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새만금

평화가 무엇이냐 2005/12/22 04:07
새만금 항소심 판결이 나던 오늘 나는 계화도 어민들과 함께 있었다.
법원은 이 새만금 재판을 '환경이냐 개발이냐'의 철학적 문제라고 정의내리고 개발의 편을 들어주었다.
재판부가 제시한,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난해한 판결문에 그렇게 나와있단다.
난 읽어봐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법원과 기득권자들과 가진자들은 개발을 해야 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런데 어민들은 이건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고 절규한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권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환경이냐 개발이냐를 놓고 지루한 탁상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 거기서 소외당해왔던 어민들의 숨통은, 갯벌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생명체들처럼, 서서히 조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방조제 남은 구간 2.7km를 막아버리면, 그래서 갯벌이 싸그리 죽으면 어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굶어 죽든지 아니면 정든 갯벌에서 쫓겨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야 한다.
둘다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임을 아는 어민들은 울부짖는다.
갯벌이 막히고 있음을 아는 조개들은, 게들은, 물고기들은 소리도 제대로 질러보지도 못한 채 떠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거대한 조개무덤들이 갯벌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다.
 
새만금 갯벌을 둘러싼 공방은 그래서 생존권의 문제, 즉 죽이느냐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이것이 새만금을 둘러싸고 십 년 이상 벌어져온 논란의 본질이다.
어민들은 이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정부가, 농림부가, 전라북도가, 농업기반공사가 설마 어민들을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며 막연한 기대를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2003년 6월 방조제 4공구가 막히고 갯벌이 죽어가면서 어민들은, 갯벌의 생명들은 숨통이 막혀가면서도 자신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 정부와 개발세력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이 이렇게 어민들의 목을 조르지는 않겠지, 많이 배운 똑똑한 법관들이 어민들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일은 설마 하지 않겠지, 기대에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투기와 개발로 이윤을 얻고 그 헛된 돈지랄로 세상을 망쳐온 자들이 이름 없는 어민들과 이름 없는 생명들의 목줄을 구둣발로 짓누르고 있는 와중에도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질끈 눈이라도 감아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법원이 새만금 갯벌을 죽여버리라고 간단하게 선언을 함으로써 어민들은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환상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미련한 기대를, 허황된 환상을 남김 없이 없애준 법원에 어민들은 오히려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만금 어민들에게 남아 있는 일은 이제 죽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것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죽어가는 갯벌의 모든 생명들의 힘을 모아 죽지 않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것.
생명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온힘을 모아 구둣발을 짓누를 개발업자와 자본가들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당하느냐, 아니면 독기를 모아 대드느냐.
답은 너무도 명확하다.
 
오늘 생명을 죽인 대가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고 환호하는 자들에게 선언하자.
갯벌을 죽여 강행한 개발은 결국 가진자들의 기름진 배만 더욱 살찌울 것이며,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메마른 등을 후려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모든 이들이여.
살아서 평화로운 갯살림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절규하는 어민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래서 함께 연대해 새만금 갯벌을 지켜내자.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싸우는 어민들과 어깨를 걸고 마지막 힘을 모아내자.
생존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숨붙이들은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
 
계화도로 돌아가는 어민들의 눈에 처연한 살기가 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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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2 04:07 2005/12/22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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