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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 인간이 새로운 낯선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팔크는 두 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한 번은 인간의 세계로, 다음은 낯선 존재들의 세계로. 인간에게 기억은 이중적이다. 경험의 흔적이면서 여전히 낯선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 때문에 오히려 기억을 새롭게 창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나는 영원히 타자이다.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나에게 세계의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 세계는 얼마나 적대적인가?

팔크는 과거가 지워진 상태에서 파스에게 발견되었다. 그의 마음은 흰 백지처럼 텅 비어 있었다. 몸은 성인이었지만 팔크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것을 다시 익혀야 했다. 신체에 와 닫는 눈부신 햇빛조차 낯선 팔크. 팔크는 파스와 마을 사람들과 살면서 그 형식에 걸맞은 내용을 채워간다. 파스와 마을 사람들은 팔크가 성인 남자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었지만 팔크에게 그의 진짜 유년기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조브의 말처럼 유년기는 한 사람이 단 한 번밖에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네는 어린아이 같지 않아. 경험이 없는 성인일 뿐이지. 팔크, 자네 안에 어린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자네는 불구자나 다름없네. 자네의 뿌리, 원천으로부터 잘려 나온 셈이지. 여기가 자네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읽었던, <비밀일기>라는 책의 서문에 이런 글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이것을 반드시 한 번은 경험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서라도 반드시 거치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이걸 겪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비극이지만 타인에게는 희극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게 뭔지 꼭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비밀일기>의 내용이 10살 전후의 아이가 세상을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써 놓은 일기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는 이것을 유년기에 겪는 어떤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건 굉장히 함축적일 게 분명하다. 그것을 모호하게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특히 가족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다. 이러한 종류의 행복은 보편적이라기보다 아주 특수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행복은 유년기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받는 사랑과 좀 자라서 어린 아이가 되었을 때, 그리고 청소년기에 받는 사랑은 모두 다를 수 있고 의미가 다양할 수 있다. 또한 사랑은 어떤 점에서 일방적인 면에서 상호적인 면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받기만 하는 사랑에서 주고받는 사랑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유년기의 사랑은 그 특수성만큼이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유년 시절의 사랑은 우리 인생의 비밀, 한 사람의 일생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삶의 근원적인 신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충만한 생의 무게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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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2 19:10 2011/10/0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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