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의 힘은 총과 칼보다 강하다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7/07/15 18:36
평화재단에서 여는 '평화연구와 평화운동의 실천전 쟁점' 워크샵이 있어서 가평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 가평역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거의 100km에 이르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왔다.
덕분에 다시 피부가 검붉게 탔다.
청평, 대성리를 지나 마석에 이르렀을 때 자전거를 세워놓고 모란공원에도 잠시 들렀다.
김기설, 김귀정 열사 등 나를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했던 사람들부터 허세욱, 전용철 열사 등 최근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슬퍼하게 했던 분들도 바로 이곳에 잠들어 계시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갔던 길, 저도 지금껏 힘차게 걸어가고 있어요'
나직이 중얼거렸다.
 
워크샵이 열린 장소는 가평역에서도 15km 정도 더 가서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 '바람과 물 연구소'였다.
산 공기가 맑고 도시의 더러운 매연이 없어서 그랬는지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포근하고 보드라운 산의 기운에 파묻혀 있는 것이 좋았다.
그 품에 푹 안겨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국가가 만들어놓은 폭력적인 체제 때문에 수많은 민중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이라크도, 아프가니스탄도, 파키스탄도, 팔레스타인도,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반도에서는 그런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평화체제를 만들어야 사람들이 죽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북측의 인민에게, 남한의 민중에게 한반도 평화체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
나에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평화를 생각할 때 생각의 단위를 국가로 상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를 평화의 주체로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국가의 안보라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 자리에 개인의 불안과 편안함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체제를 생각할 때 국가의 단위가 아니라 개별 인간의 자리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안에서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몰아내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래야 개인에서 시작해 그들이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 대안적 해방공동체를 평화의 단위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북측에서 살아가는 개인이라면 짐작컨데 미국의 경제봉쇄가 끝나고, 선군정치로 대표되는 병영체제도 해체되어야 비로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남한에서 살아가는 내가 느끼는 가장 커다란 불안감, 즉 내가 만약 지금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자동차가 없어져야 한다고 결론이 나온다.
나의 평화를 해치는 가장 큰 존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은 자동차에 있다.
권정생이 말한 것처럼 자동차를 타지 않아야 레바논이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이라크든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산화탄소와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매연도 없어져 공기도 맑아지며, 석유의존도도 줄일 수 있다.
 
자동차에 의한 내 목숨의 위협은 내가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일 접하는 위협이다.
자동차를 없애라는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은 나에게 목숨이 걸린 현실인 셈이다.
 
이번 워크샵에서 논쟁은 별로 없었고, 토론도 흥미롭지는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과 자전거를 신나게 탈 수 있어서 좋긴 했다.
정희진 선생이 젠더와 평화주의에 대해서 발제를 했는데, 난 처음 보는 정희진 선생이 단박에 좋아졌다.
그는 사소한 부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꼬치꼬치 따지면서 문제제기를 잘 했는데, 그런 부분이 더욱 맘에 들었다.
그를 의식해서인듯 한 명의 (남성) 발제자는 '페미니스트는 내게 낯설다'고 말했는데, 그 말에 정희진 선생은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정희진 선생에게 그런 언급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대단히 심각한 위협이었으리라.
아마도 그 (남성) 발제자는 자신의 그 말이 여성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말에 정희진 선생이 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며 비판을 했어야 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평소 그 (남성) 발제자에게 여성주의자는 별로 존재감이 없지 않았을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바로 억압과 굴종과 죽음을 뜻한다.
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차별 받으며 살아온 것이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가고 있는 나에게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도로에서 자전거는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자전거가 도로를 다니는 것이 내게는 낯설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당장 나는 발끈하면서 화를 내며 그 운전자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희진 선생을 마음속으로 지지했다.
 
평화워크샵에서 글도 하나 발표를 했다.
내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오려붙이고, 약간의 내용을 첨가한 것인데, 읽어보고 싶다면 아래를 눌러보면 된다.
 
워크샵 전에 미리 배포된 이 글을 읽어보고 어떤 분이 글쓴이가 당연히 여성인줄 알았다고 내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기분이 참 좋아졌다.

쟁점토론 마당 : 절대적 비폭력과 저항적 폭력의 정당성 문제
 
비폭력의 힘은 총과 칼보다 강하다
- 군사주의, 사회적 방어, 비긴다는 것 -
 
조약골 | 평화활동가
 
 
일전에 동화작가 박기범 씨가 내게 진지하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라크 민중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냐고 말이죠. 평화운동가의 입장에서 그들의 저항폭력을 잘못된 것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총을 내리라고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군이라는 보다 흉악한 테러에 맞서서 그 폭력을 멈추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므로 지지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제가 평화운동과 비폭력 저항의 중요성에 대해 떠들고 다녔는데, 과연 비폭력 저항이라는 것이 지금의 이라크와 같은 전쟁 상황에서 가능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에게 진심어린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왠지 그의 눈을 보고서는 말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라크를 몇 번이나 다녀온 그는 그 두 눈으로 내가 보지 못한 많은 이라크 인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직접 보았을 그의 두 눈에서는 이라크의 고통이 너무도 생생히 묻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말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새만금 갯벌을 직접 가보기 전에는 그 아픔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천성산을 직접 가보기 전에는 그 아름다운 산이 깎여 나간다는 아픔을 난 느끼지 못했지요. 돌이켜보건대, 내 두 발로 직접 평택 대추리 땅을 직접 밟아보기 전에는 주민들의 촛불의 외침이 내 귀에 들리지 않았었습니다. 저항폭력의 정당성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민중들이 왜 그런 식으로밖에 싸울 수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들의 생명의 저항에 우리가 먼저 깊이 공감할 수 있다면 절대적 비폭력과 저항으로서의 폭력의 문제에 의외로 쉬운 해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성폭력 생존자가 지은 책을 한 권 읽게 되었습니다.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 성폭력의 기억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아’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끔찍한 폭력을 당하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저항을 하더라고 쓰고 있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서 모든 힘을 끌어내 저항을 했던 것입니다. 저자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가해자의 완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극단적인 순간’에 저항폭력의 정당성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리고 그런 상황은 거의 대부분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그곳으로 끌고 들어가지요,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는 중요해지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는 생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라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즘 들어 이라크의 아픔은 더욱 격화되고 있습니다. 폭력에 둔감해진 우리들과는 다르게 이라크 사람들은 오늘도 너무도 생생하게 폭력의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족이,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미군에 의해, 그리고 종파간의 갈등에 의해 죽었다는 끔찍한 고통을 이라크 사람들은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다 분노가 넘치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총을 들게 됩니다. 비폭력직접행동을 중시하는 나는 그것을 틀렸다고 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솔직히 그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이라크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그들의 등을 토닥여줄 수 있다면,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을 해줄 것입니다. 성폭력 생존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는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민중(=여성, 소수자)들이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게 만든 것들에 주목하게 될 때 비로소 비폭력의 가치가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끝내려는 염원이 바로 절대적 비폭력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폭력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그 이라크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폭력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묻고, 그것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왜 성폭력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피해자들은 그 폭력적인 구조에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폭력적인 구조를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는지 묻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폭력의 가치에 기반한 평화운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미군 철수와 자이툰 부대 철수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종식을 염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대항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 비폭력주의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나는 언제나 비폭력은 올바르고, 폭력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비폭력은 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극단적인 경우를 포함해 모든 상황에서 인간의 옳고 그른 행동의 기준이 어떤 도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폭력의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춰 바라보게 되면 왼쪽 뺨을 맞고 있는 사람에게 오른쪽 뺨을 내주라고 말하는 것이 비폭력이 됩니다. 하지만 나에게 보다 의미 있는 비폭력은 폭력으로 가득한 이 사회를 바꾸는 운동의 실천지침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비폭력은 일상을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 비폭력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극단적인 폭력들이 항상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매일 우리들이 목도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밖에도 총을 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을 하는 곳은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폭력투쟁이 벌어진 적이 많이 있었죠. 가까운 대추리에서도 우리는 ‘저항폭력은 정당하다’는 믿음으로 죽봉을 들고 경찰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폭력은 항상 나쁜 것이다’ 또는 ‘저항폭력은 괜찮다’ 같은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그리고 비폭력의 가치, 평화의 가치를 중시하든 우리들이 질문해야 할 것은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분노와 증오로 총이나 폭탄, 또는 쇠파이프를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을 강간하는 자의 머리를 돌로 내리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힘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비폭력은 우리의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나 자신을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요인들은 무엇이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상황, 분노와 증오의 감정은 일상적으로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분노와 공격심과 증오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만 꼽자면 한국에서 그것은 바로 군대입니다. 군대의 가치, 즉 ‘우리의 모든 차이와 차별은 무시한 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폭력으로 적을 몰살시키자’는 것이 사회 전체로 퍼져 결국 우리들은 이렇게 군사화된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군사화된 국가는 없는 두려움도 새롭게 조장해냅니다. 당신도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옆에서 친구가 죽어가고 있는데 비폭력 타령만 할 것이냐고, 두려움을 조장하며 사람들은 총을 들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총을 들고 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매일 떠들어댑니다. 무술을 배워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남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자신에게서 분노를 없애는 것입니다. 비폭력적인 삶은 자신의 일상에서 두려움을 없애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분노와 두려움에 기댄 폭력적인 제도들, 구조적인 실천들을 자리잡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국가라는 것이 조용히 사라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폭력 운동인 것입니다. 비폭력은 맞고 있는 사람에게 계속 맞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폭력이 벌어지는 원인을 보고, 그것을 없애나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파티스타는 어떤가요? 그들의 자치를 군사주의적 지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총을 든 무장항쟁은 반드시 군사주의 사회를 만들어낼까요? 무장항쟁이 끝나 승리를 거둔 사회가 자율적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평화적이고 수평적인 사회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라도 있을까요? 총을 들고 싸운 다음 모두가 총을 내리면 되지 않을까요? 폭력으로 일상을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비폭력으로 일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다시 한번 일상을 살아가는 문제인 것이며, 일상에서 부단히 연습하고 실천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정당방위로 총을 드는 것도 한번 따져보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저 같은 비폭력주의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답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폭력의 피해자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폭력상황에 노출된, 그것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그 사람에게 남는 것은 분노이고, 한이고, 치유되지 않는 고통입니다. 심지어 '상대방을 죽인다면 내 고통이 말끔히 없어질까?' 하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복수를 하고 싶다, 그를 죽이고 싶다, 총이 있다면 상대를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 폭력적인 방법으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폭력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상대방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욕망에서 생성됩니다. 이런 욕망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폭력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들지는 않을까요? 폭력의 피해자가 저항폭력을 저지르는 경우 그 사람에게 총을 든 기억, 폭력을 행사한 기억이 어떤 영향을 주는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의 피해자는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삶을, 일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비폭력의 가치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일상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수 없이 많은 싸움과 투쟁, 경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이란 싸움이 없는 일상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싸움이 없는 삶이란 죽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일상이란, 평화로운 삶이란 싸움을 끝내기 위해 살아가는 일상을, 싸움을 끝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을 끝내려면 이기거나 져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비길 때 그래서 나와 남의 대립이 없어질 때 싸움은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승리란 역설적이지만 완전한 비김입니다. 완전히 비기지 않고는 싸움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경기에서 우리는 ‘설욕전’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비긴다는 것은 재대결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다시 싸움이 시작된다는 암시를 비긴다는 말에서는 일반적으로 풍기게 됩니다. 비폭력 저항이란 폭력적 상황을 끝내는 싸움이며, 이 때 비긴다는 말은 예를 들면 두 권투선수가 싸움을 잠시 멈추고 다음 대전까지 휴식하는 비김이 아니라 아예 권투장갑(무기)을 내려놓고 서로 다른 길로 걸어가 버리는 비김을 말합니다. 권투라는 싸움의 장이 소멸되어 버리는 비김이 비폭력에서 말하는 비기는 저항입니다. 저는 이것이 비폭력 저항의 한 방법이며, 평화를 위한 투쟁의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는 나와 남을 가르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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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5 18:36 2007/07/1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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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풀 2007/07/15 19:07 Modify/Delete Reply

    자동차 위주의 생활을 통해 대형마트,대형냉장고,4차선,6차선들의 길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매연과 경적소리.
    골목길마저 안전한 놀이터가 되지 못하는 현실.
    어릴땐 집앞에 밤이면 땅강아지를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자동차가 많은 것들을 앗아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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