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처럼 살아남는 운동권

나의 화분 2010/04/18 20:13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을 두리반에서 보내다가 망원동 사무실에 돌아왔다.

별로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여러 일들이 일어나다보니 망원동에 오질 못했다.

평소 일하는 사무실이 아니다보니 정리해야 할 문서들이며, 보내야 할 편지들이며, 올려야 할 파일들이며, 연락해야 할 사람들이며 전혀 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치 않다보니, 내가 일하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컴퓨터도 내가 쓰던 것이 아니면 사용하는데 뭔가 불안해서 일을 시작할 수가 없다.

두리반 사장님의 남편 유채림 선생님도 원래 자기가 자던 곳이 아니면 잘 못자던 성격인데, 두리반 농성을 시작하면서 아무데서나 자게 됐다고 하던데, 나도 실은 익숙한 공간이 아니면 잘 자지도, 먹지도, 일하지도 못한다.

급한 상황이면 나도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하는데, 쯧쯧, 이 세심하고 소심한 성격은 나 역시 농성을 시작하거나 하는 긴박한 상황이 아니면 바꾸질 못한다.

잡초처럼 살아남는 운동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수십년 전인데, 그게 잘 안된다.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오랜만에 온 것처럼 사무실에 돌아오니 기분이 아늑하기도 하지만 묘하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이곳에선 항상 밀린 일들을 하며 새벽까지 혼자 있게 되는데, 난 그런 생활이 지겨우면서도 딱히 다른 대안이 없고, 다른 곳에 있으면 금방 지겨워질 이곳이 그립다.

 

억지로 사람을 끌어들여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리 하자고 사람들을 졸라도, 그들이 마음이 내켜서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일은 진행되지 않는다.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조르는 일은 이제 그만 하기로 하자.

가만 내버려두어도 각자 알아서 내키는 일을 할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두리반에 미디어센터를 만들자고 몇 차례 레아 사람들에게 제안을 했는데, 반응이 별로 없다.

난 두리반이 새로운 레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인 것 같다.

그냥 두리반에 모인 사람들과 필요한 것을 해결해나가면 될 것 같다.

새로운 사람들과 접속해서 새로운 과제들을 풀어가는 것도,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적응하기 어렵지만, 괜찮은 일 아닌가?

인터넷이 필요하면 거기 모인 사람들과 풀어가면 되고, 노가다가 필요하면 거기 모인 사람들과 풀어가면 된다.

조르고 설득하지 말자.

길바닥평화행동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무슨 공연, 무슨 행동을 하든 하고 싶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공연행동을 하면 된다.

내키지 않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되겠지.

알아서들 하겠지.

내버려 두면 되겠지.

천천히 하면 될테지.

 

두리반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매일 인사하고 서로 소개할 기회가 생긴다.

나를 소개하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뭐라고 말해도 불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어차피 1분의 소개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냥 간단히 이름 정도만 말하고 나머지는 그냥 남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그리고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자세히 소개할 기회가 차차 찾아올 것이다.

관심이 더 생기면 더 알게 될테고, 관심이 없으면 피상적인 것들만 알면 된다.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는 항상 열려 있으니까 굳이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요즘은 칼국수 음악회 진행자라고 설명한다.

그게 지금의 날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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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8 20:13 2010/04/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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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비 2010/04/19 09:54 Modify/Delete Reply

    누구에게나 얼마만큼의 '전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각자마다 그리고 시간이나 상황마다 다르다고 생각해. 돕 같은 경우 그게 좀 빠른 편인 것 같고. 레아 사람들에게는 아직 더 용산 안에있던 레아를 가지고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면 나는 용산에 가는 게 참 싫었던 것 같아. 가면 자꾸 대추리 생각이 나고, 사람들하고 친해지는게 너무 겁나고 나중에는 결국 상처받을까봐 뭐 그런 것들이.

    그렇지만 돕의 말처럼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어디서든.
    조만간 두리반에서 또 만나자.

  2. 비올 2010/04/19 14:38 Modify/Delete Reply

    원래 그래 ^^ 돕 놀러오세요. 수원으로...쪼금만 벗어나도 속이 좀 션할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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