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타율적 글쓰기 | 7 ARTICLE FOUND

  1. 2016/11/24 현실과 실천 사이에서
  2. 2016/09/22 자유로운 존재
  3. 2016/09/16 주체성과 소외
  4. 2014/01/12 옛 현인의 글을 위안 삼아
  5. 2012/06/27 존재의 유한성
  6. 2012/06/08 맑스를 생각하며 (2)
  7. 2012/01/17 다잉 인사이드

<자본>을 10년 동안 읽지도 않았고 관련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계속 <자본>을 공부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주변에서 <자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별로, 아니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문제인데 오늘 그냥 끼적거려 보았다.

변화란 무엇인가? 운동은 변화를 표현한다. 운동과 변화는 같은 말이다. 유물론의 기본 명제는 모든 사물은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물질적 세계의 운동과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애를 썼던 이유는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결이 시대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맑스 역시 물질적 우주의 운동과 변화를 확립하고 이를 인간 사회의 역사와 경제적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초기 맑스의 헤겔 비판의 핵심은 세계의 유물론적 원리를 확립하려는 목적에 집중되어 있다.

맑스는 변증법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변증법을 주제로 쓴 글은 없다. 사실 맑스는 <자본>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리로서 변증법을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굳이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맑스는 <자본> 1편 상품과 화폐에서 상품의 두 요소인 사용가치와 가치를 통해 노동의 이중성을 서술하고 이를 상품과 나란히 외적 실체로 외화되는 화폐를 연역하는데, 이 1편이 바로 내적 모순의 외적 모순으로의 전화라는 변증법적 원리를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맑스는 <자본> 1판 서문에서 <자본>의 목적이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 내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기에서 맑스는 "궁극적인 최종목적(der letzte Endzweck)"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 '궁극적'이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다른 말로 <자본>의 목적은 운동과 변화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맑스는 2판 서문에서 물질의 운동과 변화를 헤겔의 "이념"을 비판하면서 변증법의 원리로 규정한다. 맑스는 "관념적인 것(Ideelle)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환되고 변역된 물질적인 것(Materielle)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맑스에게 운동과 변화는 물질적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근본적이다. 지금까지의 과학과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운동과 변화는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원리다. 변증법이란 이와 같은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기술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회적 측면에서든 물질적 우주의 차원에서든 운동과 변화가 하나의 원리라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변증법과 관련하여 잘못된 오해는 내적 모순을 이루는 단위를 "대립물의 통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립물(Gegenteil)의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인해 모순을 해소하고 외적 모순으로 이행한다는 것인데, 이는 맑스가 <자본>에서 쓰고 있는 “Gegenteil”을 해석하는 문제에서 발생한다.

맑스는 가치와 사용가치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처음 “Gegenteil”을 쓴다. 이 개념을 사용가치와 가치를 대립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맑스는 “등가형태를 고찰을 통해 드러나는 첫 번째 특징은 사용가치가 그 역(Gegenteils)인 가치의 현상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영어 번역은 모르겠으나 MEW 23권을 번역한 <이론과 실천>의 1995년 판에는 “사용가치가 그 대립물(Gegenteil)인 가치의 현상형태로 된다”고 번역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과 관련된 책들은 모두 변증법을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쓰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적대적인 대립 구도도 파악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Gegenteil”을 대립으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가?

변증법을 설명하는 많은 책들에서 변증법은 양질전화, 부정의 부정,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법칙으로 쓰고 있지만 이는 변증법을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적 모순은 대립물의 통일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립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두 요소의 자기 발전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가치와 사용가치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사용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호 의존적 관계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본과 노동은 적대적인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본과 노동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두 요소가 긴밀하게 의존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상품 생산 체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를 멸할 수 없다. 단지 어느 정도 힘의 우위를 통해 서로를 제약할 수 있을 뿐이다.

“Gegenteil”을 반대, 또는 역(逆)이 아니라 대립으로 번역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서술에서 갖는 맥락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동을 위해 이데올로기로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연구를 위해서도 실천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왜곡된 현실 인식은 왜곡된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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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4 17:03 2016/11/24 17:03

<이퀼리브리엄>을 다 본 학생이 정확하게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를 보고 사회에서 개인들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는 모양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서양 철학에서 근대 철학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인간은 이성적 존재고 이성적 존재는 자율성에 근거하는데, 자율성은 자유로운 존재, 즉 자유의 근거다. 자율성과 주체성은 같은 말이다. 칸트에게 이성적 존재가 곧 자유인이라는 전제는 칸트가 살던 계몽주의의 시대의 이념이기도 하다.

헤겔에게 자유는 칸트와 다르지 않지만 설정 방식이 좀 다르다. 헤겔에게 자유의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를 규정하는 원리로 확대된다. 헤겔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 부자유하다고 말한다. 부자유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해야만 한다. 즉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을 정립해야만 한다. 여기서 주체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겔에게 진정한 주체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헤겔이 소외를 주체성의 조건이라고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주체성의 실현이 관념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성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제기된다. 나와 세계의 일치, 곧 나와 세계의 통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헤겔 자유 개념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헤겔은 내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세계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곧 나와 세계의 일치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지만 현실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시민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지점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사회에서 개인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나는 타자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지만(시민사회는 분업체계다) 나와 타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대립적이다. 내가 나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자들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관계다. 그래서 헤겔은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즉 개인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해관계와 타자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적대적인 시민사회에서 나와 타자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헤겔과 맑스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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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2 17:17 2016/09/22 17:17

주체성과 소외에 대한 물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서양 철학에서 주체성과 소외에 대한 물음은 세계와 나, 나와 세계의 근원적인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문제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주체라는 것은 헤겔의 말처럼 내가 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는 나와 세계 사이에 간격이 발생하고 내가 이 세계에서 주체로서 존립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소외는 나와 세계 사이의 어떤 불일치, 아직 일치에 도달하지 못한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세계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를 해소하는 것, 나와 세계의 통일, 즉 일치는 곧 소외의 극복이다. 헤겔에게는 이러한 소외의 극복, 또는 해소가 일치를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맑스 역시 나와 세계의 간극, 불일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소외는 필연적이다. 맑스가 공산주의를 과정으로서의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러한 소외의 극복이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에게 소외는 극복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상태이지 극복을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다.

최근 생각하는 거지만 맑스의 이 소외는 굉장히 중요하고 재미있는 주제인데, 나는 왜 맑스를 건너뛰었을까? 그때 계속 맑스를 붙들고 파고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아마 나는 그런 끈기와 인내를 견딜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일찍 자빠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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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17:00 2016/09/16 17:00

" ...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오류의 제단과 화덕 앞에서의 천국의 기도가 논박당한 후 그 오류의 세속적 실존이 논박에 내 맡겨져 있다. 어떤 초인을 찾던 천상의 환상적 현실 속에서 단지 그 자신의 반영만을 발견했던 인간은 그의 참된 현실을 찾고 또 찾아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그 자신의 가상만을, 비인간만을 찯는 경향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비종교적 비판의 기저는 이것이다 :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 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 자신은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곧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이며 결사체(Sozietät)이다. 이 국가, 이 결사체는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의식을 생산한다. 종교는 이 세계의 일반 이론이요, 이 세계의 백과사전적 개요이며, 통속적 형태로 된 이 세계의 논리학이요, 이 세계의 유심론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며, 이 세계의 열망이요,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Sanktion)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 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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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2 14:32 2014/01/12 14:32

아주 오래전 알라딘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블로그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다. 그런데 얼마전 그 글을 찾았다.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글을 정리해야겠다. 아주 약간 수정을 했다.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가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우리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뭐 이런건데, 한 번의 삶은 사실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선물이 다 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선물은 곤혹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선물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곤혹스러운 선물은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강요된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을 시점을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곳에서 받을 지도 알 수 없으며, 선물을 주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사실 잘 알다시피, 아직까지 인간 문명의 발달 정도를 고려해봤을 때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받느냐에 따라 이 선물은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주제는 서양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서양 철학은 이러한 모티브를 상이한 관점에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헤겔은 관념론의 요체가 유한한 존재를 참된 존재자로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고 서슴없이 주장했다. 참된 존재자는,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나 신이다. 맑스는 이런 점에서 헤겔 철학이 보편자가 개별자를 통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자가 개별자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맑스에 의하면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보편자는 개별자의 사유 속에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맑스 비판의 요지는 헤겔이 실재의 과정을 사유의 과정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의 논리와 동일하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존재인 신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의 전능함을 나타낼 뿐이다. 뭐 이런 정도. 말하자면 유한한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언제나 무한자를 저 편에 설정함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종교는 시대를 초월한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은 단지 무한성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아마도 유년시절 TV에서 본 시리즈 애니메이션인 <은하철도 999>를 성인이 되어 다시 보았을 때라고 기억한다. 물론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이 TV만화는 단지 재미있는 만화영화였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 관심거리였고 우연히 <은하철도 999>를 다시 보았을 때 불현듯 내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데츠로(철이)는 어머니를 죽인 기계 백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어머니의 몫까지 살기 위해 신비로운 여인 메텔과 은하철도 999를 타고 기계별로 향한다. 이 만화 영화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데츠로와 메텔은 기계별로 가는 여정에서 많은 기착지를 거치게 되고 이들은 기착지에서 특수한 상황과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과 마주친다. 데츠로는 이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의 주요한 모티브는 대립과 화해다. 첫 째는 기계인간과 인간의 대립인데, 기계인간은 무자비하게 인간을 살해하고 탐욕적인 존재로 제시된다. 두 번째는 기계인간이 무한한 생명을 얻었지만 오히려 붉은 피를 가진 인간의 신체를 그리워 한다는 거다. 그리고 어떤 경우건 기계인간은 쓸쓸하게 죽는다. 기계 또한 인간처럼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영원성을 누리는 건 아닌 셈이다. 이렇게 기착지를 거쳐 갈 때마다 데츠로는 정신적으로 성숙해간다. 작가인 마쓰모토 레이지의 말대로 우리들이 이미 겪었으며 누구나 겪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우화인 셈이다.

여하튼 이 애니의 모티브는 삶과 죽음, 유한성과 무한성, 즉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서 이와 같은 모티브는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 악당은 기계몸을 가진 기계인간이고 그들은 무자비하고 난폭하며, 잔인하다. 한마디로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 말은 비도덕적이라는 의미와 다른데, 기계인간은 도덕성과 무관하다. 그들은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도덕적 갈등에서 자유롭다. 한참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X-files에서 “왜 외계인이 인간을 납치해서 생체실험을 하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스컬리에게 멀더는 이렇게 되 묻는다. 인간이 아프리카의 개미를 잡아다 실험하거나 개구리를 해부할 때 도덕적 가책을 느끼는가? 도덕성은 존재의 차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한성이 문제가 된다면 유한한 존재에게 윤리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은하철도 999> 시리즈 이후에 나온 마쓰모토 레이지의 애니메이션 <메텔 레전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기계몸이 된다는 것은 인간 이상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
그 힘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
기계몸은 무한한 힘과 영원한 생명
분명히 인간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 두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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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 15:04 2012/06/27 15:04

이번 학기에 서양철학사를 중심으로 강의하면서 맑스의 [자본]에서 상품물신성을 3주 강의했다. 마지막 강의를 어떻게 정리하나 고민하다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글을 떠 올렸다. 아무래도 맑스의 화폐물신성에 대한 비판을 반동일성의 관점에서 긴 글을 작성할 계획을 했는데 그만 시간만 흘려 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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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는 1970년 <레닌과 철학> 서문에서 자신의 시대를 "맑스와 무조건 싸우든지 아니면 부르주아적 해석들(경제주의, 기술관료주의, 휴머니즘)로 맑스를 왜곡하면서 그를 학문적 영예로 들씌워버리는 이 시대"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도 그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 철학과 대학원에서조차 맑스의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에서 맑스의 철학이 추방당한지 오래되었다. 20대 맑스를 읽고 맑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맑스를 언급하기를 꺼리고 맑스주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비웃는다. 이제 맑스는 비웃음과 어리석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90년대 초에는 맑스를 '죽은 개' 취급한다는 비판과 분노가 조직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맑스와 맑스주의는 죽은 개보다 더한 치욕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여전히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 한 문장으로, '맑스주의는 배제와 폭력이라는 동일성의 논리에 불과하다.' 이 말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피억압자들의 차이를 노동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특히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 아닌 비난은 들뢰즈를 전공하는 분들의 논문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사실 나는 그 분들이 맑스의 저서를 읽기나 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물론 이 분들은 헤겔도 비판 아닌 비난을 한다. 그런데 그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어이없게도 헤겔의 글뿐 아니라 헤겔에 관한 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이 아주 많다. 끔찍한 현실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상품 물신성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있는 그대로 즉 그들의 노동에서 맺는 사람들끼리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물적 관계(das sachliche Verhältniss der Personen) 및 사물과 사물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헤겔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은 맑스의 상품 물신성비판이 곧 헤겔의 관념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맑스의 헤겔 비판은 헤겔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 1장 "상품"의 가치이론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상품으로부터 화폐를 연역하는 과정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맑스의 경우 보편자인 가치와 개별자인 상품의 관계는 헤겔의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말하자면, 헤겔에게 개별자는 무한자로 이행하고 무한자는 개별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경우 화폐는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로의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보편자로서 화폐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정신" 또는 "개념"이 자신의 외부에 대립해있는 개별자로 자신을 외화시키는 것과 정반대의 과정이다. 이러한 보편자의 외화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가 사유 속에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결국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동일성의 논리로 환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 되도 심하게 전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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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8 15:04 2012/06/08 15:04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이라고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년이라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시답잖게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수년이 지났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경우 산다는 게 뭘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도 하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 관성의 법칙이 삶의 법칙이 되어 버린 것일까?

지난학기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은 매일매일이 새롭고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간다."고 말했더니 썰렁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마지못해 인간 수명이 80년 정도라면 40부터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거라고 덧붙였더니 더 썰렁해졌다. 다들 눈알 굴리는 소리가 자갈 구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밤에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달라도 매일 동일한 일과를 반복한다. 나처럼 특수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일반화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일상의 아주 미세한 순간들을 우리의 '정상적'인 눈으로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주 가끔 이런 반복을 벗어나기도 한다.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가끔이라고 해야겠다. 

들뢰즈라면 우리가 일상의 정상성에서 벗어난다면 새로운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뻔한 짓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데 이는 우리의 감각이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다음으로, 연애를 하면 된다. 그 사람은 그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다. 그 사람은 토마스의 말처럼 "백만분의 일의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가 매번 새로운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토마스는 매번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는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그녀들만의 특이성을 발견하는 재미를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토마스처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특별한 감성을 소유하거나 스스로 계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오래전에 로버트 실버버그의 <다잉 인사이드>를 읽고 메모 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애시드가 자신의 신경계를 통과하면서 벌이는 작용에 대해 그때그때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녀가 종이에 연필을 긁적대는 것이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지적할 때가지 메모를 계속했다. 시각 효과가 진행되고 있었다. 벽이 약간 오목하게 파인 것처럼 보였고, 벽토의 홈들이 예사롭지 않은 질감과 복잡함을 띠기 시작했다. 모든 사물들의 색채가 비현실적일 만큼 밝았다. 더러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은 무지갯빛을 띠며 마루 위에 분광을 흩뿌려놓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들로 체인지에 걸어둔 음악은 묘한 강렬함을 새로이 얻었다. 그녀는 선율 라인을 잘 따라가지 못했고, 마치 턴테이블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듯 보였지만, 사운드 자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밀도와 손에 잡힐 듯한 현실감으로 그녀를 매혹했다. 또한 그녀의 귀에 마치 공기가 뺨을 스치고 휙 지나가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생소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다른 행성에 와 있어." 그렇게 두 번 말했다. 그녀는 홍조를 띠었고 흥분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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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7 23:11 2012/01/17 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