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내가 숨쉬는 공기

[육아일기 : 류미례편 ②] 내가 숨쉬는 공기
류미례 감독

하은이는 4kg이라는 큰 몸으로 태어났다. 몸을 좀 추스르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신생아실에 있는 하은이를 자주 보러 다녔다. 3층 신생아실에서 하은이를 받아 5층 입원실에 데려가곤 했는데 어느 날, 방문객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물었다.

“얘는 몇 개월 이예요?”
어제 태어났다는 말에 방문객은 크게 놀랐다. 내가 보기에도 하은이는 막 태어난 게 아니라 어디 있다가 온 것 같았다. 입원실에서 젖을 먹이고 다시 신생아실로 아기를 보내고 나면 방금 돌아섰는데도 눈앞에서 아기 얼굴이 아른거렸다. 내가 아기를 보고 싶어 하면 엄마는 “좀만 있어봐라. 이제 지겹게 볼 것이다” 하며 웃곤 하셨다.

엄마 말대로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정말 나는 아기와는 한 시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신생아실과 입원실을 왔다 갔다 하던 병원생활과는 달리 이제 나는 24시간동안 아기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한테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애를 키우면서 느낀 엄마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

아들 형제를 바랐던 아버지 때문에 12년 동안 여덟 명의 아기를 낳아야했던 우리 엄마. 나는 아들 바라던 집안의 넷째 딸이었다.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남으로써 엄마는 고난의 행군을 마칠 수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해 오신 엄마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나보다 남동생을 더 예뻐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실 엄마한테 은근하게 서운함을 느껴왔던 것이다.

하지만 하은이를 키우면서 알았다. 내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마의 끝없는 돌봄 덕분이었다는 것을. 막 태어난 아기는 자주 먹고 자주 쌌으며 7월의 열대야 속에서 나와 엄마는 아기가 편안한지 쉬지 않고 살펴야했다. 아기는 몸과 마음과… 꿈까지 지배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기를 돌보면서, 그리고 어린 나에게도 그런 세심한 마음을 베풀었을 30년 전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바라본 엄마는 정말 나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의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고마운 사람.

일과 육아를 동시에 잘 할 수 있을까? 당시 나는 하은이를 업고 다니며 일을 했다.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도 늘어났다. 출산 전까지 우리는 평등부부를 지향해왔다. 그러나 오직 여성만이 출산과 수유를 담당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조건은 육아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라는 오해로 변모해갔다. 처음에 우리 부부는 똑같이 아기를 안지 못했다. 엄마는 우리들이 아기를 안으면 “목만 들고 다닌다”며 떨어뜨릴까봐 불안해했다. 그 불안도 잠시, 끊임없는 시행착오 속에서 나는 점점 아기돌보기에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남편은 몇 달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샐러리맨인 남편보다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내가 더 자유로웠기 때문에 출산 후 아기 돌보기는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나와, 퇴근 후 저녁시간만을 함께 하는 남편이 아기와의 애착관계 형성에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런 조건이 일상까지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함께 있을 때에도 남편은 전적으로 나를 의지했다. 그는 그저 조력자일 뿐이었다! 아기가 방긋방긋 잘 웃을 때만 예뻐할 뿐 아기가 울거나 보채면 얼른 아기를 내주었다.

“배고픈가 봐. 빨리 젖 줘.”
우는 것이 유일한 표현수단인 아기는 배고픔 말고도 다양한 이유로 칭얼거린다. 기저귀가 젖었을 수도 있고 덥거나 추울 수도 있다. 나는 남편에게 ‘능동적으로, 생각 좀 하며’ 아기 돌보기를 요구했지만 아기에 관한한 그는 마치 무뇌아 같았다. 그때를 돌아보면 남편 또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류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차이로 작용한다. 산후 조리 때문에 집에 오셨던 엄마는 남편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하셨다. 가끔 육아와 가사 분담 문제로 남편과 내가 언쟁이라도 하고 나면 엄마는 질린 듯한 얼굴로 내게 말하곤 하셨다.

“야야, 나는 너같은 세상 하루만 살다 죽어도 한이 없겠다”
아버지는 엄마가 6남매를 키우는 동안 기저귀 한 번을 안 갈았다. 농사일로 바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가 농사일을 안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애처로운 우리 엄마. 그러나 그런 엄마가 오히려 내게는 가장 큰 벽이 되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나보고 ‘호강에 초친다’며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셨지만 나는 엄마가 아니었다. 당신을 희생하시며 나를 키워주신 덕분에 나는 차별보다는 평등을, 인내보다는 공정함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내딸의 미래를 위해서도 순종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딸을 키우는 엄마였던 것이다. 가정의 평온함을 위해 두 눈 질끈 감고 세상이 부여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할 수도 있었지만 내 딸이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참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서라도 공정하고 평등해야 했다. 엄마들은 딸들에게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지만 딸들은 엄마의 모습에서 미래를 본다. 내 딸의 당당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는 순종을 선택할 수 없었다.

하은이는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었지만 육아와 관련한 역할 분담 문제로 우리 부부는 참 많이도 싸웠다.

"바다소리나?" "응". 하은이는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었지만 육아와 관련한 역할 분담 문제로 우리 부부는 참 많이도 싸웠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도 결혼 전과 다름없이, 오히려 날개가 달린 듯 훨훨 날아다니며 맹렬하게 활동하는 남편의 모습은 내게 심한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한편으로는 갈팡질팡한 내 마음도 문제였다. 애초의 계획은 12개월 동안만 아기를 키우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2개월은 아기와 떨어질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언니들은 낯을 가리지 않는 5, 6개월 때 미리 맡기지 않은 상황이라면 36개월까지는 양육자의 변동이 없어야 한다고 타일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선배언니를 찾아가기도 했다. 애가 셋인 선배언니는 나보고 오래오래 애를 키우라고 했다.


일하고 싶은 나는 외로웠다

“애 키우면서 작업계획을 세워라. 골목풍경, 이런 것도 좋지 않니? 난 일찍부터 일 시작한 거 너무너무 후회 된다”

선배언니에게서 뭘 기대했던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데 괜히 눈물이 났다. 난 이제 첫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그저 영화 두 편 만들었을 뿐인데, 내가 일터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기는 사랑스러웠지만 일하고 싶은 나는… 외로웠다.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문득 하은이를 보면 한없이 애처로웠다. 난 모성이 부족한가봐. 불쌍한 내 아기. 왜 나 같은 엄마를 만났니? 일하고 싶은 ‘나’와 하은이의 ‘엄마’라는 존재 사이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글썽였다.

◎ 류미례 감독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98년 '22일간의 고백' 조연출로 다큐작업을 시작했으며 2002년 '친구-나는 행복하다2'로 제27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중편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어 2003년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 2004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다.하은이와 한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게시일 2006-01-18 14:46:00.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