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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폐기! 자본주의 폐기!
자본의 이윤논리가 자연재해보다 지독하다

핵없는 미래는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보이지도 않는 ‘죽음의 재’와 죽음의 공포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쓰나미가 덮친 이후 일본 후쿠시마 원전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전 세계는 체르노빌 이상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각국은 일본에 있던 지진 복구 구조대는 물론 자국 국민을 소개시켰고, 대사관마저 폐쇄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죽음의 카르텔, 핵발전소
지진이 빈발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내진설계가 잘 되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하던 일본원전이었지만 쓰나미에 속수무책이었으며, 강력한 쓰나미에 대응하는 시나리오는 아예 없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본정부와 원전운영자인 동경전력은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여,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초동대응에 실패했다. 원전을 운영하고 있던 각국 정부와 전 세계 원전자본 카르텔 역시 죽음의 침묵에 동조해왔으며, 통제불능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자국 국민을 소개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공포는 원자력발전소를 저탄소 청정에너지원으로 둔갑시켰고 한국에서는 저탄소 녹색성장으로 미화되었다. 일본 원전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던 GE의 노동자가 이미 그 불완전함을 지적한 바 있으며, 2002년 일본원전의 내부 균열을 폭로하던 노동자는 직장에서 쫓겨났다. 더구나 비용절감을 위해 수명이 다한 원전을 계속 가동한 결과는 단지 일본만이 아니라 지구적 재앙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사고가 난 후쿠시마 원전처럼 수명이 다한 고리 원전 1호기가 버젓이 가동되고 있고 월성 1호기는 수명연장을 계획하고 있다.
원전기술의 불완전, 불안정함은 세계 원전자본 카르텔에 의해 묵살되었다. 지금 일본원전 폭발에서 노심용해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용 후 핵연료’ 즉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문제는 전 세계 어느 국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단층이 가장 발달해 있어 지진에 가장 취약하다는 경주지역이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확정된 바 있으며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조차 불안정성을 얘기하고 있다.
지금 폭발이 진행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 핵개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그 역시 묵살되었다. 핵폭탄은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으로 제조되기 때문에 경수로의 연료인 농축우라늄을 만드는 농축기술과 경수로에서 사용한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기술은 그대로 핵폭탄 제조기술로 연결된다. 이처럼 원자력이 지닌 기술의 양면성은 원자력 발전을 사용하고 미화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다.
위험은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에게
죽음의 재가 피어올라도 원전을 살리기 위한 얄팍한 속셈은 초기 대응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정부와 전 세계 원전자본의 침묵 속에서 희생되는 자들은 ‘영웅’이란 찬사 아래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음으로 다가갈 죄 없는 노동자와 자위대 군인들이며, 이는 1986년 체르노빌사태 때도 그러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에도 3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이후 타임즈는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했는데 대를 이어 계속되는 피폭의 후과는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의 몫이며 이는 지금 일본 원전폭발에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재’, 방사능 물질은 이미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다달았고 그 공포는 오염치료제뿐만 아니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사재기 열풍으로 나타나고 있다.
체르노빌원전 폭발 당시에도 안전하다고 떠벌리던 일본원전이 폭발하는 이 시점에, 아랍에미리트 원전 기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력발전소 안전성 측면에서 한국 원전이 최고 성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죽음의 재가 하늘로 피어올라도 편서풍에 기대어 안전하다고만 노래부르며, 쓰나미가 일본을 강타한 그날 죽음의 공포를 UAE에 팔아넘기며 이를 치적으로 자랑하고 있고 도지사 선거에서는 원전건설을 공약으로까지 내놓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 한국은 원전 21기가 가동 중이고, 2024년까지 국내 원전 13기 추가건설, 80기 수출을 예정하고 있다.
핵폐기, 지금부터 시작하자!
건설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위험하다는 이유로 원전과 관련한 모든 정보는 격납용기 안에 갇혀버린다. 그러나 일본 원전폭발사고는 단순히 정보의 공개나 기술적인 수준에서의 원자력 발전소 유지, 운영, 건설에 반대함을 넘어서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인류를 절멸시키는 핵 없는 세상을 위해 그러하지만, 동시에 저탄소 청정에너지로 둔갑한 원자력 신화가 계속되는 한 신재생 에너지에 기반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태양광, 풍력과 같은 신재생에너지에 의존하는 노력을 다함으로써 기후변화를 넘는 실마리를 찾아나가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기후변화를 포함한 생태위기는, 생태위기를 유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 세대에게 핵 없는 미래를 열어내고 지구와 지속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 가능한 유일한 길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이종회
핵없는 미래는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보이지도 않는 ‘죽음의 재’와 죽음의 공포가 지구를 뒤덮고 있다. 쓰나미가 덮친 이후 일본 후쿠시마 원전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전 세계는 체르노빌 이상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각국은 일본에 있던 지진 복구 구조대는 물론 자국 국민을 소개시켰고, 대사관마저 폐쇄하는 국가가 늘고 있다.
죽음의 카르텔, 핵발전소
지진이 빈발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내진설계가 잘 되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하던 일본원전이었지만 쓰나미에 속수무책이었으며, 강력한 쓰나미에 대응하는 시나리오는 아예 없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본정부와 원전운영자인 동경전력은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여,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초동대응에 실패했다. 원전을 운영하고 있던 각국 정부와 전 세계 원전자본 카르텔 역시 죽음의 침묵에 동조해왔으며, 통제불능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자국 국민을 소개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공포는 원자력발전소를 저탄소 청정에너지원으로 둔갑시켰고 한국에서는 저탄소 녹색성장으로 미화되었다. 일본 원전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던 GE의 노동자가 이미 그 불완전함을 지적한 바 있으며, 2002년 일본원전의 내부 균열을 폭로하던 노동자는 직장에서 쫓겨났다. 더구나 비용절감을 위해 수명이 다한 원전을 계속 가동한 결과는 단지 일본만이 아니라 지구적 재앙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사고가 난 후쿠시마 원전처럼 수명이 다한 고리 원전 1호기가 버젓이 가동되고 있고 월성 1호기는 수명연장을 계획하고 있다.
원전기술의 불완전, 불안정함은 세계 원전자본 카르텔에 의해 묵살되었다. 지금 일본원전 폭발에서 노심용해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용 후 핵연료’ 즉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문제는 전 세계 어느 국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단층이 가장 발달해 있어 지진에 가장 취약하다는 경주지역이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확정된 바 있으며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조차 불안정성을 얘기하고 있다.
지금 폭발이 진행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 핵개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그 역시 묵살되었다. 핵폭탄은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으로 제조되기 때문에 경수로의 연료인 농축우라늄을 만드는 농축기술과 경수로에서 사용한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기술은 그대로 핵폭탄 제조기술로 연결된다. 이처럼 원자력이 지닌 기술의 양면성은 원자력 발전을 사용하고 미화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다.
위험은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에게
죽음의 재가 피어올라도 원전을 살리기 위한 얄팍한 속셈은 초기 대응을 무력화시켰다. 일본정부와 전 세계 원전자본의 침묵 속에서 희생되는 자들은 ‘영웅’이란 찬사 아래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음으로 다가갈 죄 없는 노동자와 자위대 군인들이며, 이는 1986년 체르노빌사태 때도 그러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에도 3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이후 타임즈는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했는데 대를 이어 계속되는 피폭의 후과는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의 몫이며 이는 지금 일본 원전폭발에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재’, 방사능 물질은 이미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다달았고 그 공포는 오염치료제뿐만 아니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한 사재기 열풍으로 나타나고 있다.
체르노빌원전 폭발 당시에도 안전하다고 떠벌리던 일본원전이 폭발하는 이 시점에, 아랍에미리트 원전 기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력발전소 안전성 측면에서 한국 원전이 최고 성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죽음의 재가 하늘로 피어올라도 편서풍에 기대어 안전하다고만 노래부르며, 쓰나미가 일본을 강타한 그날 죽음의 공포를 UAE에 팔아넘기며 이를 치적으로 자랑하고 있고 도지사 선거에서는 원전건설을 공약으로까지 내놓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 한국은 원전 21기가 가동 중이고, 2024년까지 국내 원전 13기 추가건설, 80기 수출을 예정하고 있다.
핵폐기, 지금부터 시작하자!
건설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위험하다는 이유로 원전과 관련한 모든 정보는 격납용기 안에 갇혀버린다. 그러나 일본 원전폭발사고는 단순히 정보의 공개나 기술적인 수준에서의 원자력 발전소 유지, 운영, 건설에 반대함을 넘어서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인류를 절멸시키는 핵 없는 세상을 위해 그러하지만, 동시에 저탄소 청정에너지로 둔갑한 원자력 신화가 계속되는 한 신재생 에너지에 기반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태양광, 풍력과 같은 신재생에너지에 의존하는 노력을 다함으로써 기후변화를 넘는 실마리를 찾아나가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기후변화를 포함한 생태위기는, 생태위기를 유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음 세대에게 핵 없는 미래를 열어내고 지구와 지속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 가능한 유일한 길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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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부 '란 위 글에는 전적 동의 그러나 사노위 의 몇몇 다른글에는 부분동의 및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음 (그리고 어제 친구와 진보넷의 미진항. 움직임에 실망을 얘기함 친구 다양성을 말함. 진보네에 글쓰는거 정말 싫음 딱히 대안 없음 어찌해야함?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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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군요. 그 다음 이야기는.. 나도 잘 몰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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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노위의 제4인터강령안(아마도 초초안인 것 같은데)에 완전히 실망했습니다. 그걸로는 사람 안모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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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저렇게 해야 하나? 무슨 학술 세미나 발표문 같다. 죽은 아들 불알 만지고 있는것 같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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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학술세미나 발표문 같나요? 저는 무슨 사회주의 서클모임 발족문 같던데. 노동자들은 맑스, 레닌, 트로츠키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요. 자기들끼리만 얘기해도 되는걸 가지고. 그리고 원래 맑스가 무슨 주의라고 할 때는 비하적인 용도로 사용했고, 특별히 코뮤니즘은 별 내용이 없어요. 그런데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다르게 사용한 사람은 레닌이죠. 레닌이 맑스주의를 "엄격한 최고의 과학성과 혁명성의 결합"이라고 규정했고, 원래 레닌주의는 멘쉐비키가 아주 경멸적인 용도로 사용햇는데 이걸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라고 규정한 사람이 스탈린이죠. 원래 무슨 주의는 누구를 깔아뭉개거나 혹은 자기가 자칭 무슨 주의자라고 할 때 사용하는건데 말이죠. 원래 여성주의도 그 스스로 총체적이거나 과학적이라고 자신들을 주장하지 않잖아요. 무슨 주의라는건 특정한 세계관인데 어떻게 특정한 현실인식이 과학적이고 총체적이고 혁명적이고 그럴 수 있냐고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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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적어도 맑스의 삶을 보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이론들이 완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도 사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론의 오류를 무자비하게 깼어요.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이 누구의 권위를 빌려서 사회주의만이 최고의 과학성과 총체성과 혁명성을 갖고 있고 나머지는 다 부르주아 사상의 변종이거나 오염되었다고 자뻑이나 하고 있으면 누가 그 권위를 인정해주겠어요. 자기들이 전문적 지식과 조직력이 있어야 권위를 인정해주지 무슨 주의만이 이러면 그걸 누가 받아들이냐고요. 여성주의는 전부 부르주아 여성주의거나 아니면 부르주아 여성주의에 오염되어 있고, 진정 여성주의는 자기들하고는 구분이 안가는 여자회원들일텐데, 그럼 그 사람들이 여성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 좀 있다 강령나와봐요. 여자들은 그거 안좋아해요. 그러면 또 부르주아 여성주의에 오염되서 그런다고 그러겠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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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무조건 과학에는 주의 안붙여요. 맑스주의, 프로이트주의, 라깡주의, 다윈주의, 아인슈타인주의 이런거 다 틀린 말이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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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또 댓글을 계속 달아서 죄송합니다. 맑스의 이론이, 이렇게 말해야돼요, 맑스주의가 아니라, 과학인 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과학은 항상 운동의 형태로 존재해요. 계속 이론적 노동을 해야한다는거죠. 그런데 레닌의 이론은 주로 혁명론이나 조직론, 국가론이잖아요. 그런데 이게 정말 법칙이란게 존재할까요. 과학은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해요. 그런데 레닌의 이론은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어요. 레닌의 이론은 과학일 수가 없어요. 그냥 레닌주의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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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rie님의 주장은 참으로 참신하군요. 레닌주의가 과학이 아니라는 얘기부터, 맑스주의 X -> 맑스의 이론 O.. 등등.. 그렇다면 과학적 사회주의의 역사는 맑스-엥겔스 이후 적어도 11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었다는 얘기인데.. 참 신선한 주장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좀 더 그럴 듯하게 논증을 펼친다면 좋을텐데 말이죠. 저는 reverie님에게 혁명 전위당의 강령이란 무엇인지 묻고 싶네요. 강령안이 그 자체로 노동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전용 문구인지, 그게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지... 솔직히 reverie님은 별로 '전위당'을 달갑게 생각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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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님에게 묻겠습니다. 맑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정초했나요.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립해서 코뮤니즘을 선언하지 않았나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레닌 아닌가요. 맑스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대립시켰지만, 과학만이 진짜고 이데올로기는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종교는 인민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는 아편이라고 했듯이, 이데올로기도 현실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강령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당원은 강령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수준이어야겠죠. 그런데 지금 당으로 조직해야할 노동자들이 맑스, 레닌, 트로츠키를 알고 있을까요. 하물며 버냄이나 클리프는 말할 것도 없고. 레닌의 이론이 1917년 러시아에서 적합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남한에서도 적합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전위당은 필요하겠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전위당으로 모일테고.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사노위 회원들이 과학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과학에는 도식이 나오죠. 그건 과학에는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자본에서도 자본가는 자본의 담지자로서만 나타나죠. 왜냐면 자본가의 주체적 조건에 상관없이 자본가는 자본의 운동의 법칙에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죠. 그가 자본가인한. 제가 생각하기에 과학적 사회주의는 과학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의 여러 경향들에 대립해서 사용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레닌이 과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맑스는 정말 여러가지 용도로 글을 썼지만 사실 그의 과학적 저작은 자본밖에 없을걸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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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려면 현실을 정확히 분석해서 현실에 적합한 이론을 만들어야지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이 만든 전위당 이론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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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당 선언을 찾아보니 맑스는 이렇게 썼네요."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의의는 역사적 발전에 반비례한다. 계급 투쟁이 발전하여 형태를 갖춰 나가는 것과 같은 정도로, 계급 투쟁을 이렇게 환상적으로 초월하고, 계급 투쟁과 이렇게 환상적으로 싸우는 것은 모든 실천적 가치, 모든 이론적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체계의 창시자들이 많은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할지라도, 그 제자들은 매번 반동적 종파를 형성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속적인 역사적 발전을 마주 보고서도 그 스승들의 낡은 견해를 고수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관계의 변화에 따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론도 발전하는 것이지, 자꾸 맑스, 레닌, 트로츠키만 옳다고 하시면 안되죠.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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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P님은 세개의 초초안이 있다고 하시고 ou_topia님은 이형로씨가 작성한 "가짜 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시는데 저는 최기영씨가 작성한 제4인터안 강령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곤란하지만, 이형로안에서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의 사회적 관계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바꾸면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소리인데, 자본 자체가 사회적 관계이고, 자본은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본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나요, 변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예속되고, 심지어 봉건사회에서는 인간이 땅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이런 낡은 관계가 차가운 금전관계로 바뀌는겁니다. 그래서 맑스는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역할을 높이 칭송했는데, 맑스나 엥겔스가 쓴 초기저작을 보면 이 두 사람은 가부장제를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관계로 보지 않았어요. 장자상속제도 가부장제로 보고, 장인과 직인, 도제 사이의 관계도 가부장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부르주아지들에게 가서 낡은 관계를 해체해라, 가서 가부장제를 해체해라.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부르주아지가 가부장제를 해체할 것이라고 본 것 같아요. 따라서 자본은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꿉니다. 자본의 담지자로서 자본가들은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지 않아요. 자본가들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산수단에 변형을 가하고, 따라서 생산관계에 변형을 가하고, 따라서 사회관계에 변형을 가하지 지배하지 않아요. 자본주의의 핵심은 제1인터내셔널 규약에 나와있듯이, "노동수단들의, 즉 생활 원천들의 독점"인데, 여기서 노동수단이란 토지도 포함되고, 따라서 독점자는 자본가 계급만이 아니고, 토지 소유자도 포함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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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사회적 관계의 지배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계급간의 관계를 지배한다. 개별자본가들의 의지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전 사회를,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것 같은데 무슨소리를 하시는건지?"자본의 담지자로서 자본가들은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지 않아요" 맞아요. 자본가가 아닌 자본이 지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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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생산양식이고, 생산양식은 단순히 생산력과 그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로만 환원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진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여성해방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철폐되더라도 부분적 해방을 할 뿐이지, 자본주의 철폐 자체가 여성해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하시는 먼소리님은 자본이 없어지면 자본의 지배를 받는 사회적 관계들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자본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자본의 폐지는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하나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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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노동과 자본"에 이런 구절이 있네요."개인들로 하여금 생산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사회 관계, 즉 사회적 생산 관계는 따라서 물질적 생산 수단과 생산력의 변화 발전과 더불어 변화하며 변모한다. 총체로서의 생산 관계는 사람들이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 관계를 형성하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 다른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닌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주아 사회는 그러한 생산 관계의 총체이며, 각 생산 관계는 동시에 인류 역사 발전의 특수한 한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도 사회적인 생산 관계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다. 자본을 이루는 생활 수단·노동 도구·원자재 등 모든 것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즉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새로운 생산에 쓰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 사회적 성격이 새로운 생산을 위해 쓰이는 생산물들을 자본으로 바꾸지 않는가?"
맑스는 자본이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관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본=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이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정말 현실에서 그런 것인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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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어떤 주어진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조건 속에서, 생산수단과 생산물들은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폐지되면 생산수단과 생산물들은 자본이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폐지되면 임금노동자는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그냥 인간입니다. 노동의 성격도 생존수단에서 필요의 충족 및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폐지된 사회에서 여타의 사회적 관계들,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사이, 교사와 학생 사이, 성직자와 신도 사이, 그리고 광범위한 남녀간의 관계 기타등등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어떻게 됩니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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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적 예속관계가 해체되고 차가운 금전관계만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노동생산물을 통해서 연결되는데, 이것은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임금도 화폐형태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해체되면 상품관계가 해체되면서 상품물신성이 사라지게 되고, 기존의 지배관계가 해체되면서 타인을 노동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배관계가 해체된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타인을 노동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이것이 당독재로 나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서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예속관계가 전부 금전관계로 바뀐다고 했는데, 정말 우리 사회의 관계들이 차가운 금전관계만 있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예속관계는 없는 것인지 생각해봅시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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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한국은 혼외정사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논리적 귀결은 아닙니다. 매우 원시적인 이 법은 강력한 유교적 전통(남자에게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여자에게는 일부일처제를 강요하는)이 있는 한국에 개방적인 성적 문화가 도입되면서 가족의 해체가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지, 가족이 해체된다고 해서 먹고 살기 위해 임노동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비혼가정을 볼 때 출산이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이 법은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전 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유교와 무관하지 않으며,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발전했음에도 그 근거를 상실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그 기초가 자본주의 사회인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폐지되면 절로 사회관계들이 다 바뀌는 것입니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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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성매매에 대한 규제 역시 자본주의의 논리로는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생산양식에서는 노동력(이 자체가 하나의 자연력이라고 맑스는 말햇습니다)과 성이 상품이 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우기 성매매는 거대한 산업이기 때문에 이런 규모의 산업을 규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성매매특별법은 집결지를 집중 단속해서 그렇지, 이 법을 가지고 기타 다른 업소들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정당성을 갖고 있는겁니까. 제가 보기에 이 법은 매춘을 죄악시하는 유교적 전통과 성매매를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는 일부 여성운동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지금도 이 법의 반대자들은 자본주의적 논리를 들이대며 이 법이 황당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법과 그것의 기초인 사회관계는 사회의 물질적 기초인 생산양식과 조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겁니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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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공투들은 일본 자본주의를 불교 자본주의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일본 자본주의는 종신고용, 연공서열로 유명했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는건 불교의 자비심과 온정주의였습니다. 일본 자본가들은 온정주의를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지키는 수단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가네보 여공들은 투쟁할 때 사장님, 우리를 정말 딸처럼 생각하신다면 우리도 사장님 딸처럼 대학에 보내주세요, 뭐 그랬습니다. 그럼 지금 일본에서 온정주의가 다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그 사회의 기존의 관계들이 다 허물어지고 새 집이 지어지는겁니가, 아니면 그 위헤 자본주의가 들어서는겁니까. 전 후자라고 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무너지더라도 그 기초인 사회관계는 여전하겠죠. 하물며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갖고 있는 사회관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굉장히 오랜 이행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행기 강령은 매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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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만일 소비에트 국가가 자본주의라면 중세처럼 경제외적 강제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소비에트 국가에서 당의 권위에 의심하지 않는 인민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분명 경제외적 강제입니다. 소비에트 국가가 자본주의라면 소비에트 인민의 생산을 통제하는 기구는 필요없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