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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체념의 사이.

나에게 30대는 언제올까.

어릴 때부터 30대를 꿈꿔왔다.

왠지 그 나이쯤되면 모든게 편안해질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스스로 꾸릴 수 있게 되고,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올것만 같았다.

큰 욕심내지 않으며, 천천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20대 초반부터 난 그렇게 30대에 접어든 남자들이 멋있어 보였다.

내 또래의 남자 애들은 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보였고,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한듯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30대가 체 4년도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다. 마음에 여유라고는 1g도 남아있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무거워질줄 알았던 여유는 가벼워지고, 여유가 떠난 자리에는 체념이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게 기다리던 여유가 아닌 체념이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꿈을 부여잡고 있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재능이라는 게 있고, 억울하게도 어릴 적 경험이 그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노력만 한다고 모든 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세상은 징하게 변하지 않는 다는 것도.

 

노력해서 안 될 것이 없고, 운 따위는 변명이며, 우리는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던 내 믿음은

이렇게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숨을 쉬기 위해 체념하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점을 겨우겨우 깨달은 2년이 이렇게 지나간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건만.

 

이렇게 예상과는 다른 30대가 다가오고 있다.

여유 대신 체념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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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시간들

허무한 1년이 끝나간다. 그래서 일까? 몸이 무척 나른해진다.

아침에 눈뜨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연필을 쥐고 글을 쓰는 것이 귀찮다.

모든 것이 귀찮다. 가만히 앉아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백수인 만큼 하루종일 나른해 있을 수만은 없어 겨우 겨우 움직이고 있다.

 

사실 이런 나른한 상태를 즐기고 있다.

지금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싶지가 않다.

문제는 몸 뿐만이 아니라 내 정신도 나른해 졌다는 것이다.

나사가 전부 풀렸다.

앞뒤 분간 못하고 있다.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오랜만에 아주 큰 실수를

미안할 뿐이다.

 

나른한 정신상태를 다시 긴장시켜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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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하기의 어려움

일명 언론고시라는것을 하게 되면 좋으나 싫으나 내 생각을 글로 주장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하면 더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을까를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 뜯는다.

하지만 쉽게 설득력 있는 글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 생각이 옳다고 우긴다. 이건 정말 주장이 아니라 우기는 것이다.

 

자꾸 업데이트되는 사건들.

아직 나는 사형제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젠 다문화사회에 대한 내 주장을 밝히란다.

일주일마다 논술 주제를 정해놓고, 자료 조사를 하고, 머리가 복잡한 상태에서 펜을 든다.

그리고 반복되는 우기기. "이래서 내 주장이 맞다."

 

뭔지도 모르면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자꾸 주장만 하는 게 싫어졌다.

 

갑자기 글을 쓰고 그것을 남기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지금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10년 후에도 나는 옳다고 주장할 까?

아닐 것이다. 25살 때는 내가 참 무지했음을 부끄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나의 글을 부끄러워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10년이 지나도 내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과 지혜를 갖추지 못했을 나의 모습이다.

 

주장하기도 어려운데, 틀렸음을 고백하는 건 더 어려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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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말

2007년,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시련의 해였다.

물론 나에게도 좌절의 순간이 많았었다.

 

그래서 위로의 말을 건내야 할 일도

따뜻한 위로를 받아야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받고 주었던 위로들이 온전히 전달되었는 지는 의문이다.

 

나의 위로에 친구들은 다시 용기를 얻었을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을까?

아닐 것이다. 위로의 말을 건낼 때마다 난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나는 친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긴 한 것일까?

그저 마음은 따로 떼어 둔채 입으로만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올해는 유독 위로 받을 일이 많았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내 좌절의 크기만큼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누구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았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름 내 걱정을 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저 가장 힘들 때 혼자였다는 생각 뿐이다.

 

아무리 입으로 위로를 해도 마음이 전해 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일까.

아님 나는 진심에서 나오는 위로마저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위로를 받을 수록

입과 심장의 사이에 있는 길을 생각보다 멀고 복잡해 보이기만 하고

나는 더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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