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ciprocity> 세미나를 위해 바타이유의 짧은 글 "Rotten Sun(Soleil Pourri)"을 번역했다. 혹시나 흥미를 가질지도 모를 분들을 위해 블로그에 일단 저장해 놓는다.

 

이 글은 1930년 <도큐망Documents>의 피카소 특집호에 실린 한 페이지 가량의 짧은 글로, 바따이유의 짧은 글들을 모은 선집, The Vision of Excess: Selected Writings, 1927-1939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에 영역되어 있다. (영역본은 google books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번역은 시간관계상 영역본을 기반으로 했다. 추후 시간이 나면 불어원문과 대조해 수정하겠지만... 언제 시간이 날지, 이 번역이 그럴 정도의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글은 짧은 글이기는 해도, 선물교환 논의에 있어서 바타이유의 위치가 가지는 독특성을 압축적인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흔히 선물교환에 관한 인류학적 논의 속에서 태양은 행위자들 간의 상호적 교환관계를 넘어선 초월적-비상호적 관계의 대표격 이미지이자, 순수선물 혹은 신성재the sacred의 기원으로 제시된다. 바따이유가 <저주받은 몫The Accursed Share>에서 반복해 말하듯이, "태양은 받는 것 없이 준다The Sun Gives without Receiving." [이 경구에 대한 탁월한 인류학적 성찰 중 하나로는 Michael Taussig의 Walter Benjamin's Grave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2006)에 실린 동명의 챕터를 참고할 수 있겠다.]

 

"신성한 것"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모스를 재해석하는 고들리에에 따르면, 행위자들 간의 상호교환은 바로 이러한 비상호적인 신성한 "기원" 혹은 "중심"을 가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예컨대, 포틀래치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판(신성재)이 태양을 상징한다면, 순환되는 작은 동판(가치재)은 마치 이 태양을 도는 위성처럼 순환되며, 그렇기에 움직이지 않는 신성한 동판의 소유자(고들리에에 따르면 이 소유권이 바로 하우hau이다)에게로 되돌아온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며, <증여론>에서 모스 본인에 의해 어느 정도 암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들리에는 이를 상징계에 대한 상상계의 우위에 연결시키면서, "신성한 것"으로서의 사회라는 뒤르켐적 문제의식을 되살리려 시도한다 (모리스 고들리에, <증여의 수수께끼> (오창현 역, 문학동네, 2001) 참고).

 

고들리에보다 두어 세대 앞선 시대의 이론가이지만, 바타이유의 이 짧은 글은 고들리에(및 유사한 인류학적) 논의를 말그대로 "탈구축"한다. 태양은 언제나 고양과 추락이라는 두 가지 양가적인 속성의 결합이라는 그의 지적은, 이 신성한 "기원의 장소"가 항상-이미 오염되어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주기만하고 받지 않는 태양의 선물이 결국 "저주받은 몫"을 탄생시킨다는 그의 <저주받은 몫>에서의 논의와 연결시켜 보면, 바타이유에게 순수증여는 언제나 축복이자 저주로서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이 "순수증여"의 위상학적 지위가 오늘날의 여러 논의들 속에서 존재, 은총grace, 사건, 정치, 어소시에이션 등등의 개념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바타이유의 이러한 탈구축이 가지는 현재적 의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순수한 정치"의 순간은 이미-항상 폭력에 오염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면 어찌할텐가? 물론 여기서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다룰 시간은 없다.)

 

다만 바따이유가 이러한 신성한 태양의 양가성에 대한 논의들을 이후 <저주받은 몫> 3권에 등장하는 지고성(주권, sovereignty)에 대한 논의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에 따르면 이 지고성은 축은 가장 고귀한 것과 가장 비천한 것이 만나는, 이 둘을 수직적으로 연결하고 결합시키는 장소이다. (아마도 이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의 결합은 다양한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예컨대, 왕자와 거지. 돈과 똥. 주권자의 불멸의 신체와 호모 사케르 등등..) 또한 바타이유가 마지막 단락의 시작부분에서 얼핏 언급하며 넘어가는 고양과 추락의 두 심리적 운동은 프로이트의 삶충동/죽음충동의 구분을 염두에 둔 것임을 밝힌다. 프로이트가 종종 자신의 표어처럼 인용하는 단테의 말 "하늘에서 세상을 가로질러 지옥으로"는 무엇보다도 정신분석의 대상 중 하나가 무의식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 간의 양가적 결합임을 보여주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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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태양Rotten Sun

 

-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태양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종종 정오noon라는 관념과 뒤섞인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양elevation의 최고점에 달한 관념일 것이다. 동시에 태양은 한낮의 시간에 그것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추상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자신의 약한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양을 피할 수 밖에 없는 이가 생각하는 태양이라는 관념은, 수학적 청명함과 영적인 고양과 같은 시적 의미를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 누군가 완강하게 태양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런 행위에는 어떤 광기가 함축되지만), 태양의 관념은 변화하여 더 이상 빛 속에서 드러나는 생산이 아니라, 밝은 아크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포로 적절히 대변되는 쓰레기이자 타고남은 재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똑바로 들여다 본 태양은, 정신적인 비명이나 입에 문 거품, 간질병의 발작 같은 것이다. (사람이 볼 수 없는) 전자의 태양이 완벽히 아름다운 것과 같은 방식으로, 똑바로 들여다 본 태양은 끔찍히 추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신화에서, 이 후자의 태양은 황소를 살육하는 사람(미트라Mithra 신화[이란-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빛의 신]의 경우)이나 간을 먹는 독수리(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경우), 즉 살해된 황소나 먹혀진 간과 함께 하는 사람과 동일시 되었다. 태양에 대한 미트라식 숭배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구덩이 위에 나무로 된 발판을 놓고 그 위에서 사제가 황소의 목을 땀으로써 사람들이 황소의 사나운 저항 및 울부짖음과 함께 그것의 뜨거운 피를 뒤집어 쓰게 하는 널리 퍼진 종교적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눈 먼 태양의 도덕적 이익을 취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물론 여기서 황소는 그 자체로 태양의 이미지이지만, 잘려진 목과 함께 할 때에만 그러하다. 이것은 수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수탉의 공포스러운 일출을 향한 울음 소리는, 항상 살육의 울부짖음에 비유될 수 있다. 누군가는 신화적으로 태양은 그 자신의 목을 베는 사람, 더 나아가 무두無頭의 인간 형상에 의해 상징되어 왔다고 덧붙일지도 모르리라.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고양의 정점이 터무니없는 폭력이라는 갑작스런 몰락과 뒤섞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카루스의 신화는 이 점에서 확실히 의미심장하다. 그 신화는 태양을 분명하게 둘로 나눈다. 그 중 하나는 이카루스의 고양의 순간에 빛나는 태양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에 너무 가까워졌을 때 밀랍을 녹임으로써 실패를, 비명을 수반한 추락을 야기하는 태양이다.


이렇게 두 가지 태양을 구분하는 인간 성향은, 부차적인 요소들에 의해 교란되거나 그 충동이 완화되지 않는 심리학적 운동들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회화와 같은 복잡한 행위에서 이러한 운동들의 완전한 대쌍을 찾는 작업이 선험적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임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전통 회화가 어느 정도 정신의—잉여없는—고양에 상응한다면, 고양과의 단절과 눈멀게 하는 광휘를 추구하는 현대 회화는 형태의 가공 혹은 해체에 자신의 몫을 가진다. 좀 더 엄격히 말하자면, 이러한 후자의 특징은 오직 피카소의 회화에서만 발견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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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 때 이 텍스트에 대해 논하다가, 세미나 구성원 한 분이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어 여기에다 추가로 정리해 놓는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상징 "태양의 탑Tower of the Sun"을 만든 일본의 예술가 오카모토 타로Okamoto Taro는 젊은 시절 바타이유의 College de sociologie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한 것으로 유명한데, 흥미롭게도 이 탑에는 바타이유가 이야기한 두 개의 태양이 함께 묘사되고 있다. 유명한 이 탑의 전면에는 태양의 마스크가 그려져 있다면, 잘 알려지지 않은 후면에는 "검은 태양"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국제박람회가 상품물신의 스펙타클을 전시-소비함으로써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유사-포틀래치의 장이라면, 이를 기념하는 구조물에 태양과 함께 검은태양을 새겨 넣은 타로의 기획은 적절하면서도 상징적인 시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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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5 20:32 2014/01/25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