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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봄을 기다려.

10일

늦게 일어나서 늦은 점심을 먹고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한겨레 신문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30분간의 자학과 냉소. 요즘 신문을 읽는 시간은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그 만큼 신문이 보기 싫고, 신문이 보기 싫은 만큼 세상이 싫다.

그래서 신문을 봐야 한다. 그 답답한 세상을 향한 마지막 문 만큼은 닫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

열고 닫는 게 언제까지나 내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 만큼은 남겨두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는 대형 광고니까 볼 필요가 없고, 바로 그 앞 두 페이지.

그러니까 칼럼과 사설로 가득찬 그 두 페이지가 자학과 냉소의 알곡이다.

어떤 날은 너무 자세히 읽고 어떤 날은 아예 건너뛰는 그 두 페이지 상단에는 [여론]이라고 쓰여 있다.



10일자 신문,

왼편에는 김선주 칼럼 [말은 없고, 헛소리만....]

오른편에는 아침햇발 [진보가 답답하다]

제목만 읽어도 전해오는 그 가슴 답답함. 꽉 막힌 진흙 속에 쳐박힌 물고기처럼 코나 입이 아니라

아가미로 호흡해야만 하는데...숨을 쉬면 쉴수록 아가미로 진흙이 들어와 숨통이 막혀간다.

그래서 읽는다. 그 느낌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물론 이것은 현실에 등을 돌리지도 완전히 발을 담그지도 못하는 자기 연민이다.



김선주 칼럼에는 온통 자학과 절망으로 가득찬 글쟁이의 무기력감으로 가득하다.

'더 이상 말이 말이 아니고 글이 더 이상 글이 아닌 세상이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글을 써야 한다면, 글로 돈도 벌고 의견도 말하고 신문사도 굴려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글밖엔 나올 수 없는 세상이다.

매일 엄청난 양의 뉴스를 본다. 용산 철거민 참사 관련 기사는 빠짐없이 본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본다. 종종 아는 사람들 얼굴도 보인다. 내가 지금 저기 같이 있어야 하는걸까?

그런데 그 곳이 무겁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말고 마음이 무겁다. 내 언어로, 내 말로, 내 열정으로

저기에 가 있어야 하는데...무언가를 아직 놓치고 있다. 아니 못 찾고 있다.



아침햇발은 최근 민주노총 사태를 중심으로 대중으로부터 괴리되어 가고 있는 대중조직의 문제점을

꼬집는 글이다. 이쯤이면 좌청룡우백호 급이 아닌가? 글 두 편이 주는 무게감은 10년의 무게를

얹어놓은 듯 버겁기만하다. 그런데 아침햇발 글은 일면 공감이 가면서도 한 편으로 불편하다.

나처럼 대중조직도 대중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란...대체 어디쯤 있어야 할까?



그 대중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군중처럼만 보인다.

광우병 사태 때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백번 양보해서 철거민들의 저항이 너무 극단적이었다고 해도, 자기 먹는 소고기엔 그토록

흥분하면서 살 곳이 없다고 저항하다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선 어찌도 그리 이성적이고 냉철하신지....

혹여 가슴 속에 꿈틀대는 재개발과 뉴타운의 꿈이,

저 사람들도 결국 돈 때문에 저런 것이니 결국 나와 다를 게 없다는 자기 위안이,

심각한 소크라테스보다는 차라리 적당히 배부른 돼지가 되고 말리라는 타협 정신과

자신만은 고된 된장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거라는 부푼 환상이,

어느 쪽도 공정하지는 못하다는 자기 기만이.......

그런 나도 나가지 않는 이유는?? 아...짜증나고 머리 아프다. 화난다.

그런데 그 대중을 사로잡겠다는 발광하는 대중조직은 대중 못지않게 대중적으로 썩었고....






결국 문제는 대중도, 대중조직도 아니고 나 자신이다.

내 글과, 내 생각과, 내 행동과, 내 삶이 설 자리를 찾아야 한다.

올해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루저의 인생을 끝마쳐야 한다. 아니 적어도 끝마치는 출발점은 되어야 한다.

이게 유일한 올해 소원이다.






2일

어른 혐오증이 있다. 더더욱 아저씨 혐오증이.

오늘도, 예의 말많은 지하철에서 진상 아저씨를 만나고 글을 쓰려 했으나...지친다.

쓰기도 전에 심리적으로 지치는 이 기분. 천천히 쓰자.

....

하루가 지났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를 읽다가 문득 아톰의 스토리가 궁금해진 나머지

웹하드를 뒤졌는데 다행히 1982년판 TV판 astro boy를 찾았다. 다운 받아서 5편까지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게 11시. 아 오늘은 정말 행복한 잠에 푹 빠질 수 있겠구나 싶어 컴퓨터를 끄고

잠을 청했는데 마침 룸메이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깼다.

그 순간 직감한다.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글렀구나.

꼭 11시나 4시다.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잠들어야만 하는 운명처럼. 때론 이런 것도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일반 직장인들이 잠드는 11시를 넘어서면 그 때부터는 심리적으로

쪼들린다. 다른 세계다. 너무 많은 기대와 후회가 버무려진 잡념, 또 그와는 대조적으로

너무 조용한 세계. 나는 공상의 바다를 표류한다. 인터넷이나 케이블 TV 속도 표류한다.

.....


다시 아저씨 혐오증으로 돌아가자.

그 시작은 아빠다. 특별히 아빠가 나쁜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그냥 보통, 평범한 아빠였다.

가난하고, 힘없고, 그래서 조금은 비굴하고, 그래도 남자라고, 아니 그래서 더욱, 집안에서만

용감한 평범한 아빠였다.

무엇보다 아빠의 패배주의가 싫었다. 부모들은 왜 그렇게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한국 청소년들처럼 스트레스 많이 받으며 열심히 사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늘 부족하다. 모자르다. 게으르다. 배불렀다. 안 된다. 하지 마라. 그래서 늘 결론은 '되겠냐?'는

그 말. 뭘하든 안 될 것이라는 그 말. 그러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지는 꼭

알아달라는 그 짜증스런 자기연민.

그러면서 동시에 사기를 꺽는데는 세계 최강이다. 공부밖에 모르던 고등학교 때나, 운동밖에

모르던 대학교 때나, 먹고 사는 것밖에 모르는 지금이나 '니가 별 수 있는 줄 아냐?'는 그 말은

늘 나를 화나게 했다. 패배하고 사는 건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처럼 살라는

말이야?

여기에 덧붙여, 사소하지만 내게는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이유. 담배연기가 너무 싫었다.

아빠를 욕하면서도 아들은 아빠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외모 빼고는 아빠를 닮은 구석이 없다.

아빠가 하는 정반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빠가 소심하다는 사실이다. 아빠가 골수 마초들처럼 용감하기까지 했으면

지금쯤은 이미 파국이다.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아저씨 혐오증의 씨앗은 비겁함에 있다. 조직과 권력(강자)에 약하고

가족과 여자(약자)에게 강한 아저씨. 여기에 병역거부 이후로는 한국 남성들이 대개 군인이거나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치명적으로 아저씨 혐오증을 강화시켰다. 그게 어느 정도는 이미지라해도

이미 덩치가 너무 커져버렸다.


한 번 가속이 붙자 혐오증은 급속도로 확산. 별 게 다 꼴보기 싫다. 가장 예민한 장소는 지하철.

어제도 진상이 하나 있었다. 은색 플라스틱 소재로 된 지하철 의자. 끝 쪽에 아저씨가 다리를 꼰 채

신문을 좌~악 펼치고  앉아 있다. 습관적으로 조중동이 아닌가 확인한다. 한국경제다. 아쉬비~~

극도의 증오를 맛볼 수 있었는데. 당연히 옆자리 하나는 비어 있다. 그런데 그 진상이 입으로 계속

뭔소리를 중얼거린다. "의자를 왜 이 따위로 만들었어 미끌어지게~"라고 연신 투덜투덜대며

동의를 바라는 듯 곁눈질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다. 빙신 쉐끼. 저 다리를 그냥 올미다의 예지원처럼

도끼로 날려버렸음 시원하겠는데...(휴~어렵게 수양해서 그나마 내면화된 10퍼센트의 평화주의적

심성마저 날아가는 순간.)

한 번은 밤 11시 넘어 신도림 역에서 까치산으로 향하는 곁다리 2호선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한

할머니가 강남콩을 팔고 있었다. 엄마를 보는 거 같기도 하고(이거 살짝 진심이다.) 너무 밤 늦은

시각에 힘들어보여서 남은 콩을 죄다 사고 말았다.(아 충동구매...그래도 그 순간 강남콩으로 지은

밥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걸 지켜 본 할아버지가 까치산 도착할 때까지 같이 타고

가는거다. 아 완죤 짜증나는 상황이다. 타고 가면서 내내 칭찬을 하는데 어디로 사라질 수도 없고.

차악의 칭찬은 '요즘 젊은이들 중에도 아직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구먼(있구만보다는 있구먼이

상황설정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고).' 이고 최악의 칭찬은 '그래도 아직은 한국의 미래가 밝어.'

할아버지의 므훗한 미소에 한 방 날려드리고 싶다. 난 하나도 안 착하고 할아버지같은 사람

별로 안 좋아하고 무엇보다 한국의 희망찬 미래 따윈 개코딱지만큼도 관심 없거든요.

(흠. 주제와 달리 할아버지 혐오증으로 흐르는건가?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군.)



이렇게 저렇게 자가 증식한 혐오증은 이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새로운 소재를 찾아 커나가고 있다.

등산복 입고 술마신 상태에서 얼굴 벌개가지고 술냄새, 발냄새, 땀냄새 풍풍 풍기며 지하철을 점령한

아저씨들, 그러고도 서넛만 모이면 시끌시끌 안하무인인 아저씨들, 대놓고 두 칸 걸쳐 앉아 가는

아저씨들, 남자는 원래 다리구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건지 옆에 이빠이 오므린 아줌마의 존재를

뻔히 알고 있는 쫙벌남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나이부터 따지는 아저씨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말하는 아저씨들....들들들....




어차피 터진 입으로 쏟아낸 말들을 주워담기도 힘든 지경까지 왔으니 평소 생각을 다 쏟아보자.

난 어른들이 '예의없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게 정말 듣기 싫다.
(어른에 대한 반감은 꼭 아저씨를 향해 있다기 보다는 어른 전체를 향해 있지만 똑같이 재수없는
짓을 해도 아저씨가 조금 더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볼 때 그들은 그들이 체화한 생존방식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짜증나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앉을라고 떠밀면서 올라타고, 조금 사람이 많다 싶으면 밀어대고, 몸에

손대고, 줄 잘 안 서고, 새치기 하고, 그래도 싸우다 불리하면 나이로 다 해처먹으려고 한다.



또 으시대는건 좋아해서 뭐든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서 상대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의 대화는 대체로 대화가 아니다. 들어주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줄줄줄.

구치소에 있을 때도 그래서 대화를 기피했다. 너 어디 나이트 가봤냐? 너 거기 몇 번 국도 따라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다. '왕년에 내가~'로 시작해서 '~침 좀 뱉어봤다.'로 끝나는 그 대화를

듣고 있자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것도 자랑거리냐? 좀 멋있게 보이고 싶으면

노력이나 하던가...




1일


며칠째 계속 심난한 꿈을 꾼다.

어지럽고 복잡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되섞인 꿈을 꾼다.

그리고 당연히, 깬다. 꿈의 의미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집을 나선다. 내내 잊고 지내지만

마음 속에 계속 찝찝한 마음이 남아 있다. 대체 그 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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