뭔가 어긋나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는 점에서 사과와 같다"고 말하면 "사과는 과일이고 원숭이는 동물인데"이라 하지는 않잖아요. 여러 이야기가 섞여 풍부해질 수 는 있겠지만, 적어도 서로 다른 두 개(집합 A와 B)를 비교할 때 그 비교의 기준은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 둘이 같은 부분(공집합), 두 개가 다르거나 무관한 부분(여집합)은 구별됐으면 합니다.1. 전의경들도 혼자이고 시위대가 다수일 때는 몰매를 맞는 경우도 있는 건 당연하고, 전 그것도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두 사람이 노숙인을 한참 질질 끌고 갔을 때처럼 말입니다.
2. 용산 사건에서 정부가 "누군가를 죽여도 좋다고 생각해서 살해했다"거나 그런 정부가 '가학"증 환자"라서'라는 식의 생각/말을 저는 하지 않았으니, 그냥 덧붙이신 것으로 들어도 되겠지요.
제가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좋은가'라든가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노숙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자 그제서야 자신들의 폭력을 (끝까지 '폭력'이란 인정은 없이) 정당화한 데 대한 얘기였습니다. 문제제기가 지속됨에 따라 점차 정당화 정도가 약화되긴 했어도 문제제기자에 대한 인신공격/위협적인 분위기 조성까지 동반된 방어 논리의 발전 과정은 (최초 글에 있듯) 국가가 폭력을 저지르고 나서 정당화해가는 과정(그리고 문제제기가 강력할수록 슬슬 눈치보면서 뒤로 빠지거나 오히려 더 발끈해서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과 비슷해요. 누군가 문제제기조차 안 했으면 그나마 주춤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들 중 누군가는 좀 알아서 반성했겠지, 하고 넘어갈 정도로 작은 문제도 결코 아니었다고 보고요.
3. '말쑥한 정장을 입은 사람이나 외제 차가 그 판넬을 쳐 넘어뜨렸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는 제 말은, 정장 입은 사람이나 외제 차는 분명히 (언급하신, 제가 했던 비유와는 다른 각도에서 '노숙인 행패'를 설정하신 경우의 가진 자의 '경호원들'처럼) 가진 것들이 있으니 그런 린치를 함부로 안 당했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해요.
당시 집회인들은 (노숙인에 비하여) 경호원 부럽지 않은 자신의 힘과, 그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자유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노숙인이어서) 봐준 거지 아니었으면 가만히 안 보냈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전 그게 진정성이나 일관성이 있는 폭력 수위의 원칙이라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요(그랬다고 해서 문제 없는 방식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 노숙인은 (그 순간 그들에 대하여만큼은) 가진 게 허름한 몸밖에 없고 그것으로 결국 차별/무시받아 직접 신체에 위해를 당한 것인데, 이에 관해 노숙인이 자신이 당한 폭력을 폭력이라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던 맘이 있어 한 얘깁니다. 폭력을 가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한 건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상황이니까요. 주위에서 문제제기한 한 사람을 둘러싸고 그의 입을 막으려는 사후 급정당화에만 바빴고요.
4. 자본의 하수인이 되어 알면서도 우기는 행위를 '훨씬 더 무서운 폭력'이라 하여 다른 폭력들과 구별짓는 게 중요할까요? '유리한 자'가 '불리한 자'에게 마음만 먹으면 우발적으로도, 일방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보다 표면의 다름에만 주목하는 건 아닌지요.
자본의 논리뿐 아니라 그 어떤 (자본/이윤만큼 강력하게 현실 사회에서 어필하지도 못하는) 궁색한 논리라도, '이미 저지른 폭력을 정당화하며 폭력을 폭력이라 하지 않고 정당화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무섭기는 마찬가집니다.
자기보다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의 행동은 '폭력'이라 강조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억지로 온갖 핑계를 끌어다 붙여 정당화하는 논리라면, 가진 자본이나 권력에 따라 얼마든지 -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훨씬 더 쉽고 세련되고 효과적으로 가능하겠지요 - 같은 입장에서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경호원들에게 그냥 놔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나, 사망원인이 화염병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떼잡이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만이) '법치'라고 말하는 사람처럼요.
국가의 폭력, 자본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그때 쓰이는 논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우리 살갗에 닿아 있어서 당최 새롭지가 않다는 거예요. 권력과 자본을 안 가지고 맨몸으로 때린다고 해서 덜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가진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과, 가진 게 몸밖에 없는데 몸을 침범당하는 것. 폭력 당하고 사과는커녕 정당화 당하고, 당하는 입장에서 대체 무엇이 다르죠. 날 괴롭히는 사람이 경찰인지 대통령인지 갑부인지 그들을 욕하는 집회자인지 간에 더 잃을 게 없으면 무엇이 중요하겠나요.
어떤 폭력이 다른 폭력보다 중요하고 더 무섭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그 순간 노숙인에게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 보고요, 전혀 남의 일 같지 않아 공포를 느꼈던 것인데... 가령 자신의 애인/배우자에게 어떻게 할까가 상상/우려가 된단 말이지요.
예를 들어 청소년이 부모나 교사 기타 등등 경제적/사회적 보호자의 일상적인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다 자살하거나 일찍 떠났을 때, 부모가 자식에게 '강제퇴거'를 자본의 논리에 따라 명령한 것은 아니라서 국가보다 덜한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욕을 제어할 수 없기에/술에 취해 있었기에 실수 좀 했을 뿐...' 이란 말(?)로 아직도 덮이기 일쑤인 성폭력은 어떨까요?
현 정부의 시각에서 용산 참사는 심하게 말해 '(정부가) 웬만하면 덮고 넘어가고 싶은 찜찜한 걸림돌'일 뿐입니다. 재개발이나 이윤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이명박이나 오세훈을 선출한 때에 이미 이루어진 거고요. 물론 같은 정권하에서도 그리고 장기적으로도 그 흐름을 바꾸도록 해야겠고, 단기적으로 진실 규명과 여러 조치들이 따르도록 해야겠지만요.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가 재개발 지역 세입자를 보는 시각("순순히 나가지 않은 불온한 자들의 도심 테러에 대한 정당한 진압"), 노숙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그를 본 시각("집회를 하는데 귀찮고 깜짝 놀라게 한 방해꾼에 대한 정당한 반응"), 그저 '나와는 다른 만만한 사람'으로 보고 함부로 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국가만큼 자신의 정당성을 든든히 뒷받침해주는 권력(무력 공권력)과 자본과 세련되게 포장된 장치들을 갖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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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닌 폭력은 덜 나쁘다는 것인지. 하기야 군대에 끌려가 인간성을 박탈당한 이들이 행하는 강요된 폭력과, 입만 열면 자유와 평등을 말하는 자들이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자유 의지로 가하는 폭력이 같을 수야 없을 터.원 글이 자본가 계급의 폭력적 지배를 사인간 폭력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희석시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저들의 비열함과 구역질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 안에서도 반복됨을 말한 것일진대, 어째서 비애를 느낀다는 것인지. 오히려 저렇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구조야말로 저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침투되는 회로인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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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닌 폭력은 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계급지배를 사상한 채 두 개의 폭력을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죠. 우리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자기합리화를 한다고 해서 국가폭력과 같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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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마지막 문장이 잘 이해가 안가서 한참을 읽었는데 이제 이해했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구조가 저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다." 그 점을 필자는 지적한 것이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논리만 가지고 지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지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이 지배계급의 소유여야 하고 그 생산수단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폭력수단을 지배계급이 소유해야합니다. 지배의 자원을 지배계급이 소유하지 않는한 지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만 가지고 지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배의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매순간 폭력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하층계급 남성일수록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층계급 남성은 부르주아 남성들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겠죠. 하지만 부르주아 남성들이 더 폭력적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지배의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계급지배를 사상한 채 폭력을 논하게 되면 논의가 굉장히 이상해집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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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토론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리며 많이 배웠구요. 공감되는 내용도 참 많았습니다.그런데요. 부르주아 남성들의 폭력과 하층계급 남성들의 폭력을 누구의 폭력이 더 폭력적이다는 식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요?(저도 모든 '폭력'이 같지 않고 폭력이라는 행위의 주체와 맥락에 따라 의미는 굉장히 달라진다는 점은 너무*100 동의합니다.) 그런데 비교의 목적은 여전히 가부장적 억압보다 자본주의적 억압이 더 크고 폭력적이란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어떠한 폭력이 더 폭력적인가' 하는 비교는 불필요할 것 같고, 오히려 비교의 결과가 의도하지 않은 별로 좋지 않은 효과를 낳을 것도 같네요.
자본과 자원의 지배와 통제권력은 '자본가'에게만 있는 걸까요? '자본가'라는 주체는 단일한가요? '자본'의 주체와 성격에 따라 자본이 구성되는 양상이나 작동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양한 게 현실인 것 같아요.(근데 보통은 '자본' 혹은 '자본가'라고 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특징지워지는 존재 혹은 주체를 말하기는 하지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이주민보다는 선주민에게, 장애인보다는 비장애인에게, 청소년보다는 '성인'에게,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에게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통제권력이 더 있는 것 아닌가요.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집단도 있겠지만, 억압받는 집단 안에서도 작은 권력이라도 경합하고 더 가지려고 경쟁하고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 둘의 억압과 폭력의 경중을 비교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그 복잡다단한 연쇄의 고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세밀하게 분석해 하나씩 끊어내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치만 저도 참, 논리적 정합과 좀 무관하게(복잡해서..^^;;) 심정적으로는,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동의할 수 없는 폭력성을 발견하거나 그것이 저들의 폭력성과 동일한 것처럼 비교될 때에는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떤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동지'라는 환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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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가 배움이 짧아 개념과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못해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점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결국 계급지배에서 비롯된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을 사실상 비교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네요. 폭력의 근원이 다름을 역설하고 계시는데, 원 글은 그 근원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이 어디든간에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선 별로 다르지 않으며, 불의이긴 마찬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국가에 의한 피해/사적인 피해를 또다시 위계화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평등하다면요.
더불어 제가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잡설은, 데모꾼에 대한 차별이건, 노숙인에 대한 차별이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건, 그건 지배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조장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지배에는 지배의 자원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모두 필요한데, 이 사건과 같은 노숙인에 대한 차별은 다른 순간 다른 장소에서 이미 지배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논의에서 이 폭력은 국가 폭력이고, 저 폭력은 사적 폭력이고, 이런 식의 구분을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지배를 위해 얼마든지 우리 안에 있는 차별/폭력 정당화 구조의 능선을 따라 포지션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당장 비정규직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들은 언제나 분리 지배를 위해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단을 찾아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것만, 저것만 하고 가려가며 타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을 때, 위선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거야 당연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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