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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 윤이형, 루카/김성중, 개그맨/헨닝 망켈, 빨간 리본

 

2. 뱅갈룰루에 갔을 때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일이 생겨 숙소에 갖다와야할 일이 생겼다. 파라다이스 인 이라는 이름의 숙소와 수업을 듣던 대학은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만큼 떨어져있었다. 백년은 살았을 것같은 고목들이 늘어서있는 학교 안의 숲,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클랙션을 울려대는 시끄러운 거리, 아침마다 재봉틀을 꺼내놓고 수선일을 하다 저녁이 되면 다시 재봉틀을 들고 사라지던 아저씨 곁을 지나 숙소로 돌아갔다가 만났던 파라다이스 인의 적요. 갑자기 생각난다.

코끝에 어떤 향기가 스쳤는데 이게 뭐지 생각할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후 갑자기 그날이 생각났다. 정말 이건 뭐지. 

 

3-2.난 내 머릿속에 오솔길이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들어. 그 길을 걷다 보면 몇 미터씩 길어지고 미지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같아. 언젠가 그 길도 끝나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오솔길은 뒤로도 갈 수 있어. 가끔 나는 뒤를 돌아봐. 어제처럼,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든 시간 동안. 잊어버렸던 것이나 내 스스로가 억압했던 기억도 가끔 돌아보게 돼. 어쩌면 기억하는 대신에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느껴져. 그런 대화를 계속했으면 좋겠어. 사람한테 마지막으로 남는 거라고는 친구. (헨닝 망켈, 빨간 리본)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고 나서 검색창에 '정글만리 쓰레기'라고 쳐봤더니 게시물들이 많이 떴다. 진짜 쓰레기. 여고를 다니다 대학에  갔더니 남녀공학이라 남자애들한테 이상한 얘기들을 참 많이 들었는데 한 번은 과 친구가 보던 무협지를 빌려 읽게 되었다.  엄청 두꺼운 책인데 읽는 데 한 시간이 안 걸렸다. 한시간이 뭐야 30분도 안걸렸어. 세로 정렬이었고 글자수가 얼마 없었고, 그리고 싸움 묘사와 성애 묘사가 비슷한 비중으로. 터질듯한 가슴, 끊어질 듯한 허리를 가진 미녀들이 씨스루 옷을 입고 주인공 용사의 손가락 하나에 기절하는 풍경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정글만리를 보는데 무협지 읽던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났다. 조정래가 신경숙 보고 "능력없으면 그만 둬라"류의 조언을 했던데 그걸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사자성어가  튀어나왔다. 

남말하네

 

헨닝 망켈의 <빨간 리본>은 <정글만리>랑 비교된다. 스웨덴의 판사가 주인공인 서스펜스 스릴러인데 서세동점 시기의 근대사부터 사회주의가 몰락한 현재의 중국까지 잘 살피고 있다.  기대없이 폈다가 깜짝 놀랄만한 이런 발견 때문에 오늘도 틈틈이, 무차별, 독서는 계속된다.

3-1.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길을 잃은 뒤,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우리는 너무 많이 오해했고 오해를 풀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습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반복되는 내 의심과 추궁 때문에 너의 얼굴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며 죽은 것들은 되살아나는 대신 예전보다 더 죽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때쯤에는 나도 알고 있었다. 연인들이 서로에게 하는 어떤 말들, 이를테면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피부색이 무엇이든 어디서 왔든 관계없이 너를 사랑해, 같은 말들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윤이형, 루카)

:<나는 그녀와 키스했다>라는 영화를 보고 싶다. 게이가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 '동성애는 치료할 수 있다'는 개드립과 닮은 설정이지만 결국은 '사랑은 염색체와 상관없이 이뤄질 수 있다'는 진리가 부드럽게 배어나오는 영화라고 한다. <루카>는 게이들이 주인공이지만 사랑과 이별의 보편적 속성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펼쳐놓는다.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평이다. 

3.Y는 정해진 일의 순서를 따랐다. 첫번째로, 들리는 말들을 빠른 속도로 타이핑했다. 모호한 부분은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작업이 끝나면, 테이프를 처음으로 돌려 확인작업을 거쳤다. 불확실한 발음의 단어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 단어들은 곧 껄끄러워지고, 어감이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럴 때면 단어에 적응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했다. 전문용어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Y에게는 이 단계가 가장 지난한 작업이었다. 확인이 끝난 후에는 읽기 수월하도록 문장을 손봤다.(제목을 모르겠네....)

:구술사 인터뷰를 해야 한다. 어제 두 개의 강의와 한  개의 원고에 대한 의뢰를 거절했다. 어리바리한 채로 한 개의 자문회의를 승낙하고 말았지만 오늘 거절할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보면 내가 뭔가  엄청나게 바쁜 사람인  것으로 보일 것도 같은데 최근의 이  부름들은 정말 어리둥절이다. 지금의 시간대가 그런 운대인가보지. 구술사 인터뷰는 사실 이런 모드로 접어들기 전에 역시나 거절을 못하는 패턴대로 오케이를 한 경우이다. 전화를 받을 때 나는 주유를 하는 중이었고 거절을 하고 있었는데 주유가 끝났을 땐 다음 약속을 잡고 있었던 이상한  케이스. 어쨌거나 나는 누군가를 인터뷰를 하고 녹취를 풀어야 하고.... 그래서 그냥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기능적으로 상상하고 싶어서 저 문장들을 가져왔다. 녹취야 20대부터  끊이지않고 해왔으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냥 뭔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듯해서. 내가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동안  2주가 흘러버렸다.  오늘쯤 전화를 할까.... 이런 상황을 만들고야만  과거의 내가 참 싫어질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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