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알튀세르 - 주체 없는 주체성 2

[사고들]

이러한 두 가지 전제조건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해보자.

알튀세르가 발언하는 장소는 철학이다. 모든 철학처럼, 알튀세르의 목표는 철학 자체의 정의규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알튀세르가 철학에 대한 (최소한) 두 가지의 정의를 내렸음을 알고 있다.

첫 번째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4)이다. 이 정의는 사고 과정에 대한 형식 종합으로서 여전히 변증법적 유물론의 범위 내에 머물고 있다.

두 번째는 ‘과학들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재현’5) 이다. 즉, 과학과 마주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재현이다. 이러한 정의는, 철학적 활동을 위한 근본적 조건이 철학의 정치에 대한 의존, 정치적 해명에 대한 의존임을 의미한다. 이에 따를 때, 알튀세르의 기획은 철학적 단절이라는 방패아래서 스탈린 이후 정치의 성격을 사고하려는 시도가 된다.

왜 이러한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해, 철학에서 발생하는 것은 철학의 정치적 조건에 원천적으로 결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철학을, 그 자체 내에서, 일종의 자신의 정치적 조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치로 취급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철학적 가능성은 자신을 정치적 조건의 실재 운동에 대한 철학 내적인 지표로 ― 비록 복잡한 ‘비틀림’을 대가로 하지만 ― 해독되도록 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러한 희망이, 새로운 철학적 활동이 스탈린 이후 정치 아래에서 사고가능하게 되었던 과정에서 입증하려 했던 것이었다.

이 기획의 충분한 뉘앙스를 이해하려면, 이것을 정치철학의 기획과 혼동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알튀세르가 일으킨 단절은, 우리 자신의 메타정치(metapolitics)를 인도하는 문제제기를 예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튀세르는 철학이 스탈린 이후 정치가 사고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주장을 신랄하게 기각했다. 실로 오직 정치적 전위만이 정치적 새로움을 효과적으로 사고한다. (단지-역자)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철학적 가능성들을 표명하면서, (라자뤼스에 따르면) 정치 자신의 실천에 토대하여 발명되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능성’의 징표(sign)를 기록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철학이 직접적으로 정치를 사고한다고 주장하는 ― 따라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것을 다시 명명하려는 것 ―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을 단순히 국가의 객관적 실재(objectivity)로 종속시킴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철학이 정치에서 발생하는 일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확히 철학이 정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재 정치의 사건들(알튀세르의 용어로 계급투쟁의 사건들)에 자신이 조건 지어짐을 발견하는 사고의 독특한(sui generis)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지진기록계 기능을 사고 가능한 정치라는 실재 운동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철학이 전제할 필요가 있는 매우 특별한 배치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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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bid., p. 186.

5) Louis Althusser, For Marx, Ben Brewster. London: NLB, 1969;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trans. Ben Brewster. London: NLB, 1970.



• 철학은 이론이 아니며, 분리하는 활동, 곧 사고 속의 식별에 관한 사고이다. 따라서 철학은 결코 정치를 이론화 할 수 없다. 하지만 철학은 새로운 구획선을 그릴 수 있고, 즉 새로운 식별을 사고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조건의 ‘변경(shifting)’을 입증한다.

• 철학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 대상은 철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행동의 효과들이 순전히 내재적인 종류의 행동이다. 바로 행동을 통한(in actu)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야 말로 철학을 자신의 새로운 정치적 조건으로 기울인다.

• 철학은 그 자신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역사와 정치(따라서 과학과 정치)를 혼동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역자) 철학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비-역사주의적 인식을 특권화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알튀세르의 철학적 개별성은 매우 뚜렷하지만, 아직도 결코 그것의 효과들을 완벽히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반드시 모든 참된 현대 철학은, (앞서-역자) 알튀세르가 정의한 철학의 개별적 테제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알튀세르의 기획이 철학적 활동 내에 있는 정치의 내재적 효과들을 통해 정치를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기획의 첫 번째 단계는 본질적으로 분리(separation)의 질서에 속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의-역자) 어떻게 과업은 정치가 그 자신을 이데올로기와 과학으로부터 구별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철학적 인물이 수행하는 행동(즉, 테제들)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을 자신의 대상들에 대한 개념적 구성으로 특징짓는다. 만약 일반적인 의미에서 ‘대상’이 (주체라는 비존재와 상관적인) 이데올로기적 통념이라면, 반면 또 다른 의미에서 ‘대상’(이번에는, 어떤 주체가 부재하는 가운데, ‘대상성(objectivity)’과 상관적인)은 바로 과학적 실천의 핵심을 가리킨다. 과학은 주체가 없지만 대상을 가지는 과정이며, 따라서 대상성은 과학의 특정한 규범이다. 정치를 과학과 구별하는 것은 무엇보다 정치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가지지 않고 대상성의 규범에 종속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정치의 비-대상적 규범을 ‘당파성’, ‘(계급)위치’ 또는 ‘(혁명적) 전위 활동’ 이란 표현들로 지칭했다.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는 주체라는 통념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데올로기의 모체(matrix)는 법률이고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에 종속시킨다. 이것이 ‘주체의 호명’ 테제이다. 이데올로기는 ―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은 장치들에 의해 제공된다 ― 국가주의의 통념이며, 따라서 정치의 통념이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주체는 국가의 기능이다. 따라서, 혁명적 정치는 국가의 기능일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정치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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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02:08 2008/04/2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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