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8만원 세대"론 이후, 세대론이 다시 붐이긴 붐인가 보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세대론이 언제 붐이 아니었던 때가 있어나 싶기도 하다.) 오늘자 중앙Sunday에서 80년대생 0x학번으로 현재 20대인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세대론을 야심차게 내놨다. 이른바 "C세대론"이다.

 

한국 정치사회학회와 합동으로 구성된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이들 C세대는 청소년 시기와 청년 시기에 두 번의 경제 위기(Crisis)를 겪으면서, 격심한 경쟁(Competition)을 체화하고 있으며, 소비자(Customer)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세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종종 느끼지만, 세대론자들의 네이밍 솜씨는 뭐랄까.. 참으로 "애썼다" 싶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기사를 쭉 훑어보면서, 네이밍 과정에서 사회학자와 기자들이 "C세대론"을 좀 더 그럴싸하게 만들어 줄만한 중요한 키워드 몇 개를 빼먹었구나 싶었다. 바로 Commodity와 Commercial 그리고 C가 무려 두개나 붙은 Consumer Citizenship. 개인적으로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세대의 구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굳이 오늘날의 (상층부) 20대를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계발이란 이름 하에 자신을 상품(commodity)로 구성하는데 익숙하고, 자기표현 및 자기PR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판매(commercial)에도 익숙하며, 정치와 경제의 단락에 따른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consumer citizenship)을 체화하고 있는 이들.

 

 

2.

그런데 중앙Sunday가 C세대 감성의 대변자로 꼽은 이는, 조금 놀랍게도 "장기하"다.( X세대의 아이콘이 한국에서는 서태지, 미국에서는 제임스 딘이었듯이, 세대론과 아이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아마도 아이콘없는 세대론은 "88만원 세대론"이 거의 유일할텐데, 이건 88만원 세대 규정이 가진 비판적 성격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그래도 최근의 일명 "장기하 신드롬"이라 할 만한 현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많이 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하는 한 학번 차이의 과후배다.) 사실 음악 자체를 그다지 즐겨듣지 않는 나로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성을 평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그 음악적 새로움과 지금의 인기 간의 관계는 내 능력과 관심 밖의 문제다. 오히려 내게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음악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인기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적 의미층들, 혹은 장기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의미이다. 중앙 Sunday의 선정이 조금 놀랍기는 하지만, 이 아이콘의 순환에는 확실히 최근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함께 등장하는 두 가지 의미소, 즉 그 노래가 반영한다는 "루저 감성"과, 장기하 본인의 배경인 "서울대 출신"이라는 과잉 제공된 정보는 무얼 말해주는 걸까? 루저와 명문대생이라는 이 모순적인 기표의 결합을 통해, "장기하"라는 아이콘은 지금 20대 상층부들의 모순된 욕망을 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 욕망 말이다. 사회 전반에 강화되는 경쟁의 논리 속에서,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거나 경쟁에 목매달지 않겠다는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하는 행위는, 경쟁의 압박을 잠시 완화시켜주며 심지어 "쿨"하다는 평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루저가 되어 경쟁의 장 자체에 참여도 하지 못해서는 "찌질하다."(혹은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실제 루저가 아닌 한에서만, 루저의 감성을 소비할 수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벌이는 코믹 퍼포먼스는, 혹은 "장기하"라는 아이콘에 제공되는 명문대 출신이라는 (음악과는 하등 상관없는) 과잉 정보는, 우리가 안전하고 무난하게 이 루저의 감수성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이것이 장기하 이전 또 하나의 루저 아이콘이었던 "달빛요정"과 장기하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달빛요정에게서는 루저에 따라붙는 어떤 찌질함과 "사시미가 되고 싶다"는 비루한 욕망의 적나라한 표출이 있었지만, 장기하에게는 그 대신 "별일 없이 산다"는 당당한 선언이 있다. 물론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인기를 이러한 요소로 환원해 설명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겠지만, 그 신드롬이 보여주는 다층적 의미들 한 켠에서, 이러한 은밀한 욕망의 반영을 읽어내는 것이 무리한 분석은 아닌 것 같다. 

 

 

3.

그런데 흥미롭게도 "장기하"라는 아이콘에 반영된 이러한 모순된 욕망은, 사실상 오늘날 포스트모던 소비사회의 상품 논리와 동형적인 것이다. 아니,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라보는데 익숙한 신세대들이, 자신의 취향의 구성에 있어서까지 상품 논리를 완벽히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표현일 것이다. 예컨대, 끊임없이 작은 차이의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 포스트모던 소비사회에서, 조악한 키치는 하나의 쿨하고 독특한 상품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조악해서는 안된다. 혹은 촌스러운 복고를 재현하는 것은 패션이지만, "실제로" 취향이 촌스러워서는 곤란하다. 같은 논리 하에서, 다시 말하지만, 루저의 감성이나 취향을 가지는 것은 쿨하지만, "실제로" 루저여서는 찌질하다....

 

이와 같이 주체의 (루저) 취향이 상품 논리를 따라 구성되는 한, 여타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취향은 누군가에게 전시되어야만 한다. (혹은 이러한 취향은 언제나 잠재적 소비자 혹은 감상자를 전제로 한 채 구성된다.) 오직 이 전시의 몸짓 만이 그 취향을 "실제의" 조악함, 촌스러움, 루저와 구별시켜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1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곡은, 앨범 전체의 타이틀이기도 한 "별일 없이 산다"이다. 물론 앞서도 밝혔듯이, 이 흥미는 음악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별일 없이 산다"가 독백이나 성찰의 형태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 선언과 도발의 형태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별일 없이 그리고 별다른 걱정이나 고민 없이" 사는 것은, 누군가의 "불쾌"(혹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시되거나 선언되어야할 어떤 것이다. 사실 이 선언에는 아무런 메세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그저 도발과 전시의 몸짓만 존재하기에, 이 노래의 가사는 하나의 역설인데, 왜냐하면 나는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이나 별일 없이 하루하루 즐겁지만, 아무튼 내가 도발할 누군가의 "시선"에는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루저의 취향을 안전하게 소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선언과 그로인해 야기되는 타자의 "불쾌함"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인데, 앞서 말했듯이 바로 이러한 공개적 선언과 타자의 질투만이 "실제" 루저와 그저 루저의 취향만을 소비할 뿐인 나를 구분시켜주는 지점이기 때문이다.(나르시스트가 가장 자아가 빈곤한 자이며, 도착증자가 가장 상징적 부권을 갈구하는 주체라는 정신분석의 역설은 이런 식으로도 확인된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루저 취향의 "선언"은, 아마도 자신의 내면을 쇼윈도의 전시물처럼 투명하게 전시하는데 익숙한 오늘날 후기자본주의 주체성들의 감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 이 새로운 주체성들은 자신을 일종의 "스펙" 리스트로 환원하여 상품(commodity)화하는데 익숙하고, 과거의 불투명한 영역이었던 자신의 내면과 취향 혹은 심지어 진정성까지도 투명하게 전시하고 광고(commercial)하는데 친숙하다.(혹은 이러한 내면과 취향 혹은 진정성은 이러한 전시와 광고를 전제로 구성된다.) 시청률과 이미지 재고를 위해 고민과 진정성을 투명하게 전시해내는 스타 고민 상담 프로그램처럼, 주체의 내면은 이제 블로그와 싸이월드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투명하게 전시되고 고백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백되어야하는 "나"의 이러한 내면에 담긴 어떤 고민과 회환은, 초월과 자기-부정의 원동력이라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투명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타자와의 작은 차이의 게임을 보장하는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예컨대 전시되(어야만 하)는 나의 루저로서의 자괴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단지 나와 너의 차이를 확인하는 작은 지표일 뿐이다.(그러니 "고민없음이 자랑이냐"는 질문은 내게 하지 말기를...) 

 

 

4.

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러한 "상품-인간"의 논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그리고 그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의 형태들을 과연 "어떤 논리"로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볼프강 하우그는 <상품 미학 비판>에서 일찌감치 인간의 주체성까지 일종의 상품 논리를 따라 구성된다는 사실을 간파했지만, 사실 이에 대한 비판 논리는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별다르게 발전한 것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인간의 상품화"에 대한 가장 진부한 비판은,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의 틀을 조야하게 차용한 비판들,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고, 사용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입장일 것이다. 즉, 우리는 단순히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상호부조하는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 혹은 (최근에 가장 강력하게 부흥하고 있는 방식으로)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정치적"인간 같은 측면들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용가치는 "이미" 교환가치 속에 완전히 포섭되었으며, 교환가치의 알리바이로 생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기 드보르의 주장이 "상품-인간"에게도 적용된다면 어떨까? 즉, 이제 상품 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정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인간상을 상상하는 것은 순진한 사고라면 어떨까? 지난 해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소비자-시민들(consumer-citizen)에게 쏟아진 진보진영의 각종 찬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새로운 형상에서 일말의 불길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혹시 이 소비자-시민 쌍의 전면화는, 이제 정치마저 소비자와 상품의 논리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사고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갓 들어선 정부에 대한 이들의 분노를 "잘못 구매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분노에 유비한 누군가의 분석은, 당연히 일면적이고 편파적이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비자-정치는 하나의 정치 형태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이들 주체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는 외부가 아니라 소위 "C세대"의 감각에 걸맞는 그들 정체성의 일부인 것은 아닐까?

 

논의가 지나치게 커졌기에, 다시 애초의 출발지점이었던 "C세대"와 "장기하"라는 아이콘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앞서의 논의에서 간과했던 것 중 하나는, 이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둘러싼 모순된 욕망, 즉 "루저의 스타일은 소비하고 싶지만, 루저가 되고 싶지는 않은" 욕망 속에서, 지우려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어떤 근원적인 공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공포란 혹시라도 내가 언제가 경쟁 구도에서 실제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즉 실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이다. 혹은 역으로 이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 새로운 주체성들은 루저 감수성을 소비하고 루저의 취향을 전시함으로써 자신이 루저가 아님을 재확인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자신을 "상품"으로 규정하는데 익숙하고 거부감이 없는 오늘날의 새로운 주체성들에게, 이 탈락의 공포는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바우만의 말처럼, "상품-인간"은 결국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쓰레기-인간"의 다른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가설일 뿐이지만) "상품-인간"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논리는, 어설픈 사용가치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이 "공포"와 직면하고 이것을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너무 안전하고 댄디한 루저 아이콘인 "장기하"가 은폐하는 형태로만 반영하고 있는 그 공포,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부인하고 싶은 그 공포에서부터 말이다...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사회학과 문화부의 쾌거로세~ 장하다 이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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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02:10 2009/03/16 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