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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현실이 꿈에 스미고 꿈이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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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7/09
    2014년 7월 9일
    하루

W

너를 보았어.

 

나한테는 나의 엄마와 아이가 있었고

너는 혼자였어.

낯선 도시에 엄마와 아이를 두고 너랑 또다른 낯선 도시의 대학엘 갔다.

단 하루 뿐인데도 사진에 담고 싶은 풍경들을 많이 봤어.

꿈 속에서 나는 새로 산 폰의 화질이 좋아서 신이 난 채로 사진을 찍었어.

공항으로 돌아와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중이었는데

그 곳은 시골의 버스터미널처럼 의자도 없어서 길에 앉아있어야 했다.

기다리면서 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방금 전에 떨어뜨려서 생긴 상처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었어.

그런데 우리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 정도는 괜찮다"고 위로해줬고

다시 보니 폰이 아니라 폰 케이스에 살짝 흠이 난 정도였어.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지.

비행기표는 돈을 내고 이름을 적는 방식으로 살 수 있었어.

우리는 이름과 행선지를 적고 산책을 했어.

낮은 산 같은 곳을 너랑 함께 걸으며 서로의 신상은 묻지 않은 채 아슬아슬한 대화를 했다.

꿈 속에서 너는 나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고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

 

다시 처음의 도시로 돌아왔어.

까치집같이 생긴 허름한 선술집에서 밥을 먹었어.

너를 거기 두고 엄마를 잠깐 보러 갔는데

가게를 떠나기 전에 멀리서 너를 봤다.

너는 창가에 앉아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어.

멀리서 너를 보니 함께 걸을 땐 못봤던 게 보이더라.

네 옆머리 쪽이 빠져있었어. 그러니까...꿈 속의 우린 중년인 거야.

엄마를 만났는데 엄마가 새로운 동네의 이웃들과 친해져서 즐거운 듯했어.

새로운 동네는 봉천동 철거촌같은 느낌이었는데

가난한 사람들 특유의 따뜻한 공동체적인 분위기 안에서

엄마는 무척 행복한 얼굴이었지. 

애초에 나는 엄마와 아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어.

근데 엄마가 행복한 얼굴로 말했어.

"나는 여기서 살테니까 너 혼자 돌아가라".

아기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냥 거기가 좋은 듯했어.

나보고 빠이빠이를 했고 곧 놀이에 집중했어.

아기는 나의 아이들 중 누구도 아니었어.

막연한 친밀감이 있었고

그렇게 헤어진다 하더라도 곧 만날 수 있다는 편안함.

그러니까 아침에 엄마한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는 것같은 그런 기분이었어.

 

엄마의 집에서 돌아나오며 나는 방금 전 너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어.

내가 너한테 물었지. " C가 그러는데 너 J교수의 딸과 결혼했다고 하던데"

너는 잠깐 말없이 나를 보다가 말했어. "그건 묻지 말지 그랬어'

너는 초라했고 안타까웠고 슬펐지.

엄마의 집에서 돌아나오며 나는 다시 너를 생각했어.

이번에도, 아니 꿈 속에서도 나는 너랑 같이 가지 않기로 결심했어.

완벽하게, 평화롭게, 혼자가 되었는데도.

너랑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더라.

네가 초라하거나 슬퍼서가 아니야.

그냥...... 예전의 너랑은 많이 다른 것같았어.

꿈 속의 그 낯선 느낌은 99년의 마지막 만남 때문이겠지.

내가 여전히 너에 대해서 애틋한 것은

그 때 그 시간이 나한테 애틋해서일 거야. 

허리우드극장, 흐르는 강물처럼, 몬태나, 서울과학관

인사동, 광명, 신촌, 동대문......

너의 학교와 나의 집 주변을 끝없이 걸으며

우리는 늘 꿈을 얘기했지. 꿈을 얘기했어......

 

현실의 네가 꿈 속에서처럼 외롭지 않기를.

꿈 속에서 우리는 손도 잡지 않았어.

사실 꿈 밖에서도 우리는 손을 잡은 적이 없었지.

손 한 번 잡지 않은 채 긴 길을 걸었고 아슬아슬한 대화를 했었지.

네게 가려고도 했었는데.

그랬다면 내 삶이 많이 달라졌을까.

너와 함께 있던 나는 상처입기 전의 나였으니까.

그 때의 나라면 덜 날카롭고 덜 우울했을까.

상처를 모르니 보드라운 마음으로 의심없이 너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너를 생각하면 스무살 시절에 내 앞에 펼쳐져있었던 많은 길과

하지만 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안타까운 나와

가보지 않은 길들이 떠올라서 우울해져.

너는 너무나 달콤해서 위험했다.

달콤한 너는,

나를,

내가 선택한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 것같았으니까.

 

왜 갑자기 네가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너를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삿뽀로 여인숙>을 읽었을 땐 네 생각이 났었다. 그건 소설의 내용 때문일 거야.

윤종신의 노래를 들을 때도 네 생각을 하지. 그건 너를 만나던 그 때, 유행했던 노래여서야.

이렇게 정확하게 내 연상의 로직을 기억하는데

어떻게 네가 내 꿈에 나타나니.

그렇게 초라하고 안타깝고 슬픈 모습으로. 

벨기에에서 과학철학을 공부한다던 너는

가끔식 너의 부모를 만나러 한국에 오면

우리 집 앞에 앉아있다가 가곤 했다지. 

네가 그렇게 집 앞에 앉아있다가 가곤 했다던 그 시간은

내가 먼지처럼 떠돌던 시간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먼지처럼 떠돌다가 문득

내가 먼지 같다고, 아니 내가 쓰레기같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 시간의 끄트머리에서 너를, 현실의 너를 만났어. 

보라매공원 벤치에서의 어긋나던 대화들.

우리가 그때 같이 김밥을 먹었던가.

파랗고 붉었던 김밥 속이 떠올라.

그 때 너는 '너는 다 잊었는데 광명이 그립다'고 했었지.

우리 집 앞 화단에 앉아있다가 차시간을 놓쳐 자주 잠을 잤던 해병대초소가

나보다 더 그립다는 말을 해서 내가 웃었고 우리는 그렇게 유쾌하게 헤어졌던 것같아.

나도 사실은 너보다는 내 스무살 시절이 더 그립단다. ^^

그런데 방금 꿈 속에서 너랑 봤던 풍경은 참 아름다웠어.

고마워.

지금은 삶도, 사랑도, 온전히 네 것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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