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adiou, Althusser: Subjectivity without a Subject,
In Metapolitics, Verso, 2005, pp. 58-67.
알튀세르, 주체 없는 주체성
알랭 바디우
우리가 괴상한 영혼의 수집가들에게 던져진 단순한 병리적 사례로만 알튀세르를 취급하는 수많은 악의적 구경꾼들을 제쳐둔다면, 내 생각에 그의 이론적 작업을 연구하는데 다음 두 가지 관념들이 지배하는 것 같으며, 또한 그러한 연구들은 모종의 국제적 열정을 ― 이것은 좋은 징표이다 ― 가지고 수행되어 왔지만 여전히 비틀거리는 것 같다.
첫째는 알튀세르를 맑스와의 관계에서 위치 짓는 것이다.
둘째는 그의 작업에서 주체의 이론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첫 번째 요점은 내 생각에, 매우 단순화하자면,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실뱅 라자뤼스는 맑스와 레닌 사이에는 연속성과 발전보다는 단절과 구성이 있음을 설정하였다. 마찬가지로,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도, 마오와 스탈린 사이에도 단절이 있다. 알튀세르는 이와 다른 또 다른 단절을 묘사하려 하였다. 여기에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단절들 각각이 상이한 종류라는 것이다. 일단 맑스주의가 정치적 개별성들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맑스주의’를 절대 불능(해(解)가 없는-역자) 집합의 (빈) 이름으로 만든다.
게다가, 한 때 알튀세르가 제창했던 ‘맑스주의 철학’이라는 기획을 그가 포기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는 {레닌과 철학}1)에서 맑스와 레닌은 새로운 철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시작했으며, 이것은 완전히 상이한 것이며 정치와 관련된 것임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만약에 알튀세르의 작업을 맑스주의의 한 ‘사례’나 맑스주의 철학의 (불완전한) 증거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알튀세르의 작업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알튀세르의 작업을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의 과업과 그의 전적으로 특수한 목표들의 개별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 어떤 인식 장소로부터 ― 사람들은 알튀세르의 개별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이해가 선험적인 것, 즉 맑스주의라는 선험적인 것에 의존하지 하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두 번째 요점에 대한, 나의 평결은 단호하다. 평결은, 알튀세르에게 주체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없으며, 결코 있었던 적도 없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개념들을 수단으로 행해진다. 하지만 ‘주체’는 개념이 아니다. 이 테마는 「헤겔에 대한 맑스의 관계」에서 아주 명확하게 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과정(process)”이란 개념(concept)은 과학적이며, “주체”라는 통념(notion)은 이데올로기적이다2).’ ‘주체’는 개념의 이름이 아니라, 통념의 이름, 즉, 어떤 존재하지 않는 것(an inexistence/비존재)에 대한 표식이다. 주체는 없으며, 따라서 단지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알튀세르를 라캉으로 보완하려는 매우 잦은 시도는, 이러한 시도는 정신분석에 관한 알튀세르의 몇몇 언급으로부터 논거를 대려 한다, 내가 보기에 쓸모없는 일이다. 라깡에게는 주체(the subject)에 관한 이론적 개념이 있으며, 이것은 심지어 존재론적 지위를 가진다. 라깡에게서 공백과 ‘대상 a(objet petit a)’의 쌍은 주체의 존재를 위한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그와 같은 개념 쌍은 없는데, 알튀세르에 따르면 대상(the object)은 심지어 주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대상=주체의 거울 반영’3)이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의 이미지이다. 주체 없는 과정은 꼭 대상 없는 과정만큼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주체가 없다면, 만약 오직 주체 없는 과정들만 있을 뿐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역사유물론의 형식 내에서 정치를, 주체 없는 과정들의 과학으로부터, 다시 말해, 역사의 과학으로부터 식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정치를 (역사유물론의) (그) 과학으로부터,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과학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지 않은 채로 식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정치가 과학도 이데올로기도 아니라는 점은 알튀세르가 끊임없이 단언했던 확신이다. 1965년에, 그는 정치적 실천을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과학적 실천으로부터 식별하였다. 1968년에, 그는 모든 과정은 ‘관계 속’에 있다고 했으며, 생산관계를 의미하는 그 관계는, 또한 다른 관계들, 즉 정치적 관계 또는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서로 각각 식별하였다.
또한, 알튀세르는 오직 ‘혁명적 계급투쟁의 전위’만이 관계 속의 과정에 대한 사고를 실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진정한 과정의 사고는 정치적 실천에 개입한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통합해서 이해해야만 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정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모두와 식별된다. 둘째, 주체라는 통념은 이러한 식별에 근거가 될 수 없다. 셋째, ‘관계 속의 과정’이라는 관념(notion)을 사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정치를 통해서 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 대한 모든 ‘사고’는 두 가지 질문을 다룸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첫째, ‘맑스주의’라는 텅 빈 이름의 사례와 명확히 구별되는, 알튀세르 과업의 개별성을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개별성 내에서 제기되는,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 정치에 관한 질문이며, 곧 오직 정치적 과정만이, 정치적 과정의 전위적 차원 내에서, 주체 없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한 사고를 가능하게 함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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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ouis Althusser, ‘Marx's Relation to Hegel’, in Politics and History. Mantesquieu, Rousseau, Hegel, Marx, trans. Ben Brewster. London: NLB, 1972, p. 185
3)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