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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최초의 해외여행기 1 - 여행의 시작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기 1 - 여행의 시작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2012년 6월, 거세게 진행되는 홍익대 민주노조 사수 투쟁 담당자로서, 노동조합 상근 간부로서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4년 넘게 활동해왔던 노동조합 상근 간부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그 당시의 심리 상태를 말하자면,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지만 만성적으로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이 적지 않은 상태였다. 예를 들어서 들쑥 날쑥하게 우울했고, 열중할 일이 없을 때 불안했으며, 운동을 한다기 보다는 투쟁이라는 게 다 사업적 업무로만 보이고, 사업의 결과물이 없으면 쓸모없는 활동으로 스스로 간주하고 자괴감에 빠지는 등이다. 운동을 한다는 것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한다기 보다는 단지 비루한 목숨을 연명하는 생업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고, 그래서 도태되다 못해서 무능으로 인해 결국 짐짝 취급받다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과 강박이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만두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런 심리상태를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단 좀 쉬는 거도 쉬는 것이었고, 과연 내가 활동을 과연 더 계속할 수 있는지, 활동한다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 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감정과 심리, 그리고 자괴감은 묻고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활동했고 또한 많은 인연과 정을 맺을 수 있었던 노동조합을 떠난다는 나름대로 힘겨운 결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떠나야 될 때가 다가오자, 나가고 나서 과연 무엇을 하고 살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단지 백수로 노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새로이 어딘가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나 일정이 당연히 아무 것도 없었고, 나가봤자 어차피 담당하던 투쟁 사업장이나 왔다갔다 하는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이 "여행이나 다녀와" 라는 이야기를 했다. 다들 일반적으로 뭔가 정리할 때 여행을 다녀오는 일이 많았나 보다. 그런데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다. 특히 혼자서 어딘가를 간 적은 더더욱 없었다. 고작해야 대전에 친구와 술마시러 버스타고 내려가는 수준을 여행이라면 여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닥 어딘가 가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사람을 만나서 술 한잔 마시면 그걸로 휴식이고 족한 게 아니냐는 정도의 생각이나 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마음상태가 달랐다. 여행이나 다녀오라는 주변의 말들에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그만두겠다고 마음 먹으면서부터 스스로에게 설정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보자" 목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갑자기 어느 한 순간 여행이라는 큰 틀을 결정해버렸다.

그럼 하필 딱 유럽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건 또 무엇일까. 막연하게, 역사의 현장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면이 크다. 과거 로마인이야기를 비롯해 서양사에 관련된 책들을 꽤 즐겁게 보았기도 했고, 마르크스의 무덤이나 파리꼬뮌 전사의 벽 등 나름 좌파 운동의 성지들을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해주던 주변 동료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크다. 그래서 처음에는 로마와 파리로 한정했던 여행이 런던이 추가되고, 여행사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계획을 정비해 나갔다. 처음에 고작 15일짜리 여행이었지만 25일로 확대된 것도 그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또한 원래는 혼자서 어디 여행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해서 자꾸 동행이나 여행 동료를 구하려고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90년대 초반생들, 즉 이제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이 대의 모임들만 검색되었다. 아마도 도저히 그 팀에서 화합을 이루지도 못할 것 같고, 오히려 여행의 자유만 해칠 것 같아 여행 동료를 구하는 시도도 그만두고 혼자 가기로 했다.

여행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설레였지만 사실 무섭기도 했고, 과연 가서 제대로 잘 지내다 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교차했다. 그러나 어쨌든 8월 22일, 인천공항에서 러시아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출발했다. 생애 최초로 "혼자" 가는 여행이자 최초로 "유럽" 이라는 지구 반대편을 향해 가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총 17시간에 달하는 런던까지의 길


사실 비행기를 이렇게 장시간 타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일단 지루하기 짝이 없고, 잠을 자려고 해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 마당에 잘 자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앉아서 잔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다행히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USB포트가 있는 좌석이라 폰에 들어있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계속 보면서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그렇게 9시간 가량을 비행하다가 경유지인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다. 3시간 가량을 모스크바 공항에서 대기한 후 출발해야만 했다.

시간만 많이 있었다면 모스크바에서 잠시 나가서, 붉은 광장을 찾아가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비자 발급의 복잡함도 그렇고 시간도 별로 없으므로 감히 그것은 꿈꿀 수 없었다. 아직도 레닌의 시체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던데, 어쨌던 그 당시로서는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목이 워낙 말라서 물을 샀는데, 한국 돈으로 환산하니 3000원이 훌쩍 넘는 액수였다. 1.5L 도 아니고 고작 0.5L 짜리 가격이 그랬다.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러시아 물가가 이렇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공항 내부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살짝 이곳에 가서 레닌이나 공산권 기념품이라도 있다면 하나 살 법 했지만 러시아의 궁전 모양의 기념품만 있었다. 따라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밖으로 나와서 조용히 러시아 대중가요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러시아 대중가요 뮤직비디오는 한국같으면 바로 19금에 걸렸을 표현 수위와 내용들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방영되고 있었다. 어쨌든 현실 사회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국가들은 문화 면에서 다소 보수적이지 않을까 했지만 그 뮤직비디오는 나의 그런 예상을 여지없이 비웃고 있었다.

환승해서 3시간 가량을 비행하니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히드로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할 때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댔다. 무슨 놈의 질문이 그렇게 많은지 귀찮을 정도였다. 말도 잘 못알아듣는데....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수하물을 찾으러 가다가 순간 여권을 꺼내느라 가방에 채워놓은 자물쇠를 잠시 풀었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손가방을 봤더니 자물쇠가 없었다! 자물쇠를 떨어뜨린 걸로 생각한 나는 다시 입국심사대를 가서 자물쇠를 찾았지만 정작 자물쇠는 거기에 없었고, 여권을 꺼낼 때 떨어뜨린 신용카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보니 자물쇠는 내 가방의 다른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자물쇠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돌아갔지만 정작 자물쇠는 잃어버린 게 아니었고, 오히려 더 중요한 신용카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처음 유럽에 도착한 터라 짐 관리부터 내 가방에 자물쇠를 다루는 법까지 불안불안했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어쨌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나는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swiss cottage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여행사에서 예약해 둔 숙소가 있는 곳이었다. 핸드폰으로 숙소에 전화했더니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로 보이는 아가씨가 지하철역으로 나와서 픽업해주었다. 숙소에도 무사히 도착한 나는 짐을 풀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내일부터 있을 여행을 위해서는 잠이라도 빨리 자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드디어 지구 반대편의 영국 런던까지 왔다는 설레임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계획을 잡아두기는 했었지만 내일 어디로 어떻게 나가볼 지 마음이 설레이고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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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이번에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하기로 결단했다. 그러나 이 지지는 진보신당이라는 정당, 그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 대한 지지다.

이번 진보신당 선거운동 과정은 선거운동과정과 정당이라는 장치를 가지고 노동자 투쟁에 힘을 싣는데 역량을 기울였다. 정진우 선본의 선거운동이 그랬다고 생각한다. 선거운동을 빙자한 현장투쟁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그 선본은 직접 함께 "투쟁" 했다. 재능교육 특수고용노동자들과, 스물두번째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은 쌍용차 동지들과, 그리고 지금 이 시간 4개월 쨰 집단해고에 맞서 투쟁하다가 로비농성에 들어간 한일병원 식당 비정규직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성-고령-비정규직이라는 3중고를 겪는 청소노동자를 비례대표 1번에 배치한 것은 물론 전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의 가치를 명확히 드러내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진보정당으로서는 참으로 떳떳한 후보 배정이었다. 그 후보는 노련한 정책통이라 불리는 소위 먹물들처럼 이것저것 돌려말하지 않고 우리의 진짜 현실을 말했고 정치가 민중을 위해서,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주장하고 요구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후보가 진짜 지지를 받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과 같이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투쟁에 함께 했다.

 

이번 선거 때 진보신당의 선거운동이 있기 이전 진보정당의 선거운동은 여타 제도정치권 정당들의 선거운동 방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오직 차이가 있다면 민주노총이 개최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그 유세장이 된다는 것 정도일 뿐이었다. 현장투쟁에 그 진보정당들이 올 때에도 그 지위를 활용하여 사측과 면담을 한 번 더 하는 정도에 그쳤다. 직접, 함께 싸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냥 정치는 하늘위 정치의 세계에 있었고 투쟁은 땅 위의 인간들이 피냄새와 땀냄새를 풍기며 벌이는 개싸움이었다. 그러나 누구나가 바라던 진보정치는 저 높은 하늘의 정치의 세계에서 땅 위의 현실을 내려다보는 정치가 아니었다. 진보정치는 땅위의 현실에 발을 딛고 땅 위의 인간들과 함께 현실의 모순을 변혁하기 위해 싸우고 함께 땀을 흘리는 정치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정략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 그 자체의 승리를 위해서 함께 싸우고 노력하는 정치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번 진보신당의 선거운동에서 그런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제도정치권에서의 정당이라면 마땅히 득표와 집권이 목표겠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지향을 가진 진보정당이라면 그 목표와 더불어 마땅히 다른 목표도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피눈물나는 자본의 억압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다. 그 억압을 철폐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그 억압의 주체와 닮아가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우리를 들여다 본다는 경구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왜냐하면 예전에 진보정치를 주장했던 당의 일원이었지만, 국민참여당과 나름대로 "전략적"인 통합을 선택한 그 동지들이 있던 당의 모습은 기존 제도정치권 정당들과의 차이를 잃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후 그 당이 새로운 "억압자" 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진보신당이 앞으로 진짜로 노동 중심의 진보정치, 함께 땅 위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조직하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확신할 수는 없다. 단지 가능성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국민참여당 세력과 통합하는 길을 선택한 그 동지들이 어쨌든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그 "진짜 진보정치" 와 너무나 멀어져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쨌든 선거권을 얻은 이래 "진보정당" 에 한 표를 행사해 왔던 내가 통합진보당을 지지할 수 없으며 진보신당에 그나마의 가능성을 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부디 이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늘 이야기 해왔지만 노동자들을 한 표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정치가 아니기를 바란다.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고 현장과 함께 싸우고 현장을 함께 조직하고 삶의 공간을 새롭게 조직하는 활동이 살아있는 정치세력화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진보신당의 선거가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단초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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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일상.

1.선거

 

서울시 교육감 후보를 상대로 한 '비정규직 없는 학교 만들기' 정책 협약식.

 

어찌 보면 참으로 얄팍한 수단이다.

 

진보 교육감 당선이 되는데, 그 진보 교육감이 진보적일까 과연 싶은 생각이 있으면서도.

 

미리 명분 만들고 발목 잡아두겠다는 속셈.

 

그놈의 진보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딴소리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리고 서울시 교육청 상대로 교섭 요구 지속한다는 전제 조건.

 

사실 매우 골치아프긴 한데 현장의 힘 없이 진행될 상층부 사업인지라.

 

추진하면서도 사실 마음 한 구석은 조금 쓰다.

 

지자체 선거. 질의서 다 날리고, 요구 투쟁 조직하겠지만.

 

미약한 조직 상황에서는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 힘. 힘. 힘. 결국은 쪽수. 결국은 힘.

 

 

2. 투쟁.

 

해고, 징계.

 

아시아나격납고의 집단해고. 신목고등학교의 집단 징계.  솔바람어린이집의 집단해고. 충무아트홀의 표적 해고.

 

현장의 단결. 현장의 힘으로 사측을 뚫을 수 있는 힘이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반면에 그것이 불가능한 중소영세사업장의 투쟁이란, 얼마나 답답한 것인가.

 

힘으로. 힘으로. 결국 힘으로 이길 수 밖에 없는데.

 

그 힘이라는 게 만들어지지 못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현실이란.

 

결국 해답은 조직화, 의식화. 끝없는 과정일 뿐이라는 너무나 정답 밖에 없는 그런 것.

 

 

3. 노조법 개악, 민주노조 사수.

 

우리는 너무나 짧은 시야를 보고 있고.

 

당장 눈 앞에 닥쳐와서도 우리의 힘을 핑계로, 우리의 미약함을 핑계로.

 

그렇게 물러서고 있다.

 

민주노총은 과연 하나의 조직인가.

 

현장을 조직하는 지역지부, 산별을 총괄하는 산별노조, 모든 노동자 운동의 구심으로서의 총연맹.

 

하나로 힘을 모아 전선을 형성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자본이 설정한 한계를 깨어나가야 하는데.

 

정해진 금 안에서만 놀아야 하고, 그렇게 놀지 않으려면 위축이 되는 지금이.

 

이대로라면 민주노조를 사수하는 것은 너무나 요원해지는 게 아닐까.

 

민주노총 소속이라고 민주노조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이 설정한 한계를 깨지 못하는 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은 고사하고

 

민주노조, 민주노총 조차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이 설정한 한계를 깨고 나가자는 결의를 하나로, 하나로 모아가야 하는데.

 

다 각자 살 길에 바빠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4, 독서.

 

책을 요즘 전혀 손도 대지 않다가 밥과 장미라는 책을 손에 들었다.

 

동아리 선배이자 나름 친해진 형이 저술한 책이다.

 

내 인터뷰도 들어 있고, 현장 노동자 인터뷰도 다 있다.

 

현장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결코 즐거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장의 삶을 온전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나는 그 과정에서 겪었을 수많은 부침과 고통을 받아 안으면서 조심스럽게 읽어나가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금융 자본을 통제하는 민중의 투쟁.

 

하지만 결국, 현장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공염불일 수 밖에 없는 것을.

 

그러나 현장을 조직하면서 이념과 운동이 없이 조직한다는 것은 정말로 더 큰 공염불인 것을.

 

이념이 실종된 운동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금, 이론서도 서서히 손에 들어야 하겠다.

 

매일 법만 보고 살 수는 없다.

 

 

5. 솔로?

 

20대 때는 연애하냐라는 질문이 웃으면서 "아, 나도 여자가 그리워" 따위 시시껄렁한 농담거리였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나보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사귀는 아가씨는 있냐.

 

그런데 매우 진지하기 그지 없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 아저씨도 있다.

 

어느덧 그런 것들 하나 하나가 진지해져야 하는 나이인가보다.

 

만인을 위한 투쟁을 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마지막에는 혼자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 사회 속에서 사실 결혼? 뭐 그런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나는 건 이 나이를 넘어서면 어려워진다는 그런 거지.

 

물론 그런 것 자체가 사실 누구에게나 기적같은 일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런 데 어느 정도 마음이 쓰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쓰는 것 자체가 지금의 나한테는 사치일 것 같아서.

 

그 주제에 술만 처먹으면 왜 여러 사람 민폐나 끼치는지 원......

 

학교에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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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1

벌써 7개월째를 맞는 어느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투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그 동지는 정말 힘들어 했었다.

 

그 동지는 정말 지긋지긋한 곳에서 외롭게 해고 당했고, 정말 지긋지긋한 곳을 돌아가기 위해 싸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투쟁의 조직은 잘 되기 힘들었고.

 

투쟁 계획을 내는 것도 버거웠고, 그 동지는 아팠다. 된다는 희망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좀 쉴 때라고 입 밖에 누군가 내기는 쉽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에 어느 샌가 그 동지는 스스로 그 투쟁을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 없이.

 

힘겨워 하면서 그렇게 꾸역꾸역 투쟁은 진행되어 왔다.

 

 

 

 

오늘 그 동지는 이제 더 이상 투쟁을 진행하기 보다는 쉬고 싶다고 말했고.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같이 먹는데 밥이 밥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밥을 잘 안 먹은 것도 아니다.

 

그 집 음식이 그렇게까지 맛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짜,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밥을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약속이 없어서 둘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

 

그 동지는 술을 마실 몸 상태는 아니었고 나도 술은 그닥 먹고 싶지 않았다.

 

난 실컷 잡담을 하면서 억지로 웃었고, 딴에는 대단히 재밌는 얘기를 하면서 웃기려고 했다.

 

 

 

그 동지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항상 옆에서 함께 했던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고.

 

나이가 훨씬 많은 자신이, 나를 배려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고.

 

 

 

난 그냥 듣고 있다가 또다시 농으로 풀었다.

 

그 동지는 말하면서 울었지만 내가 농이라도 하면서 풀지 않으면.

 

내가 울 것 같았다.

 

몸 관리 잘 하라고, 푹 쉬라고 말했지만.

 

물론 오늘이 끝이 아니겠지만.

 

그 동지나 나나 마음으로는 이제는 끝을 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했으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흘러나온 지금.

 

이젠 더 이상 그 동지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잡는다는 게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한 것이다.

 

 

 

사람이 하는 운동이고 사람이 하는 투쟁인데,

 

물론 그녀가 힘겨운 건 정권과 자본의, 참으로 개같은 놈들 때문의 개같은 폭력때문이 원인이지만.

 

희망을 갖지 못한 채 7개월간 자신의 투쟁의 의미만으로 그렇게 싸워온 동지의 어깨에는

 

물론 그 동지의 모든 투쟁에 함께 했고 조직하고 기획하고 집행했던 나보다도.

 

더 큰 책임감이 돌덩이처럼 얹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힘들었고, 그 마음을 내가 어찌 다 알겠는가.

 

 

 

물론 그 동지가 인간적으로 훌륭하다거나, 모범적인 활동가였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까지 숨 한 번 제대로 못 쉬고 조용히 살았던 사람이 노동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봤을 때.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구나.

 

내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꿈을 꿀 수 있구나.

 

내 투쟁이 정말 이렇게 의미있는 일이었구나 라고.

 

그렇게 느꼈던 마음이 있기에 그녀는 계속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에 데려다 주고 홀로 걸어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가 무엇을 했나 싶은 생각과 함께 그 사람의 힘겨움을 뭘 이해했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속이 답답하고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머리 속에 무슨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끊임없이 담배만 피워대며 길을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동지를 만나서도 웃을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힘겨워 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만날 때 나는 웃을 것이다.

 

 

 

 

 

 

 

정말 힘든 몸과 마음, 그리고 상처를 껴안고.

 

이제껏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동지가 있어서 많이 배웠고 우리의 투쟁이 그래도 아름다웠습니다.

 

후회는 없는데 아쉬움은 계속 남는다고 말했었지요.

 

그토록 서러움과 아쉬움 속에서 싸워왔던 날들이었습니다.

 

더 많이 힘이 되어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활동가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정말 많이 미안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동지.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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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진짜 연말이다.

서른이 되기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번 연말에는 진지하게 내 인생을 한 번 돌이켜보고 생각 한 번 해 봐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사실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냥 한 번 연말 기분 내면서 잡설이나 휘갈겨 써 보는 것 이다.

 

일단 지금 나는 서른이 다 됐고, 직업은 노조 상근자에다가, 맡은 일의 경우 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지부 생활 1년 6개월이 넘어갔는데 이것 저것 배운 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운 것 같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기 그지 없지만 그나마라도 좀 나아진 게 있지 않을까?

 

단지 실무나 조직이나 운동의 현실 등에 대해서 배운 것 이상으로 그건 좋은 재산일 게다.

 

2009년 한 해.

 

스스로의 무능과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하며 살아온 한 해였던 것 같다.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진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겠지. 그나마의 낙관이다.

 

 

 

 

올해 가장 반성이 되는 건 사람이다.

 

생각보다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그들에게 그닥 좋은 사람이 되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 그지 없다.

 

오래된 관계, 어려운 관계 할 것 없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텐데.

 

내가 별로 좋은 놈이 못 되다 보니까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못 된다.

 

마음 써주지 못하는 것, 마음이 쓰이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그저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까딱 잘못해서 실수하거나. 그게 내가 지금껏 관계에서 맺어온 모습인 것 같다.

 

맡아서 싸우고 있는 사업장이나, 해고자 동지에게도 좀 더 인간적이면서도 투쟁에 대해서 원칙적이고, 힘있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데 참 다양한 관계에서 다양한 접근을 못하다 보니 항상 부족함이 생긴다.

 

아니면 내 사려가 부족해서 던가, 어쨌든 내가 맺는 인간관계라고 하는 게 사실 긴밀한 관계가 별로 없다.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게 나였다.

 

내년에는 좀 그런 면을 보완해 가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어쨌든 지금처럼 표면적인 관계를 넘어서려는 내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전망을 서서히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물론 당분간은 쭉 이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이 경험과 실력을 쌓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당분간은 생각보다 길고, 적어도 2010년은 넘어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뭐랄까, 평생동안 노조 상근 간부로만 일하면서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바닥에서 자신의 캐릭터성 하나 없이 장기적으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되지도 않는 날백수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있다.

 

구체적인 전망은 아직 하나도 그려진 게 없지만, 뭔가 다른 걸 그려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항상 현장진출이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 한 구석의 고민이 있었다.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항상 새로운 관계를 맺고 내가 그 관계를 헤쳐나왔던 과정을 볼 때 영 스스로도 미덥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현장에 간다는 건 단지 돈 벌러 가는 것 밖에 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고민.

 

그리고 돈만 벌려면 내가 뭐하려고 힘든 일을 하면서 돈을 벌까. 편한 일 하면서 돈 벌 생각이나 하면 되지, 뭐 그런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다. 물론 현장에 가서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만.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실험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내년 한 해로 정리될 만한 고민은 아니고 고민보다는 실천이겠지만, 어쨌든 생각은 계속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있다.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방식도 고민해 볼 수 있겠다.

 

이제까지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큰 변화던 작은 변화던 새로운 방식의 삶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게 뭐가 될 지는 모르겠다.

 

 

 

 

이젠 40살의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물론 딱 잘라서 난 이때 뭐가 되어 있을거야 같은 게 아니라.(그런 건 애시당초 생각할 수 없고)

 

대략적인 목표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야 될 때라는 게다.

 

어쩌면 벌써 그런 생각을 가졌어야 하는데 말 그대로 혹자가 표현하듯 "쫓기면서" 살아서 그런지

 

그런건 별로 생각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 걸 잘 고민해 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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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1일

나는 적잖이 은근히 감상적인 성격이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일해야 하고 일을 하고 있었지만 괜스레 씁쓸한 생각만 든다.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까지 어찌 살아왔나를 되돌아 보면 참으로 씁쓸한 생각만이 가득할 뿐이다.

 

앞으로의 인생은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더 잘 살아야 할 터인데.

 

긍정적인 생각만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인가.

 

도대체 그 정체는 무엇인가.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데. 왜 이런 마음인 것인가.

 

무슨 날이건 간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만한 준비가 있어야 되나 보다. 내 준비건 남의 준비 건 간에.

 

나는 남을 위해 행복하게 할 준비를 별로 안 하고 살아서 그런지 오늘이 그런가 싶구나.

 

부디 오늘 이후는 행복한 하루, 잘 풀리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이리 답답한 마음은 그만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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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재단 규탄 결의대회! 동지들의 연대로 승리합시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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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1

한심하다.

 

나는 지금 누구와 어려움을 나누어야 한단 말인가.

 

근본적인 신뢰가 없는 지금 모두가 힘들 뿐인데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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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0

남이 만들어 준 판을 가지고, 그 판에 머물러서 그 판 대로만 활동하고 있는 한 활동의 미래는 없다.

 

또한 그 판이 영원히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면 그 판을 어떻게든 더 나아가기 위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1년 간 내가 해 온 활동들은?

 

현장에만 매몰되었던 것인가?

 

실제로 지부의 전망이라는 커다란 과제는 남의 활동으로 돌리고 있지 않았던가?

 

투쟁 한 두개 잘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 중요한 판에서 채용 상근자들은 사실은 없는 것과 그다지 진배 없었다.

 

이것 저것 일을 더 하겠다고 해 왔던 건 그런 말을 하기 위한 신뢰를 만들어 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신뢰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만 생기는 게 아닌 걸 지금은 똑똑히 알겠다.

 

나 혼자 살기에도 정신없어서 하루 하루를 그냥 보내고 있는 지금 무슨 전망을 논할 수가 있는 걸까.

 

아마 함께 하는 누군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무에만 치여 있다간 결국 나중엔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러다가 서서히 망가질 거라는 말이 대단히 뼈아프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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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사건 나는 건가?

 

총학생회장, 정치대 학생회장과 함께 연행되었다. 집시법 위반이 혐의인데, 몇 년 전 처럼 국가보안법으로 엮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 당시 2명의 동지가 불시에 연행되었고 나를 포함한 3인의 동지들이 수배 비슷한 상태에서 학교에 갇혀 살았다. 그 때 상황과 너무 똑같아서 매우 답답한 마음이다.

이 미친 정권에서 살기 너무 힘들다. 개같은 대한민국, 이민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생겼다.

 

 

또 대공분실로 연행, 이명박 퇴진은 필연이다.


2009/07/06 05:21



 

5일 오후 6시40분 경 건국대학교 총학생회장과 정치대 학생회장이 비슷한 시각 동떨어진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연행되었다. 몇 시간 뒤 건국대 생활도서관 대표 학생도 연행되었다.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이들이 연락해 온 장소는 홍제동 대공분실.

 

 

홍제동 대공분실은 87년 박종철 열사를 고문으로 죽게 한 대공3계가 89년 이전한 악명 높은 곳이다. 07년 남영동 대공분실이 없어지면서 보안3계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잠원동과 더불어 홍제동은 공안기관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95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성신여대 총학생회장, 94년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장을 포함한 고대, 성균관대 대학생 11명을 구속 수사한 곳이다. 02년 공안기관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민족민주 혁명당’ 사건을 담당하기도 했다. 최근엔 08년 촛불 문화제에서 공연을 한 가극단 미래 대표가 이적단체 혐의로 조사를 받은 곳이다. 가극단 미래 기획실장과 음악감독의 인준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충성 서약식’ 07년 극단 대표가 친구 누나 결혼식에서 부른 ‘지침서’란 노래가 북에서 지령을 받은 지침의 노래로 둔갑되었다.

 

홍제동 대공분실은 건국대 학생들과 악연이 깊다. 02년 건대학생들은 깡패 400여명이 동원된 안암동 재개발지역 철거 폭력사건에서 부상당한 철거민들을 등에 업고 빠져나와 병원에 입원시켰다. 당시 화염병을 직격으로 맞아 철거민이 온 몸에 화상을 입었고 건국대 한 학생은 낫에 발등을 찍힌 주민을 업고 탈출했다. 1년 뒤인 2003년 ‘홍제동’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자신의 소속을 밝힌 사람들에 의해 그 건대 학생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인 09년 홍제동 공안분실 망령이 건국대를 또 덮쳤다.

 

경찰은 7월10일까지 공안사범 100인 검거 작전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현재 검찰청장 천성관 내정자는 98년 울산 영남위원회 조작사건의 지휘자, 용산 폭력 참사 은폐 조사 담당자, PD 수첩 과잉 조사 책임자인 공안검찰의 대부이다. 이명박 정권의 이 같은 공안 정국 조성 기조에 비춰보면 이번 건대 대표자 연행 또한 반이명박 죽이기의 한 흐름이다.

 

25일 김하얀 (전)홍익대 총학생회장 연행, 29일 시국선언 전교조 위원장 포함 17명 연행, 29일 민주노동당 중구위원회 부위원장, 사무국장 연행 30일 민주노동당 김정동 비정규직국장 연행 및 구속, 5일 건대 대표자 3인 연행

 

경찰의 공안 사범 검거 100일 작전 발표 후 MB 폭탄이 쉴 틈 없이 터지고 있다. 가끔 그래도 대통령인데 사과하고 개과천선하면 한 번 더 믿어 줄까? 하는 약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얼마나 창의적인 생각이었는지 지금 똑똑히 알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온라인에 글 쓰는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엄습한다. MB 퇴진은 이제 필연이다. MB의 진심어린 사과를 포기했다면, 아니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고 내각 총사퇴가 되도 믿을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MB 퇴진 운동뿐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온라인에 글쓰기든, 서명이든, 집회든, 국회 투쟁이든 모든 말이다. MB 정권은 장난이 아니다. 오늘 집에서 사무실에서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내일은 대공분실에 갇히는 구속자가 될 수 있는 MB 시대다.

  MB 시대 초등학생도, 국회의원도 모두 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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