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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가을 수확기가 지나니 농토를 빌려 농사를 지은 농민들은 땅 주인들에게 소작료를 준다. 남쪽에서는 '곡수'라고 하든데 그 뜻을 잘 알지 못하겠다. 넓은 땅을 가진 호남 벌판에서는 예로부터 농토를 많이 가진 지주들이 많았고, 그로 인한 아픈 역사가 많았다고 한다.

 

농촌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암태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전농도 없었고 농민운동도 미약할 때라, 일제 때의 암태도 이야기를 했었고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내 고향은 농토가 많지도 않고 소작으로 농사를 짓는 이들도 없다시피 하기에 소작쟁의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았다. 호남벌의 농민들을 만나면서 어렴풋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암태도의 소작료는 수확량의 7~8할을 지주들이 가져 갔다고 하니 소작인들은 생명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곳이 어디이고 어떤 싸움을 하였는지는 제대로 알지를 못하면서 지내왔다. 세상을 알아가면서 처음 알게된 암태도이기에 머리에서 쉬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지난달 그 암태도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이틀동안 암태도 자은도 목포의 근대역사를 둘러보고 왔다.

 

박준성 선생님께서 노동자교육센터의 역사문화기행을 암태도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주어 찾아갔다. 서울서 출발하는 기행이라 압해도 송공항으로 가서 기다렸다. 처음 가보는 압해도는 버스 운전사의 말이 선거유권자만 해도 2만이 넘는 큰 섬이라고 한다. 선착장에서는 압해도 출신의 철도노동자가 기행팀을 마중나와 산낙지와 쭈꾸미 막걸리 떡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출출한 시간이라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고 배에 올랐다.

 

암태도 가는 배에는 사람도 타지만 차량이 가득이다. 요금도 차량이 훨씬 비싸다. 선착장 옆에는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7키로가 넘는 다리를 수천 억이 들어 2018년에 완공한다고 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다리다. 서해대교가 길고 웅장하다고 하는데 그보다 길지 않을까 한다. 이 다리 건설하는 돈이면 섬 주민이며 이곳을 왕래하는 이들에게 배삯을 받지 않고 무료로 다니게 해도 돈이 덜 들것 같다.

 

배에서 내려 처음 찾아간 곳은 암태도 소작쟁의 때 가장 큰 역활을 한 서태석 선생 추모비다. 일제 때 소작쟁의를 이끌며 항일운동을 하고 후에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감옥 생활을  하고 나와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가 59세 되던 1943년 6월 12일 논두렁에서 배 포기를 움켜쥔 채 돌아 가셨다고 한다. 지금 선생의 묘지는 국립묘지에 있고, 선생께서  남긴 시라고 한다. 큰 일을 하셨는데 힘들게 살다가 돌아 가셨다니 더 안타까운 일이다.
 

"울어볼까 웃어볼까

산을 넘고 또 넘어도 앞에는 더 큰 산이요

물을 건너고 또 건너도 앞에는 더 큰 물이다

이 산 이 물 또 건너도 또 산 또 물이 있으리니

갈까보나 말까보나 험한 산 물길을 가고 가고 또 가오면

진리가 말하는 그 유토피아는 응당 있는 줄 알지마는

피곤한 팔 다리 더 가줄 바이 없다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 보자

무쇠 다리 돌 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넣어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이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이 다 없어질 때까지"

 

다음은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이다. 여느 기념탑과 마찬가지로 뽀죽하게 하늘 높이 치 솟았다. 군사문화인가? 높이높이 올라야만 그 업적이 널리 기리는가? 기념비 옆에는 항쟁 때 도움을 준 분들의 이름이 있다. 자세히보면 그 당시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단체와 개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후원 금액이 표시되어 있는데, 몇 '원' 몇 '전'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이야 몇 원은 돈 취급도 안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아주 큰 돈이었는가 보다. 동아 조선일보 이름도 있다. 박 선생께서는 그때의 조선 동아는 오늘의 조선 동아가 아니고, 오늘의 경향 한겨레보다 더 강했다고 한다. 청계천 버들다리에 가도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름이 수두룩하다.

 

암태도 소작 농민들은 소작인회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를 하면서 지주들 조상의 묘를 파 헤치고, 송덕비도 쓰러트리기도 하고, 초등학교에 수백이 모이는 면민대회도 열었다 한다. 소작쟁의로 잡혀간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목포경찰서에 가서 죽을 각오를 하고 '아사동맹'을 하여 단신농성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소작쟁의에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되자 일제가 중재하여 문재철을 비롯한 지주들과 소작인이 소작료 약정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 산 속에서 추위에 떨며 삶터를 지키려는 어르신들의 심정과도 같을까?

 

칠 팔 할이 넘는 소작료를 4할로 낮추고, 미납된 소작료는 3년에 나누어 내고, 지주는 이 천원을 소작인회에 기부하는 등 약정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소작인회에 기부를 하지 않는 등 약속이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암태도 소작쟁의는 승리를 했다. 자은도나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소작쟁의는 퍼져 나갔다고 한다.

 

자은도로 들어가 일몰을 보고, 바닷가에서 자며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목포로 나왔다. 유달산 아래 있는 옛 동양척칙회사 건물을 근대역사관으로 꾸며 놓았다. 90년대 일제 청산을 한다고 하면서 서울의 중앙청을 비롯하여 일제가 세운 건물들을 철거했는데, 여기는 남겨 두었다고 한다. 동척의 건물은 외형으로 부터 일장기의 동그란 문양이 있고, 건물 안에는 조선 농민을 착취해서 쌓아둘 육중한 금고가 있다. 근대사 박물관이기에 당시 목포와 근대 한국의 생활상과 역사를 볼 수 있도록 여러가지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동척, 그 주위는 일본인 촌이었다고 지금도 당시의 건물들이 남아있다.

 

박물관에서 보이는 유달산을 오른다.노적봉 이등바위 일등바위 유선각 목포의 눈물 노래비, 높지 않으면서 목포시내와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으로 다시 함께 오르고 싶은 산이다. 목포의눈물 시비를 보면서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김대중대통령 장례식이 서울 시청 앞에서 열렸는데, 강허달림이 그때 목포의눈물을 불렀다. 나도 추모하는 마음으로 더운 날에 그곳에 찾았지만, 함께간 여수 댁 아짐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한서린 눈물을 헤아려 보려고 한 적이 있다.

 

유달산을 내려와서 갖은 반찬에 가을 무우와 갈치 조림으로 먹는 점심 식사는 시장기와 더불어 지금도 침을 꿀꺽하게 만든다. 암태도 목포 한 많은 역사가 많다. 옛 시간을 되돌아 보는 것은 오늘과 내일을 제대로 살아가려고 함일 것이다. 앞으로 또 다른 곳을 돌아보고 싶다. 그때가 언제일지 녹색동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날도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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