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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두 가지 관점


1장: 난관들의 가운데에 선 계획



α.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소비에트 경제는 1917년 이래로 다른 나라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자연스러웠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국가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의 전복에 기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1929년에 경제적 생활에 대한 국가적 계획화에 착수했을 때, 논란은 가장 첨예한 단계에 도달했다. 그 또한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계획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구들로부터의 대규모 지원 없이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적 유기체에 가해진, 특히 1914년부터 1920년까지 6년 이상의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복구하는 사전 기초작업이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저자들은 그러한 사실이 틀렸다는 명제를, 즉 소비에트 경제가 작동하지 않았고 계획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명제를 완고하게 붙들고 있다. 학문적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은 1933년 1월 제1차 5개년 계획의 결과에 대한 스탈린의 보고에서 재미있는 사실들을 포착할 것이다.1 이러한 견해가 얼마나 완고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는—예컨대 2차 5개년 계획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와중까지도—1936년에 멘체스터 대학교가 경제학부2를 위한 소책자를 출판했을 때 “계획경제체계는 1921년 전시공산주의의 폐지 이래로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고 대담히 선언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가장 저명한 옹호자는 케인즈 경이었다. 오래전, 1925년에, 소비에트 정부가 이후 제1차 5개년 계획을 위한 최초의 시범적인 접근으로 되었던 국가계획통제지표를 발간했을 때, 그는 『러시아에 대한 단상(Short View of Russia)』에서 이렇게 썼다: “경제적 측면에서, 나는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지적 관심의 대상인, 혹은 과학적 가치를 가진 우리의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공헌을 남겼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1934년에, 그는 공산주의의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미묘한 매력이 “경제적 상황을 악화하는 방식”3에 있다고 비꼬듯이 말했다.

경제학자들의 대다수는 1933년 제2차 5개년 계획의 시작 이후에 이전보다는 어쨌든 덜 완고해졌다: 그들은 소련에서 계획경제는 작동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개인이 모든 경제적 자유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는 그가 무엇을 사야 할지, 어디에서 일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개인적 선택을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전미제조업자협회4는 계획경제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고 선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1935. 12.): “사적소유와 생산수단과 분배수단, 생활수단에 대한 지배는 개인의 자유와 진보의 보존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학계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이처럼 솔직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똑같다. 제프리 크라우더(≪이코노미스트≫지의 편집장) 씨는 『민주주의자들을 위한 경제학(1939)』에서 “노동조합이 관계되어 있는 한, 러시아에서 고용주의 명령은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절대적이다”고 썼다. 소련의 경제는 “전체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최악의 억압”을 의미했다: 소련의 경제에서 개인은 “사회복지”나 “공동체의 선”과 같은 공문구들에 휘둘리며, ‘권력에 의해 이용당하는 하찮은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하이에크 교수는 그의 『노예의 길(1944)』에서 말했다. 윌리엄 베버리지 경은 그의 『자유사회에서의 완전고용(1944)』에서 소련의 지도자들은 경제적 성과들의 달성을 위해, “개인들의 자연스러운 반발‘에 반하여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주장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여러 저명한 경제학자들로부터 훨씬 더 많이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진취성과 1인 기업에 대한 억압, 관료적 폭압과 규율, 개인의 노예화, 국가에 의한 삭막한 통제, 거대한 비인간적 기구의 한낱 톱니바퀴에 불과한 인간─이 모든 것은 소련의 경제계획에 대해 내린 비판자들의 전형적인 평가였다.

반면에,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들이 깊게 탐닉했고, 그들이 소비에트 경제 조직화의 지침으로 삼았던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언제나 국가계획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이며, 경제 업무의 관리에서 자본주의하에서보다 더 많은 개인들의 참여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전제해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1848)』의 형태로 기본 이념들을 집대성하기 훨씬 이전에, 그들이 지면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도 이상사회에서의 계획이 생산자에게 있어 보다 큰 개인적 자유와 결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로버트 오웬은 이러한 사상의 기초 위에서 “조화와 협동의 마을”들을 만들었다. 1800~2000명으로 구성될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각 “팔란스테르”(생활공동체)마다 샤를 푸리에는 “아에로파구스”, 또는 계획대표위원회의 창설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단지 자문기구의 기능만을 부여하였으며, 그 성원들은 직업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할 것이었다. 존 프랜시스 브레이는 『노동의 고난과 노동의 구제책』(1839)에서 주식회사에 기초한 공산주의 사회를 전망하며, “생산과 분배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현재의 제도 하에서의 개별 기업처럼 국가가 단기간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전국적, 지역적 무역위원회를 두는 것이, 그리고 각 개인이 “원하는 만큼 축적할 자유와 제대로 된 축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장소에, 그러한 축적을 누릴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가능하고 심지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루이 블랑5은 “사회적 협동조합”과 국가의 계획에 기초한 집단주의적 사회에 대한 강조에서 “경쟁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정제되는” 조건을 기대하며, “우리는 적어도 인간의 개성과 개인의 권리, 인간의 해방을 희생시킬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티엔느 카베는, 국회를 통해 미래의 공화국이 메뉴팩쳐와 노동의 분배, 수도의 건설을 계획하고, 새로운 발견을 장려하며, 노동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동시에 이렇게 썼다. “유익한 경쟁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애국심을 통해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은 일을 하거나, 자신의 직업에서 유익한 발견물을 만들어내는 모든 노동자들이 특별한 권위나 공적인 명망을, 심지어는 국가적 영예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6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작성한 지배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을 위한 즉각적 조치들에 관한 강령그러한 조치들 중 상당수는 1848년 이전 시기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에서 경제계획이 현저한 몫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급을 위한 국립은행이라는 수단을 통한 신용의 국가의 수중에로의 집중과 교통과 통신에 대한 국가소유, 모두에게 동등한 의무노동, 국가소유공장의 확대, “공동의 계획에 따른” 농업의 확장은 모두 『공산당 선언』의 “지극히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조치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공산당 선언』은 동시에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전체 민족의 거대한 협력”이 확립되는 것을 고대했다.

『프랑스 내전』(1871)에서도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협동조합 사회가 폐업된 공장들을 접수할 것이며, “공동의 계획을 바탕으로 국가적 생산을 통제”하기 위해 하나의 거대한 연합체로 조직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숙명인 끊임없는 무정부성과 주기적 경련에 종식을 고할" 파리 코뮌의 포고령(1871년 4월 16일자)에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종류의 —즉, 자발적인— 활동에 기초한 협동조합이 공산주의를 향한 한 실천적 단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엥겔스는 그의 1891년판 서론에서 그것을 “코뮌의 단연코 가장 중요한 포고령”이라고 불렀다.

엥겔스는 일찍이 『반뒤링론』(1878)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의 종식이 “전체 사회와 개인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사회적으로 계획된 생산의 규제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계획적인 생산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완전히 무제한적인 발달과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활용”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장할 것이다. 이 점에서, 실제 인간은 최초로 “진정으로 인간적인 조건들”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의 도약”일 것이다.7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묘사에서 경제계획과 산업민주주의의 결합은 엥겔스 사후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초창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가장 권위있는 대표자였던 카를 카우츠키에 의해 집필된 『혁명 이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카우츠키는 1902년의 이 강연8에서 한편으로는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가 “단일한 계획에 따라 개개의 생산부문들에 할당되는” 노동력과 함께 “생산물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와 유통, 산업과 산업 간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교환”을 이룩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는 시작부터 생산을 민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지배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의 규율은 노동조합의 그것, 즉 “민주적 규율, 노동자들에 의해 선택된 지도부와 다수의 결정에 대한 자각적 복종”과 같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민주적 공장은 현재의 귀족적 공장을 대체할 것이다”고 말했다.

소련의 계획경제는 이러한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소련의 체제는 인용된 학자들이 묘사한 상, 또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소비에트 국가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이 초기에 공부했던 저자들이 그린 상과 비슷한가?

본서의 주요한 목적은 이상의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소련의 경제발전에 관한 사실들을, 특히 근래의 소비에트 경제계획에 대해 연구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기에 앞서, 다른 각도에서의 소련의 계획에 대한 비판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압도적인 주목을 사상 최초로 끌었기 때문에 중요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1945년 5월 9일에 스탈린은 승전연설에서 소련의 인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유럽에서 전쟁의 시기는 끝났다. 평화적 발전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10달 후, 스탈린의 그 약속은 전형적인 소비에트적 형태로,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 의해, 전후 시기에 열린 첫 번째 회기에서 체택된 1946~50년도 5개년 계획이라는 모습으로 열매를 피웠다:

 

“대조국전쟁 와중에도 독일의 이전 점령지의 경제복구를 성과적으로 착수했던 소련은 전쟁이 끝난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는 소련의 경제적 생활을 지도하고 결정하는 장기국가계획에 기초하여 국민경제를 복구하고 있으며,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소련 최고 소비에트는 1946~50년도 소련 국민경제의 복구와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의 기본 목표가 나라의 파괴된 지역들을 복구하고, 산업과 농업을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시키며,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는 것을 선언한다.”9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수많은 저명한 저자들의 새 5개년 계획에 대한 해석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목표와 매우 달랐다. 그들은 “러시아는 버터 대신 총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강조는 전후 시기에 소련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했고, 앞서 언급한 여러 비판들을 강화했다.

따라서해외의 비판자들이 대체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인용을 꺼려했던제4차 5개년 계획의 주된 특징들이, 실제로 그들이 제기하는 해석을 뒷받침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어느 정도 중요하다. 그것의 예비로서, 이전 시기 소련의 모든 경제계획이 “버터 대신 총” 정책과 얼마나 일치했는지 검토하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번역: 김의진 | 회원

 

2024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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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 V. Stalin, Leninism, London: Lawrence & Wishart, 1944, 408-9.텍스트로 돌아가기
  2. M. Polanyi, U.S.S.R. Economics: Fundamental Data, System and Spiri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6, 15.텍스트로 돌아가기
  3. G. B. Shaw et al, Stalin-Wells Talk: The Verbatim Record and a Discussion, London: The New Statesman and Nation, 1934, 35.텍스트로 돌아가기
  4. 〔역자 주〕 영어로는 U.S. National Association of Manufacturers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노동의 조직(Organisation du Travail)』 1848년판을 보라.텍스트로 돌아가기
  6. E. Cabet, Voyage en Icarie, Paris: Bureau du Populaire, 1848, 100, 103.텍스트로 돌아가기
  7. F. Engels, Herr Eugen Dühring's Revolution in Science: anti-Dühring, London: Lawrence & Wishart; NYC: International Publishers, 1935, 314, 317-318.텍스트로 돌아가기
  8. K. Kautsky, The Social Revolution, Chicago: C. H. Kerr, 1902, 126, 130, 149.텍스트로 돌아가기
  9. “Law on the Five-year Plan for the Rehabilitation and Development of the National Economy of the U.S.S.R.”, Soviet News, March 18, 1946, 9.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