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사마님의 [알랭 바디우,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 에 관련된 글.


예전에 영어로 주워넘겼던 이 글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촛불집회의 성과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 때문이다. 올 가을 계간지를 훑어보니, 아무래도 촛불집회의 성과에 관한 논의는, "제도냐, 거리냐"의 논쟁으로 다시 한 번 귀결되는 것 같다.(아마도 최장집씨의 문제제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운동사에 익숙한 이라면, 이러한 논쟁 구도에서 시간을 뛰어넘는 묘한 기시감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제도냐 거리냐라는 논쟁 구도는, 멀게는 87년 이후에, 가깝게는 민주노동당 건설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한국 정치사의 닳고닳은 주제다.  

 

2000년대 들어 이 논쟁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제도 정치권에 한 발을 담근 자유주의 세력들이, 이 논쟁 구도를 가로질러 거리 정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논쟁의 구도 자체를 무화시키는 포퓰리즘적 실천의 부각 속에서, 거리의 정치는 제도 정치의 훌륭한 "대리보충(supplement)"으로 기능해왔다. 그랬던 논쟁이 지금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제도적 헤게모니를 확보한 이들과 거리의 정치 간의 이 암묵적 공모 관계가, 다시금 갈등 관계로 전환하고 있다는 정세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갈등이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2008년 우리에게 "제도냐, 거리냐"라는 질문이 그토록 시급한 질문일까? 혹시 "제도냐, 거리냐"라는 이 논쟁 구도 자체가 좀 더 근본적인 물음들을 가로 막고 있다면, 더 정확히 말해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의 망각 위에 기초하고 있다면 어떨까?

 

바디우의 글도 글이지만, 우리가 무엇보다 참고할 수 있는 자원은, 과거 동일하게 던져졌던 "제도냐, 거리냐"라는 질문에, "현장으로" 혹은 "아래로"라고 답했던 이들의 실천일 것이다. 이들의 실천에 대한 다수한 그리고 복잡한 평가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제도/거리의 구도 속에서 "현장"을 택한 이들의 정치적 감각만은 여전히 현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제도냐, 거리냐보다 더 먼저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오늘날 "현장(site)", 즉 상황(situation)이 발생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 곳의 조건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있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그런 점에서 얼마전 "문화연구 시월"에서 펴낸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천권의 책, 2008)에 실린 일련의 논문은, 이러한 질문들에 예외적으로 성실히 도전한, 그래서 좀 더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시도들이다.)  

 

아마도 오늘날 현장을 간단히 공장으로 치환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하지만 그 역, 즉 "공장은 현장이다"는 언제나 진실이다. 특히 오늘날 포르노그라피보다 더 외설적인 장면이 되어버린 육체 노동의 현장은, 언제나 공식적 상징 체계 속에 적절한 자리(proper place)를 차지하지 못한 채 "정치"의 장소로 이름붙여지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가능한 정치의 범위를 조건짓는 잠재성의 장소이다. 그렇기에 바디우의 말처럼 "정치에서 노동자들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현장"이라는 정의 자체가 언제나 기존의 개념틀로는 포착하기 난해한(elusive), 게다가 주체적 실천을 통해 등장하는 정치의 장소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는 실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장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선행되어야 하고, 반복적으로 대답되어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래서 잠시 촛불집회 평가로 돌아오자면, 이 떠들썩한 사회과학자들의 뒷풀이를 보면서, 내가 궁금한 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촛불집회의 "새로움"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촛불혁명"이라는 급진적인 레토릭이 사용되면서도, 왜 정작 그 내용은 "제도냐, 거리냐"라는 지나가버린 논의틀에 갇혀 있는 걸까? 언제부터 다른 정치, 다른 민주주의의 장소가 "광장"과 "거리"로 그토록 간단하게 등치되어 버린걸까? 현실의 패배와는 달리 소란스럽기만한 이 뒷풀이 속에서, 왜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누구도 던지려 하지 않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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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1 14:50 2008/09/01 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