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美 영화감독, 강정·제주에 주목한 이유

평화가 무엇이냐 2015/08/15 16:54

70세 美 영화감독, 강정·제주에 주목한 이유

한형진 기자 cooldead@naver.com 2015년 08월 15일 토요일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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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스 트렘블레이 감독. ⓒ제주의소리
[인터뷰] ‘제주의 영혼들’ 연출 레지스 트렘블레이, 차기작 촬영 위해 강정 방문
 
 
동아시아의 작은 섬 제주, 그리고 섬 속의 더 작은 마을 강정에 주목한 푸른 눈의 늙은 이방인이 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잘못을 외면하지 않았고, 먼 이국까지 찾아와 숨겨진 역사와 투쟁의 현장을 다큐멘터리 영화 ‘제주의 영혼들’(The Ghosts of Jeju)로 만든 감독, 레지스 트렘블레이(Regis Tremblay, 70, 이하 레지스)다.
 
강정마을에 들어선 사단법인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14일 레지스 감독을 만났다. ‘제주의 영혼들’을 잇는 차기작 ‘자정 3분 전’(Three Minutes of Midnight)을 촬영 중인 그는 “강정이 전 세계 평화운동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며 변함없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레지스 감독은 제주에 앞서 일본 교토,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앞으로 괌, 마샬제도까지 찾아갈 예정이다. 그가 차기작 배경으로 점찍은 강정, 교토, 오키나와, 괌, 먀샬제도의 공통점은 미군의 영향력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일본 교토에는 미군이 운영할 탄도 미사일 추적 레이더(TPY-2)의 설치 작업이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오키나와는 섬 전체 면적의 20%를 미 해병대, 육군, 공군 등 11개 군사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괌 역시 미군이 주둔해 있는 지역이며, 마샬제도는 미국이 60번 이상 핵실험을 진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강정에 건설 중인 해군기지는 앞으로 미군의 전략적 거점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지역 주민들이 미국, 현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슬픈 공통점이다.
 
레지스 감독은 지난 2012년 9월 강정마을, 제주4.3평화공원을 돌며 ‘제주의 영혼들’을 제작했다. 영화 부제는 ‘The Untold History of the U.S. in Korea after World War Ⅱ.’ 
 
이 작품은 지난해 열린 시카고 세계평화영화제(POEFF)에서 Expose Award(발굴상)를 수상했다. 미군이 제주4.3 당시 개입한 정황을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교수 등 한국 전문가의 증언, 미국 정부 문서를 토대로 추적하고, 수십 년이 지나 미군과 연관된 군사기지로 강정주민들이 고통 받는 안타까운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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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제주의 영혼들' 장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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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제주의 영혼들'에 출연한 미국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로 손꼽히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 ⓒ제주의소리
‘제주의 영혼들’은 당시 시카고 세계평화영화제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합당한 작품이 나올 경우에만 수상하는 일종의 특별상인 발굴상을 받았다. 
 
레지스 감독이 다시 강정에 온 이유는 ‘제주의 영혼들’만으로는 부족한, 남아있는 이야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의 영혼들을 제작하면서 (미군과 제주와의 숨겨진 역사를)오롯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달들어 매일 10시간씩 작업에 매달렸다. 비록 배급사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정식 개봉은 하지 못했지만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영화를 상영했다.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한국, 일본, 중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등 6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밝혔다.
 
또 “이 영화를 만들고 나니 미군으로 인해 고통 받는 다른 지역들이 눈에 들어왔다. 400년 마을 역사가 한 순간에 망가진 강정을 비롯해 교토, 오키나와 등 많은 곳에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미군기지에 맞서 저항하는 모습을 새로운 작품으로 찍게 됐다”고 설명했다. 
 
레지스 감독과의 대화는 강정에서 활동하는 평화활동가 조약골 씨가 통역을 맡았다. 그는 ‘제주의 영혼들’ 한국어 제작과 함께, 시카고 평화영화제에도 감독과 동행해 강정의 상황을 미국인들에게 알린 바 있다. 
 
감독의 나이는 올해로 70세. 깊게 주름진 이마와 늘어진 볼에서는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는 열정은 고희(古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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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강정마을에서 촬영 중인 레지스 트렘블레이 감독. 사진출처=제주의영혼들 홈페이지(www.ghostsofjeju.net)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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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스 트렘블레이 감독. ⓒ제주의소리
부당한 입지 선정 절차에 분개하며 해군·정부와 3000일 넘게 싸워온 강정은 레지스 감독에게 특별한 영감을 선사했다.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단지 작은 다툼 정도로 알고 있지만 강정에도 직접 찾아오며 문제를 지속적으로 알려온 브루스 개그논(Bruce K. Gagnon) ‘우주와 핵무기 반대 글로벌네트워크’ 사무총장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2012년 강정을 찾았다. 그는 당시 경험에 대해 “눈을 떴다”고 표현했다.
 
레지스 감독은 “제주해군기지는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군이 제주에 저지른 오랜 역사와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난 지금까지 미군이 제주에 저지르는 일에 대해 배우거나 누구에게 듣지 못했다. 4.3 당시 미군의 역할과 현재까지 미군이 전 세계에 저지른 일을 직접 보고 알게 되면서 내 삶은 크게 변했다. 이 내용을 알려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이 나를 지금까지 움직였다”고 강조했다.
 
차기작 ‘자정 3분 전’은 각국의 투쟁과 함께 핵으로 인한 전 지구적 위협을 다루고 있다. 영화 제목은 핵전쟁, 기후변화 등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을 가상의 시계로 만든, 일명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에서 빌려왔다. 인류 멸망의 순간 12시에 불과 3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렇게 그는 미 군사기지, 환경파괴 문제, 사회·경제적 불평등 운동(Occupy Movement) 등 보다 나은 삶을 고민하는 움직임을 주목한다.
 
레지스 감독은 “지금 세상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리스, 스페인, 이집트 등 전 세계 소시민들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나 싸웠다. 내가 영화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은 문제들은 각자 스스로가 깨닫고 함께 뭉쳐야 해결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희망은 자각하는 사람들이 깨어나서 평화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놀랍게도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묘비명(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현재 촬영 중인 레지스 감독의 차기작 ‘자정 3분 전’의 완성 시점은 1년 뒤를 바라보고 있다. 비록 고령의 나이에 연금으로 생활하는 몸이지만 자신의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는 응원은, 노구를 전 세계로 누비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는 “2012년 강정 촬영 당시에는 이곳 사람들이 ‘웬 미국인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냐’고 낯설어 했지만 ‘제주의 영혼들’이 완성되고 나서 지금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얼마 전 다녀온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제주의 영혼들 만든 감독 아니냐’고 알아봐 신기했다”고 웃음 지었다.
 
레지스 감독은 작은 강정마을 속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발견했다. 올바르지 못한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평화를 부르짖는 낯선 동양인들에게 전 세계를 관통하는 평화의 정신을 느낀 것이다.
 
그는 “나는 강정이 전 세계 평화운동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주의 영혼들’을 접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강정은)나와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나와 동떨어진 삶이 아니’라고 말해줬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싶다”고 희망했다.
 
자리를 정리하면서 감독은 기자에게 ‘제주의 영혼들’이 담긴 시디(CD) 한 장을 건네줬다. 
 
그리고 “이 영화를 당신이 꼭 봤으면 좋겠다. 영화를 주변에 얼마든지 공유해도 좋다. 진실을 알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70년이란 시간은 편안한 자리를 찾아 삶을 정리하는 정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인류가 함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문제적 현장을 누비는 이 미국인의 70년은 다른 어느 동년배보다 열정이 가득했다.
 
70세를 의미하는 고희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 있다. 종심(從心)이다.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다.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서 난동을 피우고 때마다 거리에 나와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는 노인들이 ‘밥 한 그릇에 영혼을 팔았다’는 조롱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이 시대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미소 짓는 레지스 감독을 보며 종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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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스 트렘블레이 감독.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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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지스 트렘블레이 감독과 평화운동가 조약골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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