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상태

from 맑글터 2007/08/30 01:33

오 마이 갓... 세 시간 가까이 붙잡고 있던 포스팅을 방금 날렸다.

앞선 퇴근길에는 골목길에서 접촉사고.. 다행히 앞 범퍼가 아주 살짝 찌그러지는 것에 그쳤지만,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볼까해서 붙잡고 있던 포스팅이 한 순간 날라가 버릴 줄이야.;;; 

 

연이은 불운으로 완전 공황상태다.

 

애초에 쓰려던 포스팅 제목은 Peter Hallward의 논문제목을 딴 <푸코와 들뢰즈를 구분하는 법>이었는데, 지금 정신상태로는 언제 다시 붙들고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신 원래 하려던 포스팅과 연결되어 있는, 한 2년 전쯤 다른 공간에 써둔 글의 '일부'를 이 블로그에 옮겨놓는다.(어차피 그 공간은 이젠 잘 가지 않는 곳이므로, 내 옛 글을 보존하려는 목적도 있다.)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런지 모르겠는데, 2005년 가을경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혼성적 지구화와 대항 주체화>란 제목으로 트랜스토리아 포럼이 열렸었다. 발표 내용에는 바디우의 정치 개념을 이용하여 프랑스 이주민 2세대의 투쟁을 다룬 서용순씨의 논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당일 토론의 핵심은, 태혜숙씨가 발표한 써발턴과 정남영씨가 발표한 다중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이 때 발제문들은 아마도 <트랜스토리아> 6호 인가에 실려있을 것이다.) 아래 글은 그 때 토론회에 다녀온 이후 작성한 감상문의 일부인데, 혹시 나중에 <푸코와 들뢰즈를 구분하는 법>이란 포스팅을 할 때 한 번 더 언급될 문제이므로, 발췌해 놓는다.

 

 

"써발턴과 다중을 둘러싼 쟁점의 핵심은, 타자(성)에 대한 그 둘의 입장차에서 드러난다. 즉, 스피박의 "써발턴"이 그 저항의 목소리를 결코 "명료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타자라면,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은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타자에 가깝다. 스피박은 "써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 "지식인과 권력"을 언급하면서 피억압집단이 직접 말할 수 있다는 이들의 주장이 결국에는 여전히 작동하는 재현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역능의 권력에 대한 우위, 저항의 선차성, 구성된 권력에 대한 구성 권력의 우위에 기반한 네그리와 하트의 사고는 피지배계급이 재현을 벗어나 항상-이미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들뢰즈와 푸코의 손을 들어준다.............."

 

 

애초에 하려던 포스팅은 '외부'의 사유로 함께 묶이는 푸코와 들뢰즈이지만, 이 '외부'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며, 이와 유사하게 (스피박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들뢰즈의 '타자'에 대한 입장 역시 작지만 심대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러한 차이는 광기가 직접 말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앙띠-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들뢰즈)과 광기는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드러내주는 경계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광기의 역사>(푸코) 간의 차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차이가 가지는 의미를 Peter Hallward의 "The Limits of Individuation, or How to Distinguish Deleuze and Foucalt"(Angelaki 5(2), 2000)을 소개하면서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혹시 여전히 푸코(혹은 들뢰즈)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이 있다면, 위 논문을 한 번 찾아 읽어보시길. 아마도 인터넷에서 원문을 구할 수는 없을 터이니, 학교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 등을 이용해야 할 듯 하지만.(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진보네 블로그는 첨부파일 기능이 없는지라...;;) 

 

아무튼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은 날인 것 같으니 그냥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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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0 01:33 2007/08/30 0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