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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소련의 ‘강제합병’인가?


발트 3소련의 강제합병인가?


김의진 | 사무위원

    머리말

     1. 전간기 발트 3국의 계급투쟁

    2. 1940년 혁명과 민주개혁

    결론


머리말


 

1940년 발트 3국의 소련으로의 편입은 흔히 ‘강제합병’으로 불린다. 소련이 발트 3국 민중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각국을 점령했다는 주장은 오늘날 수많은 나라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용되며,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반공주의적 선전의 일환으로 활용되고 있다.

 

소련이 발트 3국을 합병했다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의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다: 첫째, 소련과 발트 3국 간 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구도’로 환원한다. 한 나라 안에 상이한 계급들이 존재하고,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계급 적대가 발현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계급들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사태의 본질을 호도한다; 둘째, 발트 3국의 외견상독립’을 실질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여론전과 반인민적 쿠데타에 대한 지원을 통해 외래자본의 경제적 예속에서 탈피하기 위한 각국 민중들의 염원을 짓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주권’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이른바 발트 3국의 ‘소비에트화’는 노동자, 농민과 기타 민주 세력의 반파시즘 투쟁 산물이었다. 물론 1939-40년 당시의 우연적인 국제정치적 변화 속에서 소련이라는 외부적 요소가 각국 내부의 계급관계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 이후에도 파시스트 정권의 억압은 오히려 더욱 심화하였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1940년 6월 혁명에서 소비에트 정권의 복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현지 근로대중이 직접적으로 투쟁하여 얻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 전간기 발트 3국의 계급투쟁


 

1917년부터 1940년까지 발트 3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정권이 타도된 이후1 각국에서는 기존에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던 발트-독일계 지주들과 매판자본가들이 예속적 경제질서의 토대 위에서 정치권력을 유지했다. 노동계급의 정당인 공산당은 불법화됐으며, 수많은 활동가는 체포와 처형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에 발트해 공화국들의 지배계급은 혁명의 재발을 막기 위해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개혁은 철저하게 기만적으로 이루어졌다. 무토(無土) 농민에게 분배하기로 되어 있었던 기존 지주 소유 토지들은 부농과 군인, 정치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많은 곳에서 지주-소작제는 여전히 유지됐다. 1930년대 말 라트비아에서 소와 말과 같은 기본적인 생산수단들을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의 숫자는 5만 명에 달했고, 소작농들의 숫자는 17만 명에 이르렀으며, 독립적 경작권은 빈번히 침해당하였다.2 에스토니아에서는 500명의 지주가 100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여전히 소유했으며, 반면에 10헥타르 미만의 토지를 보유했던 농가와 30-100헥타르의 토지를 보유했던 농가는 각각 약 4만 6천 호와 2만 8천 호로 집계되었다.3 리투아니아의 지주들은 1922년과 1929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토지개혁”에도 불구하고 100헥타르에서 150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들을 여전히 소유했고, 관리들과 유착하여 몰수된 토지의 상당 부분을 돌려받았다.4 1920년대에 발트 3국에서 시행됐던 토지개혁은 이처럼 불철저하게 진행됐으며, 부농과 빈농, 그리고 지주와 소작농 간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발트 3국의 노동계급과 농민들은 민주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계급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1922년 리투아니아에서 공산당의 전선체인 “노동자 그룹”이 주요 도시들에 의원단을 진출시키고, 선거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당국은 전선체의 모든 의원을 체포·수감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사회민주당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들의 연립정부가 총선 승리 이후 세워졌지만, 같은 해 12월에 일어난 반동적 군부의 쿠데타로 붕괴하였다. 내각의 구성원들은 쿠데타 세력에게 체포당했으며, 1920년 이래로 인기를 상실했던 스메토나가 다시 대통령으로 추대됐다.5

 

에스토니아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1917년 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한 이후 들어선 콘스탄틴 패츠(Konstantin Päts)의 반동적 체제는 노동운동이 고조될 기미를 보일 때마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1924년 11월에는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 149명이 검거됐고, 그중 한 명은 군사법원에 회부돼 ‘법정모독죄’로 총살당했다. 공산당 지도자들의 체포는 볼셰비키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었던 노동자들의 봉기를 촉발하였지만, 군대와 경찰에 의해 폭압적으로 진압당했다. 봉기의 결과로 500명의 노동자가 체포됐고, 300명이 추가로 처형당했다. 패츠 정권은 이후 1934년에 최소한의 ‘민주적’ 외피마저 벗어던짐으로써 공공연한 파시스트 독재를 도입했다.6

 

라트비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트비아 공산당은 1920년대 초반 이래로 여전히 비합법 정당으로 남아 있었고, 조사에 따르면 1928년에 당원 중 3분의 1은 여전히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1933년에는 “노동자 그룹”에 소속된 일곱 명의 의원이 공산당 비밀당원이라는 혐의로 체포됐다.7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의 사례처럼, 라트비아도 1934년에 카를리스 울마니스(Karlis Ulmanis)8가 전쟁성 장관인 야니스 발로디스(Janis Balodis)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쿠데타로 파시스트 체제가 전면화됐다. 라트비아 헌병대(Aizsargi)9는 울마니스의 지시로 좌익 의원들과 미온적인 군 장교들, 작가들과 지방의원들을 리예파야(Liepaja)의 수용소로 이송했고, 각종 정당과 단체를 해산시켰다. 울마니스는 또한 스스로를 퓌러로 칭하며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감행했다.10

 

파시스트 정권의 등장 이후 발트해 국가들에서 계급투쟁은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 분파까지 탄압의 대상이 상황에서 각국의 공산당은 양심적 지식인과 학생, 심지어는 급진적 관료층과 일부 부르주아 정치인까지 망라하는 반파쇼인민전선 전술을 능동적으로 적용했다. 에스토니아의 경우 반파시스트 투쟁은 니골 안드레센(N. Andressen)과 같은 입법부 의원들까지 통일전선에 결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에스토니아 공산당이 이들까지 협력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나 이웃국 라트비아와 다르게 노동조합, 문화협회, 교육협회와 같은 기관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행동의 자유가 다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스트 정권의 틈새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공산당은 이러한 기회들을 반파시스트 선전 노동계급의 조직화 최대한 활용했다.

 

라트비아의 노동운동은 1934년 이후 공산당의 지도로 한층 더 발전했다. 라트비아 공산당과 사회근로농민당의 1934년 11월 공동행동협정을 시작으로 노동계급의 행동통일이 확보됐고, 반파쇼인민전선의 정립을 바탕으로 지식인, 학생, 관료층까지 반파시스트 투쟁의 대열로 견인했다. 1939년 초엽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공산당을 비롯한 제정당 및 당파는 소련에 대한 전쟁준비 반대와 민주적 자유의 복원을 골자로 공동의 정치강령을 발표하며 계급동맹을 가일층 강화했다. 세 나라 중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리투아니아에서도 근로대중의 요구는 1935년부터 1940년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농민봉기와11, 1936년의 노동자 총파업 선포에서 보듯 나날이 높아져 갔다. 1930년대 중반에 각국에서 형성됐던 공산당 주도하의 반파쇼인민전선은 파시스트 정권이 1940년 6월에 축출당한 후 인민정부의 골간을 이루며, 민주개혁의 주축으로 발전했다.

 


2. 1940년 혁명과 민주개혁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 직후 발트해 국가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됐다. 1930년대 중후반 반파쇼인민전선의 형성을 통해 강화된 노동자, 농민들의 대중적 운동은 각국의 부르주아 정부들에게 소련과의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강제했다. 소련은 협정에 따라 붉은 군대를 진주시켰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도발로부터 이들 나라를 보호했다.

 

발트 3국의 민중들은 소련의 이러한 조치에 환호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1939년 10월 9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inn)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집회는 소련과의 협정 결과를 만장일치로 수용했다. 이들은 소련과의 무역협정과 상호원조협정이 만성적인 실업을 없애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을 개선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12 라트비아에서는 1939년 10월 5일 소련과 협정이 체결된 후 노동자, 농민들의 환영 집회가 빈번하게 개최됐다. 부르주아와 지주계급은 군중들의 잠재적인 반발과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소련과의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편으로는 소련의 위신이 광범위한 근로대중들 사이에서 강화되는 것을 우려했고, 정치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적, 경제적 협력을 몰심양면으로 강화하고자 했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에서 파시스트 정권의 정책은 근로대중의 불만을 더욱 고조하였다. 서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이 전쟁으로 인해 마비된 상황에서 소비재 부족 현상은 더욱 극심해졌고, 물가의 인상과 함께 노동자, 농민들의 생활 처지는 급격하게 악화됐다. 소련과 무역을 확대할 기회는 빈번히 가로막혔고, 독일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더욱 심화됐다. 발트 3국의 대외무역에서 독일은 영국을 점차 밀어내고 있었다. 일례로, 라트비아에서 독일로 가는 수출량은 1938년에 35%에 달했고, 독일산 제품의 수입은 같은 시기에 27%로 4분의 1을 상회했다.13 1939년 10월 7일에 체결된 에스토니아-독일 무역협정은 이러한 양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에스토니아는 협정에 따라서 목재와 식료품을 독일에 기존보다 2배 이상 수출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생산물의 가격은 평균적인 시장가격보다 낮아졌다.14 이렇듯 독일은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발트해 국가들을 원자재 수탈 기지로 삼으며 경제적 지배를 확대했다.

 

나치 독일과의 협력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도 강화됐다. 부르주아와 지주계급의 대표자들은 소련에 대한 파시스트 독일의 공격을 간절하게 열망하며 노동계급과 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고자 했다.15 에스토니아 군부는 특히 소련-에스토니아 상호원조협정 직후 탈린에 도착한 독일 정보기구의 대표자인 젤라리우스의 소련 국경 정찰을 허용했고, 1940년 1월에는 리투아니아 군 수뇌부와 고위급 회담을 개최했다.16 라트비아의 울마니스 대통령도 1940년 2월의 연설에서 “운명적인 시련”과 “결정적인 사변”에 대해 이야기하며 평화를 염원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우려를 자아냈고17, 더 나아가 기존 헌병대 부대들을 소련 국경에 주둔한 정규군과 국경순찰대에 편입시킴으로써 군사적 긴장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18 이들 나라의 군부와 정치인들은 급기야 1940년 6월에 탈린에서 발트 연방 문제를 논의했고, 1934년 제네바 조약을 통해 확립됐던 정치·군사적 동맹을 공식화하고자 했다.

 

소련과의 상호원조협정을 위반한 것은 리투아니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1939년 11월에 카우나스 주재 게슈타포 수장인 그레페(H. Greffe)의 요청으로 자국에 주둔한 소련군 부대들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넘겨주는 데에 동의했고, 같은 해 말에는 유사시 소련에 맞서기 위해 붉은 군대의 주둔지와 인접한 곳에 병력을 배치했다.19 군 상층부는 한층 더 나아가 1940년 3월 9일에 붉은 군대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했으며, 그에 대한 사전조치로서 소련과 연계를 취하는 일반 시민들과 사립기관, 기업소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20 이는 유오자스 우브르시스(J. Ubrsys)21와 같은 관료들조차 같은 해 1월 5일에 마지못해 시인했듯이, 소련이 리투아니아에게 1939년 말 이래로 군대를 동원하여 일체의 내정간섭을 자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것이었다. 리투아니아 군 당국이 붉은 군대를 향해 공격계획을 수립한 궁극적인 목적은 소련군 부대들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를 바탕으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을 겨냥한 정치적, 군사적 도발은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첨예화됐다. 1939년 12월에 열린 발트협상 제10차 회담에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외무상들은 소련을 겨냥하여 비밀리에 군사동맹협정을 체결했다. A. 메르키스 리투아니아 총리는 또한 1940년 2월에 ≪발트평론(Ревью Балтик)≫의 기고문에서 “발트 해 국가들 사이에서의 전면적인 협력에 있어 정치적 장애물은 완전히 사라졌고, 협력의 기반이 정초됐다”고 주장하며 반소비에트 동맹의 공고화를 촉구했다.22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발트 3국을 군사적 교두보로 삼고자 했던 나치 독일의 의중에 발맞춰서, 각국의 파시스트 정부는 전쟁도발의 실질적인 주체인 정보기관들의 활동을 방조하며 현지에 주둔한 붉은 군대 장교들에 대하여 테러행위를 서슴지 않았다.23 소련의 군사기지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경찰의 통제가 강화됐고, 불심검문과 체포가 연이어 발생했다. 부르주아지와 지주계급의 대변자들이 벌인 위험천만한 단말마적 발악은 1940년 6월 15일에 탈린에서 열린 “발트 해 주간” 행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24

 

이 모든 요소는 발트해 국가들에서 파시스트 정권의 사회적 기반을 현저히 축소하였다. 1939년 10월 에스토니아 지방선거에서 콘스탄틴 패츠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후보들은 타르투와 탈린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서 낙선했고, 같은 해에 열린 입법부 선거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25 에스토니아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여건 개선과 민주적 권리의 보장을 골자로 제안서를 정부에게 전달했으며, 이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한 호응을 얻어냈다. 같은 시기에 라트비아 공산당은 1939년 7월과 12월에 지도부의 대다수가 당국에 의해 체포됐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유입된 헌신적인 투사들을 중심으로 대열을 성공적으로 재건되었다. 공산당은 파시스트 정권의 계급적 파산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근로대중의 투쟁은 경제적 조건의 악화로써 더욱 격화됐다. 파시스트 체제가 위기에 봉착할수록 노동자와 농민, 진보적 인민들의 시위와 파업은 이전보다 더욱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새로운 민주적 제도의 수립을 향한 지향과 열망은 가일층 상승했다. 1940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주요 도시들에서 열린 집회들은 이를 명백하게 증명했고, 지배계급에 막대한 공포를 선사했다.

 


α. 인민정부 수립


 

발트 3국에서 혁명적 정세는 1940년 6월에 이르러 무르익기 시작했다. 경제적 조건의 악화와 친독(親獨) 파시스트 정치인들의 모험주의적인 대외정책은 이들 나라에서 정치적 위기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반파시스트 세력의 단결과, 더 나아가 파시스트 체제의 축출을 위한 우호적인 조건을 조성했다.26

 

국제적 정세도 근로대중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소련은 독일이 발트 3국을 군사적 교두보로 활용할 가능성을 막고 국경 일대에서 무력도발을 자행하려는 현지 지배계급의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1940년 6월에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당국에 상호원조협정을 준수할 수 있는 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소련의 이러한 행보는 각국의 지배계급을 아비규환에 빠트렸고, 반면에 근로대중한테는 혁명에 대한 신심과 열의를 안겨주었다.

 

파시스트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근로대중의 결정적인 행동은 1940년 6월 17일과 18일에 개시됐다. 소련 정부가 보낸 서한의 전모에 대해 알게 된 이후 각계각층의 군중들은 집회를 조직하여 파시스트 당국의 정책을 규탄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정부의 수립을 주동적으로 요구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들의 시위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진보적 투사들을 체포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동원했다. 그러나 시위에 합류하는 숫자는 파시스트들의 각종 발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큰 폭으로 늘어났고, 노동자들은 자체적으로 분견대를 창설하며 경찰과 군대를 무장해제 하였다. 이는 1940년 6월 21일에 발트 3국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붕괴하고 인민정부가 수립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에스토니아에서는 근로대중들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들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탈린과 타르투의 공장 노동자들은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6월 20일까지 열 차례에 걸쳐 집회를 열었고, 당국의 반인민적 정책들을 규탄하며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결정서들을 채택했다. 최초로 열린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는 6월 20일 저녁에 에스토니아 공산당 비합법 사무국의 주도로 탈린 시의 한 체육관에서 개최됐고, 건물 안에 참가자들이 모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수천 명의 인파가 집결했다. 공산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던 오스카 세프레(Oscar Sepre)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회의는 네메 루스의 개회사로 시작됐다. 사람들은 주의깊게 경청했다. “스파이는 꺼져라!”는 목소리가 갑자기 군중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군중들은 열광했다. 밀고자들의 축출을 요구하는 함성은 점점 커졌다. 열 혹은 열다섯 가량의 사람이 군중들 사이에서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허리를 구부린 채 수많은 군중을 뚫고 지나가려고 애썼다. 밀고자들은 매우 처량해 보였다. 이들의 한심한 도주행각은 사람들의 정신을 더욱더 고양할 뿐이었다.”27

에스토니아의 노동계급은 신속하게 움직였다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부는 6월 21일에 전국적으로 시위와 파업을 열기로 결의하며, 경찰과 군대의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무장한 노동자 부대들을 조직했다. 마침내 6월 21일 아침에 수도 탈린의 노동자들은 근로대중의 정치적 자유 보장과 정치범들의 석방, 물질적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대통령궁으로 행진했다. “20년 동안 에스토니아의 노동자들은 허리를 굽혀야 했지만, 모든 것이 이제 끝났다”는 선포와 함께 노동계급은 콘스탄틴 패츠와 파시스트 정치인들을 압박했다.28 그러나 패츠는 연설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회피하려 안간힘을 썼고, 이들의 구체적인 요구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또한 정치범들의 석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부로 일관했다.

 

노동자들은 요구 조건들을 거부당한 후 직접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정치범들을 석방하기 위해 교도소로 향했고, 당국과 충돌이 벌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공산당 위원들의 중재로 목적을 달성했다. 노동자 부대들은 같은 시간에 경찰과 군부대를 해산시켰으며, 얼마 뒤 저녁 6시에는 입법부가 위치한 톰페아성을 점거했다. 타르투와 패르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도 같은 날짜에 공산당 지역위원회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조직됐고, 자체적인 역량으로 주요 기간시설들을 장악했다.29 에스토니아 당국은 봉기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6월 21일 저녁에 라디오 발표를 통해 바레스-바르바루스를 총리로 하는 신임 내각의 수립을 발표해야 했다. 파시스트 정권의 타도와 함께, 정치권력은 노동계급의 수중에 넘어갔다.

 

라트비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경찰과 군대가 1940년 6월 17일에 수도 리가에 진주한 소련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평화적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대중행동이 대규모로 일어났다. 라트비아 공산당 임시조직위원회는 모든 반파시스트 세력의 단결을 공고화하고, 울마니스 정권의 타도를 앞당기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했다. 6월 19일과 20일에 이르러 일련의 시위들은 동시다발적인 무장봉기로 발전했다. 리가의 노동계급은 항구와 주요 시설들을 점거함으로써 파시스트 국가기구를 마비시켰다. 리예파야(Ljepaja)의 노동자들도 6월 20일에 헌병대 청사와 우체국, ≪쿠르제메스 바르드스≫ 신문사를 장악했고, 군대와 경찰을 무장해제 하였다.30 6월 21일 아침에 모든 권력은 울마니스 대통령의 승인하에 아우구스츠 키르헨슈테인츠를 총리로 하는 인민정부에게 이양됐다.31

 

리투아니아의 혁명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다르게 지리적 특수성까지 더해졌다. 1920년대 초반 이래로 리투아니아는 독일과 폴란드와 직접적인 국경을 접했고, 빌뉴스와 클라이페다 일대를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경험했다. 폴란드는 1938년에 빌뉴스의 영유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고, 독일은 1년 후 1939년 3월에 클라이페다를 강제합병하며 군대를 진주시켰다. 독일과 폴란드의 침략적 책동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리투아니아에서 계급투쟁이 다른 나라들보다 일찍이 고양되는 계기가 됐다. 외세에 굴종함으로써 대중적 기반을 상실했던 지배계급은 파시스트 독재를 완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스메토나는 1938년 3월 21일에 V. 미르나스를 신임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내각을 교체했고, 1939년 3월 28일에는 새로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기독민주당을 비롯한 부르주아 정파들까지 포괄해야 했다.

 

1939년 말과 1940년 초반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는 정세를 더욱 고조하였다.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구로서 대외무역의 60%를 차지했던 클라이페다의 상실은 독일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심화하였다. 스메토나 정권은 나치 독일의 지배를 피해 폴란드와 클라이페다에서 탈출한 노동자들과 사무원, 피난민들의 유입에 대해 고용대책을 내놓지 못했으며, 이는 실업률이 상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근로대중의 불만은 파시스트 정권의 각종 기만책에도 불구하고 고조되어 갔고, 카우나스와 빌뉴스, 시울라이, 로키슈키스 등 주요 대도시와 농촌지역에서는 시위와 파업이 연달아 발생했다. 파시스트 정부의 정보국 수장인 A. 포빌라티스는 이 당시 활발하게 전개됐던 계급투쟁에 대해 1939년 10월 16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최근의 사건들은 공산주의 선전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강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전에 공산주의 활동과 연계를 가지지 않았던 많은 노동자들은 이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32

예속적 지주-자본가 계급의 대외굴종적 내외 정책경제적 조건의 악화는 공산당의 지지기반을 확충시켰다.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양심적 지식인들도 사회주의 혁명만이 민족적 자유를 강화하고 파시스트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유력한 방안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940년 3월 19일에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기관지인 ≪티에사(Tiesa)≫가 지적한 것처럼, “노동자-농민의 전투적 동맹”이 형성되기 시작했고33, 반파시스트 운동에 대한 지식인들의 결합도 빈번하게 늘어났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총제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스메토나는 근로대중의 압박으로 인해 1940년 초엽에 라슈티키스(S. Raštikis)를 경질하고 진보적 지향을 가진 비트카우스카스(V. Vitkauskas)를 참모총장에 임명해야 했다. 폭압적 기구로서 경찰과 함께 근로대중을 탄압했던 군대의 약화는 리투아니아의 근로인민대중이 파시스트 정권을 비교적 순탄하게 축출하고 1940년 6월 17일에 인민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있어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34

 

1940년 6월 17일에 게드빌라스(Gedvilas) 신임 수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민정부는 기본적으로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입각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리투아니아에서도 공산주의자들 참여한 가운데 대중적으로 유명한 민족시인인 루다스 기라(Ludas Gyra)를 포함한 지식인들과 작가, 변호사와 군 장교들이 연립정부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화”에 관한 지배계급의 ‘우려’와 다르게35, 정부의 과반을 점하지 않았고 인민정부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민족주의 단체들은 ‘자원병연맹’36과 ‘청년 리투아니아(Jaunoji Lietuva)’37, ‘시울라이 연맹’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스메토나 정권의 굴종적 태도에 항의하여 시위를 전개한 역사가 있으므로38 히틀러 파시즘에 반대했던 신생 인민정부와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전체 민족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구축했다.

 

1940년 6월 20일과 21일에 일어난 파시스트 정권의 붕괴는 근로대중에게 우호적인 정치적 조건을 조성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내전을 섣불리 일으킬 수 없었고, 새로운 정부의 수립에 동의해야 했다. 울마니스와 패츠, 스메토나는 1940년 7월 이전까지 대통령으로 남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고, 모든 중요한 법령들과 행정명령들은 인민의회에서 작성되고 통과됐다. 발트 3국의 근로인민대중은 이처럼 계급관계의 근본적인 변화에 기초하여 의회와 같은 민주주의적 국가기구들을 활용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개조를 위한 길을 열었다.

 


β. 민주개혁과 사회주의로의 성장·전화


 

1940년 6월 혁명은 발트 3국에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촉진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파시스트 정권의 타도는 정치적 민주화를 확대하는 동시에,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핵심적인 정책들의 실행에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초반 이래 지속됐던 노동자와 농민들을 향한 파시스트 정권의 테러 독재는 종언을 고했으며, 착취적 경제관계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착수되기 시작했다.

 

파시스트 정권의 타도 이후 노동계급의 민주적 권리는 전적으로 확장됐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신생 인민정부는 수립 직후 사면령과 함께 노동재판소와 같은 억압적 기구들을 폐지함으로써 근로대중의 요구를 이행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15-20% 이상으로 인상됐고, 파시스트 성향의 관료들을 대체하여 진보적 인사들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경찰과 사법기관의 요직들에 임명됐다.39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와 같은 기구들을 통해 생활조건을 개선하고, 공장주와 지배인에 의한 무단해고를 저지하며 발언권을 강화했다.40 노동자위원회는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일환으로서 기업소의 설비와 자산을 해외로 유출하려는 시도들을 조기에 차단하고, 관리부실 여부를 감독함으로써 생산의 정상화를 추동했다.41

 

발트 3국에서 지주-자본가 및 파시스트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력은 1940년 7월의 국유화 조치를 통해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라트비아에서는 같은 달 25일에 은행과 대기업 국유화 법령이 제정됐으며, 보험회사와 신용회사를 포함한 804개 기업소가 우선적으로 몰수되었다. 중소기업 역시 같은 해 8월 말에 797개 기업소 중에서 650개가 국유화됐고, 9월 초에 이르러 모든 절차가 마무리됐다. 라트비아의 전체 생산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40년 9월에 72.7%로 사적 부문을 압도했고, 이 나라에 투하된 미국과 영국, 스웨덴, 이탈리아, 프랑스를 비롯한 외래자본의 생산수단까지 국유화42의 대상으로 놓음으로써 자립경제의 토대를 구축했다.43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도 기간산업에 대한 국유화는 오랜 기간 고질적으로 지속됐던 대외적 예속을 청산하고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진행되었다.44

 

농민들도 인민정부가 실시한 토지개혁을 통해 경제적 착취에서 벗어났다. 1940년 7월 이래로 6개월 동안 최소 20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토지개혁의 수혜를 입었고, 자신만의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리투아니아에서는 6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빈농을 포함한 농민 7만 명에게 추가로 분배됐고, 에스토니아에서는 약 6만 명이 새로운 경작지를 부여받았다. 라트비아에서는 농민 5만 명이 총 47만 5천 헥타르 가량의 토지를 추가로 분배받았으며, 나머지 2만 3천 명의 농민들은 7만 5천 헥타르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 과정에서 탄압받은 계층들은 주로 지주들과 “회색 남작”으로 불렸던 부농들이었으며, 이들의 토지는 국가에 귀속되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됐다.45 토지의 매매와 저당, 투기는 금지됐고, 30헥타르 이상의 경작지가 소작농과 빈농들에게 분여됐다.46 농업 부문에 있어서 인민정부의 이러한 시책은 농촌 내부의 양극화를 일소하고 지주-소작제를 폐지하는 데에 있어서 관건적 역할을 했다.

 

발트 3국에서 1940년 6월부터 8월까지 실행된 일련의 정책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산시켰다. 각국의 공산당은 기업소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지원하고, 노동조합과 농민단체, 군대와 정부기관에 당원들을 파견하여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비롯한 인민정부의 시책들을 지원했다. 일례로, 에스토니아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숫자는 1940년 6월 21일 이후 3주만에 2배로 늘어났고, 농민단체의 조합원들은 6만 명에 육박했다. 노동조합은 이 기간동안 A. 아벤을 중심으로 파시스트 정권에 굴종했던 어용 지도부를 몰아내고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하며 민주적 권리를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갔고, 에스토니아의 대표적인 농민단체인 전에스토니아농촌근로자조합의 경우 공산당 지부들과 협력하여 토지개혁을 방해하려는 부농들의 시도를 미연에 방지했다.47

 

지주-자본가 계급의 착취의 폐절에 관한 각계각층의 요구는 1940년 7월에 열린 각국의 총선거를 통해 표출됐다. 공산당과 노동조합, 농민단체를 비롯한 수백 개의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은 7월 초반에 인민정부의 민주개혁을 방해하고자 했던 부르주아지와 지주계급의 책동에 대항하기 위해 선거블록을 형성했다. 선거는 치열한 계급투쟁의 장이었다. 대자본가와 지주계급은 선거자금을 지원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후보들의 당선을 도와줌으로써 사적 소유에 의거한 기존의 사회경제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선거관리위원회를 매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48 그러나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비롯한 민주개혁에 제동을 걸고자 했던 지배계급의 모든 시도는 인민정부에 진출한 근로대중의 대표자들에 의해 가로막혔다.49 기존의 파시스트 체제에 부역했던 부르주아 정당들의 출마는 엄격히 금지됐고, 오직 근로대중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후보만이 출마할 수 있었다.

 

선거에 대한 노동계급과 농민, 지식인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공산당의 주도로 조직되어 618개의 단체들을 망라했던 에스토니아 근로인민연합은 7월 4일부터 7월 15일까지 304회에 걸쳐 군중집회를 열며 80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등록했고, 공산당원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비당원 군중까지 선거명부에 포함시켰다.50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는 1940년 7월 5일에 12만 명이 모인 가운데 인민정부의 총선거 일자 채택에 관한 결정을 환영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됐으며, 같은 시기에 리예파야 등 지방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집회에 참여했던 인파는 6천에서 15,000명에 달했다.51

 

군중집회는 공산당과 민주세력을 향한 근로대중의 지지를 확인하는 장이었다. 지식인들도 파시스트 정권 타도 이후에 개최된 일련의 집회들에서 노동문제와 농민문제의 공론화에 앞장섰으며, 인민정부의 방침과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인민의회 선거와 에스토니아 국민의회 선거는 1940년 7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 동안 진행됐다. 발트해 국가들에서 열린 총선거는 파시스트 정권의 축출 이후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 근로대중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 투표율은 각각 95.5%, 94.8%, 85.5%로 유례없이 높았다. 민주적 자유의 확대가 공산당 주도 전선체의 압도적인 승리를 보장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1938년 의회 선거에서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들의 숫자가 1940년보다 10% 적었고, 실제 투표율도 33% 더 낮았던 에스토니아의 사례를 고려할 때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52

 

발트해 국가들의 유권자들 중 절대다수는 반동세력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근로대중의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선출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투표에 참여한 한 유권자는 당시 선거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메토나 체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진정한 선거였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진정성 있게 투쟁하고, 말만 아니라 행동으로 투쟁할 후보들을 선택할 수 있기에, 투표를 여러 번 했어도 오늘만큼 기쁘고 투표를 자랑스럽게 느낀 적은 없었다.”53

발트 3국에서 1940년 7월 중순에 열린 총선거에서 공산당 주도 선거블록의 압도적인 승리는 소비에트 권력의 복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민의회를 중심으로 한 국가기구의 완전한 민주화는 기존의 지배계급이 혁명의 성과들을 뒤엎고 반동적 정치제도를 복원할 가능성을 미연에 봉쇄했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더욱 수월하게 하는 발판이 됐다. 발트 3국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복원은 근로대중의 이와 같은 노력에 따른 산물이었으며, 자립적 경제기반의 건설을 향한 길을 열었다.54

 


결론


 

발트 3국의 ‘소비에트화’는 소련이라는 ‘외세’의 강점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소련이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 군대를 진주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지주-자본가 정권에 의한 공산당과 제 민주 역량 탄압이 격화되어 갔다는 점을 고려할 때, 1940년 6월의 정치적 변화에 있어서 외부적 요소가 핵심적인 요인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소련이라는 변수가 각국에 일정한 영향을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의 주체적 역량은 기본적으로 근로대중에서 나왔다.

 

1940년 6월 혁명 이후 전개된 일련의 변화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근로대중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을 바탕으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개조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55 지주-자본가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집회를 조직할 때부터 각국의 노동계급은 인민방위대와 같은 기구들을 통해 경찰과 헌병대를 비롯한 각종 폭력기구를 민주적인 기관으로 대체해 나갔으며, 이로써 부르주아지와 지주계급이 무력을 동원하여 혁명의 전취물들을 탈취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포함한 인민정부의 획기적인 조치들은 계급관계를 근로대중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변시키지 않았다면 결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2025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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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연합국은 전쟁 당시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에서 활동했던 독일군의 주둔을 용인했다. 발트 3국에 주둔한 독일군은 현지의 반동적 정치인들인 스메토나(리투아니아)와 울마니스(라트비아), 패츠(에스토니아)를 도와 소비에트 정권기관들을 몰아내며 발트-독일계 위주의 지주-소작제를 보존시키는 데에 일조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P. Farr, Soviet Russia and the Baltic Republics, London: Russia Today Society, 1944. 25-6.텍스트로 돌아가기
  3. G. Meiksins, The Baltic Riddle, NYC: L. B. Fischer, 1943, 68.텍스트로 돌아가기
  4. A. Strong, The New Lithuania, NYC: Workers Library Publishers, 1941, 52.텍스트로 돌아가기
  5. Soviet Russia and the Baltic Republics, 1944, 28.텍스트로 돌아가기
  6. Ibid., 27-8.텍스트로 돌아가기
  7. Ibid., 27. 텍스트로 돌아가기
  8. 라트비아의 총리(1918-21, 1925-6, 1931, 1934-40)와 대통령(1936-40).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정부의 후원으로 ‘라트비아 독립 정부’를 결성하는 데에 관여했고, 1919년 1월 3일 볼셰비키─그 당시 현지의 소비에트 권력에 맞섰던 독일군 사령관인 뤼디거 폰 데어 골츠(Rüdiger Von der Goltz)도 시인했듯이, 이들 중 대다수는 러시아계가 아니라 라트비아계로 구성되어 있었다.─의 리가 점령 이후 리바우(Libau)로 후퇴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소비에트 정권을 전복했으며, 발트-독일계 지주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반동적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1934년에 쿠데타로 파시스트 제도를 구축했고, 1940년에 타도되기 전까지 대통령으로 군림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1918년에 창설됐으며, 1934년 쿠데타 이후 라트비아에서 울마니스의 수족으로서 나치 친위대와 맞먹는 위상을 누렸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0. The Baltic Riddle, 1943, 96-7.텍스트로 돌아가기
  11. 대표적으로, 1935년과 1936년에 라트갈레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민봉기가 연달아 일어났다. 1940년 이전까지 라트갈레는 라트비아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서, 토지를 매각한 빈농들의 숫자가 2만 6천 명에 달했을 정도로 계급분화가 극렬하게 전개됐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2. О. Куули, Революционное лето 1940-го в Эстонии, Таллин: Периодика, 1979, 6-7.텍스트로 돌아가기
  13.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에스토니아의 수출량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21%에서 31%로 증가했으며, 수입량에서는 22에서 26%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라트비아의 수출량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26%에서 35%로 증가했으며, 수입량 비중은 24%에서 27%로 상승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4. Ibid., 9.텍스트로 돌아가기
  15. 1939-40년 사이 발트 3국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독일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카우나스 지방법원장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대로였다. “소련은 리투아니아 민족을 그대로 나두겠지만 우리의 집과 재산을 빼앗을 것이다. 반면에 독일군이 온다면 그들은 리투아니아 민족을 파괴하겠지만 우리의 말과 재산을 그대로 남겨둘 것이다. 나는 후자를 선호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6. The Baltic Riddle, 1943, 117.텍스트로 돌아가기
  17. E. Zagars, Socialistiskie parveidojumi Latvija: 1940-1941, Rīga: Izdevniecība "Zinātne", 1975, 24.텍스트로 돌아가기
  18. 예를 들어, 1940년 4월 25일 라트비아 헌병대(Aizsargi) 사령관이 레제크네 주둔 헌병대 제17연대 연대장에게 보낸 극비명령은 안드루페네와 부크무이자, 카우나타에 있는 헌병대 병사들을 국경순찰대와 군부대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국경에 배치된 헌병대는 군부대와 국경순찰대의 훈련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됐으며, 헌병대의 군 및 국경순찰대로의 편입은 라트갈레 사단과 국경순찰여단 사령관들의 승인을 받고 이루어졌다. 관련 내용은 ЦГИЛ ЛатвССР, ф. 1899, оп. 2, д. 9, л. 1.; А. И. Спреслис и др, Вос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в Латвии и вхождение Латвийской ССР в состав СССР: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Rīga: Зинатне, 1986, № 59.를 보라.텍스트로 돌아가기
  19. Р. Ю. Жюгжда, “Антинародная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реакционных кругов литовской буржуазии в конце 1939 - начале 1940 г”, Побед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волюций 1940 г.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Вильнюс: Ин-т истории АН Литовской ССР, 1983, 112.텍스트로 돌아가기
  20. Ibid., 114.텍스트로 돌아가기
  21.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리투아니아의 외무성 장관을 맡았으며, 스메토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지주-부르주아 정권의 대변인 중 한 명이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2. Lietuvos oídas, 1940, bal. 6.텍스트로 돌아가기
  23. “Антинародная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реакционных кругов литовской буржуазии в конце 1939 - начале 1940 г”, Побед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волюций 1940 г.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1983, 115.텍스트로 돌아가기
  24. “발트 해 주간” 행사는 표면적으로 ‘경제적, 문화적 교류의 증진’이라는 표어 밑에서 열렸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군사적 협력을 위해 각국의 군 당국자들과 정부 각료들, 정보기관 사이에서 오간 일련의 실무회의들로 점철됐다. 이에 관한 정보는 Революционное лето 1940-го в Эстонии, 1979, 11.를 보라.텍스트로 돌아가기
  25. Ibid., 10.텍스트로 돌아가기
  26. 이 당시 각국 공산당들의 입장은 1940년 3월에 나온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서 「노동계급의 통일전선에 대하여」와 같은 해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 공산당 대표자회의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Latvijas Komunistiskās partijas kongresu, konferenču un CK plēnumu rezolūcijas un lēmumi, 1 daļa, 1904-1940, red. A. Kuduma, Rīga: Latvijas Valsts izdevniecība, 1958, 617-20.와 Революционное лето 1940-го в Эстонии, 1979, 11.; Вос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в Латвии и вхождение Латвийской ССР в состав СССР: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1986, № 58.을 보라.텍스트로 돌아가기
  27. Ibid., 13.텍스트로 돌아가기
  28. 1940년 6월 21일 오후에 E. 카다스 섬유노동조합 의장이 수도 탈린의 대통령궁 앞에 모인 수천 명의 인파들 앞에서 한 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9. Ibid., 15-6.텍스트로 돌아가기
  30. Socialistiskie parveidojumi Latvija: 1940-1941, 1975, 25-6.텍스트로 돌아가기
  31. Ibid., 28.텍스트로 돌아가기
  32. К. Навицкас, “Особенности созревания революционной ситуации в Литве в 1938-1940 гг”, Побед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волюций 1940 г.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Вильнюс: Ин-т истории АН Литовской ССР, 1983, 45.텍스트로 돌아가기
  33. Ibid., 46.텍스트로 돌아가기
  34. 비트카우스카스는 이후 스메토나가 1940년 6월에 근로대중의 혁명적 봉기를 진압하고 파시스트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을 때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노동계급과 각계각층의 대중들에 의한 국가기구의 장악을 용이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5. 스위스로 망명을 떠나기 전에 리투아니아의 독재자인 스메토나는 “내 손으로 리투아니아를 볼셰비키 국가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6. 1910년대 후반에 라트비아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로 구성된 재향군인단체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7. 안타나스 스메토나 시기(1926-40) 리투아니아 집권당의 청년조직이다. ‘청년 리투아니아’의 활동가들은 1939년 3월 독일의 클라이페다 점령에 항의하여 당 지도부가 소집한 관제대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8.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Особенности созревания революционной ситуации в Литве в 1938-1940 гг”, Побед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волюций 1940 г.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1983, 35를 참조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
  39. Socialistiskie parveidojumi Latvija: 1940-1941, 1975, 34-5.텍스트로 돌아가기
  40. 1940년 6월 이후 발트 3국의 기업소들에 들어선 노동자위원회는 각 기업소당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규모 기업소의 경우 대표자 1명을 선출했다. 라트비아에서는 1940년 6월 26일에 인민정부가 ‘노동자위원회’를 정식으로 승인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 사이에서 활동을 전개했으며,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주효한 역할을 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1. Ibid., 66-7.텍스트로 돌아가기
  42. 국유화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서 미국은 라트비아 주재 자국 대사관을 통해 7월 29일에 항의서한을 전달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도 각각 7월 30일과 8월 1일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3. Ibid., 72-3.텍스트로 돌아가기
  44. 라트비아의 공업부문에서 사회주의적 개조가 빠르게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말에 주요 산업 부문들을 포괄하는 국유주식회사가 형성되면서 자본집중현상이 일정하게 나타났고, 그것이 국유화의 물질적 토대로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국유주식회사에서 국가가 차지했던 지분은 90%로 총자본액이 6,905만 라트화에 달했으며, 1939년 7월에는 33개 국유주식회사들을 묶어 신디케이트를 형성했다. 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유주식회사의 이러한 성장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외래자본의 투자가 일시적으로 급감한 틈을 탄 것이었지만, 주요 생산 설비들을 도입할 때 여전히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게 의존해야 했던 만큼 식민지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5. The Baltic Riddle, 1943, 177-8.텍스트로 돌아가기
  46. The New Lithuania, 1941, 54.텍스트로 돌아가기
  47. Революционное лето 1940-го в Эстонии, 1979, 20-1.텍스트로 돌아가기
  48. 에스토니아의 부르주아 단체들은 66개 선거구에 후보자 78명을 진출시켰고, 라트비아에서는 1934년 파시스트 쿠데타의 주범 중 한 명이었던 야니스 발로디스를 주축으로 ‘라트비아 민주유권자위원회’를 창설했다. 부르주아적 정치제도의 유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소련과의 우호를 선언적으로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유재산의 보호’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와 계급적 억압을 유지하고자 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9.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 ≪치냐(Cina)≫는 1940년 7월 10일자 논평에서 ‘라트비아 민주유권자위원회’의 후보명단을 폭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은 결코 민중의 복지나 민중의 이익을 고려한 적이 없으며, 그동안 억압했던 방식대로 민중에게 다가서고자 한다면, 이들의 목적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근로인민의 통일적 대오를 분열시키고 세임에 진출하여 반인민적 정책을 계속해서 펼치려는 것이다.” (И. И. Минц и друг, Сощиалистические революции 1940 т.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Вос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Москва: Наука, 1978, 338.에서 인용함.)텍스트로 돌아가기
  50. Революционное лето 1940-го в Эстонии, Таллин: Периодика, 1979, 25.텍스트로 돌아가기
  51. Socialistiskie parveidojumi Latvija: 1940-1941, 1975, 48-9.텍스트로 돌아가기
  52. Сощиалистические революции 1940 т.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Вос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1978, 342.텍스트로 돌아가기
  53. ≪Сina≫, 15. УП. 1940.텍스트로 돌아가기
  54.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사회주의 건설의 일보(一步)로서 외래자본과 국내자본에 대한 국유화에 입각하여 국영 기업소를 중심으로 경제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농업부문에서는 1940년부터 1941년까지 기계-트랙터 기지(MTS)와 함께 농촌협동조합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 기틀을 닦았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5. 발트 3국의 혁명은 샤지우스(Г. А. Шаджюс)가 지적한 것처럼 “형식에 있어서 평화적이었지만, 내용에 있어서 매우 혁명적”이었다. 발트해 국가들에서 “부르주아는 정치권력을 상실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됐다. 부르주아는 또한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를 상실했다.” 발트 3국에서 일어난 혁명의 성격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로는 Г. А. Шаджюс,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е революции 1940 г. в республиках прибалтики, Побед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волюций 1940 г. в Литве, Латвии и Эстонии, Вильнюс: Ин-т истории АН Литовской ССР, 1983, 76.를 참고하라.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