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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불멸의 신神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방 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

내 영혼 안에는 인도印度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

한번은 카페에서 술 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하며 싸웠다.

나는 몇 시간씩 물을 응시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뒤좇을 수 있지만,

어느 주간 신문에 내 책에 대한 파렴치한 논평이 실렸을 때는 자살을 생각했다.

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슬기롭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때는 공자孔子의 형제지만,

신문에 오른 참석 인사의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울분을 참지 못한다.

나는 숲 가에 서서 가을 단풍에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의혹의 눈으로 꼭 조건을 붙인다.

이성의 보다 고귀한 힘을 믿으면서도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 아둔한 모임에 휩쓸려 내 인생의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인 탓에 하늘을 믿고 땅을 믿는다.

아멘.

 

- 하늘과 땅Ohne Anfang und 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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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의 추억

서울시장 후보들의 TV토론을 보았다. 강금실은 뭐랄까, TV토론에 적한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오세훈은 여유롭고 차분해보였다. 흥미진진한 토론회는 아니었지만, 꽤 마음 졸이며 보았다. 김종철 후보가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긴장하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손뼉을 치기도 했다.

 

주택문제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김종철후보가 공공임대주택의 구별 쿼터제를 도입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이렇게 좋은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리고는 정말이지 뜬금 없게도, 죽은 시아버지 생각이 난 것이다.

 

재작년 가을에 결혼해서 생긴 시아버지인데 작년 가을에 장례를 치렀으니, 생각해보면 참 짧은 인연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동안 어쩜 그리 많은 김치를 담그어주었는지. 며느리 예쁘다고 달마다 김치 담그어주던, 꼬막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우연히 흘려듣고는, 나 갈 때마다 꼬막 무쳐주던 시아버지.

 

그 시아버지는, 신동엽이 나와 하던, 주말 저녁 남북어린이들의 "가상" 퀴즈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쩜 남북 아이들이 한데 모여서 퀴즈를 하는지 도통 신기해서 알 수가 없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었다. 몇번이고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엔 그냥 포기하곤 웃고 말았다.

 

김종철 후보가 공공임대주택 이야기를 할 때, 공공임대아파트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가기 어렵다더라며 푸념하던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리고는 문득, "가상" 퀴즈를 진짜 남북 아이들의 경합으로 오해하던 시아버지가 떠올랐다. 그 시아버지가 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텐데, 하면서.

 

서울시장 후보들의 합동토론을 보다, 이렇게 한참 죽은 시아버지를 추억하게 된다. 죽은 시아버지가 살아, 좋아하며 박수치는 후보가 되어야 할텐데. 아, 이 짧은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이 쏟아진다. 남북 애들이 주말마다 모이는 걸 희한해하던 시아버지 생각에 울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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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과 최민식

오늘 배우 최민식의 인터뷰를 보았다. 최민식을 보는데, 언젠가의 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전 정진영의 인터뷰와 비교해보자면, 정진영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정진영은 단호하게 말했었다. "배우는 전혀 좋은 인간일 필요가 없다"고. 개자식이고 미친년이어도 된다는 소리다. 배우는 연기로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민식은, 뭐랄까, 어떤 부분에서도 단호하거나 냉정한 구석이 없어보였다. 무심히 틀어놓은 TV로 최민식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좀 뜨끔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마음 속으로 조금씩 키득거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유부남이 좋아졌으면 사랑을 하든지 그만둬야지, 자기연민과 죄의식에 빠져 이도저도 못하면서 자기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

 

스크린쿼터와 한미FTA가 한창 언론을 달굴 때, 영화인들이 농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한 것이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영화 찍는 사람들이 농민들에게 죄송해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어떤 사회적 순간에, 영화인과 농민이 사회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 힘과 관계란 것이 서로에게 재앙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라고, 서로 아파하면서 서로 반가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최민식은 왜 농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하나. 배우 개런티가 지나치게 높다고 감독들이 말할 때 불쾌해하며 기자회견을 자청했던 그였다. 그런데 농민들에게는 죄송하다고 한다. 영화배우가 그동안 농민들 일에 너무 무관심했다고, "죄송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온통 서로에게 죄송해하는 농민들과 배우들과 노동자들과 장애인들과 동성애자들로 넘쳐나야 할 것이다.

 

배우 개런티가 높은 건 사실이다. 최민식은 바로 이 한 문장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 스탭 인건비와 어떻게 상관되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게 핵심일 뿐이다. 배우들이 영화 만들고 연기하는 동안 농민과 농업 문제에 관심 없었던 게 사실이라 한들 그게 부끄럽거나 죄송할 일은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배우와 농민을 만나게 한다는 게 핵심인 것이다.

 

단호함이나 냉정함이란 어쩌면 다른 많은 선한 태도와 덕목들보다 훨씬 더 윤리적이면서 유익한 것인지 모른다. 아무 것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일수록 단호해지지 못하고 냉정해지지 못한다. 단호하지 못하고 냉정하지 않은 사람은 늘 필요 이상의 말을 한다. 그래서 핵심이 모호하다. 반면 단호하고 냉정한 사람은 필요한 핵심만을 말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청자의 선택이다.

 

배우는 개자식이어도 미친년이어도 된다고 말하던 정진영도, 농민들에게 "죄송하다"며 큰절을 올리는 최민식처럼 스크린쿼터 투쟁의 간판인사다. 나는 가급적 정진영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단호함과 냉정함이 그것과 반대편에 있는 듯한 다른 선한 덕목들보다 어떻게 더 윤리적이고 유익한 것인지를, 삼십을 넘겨서라도 배우게 된 것이 다행이다. 조금 뜬금없지만, 너의 그 선한 의도가 바로 그녀를 죽이고 있는 것이라고, 베를렌느에게 일갈하던 랭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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