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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와서

하루님의 [] 에 관련된 글.

 

원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동네분들과 함께 하는 교육이 있었는데

부산으로 가는 사무실 엠티(토~월)과 일정이 겹쳐버려서

첫날은 영화상영과 자기 소개 등으로 대신했다.

화요일 새벽에 돌아와서 깜박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하늘의 체험학습 보고서(월요일을 쉬었으니)를 써야했고

학교와 어린이집에 애들을 데려다주고 곧 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오늘까지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부산은....기실 원정음주로 기획된 거였다.

하돌의 출산휴가가 끝나고 사무실 동료들과 함께 계획적인 음주를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나름 돈을 모으고 장소를 물색하고 가족들과의 스케줄을 조정한 후

밤새 달리는 방식.

첫번째 원정음주가 가리봉 오거리.

사무실 정이 <종로, 겨울> 조연출을 할 때 알아둔 중국음식점에 갔었다.

중국음식점 특유의 향이랄지 잔술, 팡팡 노래방. 뭐 그런 것들이 그날 밤에 대한 기억.

두번째는 독산동 우시장.

그 땐 가족들도 함께라서 맛있게 먹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3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08년 가을, 세번째 거사를 준비하였는데..

다른 동료들은 거의 잠없는 2박 3일을 보낸 듯하고

나는 밤 10시면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보려고 했던 영화들 중 반 정도를 보았다.

일차 목적인 음주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2차 목적인 마스터클래스는 열심히 들었다.

서울로 떠나와야했던 월요일이 되어서야 영화보는 재미가 솔솔 피어났고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두고 서울로 돌아와야했다.



1. 워낭소리

보는 사람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는 화제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리 불쾌하던지.

나이든 농부 부부와 마흔살이 넘는 늙은 소의 이야기이다.

공들여 찍은 화면과 극영화처럼 매끄러운 내러티브는 눈에 쏙쏙 들어오는데

나는 왜 그리 불쾌했을까?

나는 그 불쾌감의 정체를 지금도 곱씹는 중이다.

감독이 방송PD출신이라는 것을 몰랐어도 불쾌했을까?

감독이 외국인이었어도 그렇게 불쾌했을까?

 

영화에 대한 첫번째 생각은

'탐욕스런 자본이 이제 독립다큐의 영역까지 먹어치운다'는 것.

<동강은 흐른다> 생각이 많이 났다.

<동강은 흐른다>를 방송국PD와 전문카메라맨들이 HD카메라나 지미집까지 써가며

찍었다고 보면 된다. 한 컷 한 컷이 다 예술이었다.

그렇게 찍은 다큐가 독립영화라는 이름을 달고 극장개봉을 한단다.

GV를 보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와서 노치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작비 얼마 들었나 꼭 물어봐 줘~"

나중에 사무실동료 S가 그랬다.

"전 너무 재미있게 잘 봤는데 누나가 분개했다는 얘기 듣고서 의아했어요"

그 말을 듣고 약간 당황했고....조만간에 정신을 가다듬고

내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

 

2. 스카이 크롤러

온 가족이 함께 할 유일한 이벤트로 마련했으나

19세 이상 관람가라서 포기.

티켓 교환소에 가져가니 사람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줄을 서더라.

정말 보고 싶었는데....

 

3. 플라워 브리지

루마니아 다큐이다.

엄마는 먼 데로 일하러 가시고 아빠가 아이 셋을 키우는 이야기인데

중간중간 아빠가 카메라를 보면서 나레이션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수선화가 구근에서부터 활짝 피어나는 장면들이 스치면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줬고.

열심히 봐야했으나 부산의 동생이 사준 밥과 술을 먹은 탓에 약간 졸았다.

졸면서 깜짝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여기에 어떠헥 왔는데, 이 시간이 얼마나 금쪽같은 시간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달콤하게 잤다.

 

4. 댄서의 꿈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독립영화인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만났다기 보다는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같다. 고교 졸업 이후에 영어와 담을 쌓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행사는 통역기에 의존해서 겨우 이해했고 옆자리 앉은 감독과도 어색한 웃음만 교환했을 뿐이다. 서울에 돌아와서 어쩌면 사람들이 그렇게 다들 영어를 잘하느냐고 한탄을 하자 한 선배가 말해주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올 정도면 다들 엘리트 계층일걸. 우리랑은 좀 다르지 않을까?”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리는 건 역시나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다. 이번에도 부산에 내려갔고 독립영화들을 주로 보았다. 그 중 인도의 감독이 만든 영화 <댄서의 꿈>을 소개하려 한다. 요즘 고민하는 것이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 사이의 관계망인데 이 영화는 그 고민의 깊이를 더해줬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인상적이다. 작고 가냘픈 여자아이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날 것같은 소의 변을 치운다.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모아 들고 어딘가로 간다. 카메라의 시선이 작은 소녀의 동선을 따라 우시장 전체 풍경으로 확장된 후 장면이 바뀌면 영화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한다. 우시장의 외경은 쓸쓸하고 고즈넉해 보이지만 댄서들의 춤이 펼쳐지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영화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다.

 

무대 위에 선 댄서들은 독무도, 군무도 아닌 낯선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다. 극장 안은 남성들로 발 디딜 틈 없고 50여명의 댄서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한 채 자기들 마음대로 춤을 춘다. 각각의 댄서들의 선 방향이 다르듯이 남성 관객들 또한 바라보는 댄서들이 제각각이다. 각자의 상대를 바라보며 어떤 남성은 바지를 벗어 내리며 성기를 노출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남성은 돈이나 보석을 건네기도 한다. 한 마디로 기이하고도 독특한 풍경이다.

 

주인공 수니타는 어머니 대에서부터 유명한 댄서 집안 출신이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아버지와의 사연을 듣다 보면 영화 속 댄서들의 사회적 지위가 보인다. 파티 플래너였던 아버지는당대 최고의 댄서였던 어머니를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개한다.

“창녀가 왔다!”

어머니는 당황하지 않고 대꾸한다.

“내가 창녀면 너는 포주다”

젊은 시절에는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렸던 어머니는 결혼 후에는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살린다. 댄서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인도의 남성들은 너무나 바보같다. 나는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다”

수니타는 무대 위에 선 자신을 향해 손목을 그으면서까지 구애하거나 보석을 싸들고 찾아오는 남성들을 외면하진 않는다. 계속해서 극장에 오게 하려면 웃음을 날려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마음을 열지도 않는다.

“사랑? 그런 건 믿지 않아요. 사랑은 오직 부모 자식 간에만 존재하는 거죠.”

 

외설적인 열기로 가득찬 극장 풍경과 사랑을 믿지 않는 댄서들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노래가사들,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춘 댄서들의 제멋대로인 춤을 보다 보면 흥겨움 보다는 삶의 팍팍함이 묻어난다.

영화는 늙은 댄서들의 사연도 빼놓지 않는다.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늙은 댄서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옛날은 연극과 뮤지컬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관객들은 더 이상 참고 기다리며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다. 벗은 몸매, 외설적인 몸짓 속에서 말초적인 쾌락만을 쫓을 뿐이다.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리조각을 던져대는 관객들의 변해버린 정서 때문에 댄서들은 이제 짙은 화장을 하고 반라의 몸짓으로 남성 관객들을 성적으로 자극한다. 그렇게 유혹의 시선과 몸짓을 넘어서 여성 댄서들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외설적인 몸짓들은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다가온다. 젊은 댄서들은 대중문화가 머물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착목해서 노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예술가임을 자처하는 수니타의 어머니는 그런 세태가 마땅치않다.

“벗은 몸으로 흔들기만 하는 게 춤은 아니다”라며 은근히 딸을 비판하지만 알콜중독에 빠진 그녀를 돌보는 건 수니타이다. 늙은 댄서들은 수니타의 어머니처럼 변한 세상을 한탄하며 쓸쓸해하지만 젊은 댄서들이 바라보는 현실은 냉정하다. 그들은 매일 밤 쉬지 않고 춤을 춰서 가족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살 계획을 세우고, 자기 가족들만 돌보는 오빠 대신에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당당하게 피력한다.

 

영화는 내내 불편했다. 감독의 시선 때문에 영화 속 씩씩한 여성들에게 쉽게 공감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감독은 그녀들을 지지하는 것도, 이해하려는 것같지도 않았다. 나는 문득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굳건한 인도에서 이 영화의 감독은 어떤 계층일까? 또 댄서들은 어떤 계층일까? 소의 대변을 맨 손으로 치우는 소녀나 남성들 앞에서 맨 몸을 드러내는 댄서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때 감독의 마음은 어땠을까?

문득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끊임없이 찍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을 멈추는 순간, 감독은 권력자의 위치에 올라서고 찍히는 사람들은 피사체에 머문다. 뜨겁고도 씁쓸한 영화 <댄서의 꿈>을 보며 나는 다시금 내 선 자리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5. 멘탈

마스터클래스 때문에 1시간 정도만 보고 나와야했다.

정신장애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

흥미로운 주제였다.

 

글을 쓰다가 잠깐 궁금해서 보니 <멘탈>과 <워낭소리>가 상을 받았다.

<멘탈>을 보며 문득 깨달았던 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넘나들기라든지,

스텝을 잘 꾸리는 문제라든지, 촬영을 잘 한다라든지,

사운드 디자인을 잘 한다 뭐 이런 문제들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일상의 잔물결을 흐트러뜨리는 카메라의 존재

생활의 내밀한 공기와 무거운 카메라 사이에서의 긴장감

그런 것들은 평생 지고 가야할 나의 운명인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덤덤하게 받아들여야한다는 입장.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 평범한 진리에 대해서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형식의 변화라든지 실험이라든지 그런 것, 중요하지만

기본을 바로 세운 후에 시도해볼 수 있는 것.

내가 중심을 잃고 너무 멀리 나가 버렸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런 것들을 얻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워낭소리>와 <멘탈>에게 감사를.

나도 이제 정신차리고 작업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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