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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촛불2008, 당신과 통(通)하였는가.

타학교 교지에서 촛불집회 관련 원고 청탁이 들어와 고심하다... 하루에 마무리를 했다.

 

쓰고나니 몰려오는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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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20081), 당신과 얼마큼 통(通)하였는가?

- 촛불의 문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올해 5월부터 약 3개월 동안 우리 사회를 강타한 것은 촛불 집회와 촛불 시위2)다. 지금은 많이 사그라진 촛불집회지만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중엔 ‘시즌1 끝!, 시즌2 coming soon’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mb의 눈치를 보는 주류 언론에 나오지 않을 뿐 지금도 서울에서는 백여 명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촛불 시위를 하고 있고 촛불로 만난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와 영역, 지역에서 작지만 자신의 촛불 운동을 하고 있다. 여전히 mb 정권과 자본 그리고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정당하게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을 억누르고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 사회를 몰고 가기 때문이다. (mb 정권만이 아니라·남한의 모든 정부가 그랬지만.)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은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와 논평은 미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보다 지금 촛불집회의 중요한 두 축이자 원동력인 청소년과 인터넷을 보며 남한 사회와 우리 자신을 돌아봤으면 한다.



1. 청소년, 억압에서 광장으로 나가는 역동성.

 

아무래도 촛불 2008의 시작인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청소년과 관련해 생각나는 것이 중앙․동아 일보의 사설이었다. 두 신문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어떤 스타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걱정 어린 말을 했다는 이유로 촛불집회에 나왔다며 연예인들 입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는 관심도 없고 촛불집회를 비판한다는 논조가 고작 그 정도인 신문들이 불쌍하기까지 했지만 백보 양보해서 받아들여보자. 설사 모든 청소년들이 연예인 말 한마디에 그랬다 해도 촛불을 들었다 해도, 서민을 위해 정치하겠다며 ‘지금 버스요금 기본 70원이죠’라고 말해 웃음거리가 된 정몽준보다 입조심해야 할까?

 

 

어떤 신문의 사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청소년들의 촛불은 적극적이었다. 4.15 학교 자율화 조치에 대해 “학생은 억압하면서 학교는 자율화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며 mb식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청소년, “정부가 알고 싶은 배후세력은 mb가 아니었나?”를 적어 보이던 청소년. 그들을 보며 대학생은 잘못된 대학교육에 대해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을까 내심 부끄럽다. 어떻게 이런 에너지가 촛불과 함께 나왔을까.

 

 

청소년이 촛불집회에 나온 건 경쟁을 강요하는 입시중심 교육, 가부장적 가족체계 등의 억압적 구조에 눌러왔던 에너지의 역동적인 표현으로 봐야 한다. 청소년에게는 억압적인 구조를 벗어나 억눌려온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한 곳이 필요했고 거대한 열린 공간 촛불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이들이 만나게 된 인터넷이라는 공간도 생각해야겠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어쨌든 촛불집회에서 청소년의 공연․발언들이 폭발적인 힘이 있었던 것은 억압받던 에너지의 마음껏 표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4.15 학교자율화-진실은 공교육 포기와 청소년 억압 조치로 청소년의 분노를 일으켜 촛불로 나오게 한 mb정권 공로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촛불집회에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가 지켜주자”며 어른들이 나오자 청소년은 점점 수동적 존재,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며 촛불집회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다시 말해 답답해서 광장에 나오려던 청소년들에게 촛불을 든 어른들이 너희는 ‘어리니’ 집에나 가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장학사나 교사들을 동원해 촛불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을 감시하던 것, 청소년을 현혹하지 말라고 스타에게 꾸중하던 중앙․동아 사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년들은 시민으로서 권리이자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촛불 집회 참가 ‘어른들’에게마저  빼앗긴 것이다. 이것은 시민을 성인 백인 남성으로 규정되었던 20세기 초의 개념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에 박진홍이라는 조선인 혁명가가 있었다. 그이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식민지 해방을 위해 싸우겠다는 뜻을 가지고 공장에 취직을 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일제와 조선의 친일자본들과 싸우고 구속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평생을 싸워왔던 박진홍을 비롯한 식민지 해방투쟁을 한 청소년들에게도 “너흰 어려서 뭘 몰라”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 그전에 나는 어떤가. 청소년을 어린 것으로 보며 대하는 ‘꼰대’인가, 아니면 인권과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갖는 시민으로 함께 살고자 하는가. 시민으로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와 인권에 대해 돌아볼 것을 촛불 2008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 교육, 가부장제 그리고 나이로부터의 권력관계 등. 이것들에 대한 청소년 해방 없이 진정 인권이 보장된 사회는 없다.

2. 촛불은 너희의 미디어상품이길 거부한다!

 

촛불집회의 현장은 정규방송 종료와 함께 엄숙한 애국가가 깔려 나오는 배경들처럼 뭔가 있어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촛불은 때로는 권력과 촛불, 시민들의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하던 격렬한 정치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대중매체들은 촛불의 아름다움 혹은 가십, 자극적인 폭력성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그것은 촛불을 하나의 정체된 것으로 화석화하여 미디어상품으로 받아들이게 하려했던 국가와 자본에 매인 대중매체의 의도였다. 여기서 미디어상품이란 매체가 국가, 자본의 관점에서 사실을 보기 좋게 가공 처리해 시장에 내놓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보통 사진기자나 방송기자들은 ‘그림 좀 되는’ 화면을 만들기 위해 행사 참가자, 주최 측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한다. 박수 한 번 더 쳐주세요, 촛불 한 번 더 들어주세요, 뭐 이런 거 말이다. 그래서 정말 ‘그림’이 되는 미디어상품만을 내놓는다. 이러한 미디어상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정치(촛불)가 마치 분리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무의식적 작동을 한다. 대중매체는 이런 착각을 끊임없이 대중에게 심어주며 정치=투표(대의 민주주의)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래서 대중매체는 투표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와 함께 커왔고 투표 민주주의를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정치와 우리 삶의 분리에 매스미디어가 한 몫 해온 것이다.

 

 

하지만 촛불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매체들이 조절할 수 없도록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갔다. 아니 아예 촛불을 상품화하기 어려워졌다. 어떤 매체에서 확성기를 통해 해산을 경고하는 경찰을 향해 촛불집회에서 마이크 잡으면 노래하는 거니까 ‘(경찰도)노래해~♬ 노래해~♬’를 외치는 촛불 시민의 모습을 전달할 것인가.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촛불은 자신을 싸구려 예술품, 즉 ‘키치(Kitsch)’로 만들어버리는 모든 시각과 시도를 벗어나3)려 했다고 말한다. 촛불집회가 그냥 ‘그림 좀 되는’ 싸구려 예술품, 상품을 넘어서 그리고 사람들은 조․중․동을 비웃고 비판하며 기존 대중매체를 저만큼 따돌리게 된다. 그것은 촛불 집회 동영상과 1인 미디어라 할 수 있는 인터넷 생방송 등으로 표출된 인터넷의 힘이었다. 이러면서 촛불이 새로운 모습과 목소리를 담고 광장을 넘어 거리로 나가는 과정은 제한적이긴 했지만 그대로를 전달하려 했다. 비록 어설프고 때론 부담스러운 전달이지만 진실을 상품화 시키지 않는 과정이었다. 과정은 다시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고 토론되며 촛불 집회로 피드백 되면서 더 큰 촛불을 만들어냈다. 일례로 촛불 집회에 나갔던 서울대 학생을 전경이 군홧발로 짓밟는 일명 군홧발 동영상이 나오자 이에 분노한 서울대 학생들이 지지부진 하던 동맹휴업 결정을 투표를 통해 만들어 냈다.

 

 

촛불집회를 통해 인터넷에 앗 뜨거워하며 데였던 mb정권은 부랴부랴 인터넷과 언론을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 사이버 모욕죄-이른바 최진실법4)등을 이야기하며 인터넷 공간을 권력에 굴복시키려 하는 것이다. 사이버 모욕죄에는 숱한 문제가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국가권력이 쓸데없이 온라인을 감시하도록 허용하여 온라인의 개인 공간(미니홈피, 블로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검찰, 경찰이 계속 들여다보고 있겠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엔 없는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고도 우리사회 인터넷이 유독 문제라고 하면서-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계속 통제만을 강화하려 한다.

 

 

촛불 2008은 인터넷 문화의 힘과 그것을 두려워하며 시시때때로 옥죄어오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통제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인터넷은 실로 엄청난 힘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통제는 날이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통제를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 이미 당신의 댓글 한자에도 감시와 통제는 시작된 거 같다.

마치며. 당신의 촛불은?

이제 마지막으로 촛불집회 그 자체를 보며 우리를 돌아봤으면 한다. 지금은 촛불집회 초기만큼 다양한 영역과 계층의 사람들이 촛불 2008과 함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촛불을-그것이 현실의 촛불이든 삶속의 촛불이든 꺼뜨리지 않는 시민들은 ‘촛불 들고 나와 봐야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냉소 바이러스를 이기며 세상을 조금씩 바꾸겠다는 작지만 굳은 심지를 밝히고 있다. 여담인데 그 냉소 바이러스가 가장 빨리 퍼지기를 바라며 퍼뜨리는 숙주는 정부와 자본이다. 냉소 바이러스는 냉소를 떠나 모든 것을 결국 체념하게 한다. 때론 냉소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모든 것 그리고 그 끝이 냉소적이라고 한다면 좀 곤란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런 저항하지 않고 냉소하는 것을 국가와 자본이 가장 원하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가, 당신도 냉소 바이러스 감염자인가. 아니면 당신의 가슴엔 어떤 촛불이 타고 있는가.

 

 

<각주>

 

1) 촛불이 올해에만 있지는 않았다. 우리가 잘 모르는 20세기에도 있었고 21세기 들어서 지금까지 전국적인 촛불 집회가 미군에 의한 청소년 살해, 대통령 탄핵 등에 분노하며 두 번이나 타올랐다. 촛불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해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의 촛불집회에 대해 촛불 2008이라 하는 것이 맞다.

2) 촛불문화제는 명백하게 데모 즉, 집회와 시위였다. 다만 인권과 헌법에 어긋나는 현행 집회․시위법(집시법)이 야간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문화제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뿐이다.

 

3) 블로거 紅知, 무너진 키치(Kitsch)의 왕국 中, 원문은 http://blog.jinbo.net/idiot/?pid=383

 

4) 사이버 모욕죄를 둘러싼 정치권 논쟁을 보며 분명하게 짚을 것이 있는데 지금 여당의 인터넷 통제를 비판 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자기 반성먼저 해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 강화 등을 통해 인터넷 통제를 하려고 했던 것은 민주당 의원들과 노무현 정권이었다.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http://blog.jinbo.net/hi/?pid=1075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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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에는 안들어가지만 나름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해야겠다.

글쓰는데 인터넷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주며

본의 아니게 도움을 주신 진보넷블로거 紅知님, 행인님께 감사를.

 

그리고 나에게 청소년해방에 대해 고민을 하게하여

역시 본의아니게 글 주제를 잡게 해준 동블러거 또또님께도 감사를.

 

이러고 보니 무슨 책 출판하는것 같다... -_-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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