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

[사고들]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

알랭 바디우

우리가 정치를 전망하는데 있어서 왜 노동자들이 준거가 되어야 하는가?

석적이고 객관적인 개념화는, 이 노동자 준거의 필연성을 사회적 연대의 견고함으로 한정한다. 이 사회적 연대는 반대 방향인 피착취자의 위치로부터 추론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접근은 보기보다 복잡하다. 정교한 분석(예컨대 맑스의 분석)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착취 - 잉여가치의 추출 - 기제로부터는 단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만을 도출할 수 있을 뿐, 결코 직접적으로 재현 가능한 어떤 연대(bond)를 끌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만약 경쟁에 의한 [노동자들의] 탈-연대가 안정적이라면, 연대와 사회적 일관성의 형태, 즉 “객관적 주체들”의 형태로 정치를 사고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노동자들을 농민들 즉, 맑스가 다양한 처지와 이기주의 때문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창출할 수 없다고 여긴 자들과 손잡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노동자들 간 경쟁의 안정성을 깨트리고 하나의 가능한 정치적 재현 밑으로 그 계급을 통일시키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이 있는데, 그 첫째인 <1844 초고>에서 노동자라는 유적 존재(generic being)에 의해 전제되는 공백(the void)으로부터 답변을 도출한다. 노동자들이 일종의 판매 가능한 추상일 뿐인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nothing)도 아니기 때문에 공백인 것이다. 둘째는 엥겔스에 속하는 것으로서 산업노동의 특징에 기초한 주장이다. 즉, 인간 대중의 집중, 군사적인 규율 등등. 이번 경우, 자유로운 동시에 엄격한 어떤 연대로 전환되는 것은 죽은 노동( 기계적이고 전제적인 배치)이 산 노동(노동자의 노동)을 장악하는 양식인 속박된 연대(제한된, the constrained bond), 즉, 노동의 조직화이다: 당에 의해 대표되는 요구의 생디칼리즘.


첫번째 반응이 노동 소외의 추상적 특징에서 그 논거를 도출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역사적 제시(presentation)의 대논리학에 조회한다면, 두번째 반응은 이 상황 내부의 특징적 장소(place), 즉 공장에 대한 하나의 경험적인 묘사에 근거 한다. 맑스주의는 따라서 노동자들의 정치적인 실정성에 대한 총체적인(global) 재현과 국부적인 등재(local register)를 결합시킨다. 그 재현이 총체적인 것은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조직할 능력이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국부적인 등재인 것은 이러한 개별적이고(특이하고, singular) 분리된 다수, 즉 공장이 사회적인 제시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공장을 정치적에 등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에 준거해야 할 필연성에 대한 객관주의적 판본의 핵심에서 우리는 공백(the void)과 현장(the site)이라는 두개의 용어를 마주치게 된다.**) 이제 살펴보게 되듯이, 그것들은 오직 우리가 주관주의적인 것을 향해 정치의 전망을 탈-중심화시킬 때에서야 완전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용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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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ain, Badiou, The Factory as event site, Prelom 8, 2004, pp.171-177 (“"L'usine commesite événementiel”", Le Perroquet, 62-63(1986), pp.1 and 4-6.) - 영역본은 인터넷에서 파일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보내 드리겠습니다. 강조는 원문의 이태리체이고, 꺽쇠는 역자가 추가한 내용입니다. 번역은 오역이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역주: 장소는 흔히 site와 place 모두의 우리말 번역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다소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place와는 달리, site는 고고학적 유적 발굴지, 건물이 위치한 곳, 사건이 발생했던 곳 등으로 사용된다. 사전에서 보면 places는 장소, 범위를 가진 3차원의 열린 공간, 계기, 정당한 자리, 지정된 적소의 뜻이 있으며, site는 사건이 있던 자리, 터, 배치된 곳, 집터, 대지, 지점, 장소, 구조화된 공간상의 특정한 위치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위상수학 용어이기도 한 site는 특정 위상공간 상의 한 범주라는 뜻으로 정의되긴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가 없는 것 같다. 흔히 둘 다 장소로 번역하지만, 문맥에 따라 거점, 장소, 지점, 곳, 현장, 어떤 현상에 대한 범주 등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place를 장소로, site를 현장으로 번역한다.(단 이것은 바디우의 용법, 특히 최근의 용법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용법이다.)

 

 

 



하나의 테제.


고전적 맑스주의의 이 두가지 발견인 공백과 공장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안한다: 근대 역사의 제시에서 공장은 무엇보다 특별한 사건이며,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는 수의 범례이다(the paradigm of the multiple).

 

테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공장의 지위에 관해 몇가지를 언급한다.


1. 이 테제는 어떤 점에서는 객관적이다. 왜냐하면 이 테제는 공장을, 주관적인 정치활동의 특권적 장소(place)로서가 아니라, 어떤 현장(a site), 즉 상황 속에 있는 다수의 특수한 형태로 특징짓기 때문이다.


2. 이 테제는 노동자 준거의 총체적(총칭적, global)인 의미에 영향을 미쳐서(즉, 정치 자신을 공장과 분리할 수 없어서), 어떤 총체적인 [단일] 주체(계급)를 구성하는 것을 피하게 한다.


3. 이 테제는 노동자들을 직접적으로 정치에 연결시키지 않는다. 사실상 공장이 사건의 현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장 사건들(factory events)이 필연적으로 또는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결코 예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즉, 사건은 오직 조건적인(conditioned) 개입이라는 소급적인 행동(retroaction)을 거쳐야만 사건으로서의 자격을 갖는다.


4. 따라서 이 테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한다. 즉, 공장과 노동자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 내에서, 정치의 존재 기반에 근거하여 정치가 발생할 가능성을 최소한도로 규정한다.


5. 이 테제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형식은 오히려 그 역이다. 즉, 공장을 현장으로 하는 -불확실하지만 가능한- 사건들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만큼만 정치가 존재할 수 있다.


6. 이 테제는 여하한 의미에서도 노동자들이 “정치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테제가 말하는 것은 정치에서 노동자들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어떤 상황 속의 한 현장(a site)은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는" 어떤 다수(a multiple)이다. 그것이 다수인 것은, 그 상황에서 그것이 제시되어 하나로 셈해질지라도, 그것의 항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가 분리된 방식[즉, 부분집합]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그런 다수는 절대적으로 개별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의 부분(part)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결과 국가가 그것을 하나로 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옹호하려는 역설적인 명제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공장에 속하는 한, 노동자들의 장소(place)인 공장은 분명 사회-역사적 제시에 속하며(그 속에서 공장은 하나로 셈해진다), 그 노동자들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장소(place)로서- 공장은 사회에는 포함되지 않고, (공장의) 노동자들도 국가의 셈하기에 활용될 수 있는 적합한 하나의 “부분”을 형성하지 않는다.

 

이상 증식들-회사와 노동조합주의와 대립하는 공장들과 노동자들

 

이 사실은 내가 아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두 가지 주된 이유 때문에 은폐되어 있다.

첫 번째는 만일 공장이 국가에 의해 셈해지지 않는다면 공장의 단일화(unification), 즉 공장[만]을 유일한 요소로 갖는 다수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셈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단일화된] 노동자-다수, 즉 공장[만]을 원소로 갖는 단일원소집합(singleton)을 지칭하기 위한 하나의 특별한 이름, 즉 회사(company)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용어는 이상증식(돌출, excrescence)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개별성을 감추기 위해 봉사하는 경우이다. 비록 공장의 노동자들 자체가 제시되지는 않을지라도, 공장은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반면에, “회사”는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회사는 국가의 한 항으로서, 순수한 다시-제시하기 (즉, 재현, re-presentation)일 뿐이다. 이런 이상증식 속에서, 비록 공백의 가장자리에서 일지라도 공장이 늘 제시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결코 제시되지 못한다. 회사는 오직 하나의 원소, 즉 공장만을 갖기 때문이며, 이런 단일성(unicity)은, 최종분석에서, 이러한 단일성 각각에 대한 국가의 명명이 “회사 사상”이라는 명시적 형태를 취할 때, 완수되기 때문이다. "회사 사장”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그 용어를 통해 다수들(the multiples)의 비-제시를 국가가 단일원소집합으로 위장하여 다시-제시한 것이다. 국가는 공장이라는 하나-다수에 의해 제시된 그 다수들을 부분[집합]으로 나타내지(명명)하지 못한다.

공장은 제시할 수 없는 노동자들을 어떤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을 은폐하는 두 번째 현대적 [이유는] 노동조합주의(unionism)다.

노동조합주의(unionism)는 특수하게 노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스스로를 노동자들의 대표(worker representation)로 제시한다. 바로 이 노동조합주의에 의해서 노동자들이 제시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은폐된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주의는 연대라는 허구(the fiction of a bond)를 공장-다수에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공장이 하나로 셈하는 노동자-다수는 국가와 관련해서 그리고 국가가 유도하는 집합적 재현 속에서 제시되는데, 그 이유는 그 노동자-다수가 노동조합(들)에 의해 대표(재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표(재현)가 반드시 제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그 이유는 원소가 아닌 부분(집합)들, 즉 보이지는 않지만 그 외양[원소의 귀속]을 초과해서(excess over appearance) 포함된 것[즉, 부분집합]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으로의 연대는 의심할 바 없는 한 부분(집합)의 연대이다. 그 연대는 노조의 임금 요구로의 연대이며, 노조 단체 교섭자들은 국가라는 메타-구조에 의해 보증되는 담지자들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즉 요구의 전체화(“합법적 요구들”)를 공장에 있는 노동자 다수의 실재 항[조건]들이 제시된 것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 비록 모든 노동자들이 노조로 조직되어 그에 따라 대표될지라도, 그들이 반드시 노동자들로서, 즉 그들이 공장에 소속된다는 것이 갖는 유효성 속에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공장 내 노동조합의 자유라는 재현(대표성, representational) 테마와 노동자들의 자유라는 제시(presentational) 테마 사이에는 심연(深淵)이 있다. 그 심연은 국가의 분리, 즉 노동자들의 폭동이 즉각적으로 산출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폭동이 노조(union apparatus)와 불가피하게 겪는 갈등을 통한 국가와의 분리라는 심연이다.

사실상 노동조합주의는 “서구”의 역사적 제시 속에서 셈하기인, 의회주의 국가의 셈하기 배치에 속한 특수한 조각(piece)로서, 하나의 이상증식이다. 공장과 노동조합주의의 연결은 인공적 재현과의 연결이며, 그러한 연결은 회사 사장에 의해 명명된 하나(the one designate), 즉 단일원소집합을 완성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공장 소속이 갖는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성격은 재현적인[대리적인] 이상증식에 법률을 중첩시킴으로써 비가시화 되고 만다.

노동자를 언급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공장이 노동조합 대표[재현]에 의해 정치를 위해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에 반대해서 고전적 반동들은 노동조합이 “정치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노동조합주의로는 노동자 준거를 정치적으로 명명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면 이내 진부해지고 만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주의는 국가의 질서 즉, 부분들을 셈하는 것에 속하며, 그래서 그것은, 공장-다수의 특징인 노동자-비제시에 속하는, 사건의 현장(event site)으로서 공장의 사라짐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주의를 “정치 교육”으로 보거나, 순전히 임금교섭의 도구로 보건 간에, 우리는 어느 것에서도 공장에 대한 정치적 준거의 최소한의 지표조차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논쟁은 전적으로 국가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공장 속에서 자신의 요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들이며(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후자는 회사 사장으로 재현의 독점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의회의 규칙은 그 둘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국가는 결코 그 자체로는 정치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설사 국가가 정치의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손 치더라도, 현하 갈등은 결코 노동자들을 노동자들과 정치의 접합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포함된-단일원소 집합인 회사와 다수-포함인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자들의 제시라는 수수께끼를 재현을 통해 은폐한다.

 

현장의 존재론

이제 현장 자체로 돌아가 보자.

 

1.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주체가 아닌 힘들(forces)로 고려된다. 따라서 그들은 그 자체로 제시되지 않고, 오직 생산 배치에 그들이 추상적으로 접합된 채로 제시될 뿐이다. 노동력은 어떤 제시가 아닌, [단일한 단위로서] 공장이라는-하나[로 셈하기]의 특수한 한 조각이다. 노동력은 노동자-다수의 제시를 감산하여, 생산단위로서 공장의 이윤으로 만든다. 따라서 노동력에 총체적인 자격을 부여하는 유일한 기준인 생산성은 노동자-다수에 완전히 외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는 노동자-다수를 오직 공장이라는 항의 제시에 따라서, 분해 불가능한 제시 단위로서만 명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2. 모든 노동자는 대체가능하거나 처분가능한데, 이것은 그가 제시되는 경우라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공장에 특징적인 운영(연산, operation)인 해고는, 심지어 그것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일지라도, 노동자의 비-제시를 공장이라는-하나의 관점에서 명명한다. 어떤 노동자는 그의 삶과 건강을 조립 라인위에서 낭비하다가, 나이 사십이 되면 소위 생산 현대화의 희생물로 내쳐지고 만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명백히 생산현대화가 공장 그 자체를 제시하는 상황의 관점에서는 이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현대화는 상황 속에서 제시된 공장의 실존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으로서 노동자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재현되는 것은 기껏해야 단일성[묶음]으로서 노동자 자신[만]을 갖는 단일원소집합일 뿐이며, 이것은 그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다수(그의 삶, 그의 가족, 그의 나라 등등)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재현되지만 제시되지 않는 이 추상집합(이 이상증식)은 통계량이 되고 만다. 즉, 필요한 해고자의 숫자. 여기서 수량화된 것은 어떤 제시된 노동자 다수가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묶어 모아진 자료들일 뿐이다.


3. 시민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제시된다. 왜냐하면 제시는 사회성 자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은 분명히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공장은 벽, 경비원, 위계, 일정표, 기계 장비 등에 의해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공장의 규범인 생산성이 일반적인 사회적 제시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공장 질서와 군대 질서 사이의 유사성은 주목받은 지 오래되었다. 그 근저의 이유는 두 경우 모두에서 대체가능한 단일원소집합들로만 셈하기가 이루어짐에 따라 제시가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한 명의 군인은 항상 무명씨(unknown)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기 위해 입대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하게 공장에 들어가는 것도 비-제시로 진입하는 것이다. 공장의 관점에서 보면, 한 명의 노동자도 역시 항상 무명씨이다.


4. 노동자의 정치적 역량이라는 그런 생각은 공장의 본질에 반한다. 공장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정치화되어 있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인(non-political) 장소이다. 그것은 정치가 생산성 체제와 아주 철저하게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산업노동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정확히 정치 자체가 다른 노동의 중단을 요구하는 노동, 어떤 정련된 창조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제시의 노동이며, 또한 제시 불가능한 것으로는 충족되지 않고, 이런 제시 불가능한 것의 제시가 상황의 존재로서 공백을 단언하는 만큼만 충족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건이 중단을 야기할 수 있을 역량이다.

 

공장 사건


솔직하게 말해보자. 만약 공장이 우리 사회들의 대표적(paradigmatic)인 사건의 현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일한] 하나로서 [셈해진] 현장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공장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사실상 언표 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장 사건은 자신의 비-존재가 [단일한] 공장이라는-하나를 유지하는 바로 그 사물, 즉 노동자들을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공장은 이런 예외적인 장소이다. 즉, 그 장소에서 개별성의 명령(임무, charge)은, 비록 부분적이나마 제시 속에서 개별성을 배치하기 위해, 공백 즉 셈하기가 추방했었지만 그것의 예외적인 벗어남에 집중했던 공백의 침입 속에서, 노동자들이 그러한 셈하기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공장 사건은 하나[로 셈하기]가 지닌 계산할 수 없는 [미세한] 특성이며, 그 하나를 넘어서 것으로서, 사건 이전에는 단지 무차별적인 단일화로서만 의미되었던, 무명의 다수들로 구성된,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분(정원 외, supernumerary)의 다수, 즉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현대 정치가 노동자에 대한 준거를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은 하나의 구조적 조건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하나의 역사적 조건으로서 노동자운동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공장이 사건의 현장임을 인정하는 문제이며, 그것을 기각하면 어떤 정치일지라도 완전한 비-제시의 영역이 존속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며, 그에 따라 그 자신의 항들 속에서 국가라는 총체적 체제를 재생산할 것임을 인정하는 문제일 뿐이다.

국가 통치의 재 보증에서 빠져나온(감산된, subtracted) 어떤 일관성이 유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개별적인 또는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다수성들(multiplicities)이며, 따라서 현장이다. 왜냐하면 상황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제시되어 있는 항이 자신의 소속을 국가의 메타구조 즉, 국가의 셈하기의 셈하기[이중적인 셈하기]에 의해 과잉결정된 것으로 보지 않는, 유일한 곳이 바로 현장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의 개입 능력은 오직 제시 불가능한 것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가 지닌 (미세한) 특성으로서 또 비합법적이고 여분[정원 외]의 기표로서, 사건의 현장에 있는 다수의 항들을 사건이 배치하는 한, 정치 자신을 공백의 가장자리에 거주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정치가 한편으로는 이러한 주요 사건의 현장들인 공장들을 정치의 장에서 배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상황들이 갖는 감산적인(subtractive) 성격을 표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 공장들이 정치의 기원이 있는 곳이 아니라, 분명 거기는 정치를 시험하는 곳이다. 그리고 공장의 사건들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비-제시 속에서 언표되기(averred) 때문에, 공장 사건들은 필경 현대의 정치적 일관성의 매개자인 것이다.

이제 나는, 공장들이 사실상 일반적인 역사적 제시 속에서 거의 셈해지지 않았던 시기에 맑스가 인식했던 최초의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의 방대한 분석적 구성들은 그에게 전-예측적인 증거였던 것을 소급하는 초석이었다. 즉 전 예측적 증거란, 노동자들이 (사회적인 것의 히스테리 속에서) 자기 자신의 비제시를 명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상황의 은폐된 공백을 명명했던, 그러한 사회적인 것의 이런 놀라운 히스테리들의 주체-내적인-해석을 제안하지도 못한다면, 현대의 정치는 가설로서 조차도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골자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맑스주의는 비-지배의 정치-국가주의적인 셈하기의 셈하기로부터 빠져나온 정치-라는 가설과, 근대성의 가장 유의미한 사건의 현장들을 언표화하기, 즉 극도의 개별성을 갖고 있는 현장들이자 노동자 현장들(worker sites)인 [곳을] 언표화하기를 결합한다. 이 이중 제스처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도출된다. 즉, 그 가설을 개입적이고 조직적으로 실험하기 위해서는 이 현장들을 숙고하기 위한 끊임없는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 준거는 정치의 특징이며, 그것 없이는 누구도 국가의 셈하기로부터 스스로 빠져 나오는 것을 이미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이 만일 누군가 정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맑스주의자로 내세우는 것이 여전히 정당한 이유인 것이다.

(심**, 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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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알랭 바디우,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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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사마님의 [알랭 바디우, 사건의 현장으로서 공장] 에 관련된 글. 예전에 영어로 주워넘겼던 이 글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촛불집회의 성과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 때문이다. 올 가을 계간지를 훑어보니, 아무래도 촛불집회의 성과에 관한 논의는, &quot;제도냐, 거리냐&quot;의 논쟁으로 다시 한 번 귀결되는 것 같다.(아마도 최장집씨의 문제제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운동사에 익숙한 이라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