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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주의·아베나리우스주의의 변종들에 대하여: 결론

한동백 | 집행위원


결론: 철학의 근본문제의 의의


 

현대 주관적 관념론, 특히 영국과 미국적 전통에서 배양된 관념론은 한국의 강단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세계 자본주의에서 신식민지 한국이 지니는 특수한 규정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상황은 강단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청년의 인식 형성에 돌이키기 힘든 악영향보편성 추구 경시, 진리 인식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 거부, 총체성에 대한 거부, 제국주의 약육강식 논리에의 순응, 즉물적 인식에 대한 찬양, 염세주의, 이기주의, 허무주의 등으로 발현되는을 끼치며, 사회 전체적으로는 과학 혐오를 부추긴다.

분석철학이 그 어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보다도 맹독성인 이유는 이 철학이 다른 부르주아 철학과는 달리 (속류적 맥락에서 논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외관기호논리학을 통한 극도로 형식주의적이고 공허한 서술로 대표되는을 띠면서 그 체계의 비정합성과 비논리성을 적극적으로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은 그 이론적인 원천을 직접적으로 다룰 때라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며 현대과학의 발전양식에 반하는지를 알 수 있다.

분석철학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본질상,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관념론의 두 부면을 여지없이 지니고 있다: (ⅰ) 물질과 관념의 선차성에 관한 문제에서 관념의 선차성을, (ⅱ)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에서 동일성이 있을 수 없음을 승인한다. 그들 철학에서 본질을 흐리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군더더기 역시 그것이 갖는 내적인 체계를 깊게 파고들면, 그것이 불가피하게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두 가지 관념론적 입장을 승인하는 것으로 귀착함을 알 수 있다.

철학의 근본문제의 첫 번째 부면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의 필연적·내재적 조건은 물질과 의식의 선차성 문제에서 물질의 선차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는 심리적인 것이 유기 물질의 최고 형태의 최고 산물로서 나타날 수 있기 전에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1 두 번째 부면에서 그것은, 세계의 과정 총체를 인식할 수 있느냐, 불가능하느냐의 문제에서 세계의 과정 총체를 인식할 수 있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근본문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부면과 두 번째 부면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보증하는 내용 중 어느 하나만 결여하고 있어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전락하게 된다.2 물질과 의식에서 물질의 선차성을 승인하는 것, 그리고 세계를 이루는 총체의 가인식성을 승인하는 것은 서로 표리관계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표리관계이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통해,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철학 전체, 특히 근대 철학에서 중요한 기본문제는 존재와 사유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 철학 전체의 최고 문제인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자연에 대한 정신의 관계 문제는 온갖 종교와 마찬가지로 야만시대 인간의 제한되고 무지한 사고에 그 근원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비로소 충분히 두드러지게 제기되고 그 완전한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유럽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적 중세기의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난 때부터였다.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 다시 말해서 무엇이 일차적인가, 정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연인가 하는 문제중세기의 스콜라 철학에서도 역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이 문제는 교회의 의사와는 반대로 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보다 첨예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담하는가에 따라서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정신이 자연보다 먼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 사람들, 따라서 결국 어떤 종류이든지 우주의 창조를 승인한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에 속하였다.”3

앞서 언급한 그대로 첫 번째 부면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이냐, 관념론적 세계관을 구분짓는 기준은 존재와 사유, 즉 물질과 의식의 선차성에서 어떠한 입장에 서 있냐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서 물질와 의식은 기나긴 현실투쟁과 이를 반영한 철학적 대립사에서 각각 질료와 형상, 역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 자연과 이념, 인간과 신이라는 다양한 개별적 양태를 취하였다.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기본 규정을 관념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모든 사물의 근원적 계기를 관념적인 것에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사물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규정을 띠는 것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 창조된 것으로, 또는 후차적으로 변형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련의 견해는 종국적으로는 관념의 자연 창조라는 입장을 승인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현실적인 것, 질료적인 것을 본래에 영원히 존재하였다고, 그리고 관념을 그것의 파생태라고 간주한다면, 관념은 자연이 창조해냈다는 입장을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물음은 철학적 대립의 근저를 이루는 현실적 당파성의 발현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물음은 근원성에 관한 물음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간 창조의 비밀’에 대하여 종교적 창조론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옹호한다면, 종교인들은 종국적으로는 그러한 진화를 가능하게 한 모든 제반 자연적 조건의 근원을 신이 창조하였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유물론자는 또한 그에 대응하여, 본래 자연은 영원히 존재해 온, 존재 자체의 ‘불멸’하는 조건이자 기본 규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물질과 관념 사이의 ‘제3의 규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협잡꾼이나 극도의 바보만이 이 두 ‘계열’의 극도로 포괄적인 개념에 대해서 그중의 어느 하나가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을 그러한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것”4이다.

철학적 대립은 현실투쟁을 반영하고, 현실투쟁은 인간의 역사적 제반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은 이 문제는 인식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첫 번째 부면에 기반하여, 유물론적 세계관과 관념론적 세계관 간 첨예한 대립의 양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부면이 등장한다. 두 번째 부면에서의 철학적 투쟁의 역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는 또 하나의 다른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사상은 이 세계 자체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우리의 사유는 현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현실에 관한 우리의 표상과 개념 속에 현실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가?​ 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라고 한다. 절대 다수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 사유가 애당초부터 사상(事象)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고 전제하였으므로 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논증되어야 할 명제가 여기서는 이미 그 전제 자체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자명한 것이다.”5

유물론자라면 철학의 근본문제의 첫 번째 부면에서 유물론적 입장을 승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입장을 승인할 수 있음에는 우리의 사유와 우리 사유의 객관적 근저를 이루는 객관적 실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입장의 승인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관을 부정한다는 것은 사유를 다룸에 있어 그것이 사유와는 이질적인, 현실적이고 사상(事象)적인 요인 간의 절대적 분리를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입장을 승인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불가지론적 견해로 귀착한다. 그리고 불가지론적 세계관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신비화를 정당화한다.

우리는 레닌이 언급한 "인간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물질"이 어떠한 의미를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레닌의 이 간명한 말은, 물질과 의식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그것이 서로 이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되려 물질이 의식을 규정하여, 이 규정된 의식은 물질의 고유한, 특수한, 규정되어 있는 자연필연성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의식은 다만, 즉자대자적으로 그 자체 존재하는 객관세계의 필연적 법칙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로부터 의식의 상대적 자율성, 주관적인 것의 상대적 자기운동, 인간의 자기목적적 운동이 성립된다.

나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첫 번째 부면과 두 번째 부면을 거론하며, 그것이 서로 상반되는 입장이 각 문제에 대해 표리관계를 이룬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선차성 문제에서 관념적인 것이 일차적임을 승인하면 동일성 문제에서 세계 총체에 대한 가인식성을 승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엥겔스의 해명은, 관념론자이면서, “가지론(可知論)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례로, 철학사적으로 헤겔이 관념론자인 동시에, 당대 불가지론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전개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완고한 관념론은 철학적 이원론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헤겔은, 아니 헤겔 이전의 모든 진리 인식의 가능성을 무한히 긍정이원론이나 다원론적 체계가 아니라 표면적으로 일원론적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하였던 ‘일원론적’ 객관적 관념론자들의 존재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에 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그의 논증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사유가 그의 철학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한 철학이며, 또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에 인류는 이 철학을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 옮겨 전 세계를 헤겔의 근본원리에 따라서 개조함으로써 그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헤겔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철학자에게서 볼 수 있다.”6

그리고 헤겔의 체계는, 그 체계의 총체적·내적 안정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종국에는 다음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다: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그리고 홉스로부터 포이어바흐에 이르는 이 오랜 기간에 걸쳐 철학자들을 움직여 온 것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한갓 순수사유의 힘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였다. 실제로 그들을 앞으로 추동한 것은 주로 위력있고 더욱더 급속하고 급격한 자연과학과 산업의 발전이었다. 유물론자들에게는 이미 이 점이 직접 눈에 띄었다. 관념론적 체계도 정신과 물질의 대립을 범신론적으로 조화시키려고 하면서 더욱더 유물론적 내용으로로 충만되어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헤겔에 와서는 그 체계가 그 방법에서나 내용에서나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선 유물론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기까지에 이르렀다.”7

생산력 진보가 가져오는 과학적 성과를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방식으로써 내적인 일관성을 준거로 삼는 모든 체계의 고도 발전은, 체계의 유물론적 성격을 강화한다. 설사 그것이 스스로의 체계가 관념론적 세계관임을 공공연히, 직접적으로 ‘표명’하였다고 하더라도, 과학적 성과를 반영하는 모든 일관적인 체계는 일관적인 유물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실제 역사적으로 나타난 헤겔 체계는 관념론적 사변 철학의 한계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관념론적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체계가 더욱 고도화되고, 동시에 그러한 고도화에 걸맞는 일관한 체계로 나아가는 도정 상에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바로 헤겔의 철학 체계는 이러한 운명의 경계를 아주 극렬하게 보여준 철학 체계였다. 이는 우리가 스피노자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목도할 수 있는 사실이다. 스피노자는 그 누구보다도 ‘신’에 취해 있었지만, 그가 당대의 과학적 진보를 의식하는 한에 있어 『에티카』에서 전개한 기하학적이고도 사변적인 논증은, 그것이 자기 체계의 일관성을 보증하는 한에서, 그가 ‘신’을 자연 총체(“Deus sive Natura”)로 여기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과학의 진보가 있는 한, 유물론적 세계관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과학의 진보는 삼라만상에 대한 인간 이해가 지니는 모든 일관적 체계의 유물론적 고도화를 불러오며, 모든 관념론적 견해를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린다. 관념론자들은 자기들이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던져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과학적 진보의 내용을 왜곡하여 일련의 사이비 문제로 뒤덮인 비일관적 체계신칸트주의, 실증주의, 신실증주의, 실용주의, 분석철학 등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이 틈바구니에서 성장한 것이 바로 불가지론이다. 그러나, 불가지론의 도피처는 과학의 진보를 반영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체계적 고도화 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관적인 체계는,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일관성을 보증해야 하는바, 고도화의 여정에서도 이러한 일관성이 관철되는 한에서, 종교적 관념론과 불가지론의 도피처는 좁아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귀신을 눈으로 본 적이 없으나, 그것이 없다는 것 또한 ‘직접적 감각’으로써 ‘입증’한 적이 없다. 불가지론자들은 이러한 것에 의존하여 유물론에 대해 온갖 저질스러운 시비를 건다. 그러나, 귀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일련의 객관적인 체계적 연속성의 내용은 생산력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설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귀신의 비존재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경험’〉불가지론자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계속 ‘요구’하는 그 ‘경험’을 거치지 않더라도 귀신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일상의 세밀한 모든 측면을 ‘예정’한 미지의 존재현세를 초월해 있는가 존재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일련의 일관된 그리고 연속된 체계의 존재 가능성은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한 과학의 진보에 의해 계속 줄어들고 있다. 먼 과거, 종교주의자들은 해충의 범람을 신의 징벌이라고 여겼지만, 근대기에 들어서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해명 방식은 여러 기후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과학적 설명 방식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종교주의자들은 그러한 기후적 요인을 신의 징벌이라고 여겼지만, 또한 그것은 머지않아, 기후적 요인 역시 행성이라는 거대한 무·유기적 자연의 내적 체계상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인 운동임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철학적 유물론이 포섭할 수 있는 현상은 많아졌지만, 종교를 포함한 온갖 관념론이 포섭할 수 있는 현상은 크게 감소하였다.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유물론적 세계관과 관념론적 세계관의 대립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생산력의 발전, 과학적 진보 속에서 관념론적 세계관은 설 자리를 계속 잃고 있다.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사멸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애써 막기 위해 가지각색의 현대 주관적 관념론을 주조해낸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이름’을 자기 간판으로 걸어놓고 있지만, 그것을 철학의 근본문제의 두 부면이라는 리트머스지를 통해 본다면, 그것이 항상 불가피하게 신앙주의로 귀착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의식 있는 활동가라면 이러한 신앙주의를 유포하는 부르주아 교수들, 즉 “억지로 짜낸 관념론으로 민중을 기만하는 학위를 받은 종복들”8의 헛소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노동계급 사이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학습의 기풍을 세워야 할 것이다.<>

 

2025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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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290.텍스트로 돌아가기
  2.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유물론자들은 누구나 다 사물 자체의 인식 가능성을 주장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빅토르 체르노프 씨여, 그것은 무지이다. 사유의 ‘대상적 진리성(gegenständiche Wahrheit)’이란 사유에 의해 옳게 반영되는 대상(=‘사물 자체’)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생각지 않고 이 테제의 바로 그 첫 구정을 건너뛴다면, 빅토르 체르노프 씨여, 그것은 무지이거나 아니면 한없는 경솔이다. (위의 책, 145.) … 엥겔스는 여기서 철학적 경향의 어떠한 두 노선을 대립시키고 있는가? 한 노선은 감관이 우리에게 사물의 옳은 모상을 준다는 것, 우리는 이러한 사물 자체를 안다는 것, 외부 세계는 우리 감각기관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이므로 여기에는 불가지론자가 동의하지 않는다. (위의 책, 149.)”텍스트로 돌아가기
  3. F. Engels,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서울: 돌베개, 1987, 31-3.텍스트로 돌아가기
  4.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196.텍스트로 돌아가기
  5.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1987, 33.텍스트로 돌아가기
  6. 위의 책, 33-4.텍스트로 돌아가기
  7. 위의 책, 34-5.텍스트로 돌아가기
  8. P. J. Dietzgen, 『철학 소론집』, 53.;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상)』, 1992, 186.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