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너머

이 글은 2004년 금속노조 '파업문화지원단' 사업을 마친 후에 쓴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속한 조직에 돌아올 정치적 타격이 걱정되어 조심하다보니

너무 예의바른.. 그래서 덜 솔직한 글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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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파업문화지원단(이하 파지단)에 참가하니?”
올해 금속노조의 파지단에 기획단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단순히 참가 여부를 확인하는 질문이 아니라

‘니가 왜 그 사업을 하느냐?’는 힐난 섞인 반응들이었다.

많은 문화노동자들이 파지단에 참가한 것은

영세한 투쟁사업장과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을 만나

다양한 노동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앞서 진행된 2번의 파지단 활동을 보며

많은 비판의식을 갖었음에도 참여를 결정했던 이유는

금속노조의 열악한 사업장 동지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파지단 첫 공연을 다녀왔던 가수들의 벅찬 감동이 생각난다.

50여일째 투쟁하고 있던 포항의 ‘진방철강’이라는 곳이었는데,

힘들게 투쟁하는 동지들과 함께 연대하며 같이 울분을 터트리고

공연자는 노동가요를 통해 투쟁에 지친 동지들은

위로와 투쟁의식을 다지는 계기가 되고,

굽히지 않고 뚝심있게 싸우는 동지들의 모습을 통해 그 몇배의 힘을 받고 왔었다.

그럼에도 왜 파지단에 대해 참여한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긍정적 시각보다는 부정적 시각을 더 많이 갖고 있는가?

파지단은 노동조합과 문화노동자들이 한 시기의 투쟁에 목적의식적으로 결합하여

단순 초청 공연형식이 아닌 노동조합과 문화노동자들이

함께 기획하고 판을 꾸리는 연대의 틀거리로 제안되었다.

그러나 그간의 경과과정은

그간의 활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 영세사업장이나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과 함께 하며

파지단이 아니면 만들어지기 힘들었을 자리들이 만들어지고,

노동문화 체험을 통해 서로 벅찬 감동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회차를 거듭하면서 초기의 이런 의도들이

빛을 바래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파지단활동으로 인해 파업문화에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연극이나 밴드 등의 장르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어느 팀은 파지단 참가를 계기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2년째 파지단에 참여하며 느낀 점은

파지단이 가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지 않나 하는 것이다.

몇가지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파지단의 활동 이후 연대투쟁하며 문화노동자들이 받는 게런티에 관한 것이다.

첫해에는 한푼의 예산도 없이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예산 확보를 하기는 했으나

파지단의 이름으로 가지 않는 경우에 비해 턱없이 게런티가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파지단 공연을 하면 할수록

재정적으로 적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 술 더떠서 파지단에 참가하는 순수한 뜻을 이해못하고

다른 집회나 문화제 예산까지도

파지단 게런티에 맞추어서 책정하여 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이게 웬 떡이냐?’ 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둘째, 파지단의 활동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속에

파업문화양식의 새로운 정형을 창출하기보다는

‘현장 노동문화역량을 발현할 수 있는 의지와 기회를 박탈한 것은 아닐까?’

현장 문화역량의 위축은 금속노조 뿐만 아니라

전 영역에 걸쳐 발생하고 있는 문제이므로

파지단 때문에 현장 노동문화가 위축되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축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동문화 토대 확보와 자기 역량을 제고시키기 위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에,

그러한 노력을 하기 보다는 중앙의 문화역량배치에 자족하는

현장의 수동적 분위기가 발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셋째, 문화판 배치와 섭외에 관한 것이다.

현장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노조문화담당자가

문화노동자들과의 직접 협의 속에서

판을 배치해야 할 것을 파지단 기획단이 일임받아 하다보니

워낙 일손 부족한 노조 상황과 맞물려

지부, 지회 담당자는 자연스레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파업 시기에는 그에 맞는 파업문화가 있고 그방면에 관한한은

이미 노조에 축적된 노하우들이 많다고 생각하며

충분히 노조 담당자들 선에서 실행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
특히 중앙교섭을 쟁취한 지난해부터는

중앙지침에 의하여 지부별 집회를 중심으로 투쟁을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업에 대한 파지단의 문화적 개입을 더욱 협소하게 만들기도 한 것 같다.

산별노조 시대가 정착되기 까지는

갖가지 실험적 시도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지단은 그 초기에 이루어진 하나의 실험으로 볼 수 있으며,

지금은 그 4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색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터닝포인트의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무엇인가?

노동문화의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노조와 문화노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장기적인 노동문화발전을 꾀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노조 차원에서는 무너진 노조문화담당자라인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금속노조 본조에 문화담당자가 단 한명 뿐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혼자서 전국단위의 파업집회와 문화제, 중장기 노조문화사업전망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정체 혹은 침체되어있는 문화패 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고민할 수 있겠는가?

아주 근시안적으로 보더라도 파업문화 하나라도 잘치르기 위해서는

파지단이라는 단위보다는 문화담당자를 배치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장기적으로도 발전적 사업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문화노동자들은 지금까지 열심히 함께 토대를 구축해왔던 파업문화 뿐만 아니라

노동문화의 노동자 일상으로의 침투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파업으로만 한정된 노조운동, 노동문화가 뿌리없는 나무와 같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투쟁을 아무리 잘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그 성과물이 노동자 일상 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더불어 잘사는 세상’,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은

요원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문화진영은

일상 영역에로의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시도들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근시안적 사업 틀거리를 과감하게 깨고

노동문화를 노동자 삶의 전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는 과감한 사업이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이는 문화노동자들에게만 한정된 요구가 아니다.

노동문화의 3주체라고 일컬어지는 문화국, 문화패, 문화단체(및 개인활동가)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원활한 상호 피드백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활짝 핀 노동문화의 꽃은

우리 삶 전반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제 파업이라는 특정시기의 싸움이 아닌

우리 일상의 모든 영역을 바꿔내는 싸움을 구체화시켜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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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30 16:18 2005/09/3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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