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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투쟁전술을 척결하자!

  • 등록일
    2006/01/11 00:23
  • 수정일
    2006/01/11 00:23

http://go.jinbo.net/mybbs/view.php?board=cool&id=24061&page=1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투쟁전술을 척결하자!


노동운동이 뒤로 밀리고 전투성과 연대성이 약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을 결집시키는 노동계급적인 투쟁전술보다는 개인적 힘에 의존하는 소부르주아적인 투쟁전술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단식, 1인 시위, 삼보일배 등 노동자들을 불쌍하게 보이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동정적 여론을 만들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이런 전술은 특히 비정규직 투쟁사업장,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투쟁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투쟁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란 이유로,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런 전술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이런 전술이 노동자의 자존심과 투쟁의지를 장기적으로 볼 때 약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서 이런 전술이 해방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을 갉아먹고, 조직보신주의와 관료주의를 키우고 있으며, 노조관료들이 이런 전술을 주도면밀하게 구사함으로써 노동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노동자계급다운 투쟁전술을 중심에 놓고 일관되게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해야 한다.

 

 

참... 간만에 괜찮은 글이네.



단식

단식은 노동운동의 기본적 투쟁전술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전술은 집단적 힘, 대중 자신의 힘을 기초로 한다. 하지만 단식은 주로 개인의 결단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단식의 주체는 주로 지도자 혹은 소수의 간부들이다. 지도부들의 단식이 주요 투쟁전술로 자리 잡으면, 대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게 된다. 대중은 일부 지도자들의 헌신에 의해 구제되는 수동적인 존재 정도로 격하되면서, 대중 스스로가 자기 내부에 단결을 강화하고 전투력을 확대함으로써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붙잡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단식의 성과가 단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 그것은 장기적 견지에서는 커다란 손실을 야기할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대중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기보다는 소수 지도자들의 결단과 희생에 기대하는 주변적 존재로 부지불식간에 전락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판기 노조와 같은 대리주의적 습성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에서 지도부들이 단식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노동조합의 활동(대중적인 단결과 투쟁을 고취하는 바로 그러한 활동)은 사실상 마비상태에 처하게 된다. 단식자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조합원들이 투쟁을 하게 되더라도 그건 단식을 보조하는 정도의 주변적 지위로 추락한다. 또한 역동성과 기세, 단호함을 상실한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장 선의가 두드러지는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객관적 효과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단식을 불가피하게 선택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노조의 투쟁력이 아주 가라앉아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대중은 지도부들의 단식을 보면서 패배감에 젖어든다. 단식자들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노조가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패배적 정서를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의 결의는 오히려 사그라들며 투쟁의 정리과정에서 대중의 주도성은 약화된다. 소수 단식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게 되고, 투쟁 정리 문제는 단식을 얼마나 오래하는가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

단식투쟁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전술이 노동자들의 투쟁력과 조직력 강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노동자의 자존심과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평범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 중의 하나는 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단식은 우리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반면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적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을 굽히게 만든다. 설사 아주 당당하고 패기 있게 단식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단식자의 모습은 초췌해지며 고통스럽게 비춰질 수밖에 없다. 이런 단식자의 모습을 보면서 대중은 자괴감과 미안함을 느낀다. 쓰러지고 패배할지라도 꼿꼿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힘없고 나약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대중의 마음은 착잡해지며 노동자계급이 갖고 있는 위대한 잠재력과 거대한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주로 단식은 노동자의 집단적인 힘이 갖고 있는 거대한 가능성 대신에 심지어 적들의 동정, 특히 부르주아 언론사들이나 이른바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의 동정심에 의지하는 전술이다. 최상의 결연함을 가지고 전개되는 단식일지라도, 결국 이것이 의지하는 힘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처한 불쌍하고 가엾은 처지에 대한 폭로’ 그 이상이 될 수 없고, 이 가엾은 처지에 대한 온정적 자본가들, 중간계급들, 언론들의 ‘동정심’과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무의식적으로 의존한다. 지도자들의 단식을 보면서 노동자 대중이 느끼는 감정도 그것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대중과 지도자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란 노동자의 거대한 잠재력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그리고 투쟁의 동료로서의 지도자와 대중 사이에 맺어지는 상호 신뢰와 존경이 아니다. 또한 여기서 대중이 확인하는 것은 노동자의 거대한 잠재력과 위대한 힘에 대한 확신, 즉 노동해방의 주체로 전진할 수 있는 당당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불쌍하고 가엾은 처량한 존재로서의 노동자계급이다. 스스로의 힘에 대한 확신, 끈질긴 투쟁의 결의, 운동에 대한 믿음은 단식 투쟁전술을 통해서는 결코 태어날 수 없다.

특히 기회주의 관료층에 의해 단식전술이 애용되기 시작하는 경우에는, 상황은 극단적으로 악화된다. 관료들에게 단식은 투쟁을 회피할 수 있는 손쉬운 도피처다. 또한 관료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투쟁의 지도자로 포장하며 정리 국면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관료들은 단식을 통해서 대중의 관심을 집단적 투쟁의 조직화에 모아내는 대신 자신들에게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단식을 통해 자신들이 투쟁하고 있는 것처럼 나서는 이상 조합원들이 쉽게 불만과 분노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을 포착한다. 결국 단식은 조합원들을 수동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단식은 노동자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투쟁력 대신 적들의 동정심과 자비 혹은 중간계급의 우호심을 끌어내는 데 관심을 쏟도록 몰아간다. 심지어 관료들은 투쟁의 상승국면이나 또는 투쟁을 전면화시켜야 할 시점에 단식으로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일까지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매번 중요한 투쟁 국면에서는 관료적 통제로 일관했던 관료들이 단식에서는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경우에도 대중은 방관자이지 주도성을 갖고 전진하는 주인공은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은 강력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자신감 있는 변혁 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단지 고통 받고 있는 가엾은 존재로서만 남게 된다. 한마디로 자기 투쟁력을 가지고 상황을 개척하는 존재가 아니라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불쌍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핵심 논쟁점은 다음과 같다. 노동운동의 전진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계급은 오직 자신의 집단적 투쟁력을 끌어냄으로써만 장기적으로 전진할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은 투쟁과 실천의 원칙을 지킬 때만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운동의 전권을 맡기고 대중은 수동화되면서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관료주의의 등장과 확대에 문호를 열어준다. 이른바 가장 선량하고 헌신적인 대리주의에 의해 형성되는 자판기 노조일지라도 결국 관료주의 노조로 이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관료주의의 토대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

이런 소부르주아적 투쟁전술에 기대서는 아래로부터 전투적 활동가층이 탄생하는 토양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이것은 소수 지도자들에게 의존하고, 대중이 이 지도자들만을 쳐다보고 수동적으로 기대도록 만드는, 더 나아가서 중간계급의 동정심에 기대는 나약한 습성을 노동운동 속에 불어넣는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오직 노동자계급에 걸맞는 집단적 투쟁력을 키우기 위한 일관된 노력만이 노동운동의 전진을 보장할 수 있다.

실제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전후로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리고 일련의 패배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던 80년대 초중반의 시기에 한국노동운동은 단식과 같은 전술을 철저히 배제했다. 패배하더라도 현장에서의 집단적 대중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길을 가지고 투사들이 결의를 모아내면서 미래를 준비해나갔고, 정리투쟁을 조직하더라도 과감한 투쟁전술을 채택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전투의지와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멀리 보았기 때문이고, 노동운동의 기세와 정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았고 결국 성공했다.

물론 끝까지 투쟁을 책임지고 노동조합을 사수하려는 진지한 투사들의 경우, 관료들과는 다른 의도에서 단식에 돌입한다. 급격한 하강국면에서 다른 투쟁 방법이 없고 대중적 투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이 드러날 경우 최소한의 요구를 쟁취하여 퇴각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다음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미래의 투쟁을 준비하기 위한 일보후퇴, 그리고 그것을 위한 조직의 사수를 위해 단식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단식이 그런 효과를 진짜로 가져올 수 있는지를 냉정히 따져 봐야 한다. 수세로 급격히 몰린 상황에서 단식은 대중의 투쟁 의지를 다시 살리고 모아내는 데 기여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식을 통해 조합원들은 자괴감이나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반격에 대한 의지는 살아나기 힘들며 오히려 투쟁의 정리를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단식이 아니라 수십, 아니 몇 명의 선진적 동지들일지라도, 그들에게 대중투쟁의 전망을 제기하고, 이것을 위해 지금부터 해야 할 작업과 단련의 내용을 차분히 침착하게 공유하고 그런 방향으로 실천의 결의를 모아내는 것만이 공세를 위한 진지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차근차근 실천이 전개되고 대중의 의지를 미래를 향한 투쟁의 의지로 모아나갈 때 반격은 비로소 준비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투쟁의 조직화이며 이것을 위해 때로는 견뎌내고 때로는 패배를 감수한 투쟁을 통해 미래의 자양분을 축적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에 제대로 착수하기 위해서는 당장에는 현장의 일상 활동으로 퇴각할지라도, 항상 공세적이고 대중 속에서 자신감 있게 움직이며 대중투쟁으로 반격해 내려는 패기와 기백으로 무장한 투사들을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단식은 노동자들을 이런 방향으로 무장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 사이에 패배감과 자괴감을 불러일으켜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진지한 투사들이 단식을 통해 수세적 국면을 돌파하고 미래를 향한 진지를 사수하려 하는 선한 의도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인 선진노동자들의 자신감과 미래를 향한 실천의지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단식은 그 주관적 의도에 부합할 수 없는 것이다.

단식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단기적으로 확보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대중 자신의 성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장기적으로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수단으로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역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당장 손에 붙잡히는 단기적 성과를 위해서 장기적 성과를 희생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수세기, 급격한 하강국면, 정리국면에서 단식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단식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장기간 단식으로 인해 동정적 여론이 조성되어 사측이 부담을 갖고 일정하게 양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기간 단식으로 얻게 된 성과는 첫째 단식 자체가 아니라 단식을 계기로 해서 대중이 투쟁에 나섰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단식 대신 대중의 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실천을 전개했다면 동일한 결과, 아니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단식의 효과와 대중이 투쟁에 나섬으로써 발생한 효과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설사 단식 자체 때문에 자본이 일정하게 물러섰다 하더라도 이것이 대중 자신의 주체적 투쟁, 집단적 투쟁에 기반한 성과가 아니기 때문에 대중 자신의 전진을 보장하지 못한다. 오직 대중 자신의 투쟁에 의한 전진만이 대중에게 이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불러일으키며 대중의 의식과 투쟁력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반대로 대리주의적으로 쟁취된 성과는 대중의 의식과 투쟁력 향상에 기여하지 못한다. 대중적 투쟁의 결과로 쟁취한 것일 때만 후진적 노동자들에게도 이 투쟁의 성과와 의의, 한계를 인식시킬 수 있으며 단결의 광장으로 그들을 초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은 투쟁전술과 관련해서는 ‘노동자대중의 단결과 투쟁에 기반한 자주적인 투쟁의 원칙’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그런데 단식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누가 단식을 하고 싶어서 하냐”라는 얘기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수의 힘으로 어찌되었건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하는 열망은 선한 열망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노동자계급다운 침착한 열망은 아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투쟁의 대안을 조직해 나가는 데 몇 배 더 힘을 쏟아내는 것이다. 당장의 손에 잡히는 성과보다는 진정한 성과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을 탐색하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만약 투쟁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하다면 최대한 과감한 투쟁전술로 정리해야 한다. 물론 각각의 사업장마다 조건은 다를 것이며 불가피한 타협의 경계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더 이상 투쟁을 지속시킬 수 없고 다른 수단이 없으며 투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면 최대한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의 약점을 검토하면서, 다음에는 더 강한 힘을 모아 승리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대중적으로 토론하면서, 현장에서의 일상적 실천활동의 상을 공유하면서 전체의 실천의지를 모아나가야 한다. 최소한 전투적 의지를 잃지 않은 선진적 노동자들과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 투쟁의 정신을 사수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당면 투쟁의 성과를 보호할 수 있다.

항상 공세적이고 대담한 투쟁을 해야 하고, 최악의 경우에 소수가 싸워서 정리할 수밖에 없다면 그 경우에도 수세적인 정리가 아니라 노동계급다운 단호한 정리를 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운동의 정신을 투쟁적이고 대담하며 전투적인 방향으로 보호할 수 있다. 이 경우 대중은 불쌍함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당장은 깨졌지만 저렇게 대차게 해나가면 이후 대중적 투쟁을 강화해 제대로 한 판 붙으면 이길 수 있다는 투쟁 정신과 자신감을 유지하게 된다. 지도자들과 대중 사이에 맺어지는 진정한 상호신뢰도 그렇게 형성되게 된다.

또한 이런 기조를 유지할 때만 궁지에 몰린 소수의 투사들일지라도, 이 투사들은 대담성과 패기, 기백(몇 명 안 남았고 깨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대차게 붙고 깨졌다!)을 보호하게 되며 이후 투쟁에 대한 결의를 확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정신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정신이다. 노동자계급을 고통받는 불쌍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단결하고 노동자 의식을 갖추게 되면 자본가계급을 능가할 수 있는 압도적 힘을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는 위대하고도 거대한 힘을 갖춘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고, 그렇게 성장시켜 나가는 노동해방의 정신인 것이다.


삼보일배

다음으로 삼보일배 투쟁전술을 살펴보자. 최근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렸던 홍콩에서 한국원정투쟁단은 삼보일배 행진을 벌여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올 한 해 하이닉스 매그나칩, 현대하이스코, 울산건설플랜트, 대구 국일여객 동지들의 삼보일배 행진이 있었다. 삼보일보 행진은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등 4개 종단 성직자들이 지난 2003년 3월부터 5월까지 65일간 전북 새만금 갯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서 시작한 것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원래 삼보일배는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면서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고 비는 일종의 수행법이다. 이렇듯 종교적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는 삼보일배를 노동자들이 행하면서 스스로 고행에 나서는 모습을 연출해 여론의 지지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자존심과 당당함을 스스로 뭉개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저 사람들 정말 힘들겠다, 고생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우리 이만큼 고생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동정적 여론을 확산시키고자 할 때 세상을 바꾸어가는 변혁세력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당당함은 사라진다. 시민들, 아니 노동자들 자신에게 비춰지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란 결국 불쌍한 사람, 힘없는 사람의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 속에서 노동운동의 고귀하고 당당한 정신, 가치는 사라진다. 이런 모습으로는 그 누구에도 노동운동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결코 소수일지라도 당당하고 패기 있는 운동을 통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투쟁 정신이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으로 깎아내리며 여론, 그것도 부르주아 여론에 호소하려는 소심하고 타협적인 정신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당장 무언가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는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집단적 투쟁력 대신 이러한 시도에 의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키우면서 길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는 열악한 상황 때문에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하게 거부해야만 한다. 열악한 상황의 핵심은 대중적인 집단적 투쟁력을 당장 끌어내서 돌파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그 이전에 전개되었던 대중적 투쟁이 아직 힘이 모자라서 깨지면서 상당한 피해와 패배의식을 초래하고 있는 상황임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의 심리는 이렇게 이동한다. “정면돌파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결국 얻은 것은 당장 없다. 피해도 크다. 반면 소수 지도자들의 단식이나 삼보일배는 여론의 동정심을 끌어내서 약간의 성과는 남겼다. 그렇다면 굳이 무모한 투쟁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단기적인 성과는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대중 속에서 스스로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투쟁력을 끌어내기보다는 소수 지도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의지하려는 습성, 한마디로 자판기 노동조합의 습성이 확대된다. 대중은 상황이 급박해지면, 단결투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 대신 지도자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한마디로 지도자들이 대신 나서서 희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이닉스, 건설플랜트, 국일여객 등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투쟁들이 투쟁을 알리고 확산시키기 위한 의도로 삼보일배에 나섰고 하이닉스와 건설플랜트의 경우 경찰의 탄압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이 삼보일배 전술은 결코 노동자들의 투쟁력과 의식을 끌어올리는 전술이 될 수 없으며 노동운동이 채택해야 할 전술이 아니다. 특히 비정규직 사업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단식, 삼보일배 등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불쌍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부정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가뜩이나 정규직에 비해 “불쌍한 사람들, 가여운 사람들”로 그려지며 그것에 기대 뭔가를 호소하고 따내려는 개량주의적인 경향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당당한 주인공이자 투쟁의 선봉장으로 성장시키는 대신 동정심을 유발하는 불쌍한 존재로 격하시킴으로써 비정규직 투쟁의 성과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전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당당한 주체로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의존적인 존재,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 쉽다.

투쟁을 알리기 위한 상징적 방법으로 최근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 1인 시위 역시 왜소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 시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오히려 약화되어 장기적으로 보면 투쟁의 전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혼자 외롭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중은 무력감과 패배감을 갖게 된다. 지도자들은 대중의 투쟁의 조직화의 길로부터 이탈해서 기자들의 카메라를 의식하고 고립된 무기력한 길로 퇴각해버린다.


노동자계급의 길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계급은 고통받는 존재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리고 그러한 측면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즉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위력적인 힘을 가진 성장하는 계급이다. 그리고 바로 후자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핵심 정의다. 노동자가 노동자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노동자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당하게 투쟁하면서 세상을 변혁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잠재력과 필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결코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은 자기의 엄청난 힘을 현실화시켜 세상 앞에 “우리 노동자가 우리의 해방을 위해, 그리고 세계의 전진을 위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고 선포할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힘을 갖추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 노동자계급은 비록 당장에는 깨지더라도, 오직 노동자 자신의 집단적 투쟁력과 선명한 노동자 의식에만 의지한다.

그런데 고통받는 불쌍한 존재에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적들과 중간계급의 동정심에 의지해서 무엇을 따내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면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다. 노동자계급이 노동해방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그런 전술은 더더욱 해롭다. 우리는 현재 노동운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1인 시위, 단식, 삼보일배 등 ‘나약하고 힘없는 노동자로서의 모습, 고통받는 노동자’로서의 측면을 부각시켜 동정적 여론을 끌어내려는 전술을 반대하면서 대중적 투쟁의 길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을 힘주어 투사들에게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수세적 국면에서도 노동계급의 사기와 정신을 반드시 보존해 나가야 한다.

노동해방 투사들은 선언한다. “노동자계급에게 동정심 따위는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 노동자계급이 당장 퇴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거대한 힘을 아직 충분히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사들이 집단적 투쟁력을 향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실천해나간다면, 노동자의 거대한 힘은 현실화될 것이다. 바로 이 힘만을 우리는 신뢰한다. 노동자 스스로의 주체적 힘만을 우리는 신뢰한다. 우리 노동자의 힘을 우리 노동자다운 투쟁전술로 열어나가자! 다른 길은 없다! ”[끝]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

이메일 nhaebang@jinbo.net
홈페이지 haebang.jinbo.net(주소창에서 “노동해방”을 치면 바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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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 등록일
    2005/12/06 01:02
  • 수정일
    2005/12/06 01:02

http://reltih.cafe24.com/reading/

 

대체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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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 쳐다보는 짓 좀 그만했으면 합니다

  • 등록일
    2005/11/15 11:33
  • 수정일
    2005/11/15 11:33

http://blog.jinbo.net/autismee/?pid=39

 

 

미니스커트 쳐다보는 짓 좀 그만했으면 합니다.

* 어제 쓴 그만 좀 쳐다봐라는 포스트에 대한 포스팅. 피곤하기도 하고 CSI도 보고 싶고 해서 감정만 휘갈겨 놨었는데 오늘은 좀 머릿속이 정리가 된듯.

 

너는 다리도 예쁜데 왜 짧은 치마를 안 입고 다니냐는 둥 니 다리로 짧은 치마 입다니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둥 여름이면 벗고 다니는 여자애들이 많아서 눈이 즐겁다는 둥, 그런 얘기는 좀 그만했으면 합니다.

자폐도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면 아주 그냥 뭇 사나이 씨들의 시선에 깔려 죽을 것 같던데(심지어 어떤 색히는 계단 올라가는 자폐 뒤에 찰싹 붙어서 따라오다가 이쪽에서 한번 째려봐주니 도망가기도 하드라) 쳐다보는 짓도 그만했으면 합니다.

 

1.

 

남들 보라고 일부러 벗고 다니는데 봐 줘야지.

 

예, 독심술이라도 익히셨나보군요. '벗고' 다니는 여자애들의 마음이 읽히나 보네요. 아니면 '벗고' 다니는 여자애들이 전부 사토라레였던 모양이군요.

 

그런데 자폐는 한번도 남들 보라고 벗고 다닌 적 없습니다.

자폐는 본인의 의사가 왜곡되어 전달되는 유형의 사토라레였던 모양입니다.

 

왜 유독 한국사회에선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성들이 외모를 치장하는 것은 남들 보라고 치장하는 건줄 아나봅니다. '벗고'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화장 안 하던 애가 갑자기 화장으로 하고 와도 '너 소개팅 나가냐' 라는 소리를 듣나 보더군요.

단지 본인이 '벗고' 싶어서 '벗는' 거고 화장하고 싶어서 화장하는 겁니다.

남들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주제에 남의 마음 지레짐작하지는 말아주세요.

 

2.

 

내 다리에 따라붙는 '시선'이 왜 불쾌하냐구요.

 

일단 피상적인 이유로는 이런 것이 있겠군요.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경험을 종종 겪어온 여성들은, 따라붙는 그 시선이 어떠한 폭력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 시선이 매우 무섭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쳐다본 후에 일어날 변태짓이 예견가능하기 때문에 존나 무섭습니다.

 

실제 변태짓을 하는 색히는 몇 놈 안 되겠지만 변태짓 하는 색히가 남성 중엔 극소수일지라도 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그 몇 안 되는 숫자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주세요.

한국사회에선 워낙 다반사로 일어나는 변태짓이기 때문에 본인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어요.

 

무서우면 짧은 옷 입지 않으면 되지 않냐구요?

여보세요, 강도질 당하는 게 무서워서 늘 거지차림으로 입고 다니라고 이 사람 저 사람 말씀하고 다녀보세요.

피해자가 조심해서 범죄를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가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범죄 예방의 기본입니다. 피해자 중심주의 라는 단어를 좀 신중히 생각해보세요.

 

3.

 

내 다리에 따라붙는 '시선'이 불쾌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이것일 겁니다.

 

쟤 다리 존나 이뻐.

 

하며 다리만 바라본다는 것은 곧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행위입니다.

 

여성주의에서 항상 얘기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지 말아라, 그렇게 대상화한 여성의 이미지를 팔아먹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천년 동안 여성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사실들은 알고 계시겠지요. 여성은 인권이 없다(by 루소) 라는 이야기라든지 중세시대엔 여성은 영혼이 없는 걸로 취급되었다든지 하는 역사학적 얘기는 너무 기니까 넘어가도록 하지요.

여하튼 그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사실 자체가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여성은 그 자체로 인격체로 대접받기 보다는, 그냥 으로 대접받기 일쑤입니다. 그러니깐 이라는 하나의 사물로 대접받기 일쑤라구요.

 

소위 말하는 '나가요 가수'들의 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시는 사나이 씨들 중에 그녀들이 어떠한 노래를 부르고 어떠한 활동을 하며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특별히 관심있는 사람들 있습니까. 좀 유명해진 채* 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이 가는 것 같지만 왠만하면 그냥 벗고 나오면 좋다더군요. 완전 감상용으로 취급하더라고요. 그녀라는 인간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보더라구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다리를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행위, 여성의 다리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서 입을 옷을 손수 골라주는 행위와 같은 것은 여성을 감상용으로 취급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입니다.

 

여성의 다리를 쳐다보면서 내가 이 여성의 다리를 쳐다보면 이 여성이 기분 나빠할 것이다, 라는 생각 한번이라도 해보신 적 있나요?

여성의 다리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 이 여성이 기분나빠할 것이라는 생각 한번이라도 해보신 적 있나요?

여성에게 '넌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 돼' 라고 말을 할 때에 그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싶어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있다면 저런 말 안 나오죠.

 

당신이 여성의 몸에 대해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때에 당신은 이미 그 여성의 주체성은 거세시키고 있는 거라는 얘기죠. 그 얘기인즉슨 여성을 인간으로 보기보단 하나의 사물로 취급하고 있는 거라는 얘기이기도 하구요.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길 물건 취급하는 데 기분이 좋겠습니까.

사람을 물건 취급 하지 말라고 중학교 도덕책에서도 누누히 얘기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기초 상식입니다.

 

4.

 

지난 여름에, 얼핏 보면 섹스할 때에 입을 속옷 같은 슬리브리스를 입고 광화문 지하보도에서 누군가를 기다린 적이 있었더랬습니다.

자폐 가슴에 꽂히는 뭇 사나이 씨들의 시선에 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재미난 것은, 노골적으로 쳐다보시는 분들은 대부분 중장년층이었는데 청년층은 흘끗 보다 말고, 흘끗 보다 말고, 그러시더군요.

감히 일반화시켜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흘끗 쳐다보다 말고 하시는 분들은 본인의 행위가 별로 옳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는 모양인 것 같습디다. 아마 그 감각 자체가 나이가 들면서 무뎌지나 봐요.

 

그렇게 노골적으로든 아니면 흘끔이든 시선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몹시 불쾌합니다.

짧은 치마를 입고 나가도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한국에서 살았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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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식 증후군

  • 등록일
    2005/10/22 13:19
  • 수정일
    2005/10/22 13:19

우리 마을 지렁이 할머니

  • 등록일
    2005/02/01 02:45
  • 수정일
    2005/02/01 02:45

http://blog.jinbo.net/jseayoung/?pid=48

 

우연히 덧글 단 블로거의 블로그에 갔다가.

연주 음악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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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흡연에 관한 다른 시선

  • 등록일
    2004/12/05 01:08
  • 수정일
    2004/12/05 01:08

그 날 그 행진

  • 등록일
    2004/10/27 17:19
  • 수정일
    2004/10/27 17:19

http://blog.jinbo.net/neoscrum/?pid=124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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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폭력 예방교육이 끝나고,

  • 등록일
    2004/10/11 01:07
  • 수정일
    2004/10/11 01:07

http://blog.jinbo.net/toiless/?pid=156

 

언젠가 시간 날 때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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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한국 현대시

  • 등록일
    2004/10/10 23:51
  • 수정일
    2004/10/10 23:51

http://hongsup.egloos.com/369263

 

넘 재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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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놀기?

  • 등록일
    2004/10/10 23:34
  • 수정일
    2004/10/10 23:34

http://blog.jinbo.net/nori/?pid=66

 

망상이라 할 지라도 이런 상상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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