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퀼리브리엄>을 다 본 학생이 정확하게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회에서 개인들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는 모양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서양 철학에서 근대 철학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은 이성적 존재고 이성적 존재는 자율성에 근거하는데, 자율성은 자유로운 존재, 즉 자유의 근거다. 자율성과 주체성은 같은 말이다. 칸트에게 이성적 존재가 곧 자유인이라는 전제는 칸트가 살던 계몽주의의 시대의 이념이기도 하다.

헤겔에게 자유는 칸트와 다르지 않지만 설정 방식이 좀 다르다. 헤겔에게 자유의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를 규정하는 원리로 확대된다. 헤겔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 부자유하다고 말한다. 부자유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해야만 한다. 즉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립해야만 한다. 여기서 주체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겔에게 진정한 주체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헤겔이 소외를 주체성의 조건이라고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주체성의 실현이 관념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성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제기된다. 나와 세계의 일치, 곧 나와 세계의 통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헤겔 자유 개념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헤겔은 내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곧 나와 세계의 일치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지만 현실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시민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지점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나는 타자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지만(시민사회는 분업체계다) 나와 타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대립적이다. 내가 나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자들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관계다. 그래서 헤겔은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즉 개인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해관계와 타자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적대적인 시민사회에서 나와 타자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헤겔과 맑스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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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2 17:17 2016/09/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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