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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은 계급투쟁을 보여준다. part1

Monthly Review 12월 호에 흥미있는 글이 실려 해석해본다.

대학교때 였나, 영화를 쫌 본다하는 이들은 히치콕 영화를 봐야 한다길래 (ㅋㅋ) 그의 영화를 주루룩 빌려다가 하루 이틀 동안 내리 봤던 적이 있다. 카메라 기법 따위는 잘 모르겠고, 그냥 아~ 이장면이 유명한 장면이구나, 그냥 스릴러 영화구나 이러면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히치콕의 영화가 특히 <사이코>가 계급투쟁을 묘사한것이라는 흥미로운 글이다.

내용이 너무 많아 일단 반만 해석. 나머지는 며칠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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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은 계급투쟁을 보여준다

by Mervyn Nicholson

계급투쟁은 아마도 가장 유명한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연관성이 있다. 아무도 히치콕을 사회주의자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원하는 모든것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즐겁게 하는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그의 상업적 성공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를 고용했던 스튜디오들도 그러했다)-<Remaking Psycho>의 저자 중 한명인 James Naremore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히치콕의 '사이코'는 전에는 없었던 가장 이익을 많이 남긴 영화 중의 하나이다." <Hitchcock>의 저자 Francois Truffaut에 따르면 히치콕은 항상 대중적,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영화들을 목표로 했다; 그는 그가 "아트 하우스"라 부르는 것들을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히치콕은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을 원했다. 그래서 신념이나 국면에 대한 "진술(statement)"을 많이 하지 않았다. 영화 연출에 대한 언급은 거의 모두 기술적인것, 촬영기법, 그리고 시나리오구성과 관련된것 들이며, "method-acting(연기자가 연기할 배역을 실생활에서 직접 경험해보는 극사실주의적 연기법-역자)"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게 배우의 역할은 영화보다 중요한 모든것도, 영화와 독립된 그 무엇도 아닌, 영화의 한역할일 뿐이다.-그는 관객들을 조종하는것에 대해 냉소적인 의견을 냈으며, 심오한 영화를 만들려는 고민 조차도 하지 않았다. 전쟁시기(1939-45)의 그의 영화들, <구명보트> 등 당시의 그의 영화들이 반파시즘적이라는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히치콕은 당연히 비정치적이라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당신의 영화들에서 당신은 대개 어떤 정치적인것도 회피한다"고 프랑스 영화감독 Francois Truffaut이 히치콕에게 말했고, 히치콕의 대답은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단지 사회가 정치적인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의견에 반할만한 어떤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사회가 원하는것이 아니다. <구명보트> 조차 나치를 지지하는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것 또한 주목할 만 하다.-<Alfred Hitchcock: A Life in Darkness and Light>의 저자 Patrick McGilligan은 히치콕의 동맹군에 대한 지지와 관련한 그의 작업의 원인을 강조한다. "1개 이상의 전후 영화에서, 히치콕은 그가 절대 용서 할수 없는 어떤것, 독일 나치의 악을 떠올리게 하는것들을 흩뿌려놓았다." 히치콕에 대한 McGilligan의 일대기 분석은 심리학적으로 다뤄진, 더욱 유명한, <The Dark Side of Genius: The Life of Alfred Hitchcock>의 저자 David Spoto의 분석보다 훨씬 더 객관적이다. McGilligan은 히치콕의 영화들에서 "빨갱이 소동(Red Scare)"를 비꼬며 언급했다. <찢겨진 커튼> 같은 후기 영화들은 "반꼬뮤니스트"적이다. 하지만 이들 영화들에서 주목 할 점은 공공의 적이 그 유명한 "맥거핀(MacGuffin)-스릴러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으로, 작품상에서 중요한 동기와 모티브가 되지만 그 자체로서는 스토리 전개상 별 의미없는 것-역자" 장치 처럼, 드라마 구성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정치적 언급의 필요성 보다는 주변에서 줄거리를 구성한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유사문화적 개념의 계급이 아닌, 잉여물 착취, 소외, 비참함, 혁명과 관련된 계급에 대한 전문적, 맑시즘적 개념에서의) 계급을 제외하고는 히치콕의 모든것을 토론한다.-예를 들면, <The Myth of Apocalypse and the Horror Film: The Primacy of Psycho and The Birds>의 저자 Christopher Sharrett는 "히치콕은 미국인의 삶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이코>의 적막한 기운을 형성하는 소외와 좌절감은 은밀한 곳에서 형성된다...샘의 엄청난 재정적 유산은 그의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것이다"고 분석한다. Sharrett은 통찰력있는 비평가이다. 하지만 다른이들 처럼 그 역시 계급 이슈를 비켜간다.-John Grant가 말했듯이 "'계급'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미국에서 더러운 단어"이다. 비평가들은 히치콕의 헐리우드 영화에서 솔직하게 묘사된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에 주목한다. 그들은 그의 영화들에서의 소외와 냉소, 풍자, 심지어 허무주의에 대해 토론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소외가 '경제와 계급 이슈'의 하나의 기능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이 초점을 두는것은 학자들이 좋아하는것, 초기 섹슈얼리티, 오이디푸스적 욕정, 항문가학증, 거세불안, (확실히 잘못된 명칭인) "가족 로맨스", 남근 숭배의 엄마와 아이의 남근에 관한 항상 얽혀있는 이러한 망들, 그리고 다른 흥미로운 난해한 정신분석학적인 것들이다. 계급의 역학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것을 말해준다.

 

많은 이들에게 히치콕이 계급투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소리처럼 들릴것이다. 그것은 흥미로운 반응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무시하거나 제거해 버렸을지라도, 계급투쟁의 한 기능인 이슈들은 분명히 히치콕의 시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중 많은 작품이 계급 투쟁 이슈들 주변에서 만들어졌다. 그것들 없이는, 영화도 없었을 것이다. 눈에 띄는(이채로운) 지표는, 거의 스릴러물과 보잘것 없는 영화들에서 조차, 히치콕은 이례적으로 '노동', 소유의 특권을 지닌 사람들을 묘사하는것 뿐만 아니라 삶을 위해 노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것을 좋아한다. 그는 종종 부와 빈곤의 의미 사이를 이동한다. 히치콕은 <비밀첩보원>의 공장에서 조립라인에서 부터 <프렌지>에서 채소 도매 장수, 그의 마지막 영화 <가족음모>에서 (실패한 노동자, 운전사와 함께) 택시의 내부까지 일터를 특징으로 한다. 히치콕은 삶을 위해 사람들이 행하는것에 관심을 가졌다. 자본주의적 서열에서의 노동자로서의 혹은 소유주로서의 그들의 위치는 항상 신중하게 특징 지워졌고 의미가 있었다.   

 

관객 집단과 함께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호소의 일부는 실제로 수많은 이슈들과 함께, 비록 무의식적 혹은 붕괴된 형태일지라도, 히치콕은 뷰어의 현실의 삶과 함께 울려퍼지는 투쟁들을 묘사했다는 사실과 함께 해야만 한다. 이들 이슈들은 당연히 명백하다. 하지만 뷰어의 태도가 그 이슈들에 직접적으로 닿아있는것은 드물다. 그 이슈들은 필연적이지만, 비가시적이다. 필연적으로, 그것들은 시나리오에서 필수조건이다. 시나리오는 그것들 없이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슈들이 거기에 없는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목격되지 않는 곳에서 그것들은 비가시적이다.-히치콕의 <열차안의 낯선 자들>이 그의 영화중 가장 덜 계급적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계급적 주제를 복잡하게 포함시키고 있다-지금, 종종 그렇듯이, 관점이 분명한 그 무엇은 가장 보기 힘들다.  

 

히치콕의 가장 유명한 작품 <사이코>를 보자. 가장 무서운 "샤워 신"-마리온 크레인(자넷 리 분)의 살해 장면-은 어쩌면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중 가장 많은 부분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이코>가 '계급'에 대한 모든것이라는 것이다.-히치콕은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었지만, 시스템을 제안하는 신념자 보다는 드라마적 상황을 만드는 의미로서 그의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을 이용했다. <스펠바운드 spellbound>는 영화전체가 정신분석에 관한것이지만, 히치콕은 간결하게 "이것은 단지 정신이상에 관한 또다른 범인수색 이야기 이다"라고 했다-시놉시스가 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이다. 주인공 마리온 크레인은 피닉스 real state에서 비서로 몇년간 일해왔다. 그녀의 남자친구 샘은 가상의 도시인 "Fairvale"이라는 곳에 산다. 그녀는 결혼을 원하는 삶의 지점에 있지만, 샘은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돈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샘의 단순한 섹스를 위한 관계라 할수 있다. 마리온의 점심시간에 그들은 더러운 호텔에서 재빠르게 사랑을 나눈다. 때문에 여자는 오후 업무에 늦게 복귀한다. 한편, 그녀와 함께 일하는 행복하지 않은 비서는 마리온이 오고 가는것을 눈여겨 본다. 그녀는 신뢰를 잃는다.

 

이 영화는 '돈'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돈에 관련한 점이 심각한 정신 문제와 관련되었다는 점보다 더 우선한다. 마리온은 그럭저럭 살만하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멋지지만, 직업이 없다(철물점 직원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엔 힘들다).모든이가 가졌으면 하는 마리온의 기본적, 단순한 희망은 막혀있다. 그녀는 가족을 만들수 없고 혹은 <아빠가 제일 잘 알잖아 Father Knows Best>와 <비버에게 맡겨 Leave it to Beaver>의 시대-모두가 행복하고 모든것이 그저 괜찮기를 바랬던,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들에게 모두 가능했던 영광의 1950년대-에 그녀가 갈망하는 것들을 할수가 없다. C. Wright Mills의 "Great American Celebration"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마리온은 결혼을 하던지 아니면 헤어지자는 최후 통첩을 남자 친구에게 하기에 충분할만큼 좌절한다. 그녀의 분노의 불만족은 이미 계급 반역자로써 그녀에게 존재했다. 그녀는 단순히 자발적 복종이라는 그녀에게 주어진 기능을 이행하지 않는다.

 

그리곤 마이너로 보이는 어떤것이 그녀를 벼랑끝으로 밀어버린다. 점심시간에 더러운 호텔에서 섹스를 나눈뒤 real estate 사무실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가보면, 카우보이 모자를 쓴 석유 부자와 함께 그녀의 상사가 들어온다. 그들은 '판매'를 '팔림'으로 바꾼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부자, 캐시디-소설 호팔롱 캐시디 Hopalong Cassidy를 나타내는-가 그의 10대 딸의 결혼 선물로  집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그는 집값을 현금으로 지불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을 손에 쥐고 있다. 세금처럼, 융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가 아름다운 마리온을 보자마자, 캐시디는 음란하게 그녀를 흘겨 본다. 그는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며 그녀의 책상에 앉아 무례하게 사생활적 질문들을 한다. 그는 그녀가 행복한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이따금 마치 그녀에게 막 접근하는 것이 그의 권리라는 듯이 그녀의 일터뿐만 아니라 그녀의 개인적인 곳까지 침범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당신이 원하면 마리온처럼 사람들을 대할수 있다.-거기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하지만 부자들은 드물고 존귀하다, 물론 그들은 부가 온 곳에 존재한다-마리온은 그녀의 감정을 표현하는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의 일그러짐이 증거이다. 캐시디는 그녀가 원하는것은 "세계의 놀이터" 라스베가스에서의 휴가라는 결론을 내린다. 혼자 물아지경이 되어 선언해버린다. 그는 그의 돈다발을 그녀의 얼굴에 흔들어 대벼 말한다. "행복을 사세요." 그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현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랑한다. 주말동안 사무실에 그 많은 돈을 갖고 있는 것이 불안한 그녀의 상사는 그 돈을 은행에 저금하라고 마리온에게 말한다. 그는 금요일 오후에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그녀를 완벽하게 믿었다. 의도적으로 그 상사를 쩔쩔매게 하는 캐시디는 멍청한 업무를 보는 "계집들"을 두고, 이 두 남자는 "술이나 마시러 갈 것"이라는 말을 한다.

 

마리온은 이 장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지겹고 조금 고된 일을 몇년 한 후에,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다. 그녀의 젊은 날은 사라졌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할수 없다-혹은 가족을 꾸릴수 없다-왜냐하면 충분한 돈이 없기 때문에. 일을 한 수 년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친구 디토는 그의 죽은 아빠가 남긴 빚을 졌다. 그는 죄수 노동(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 일하는 제도-역자)의 운명에 놓여있다. 이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 상황이다. 마리온은 매우, 매우 어려운 상항에 처해있다. 사실상 강요당하고 있다. 이제 현금 뭉치를 든 이 더러운 늙은 남자 캐시디가 세계의 섹스촌, 라스베가스가 그녀가 가야하는 곳이라고, 그래서 불행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부자이면서 무례하고, 세금도 내지 않으며 일도 하지 않는다. 이 끔찍한 순간에, 마리온은 캐시디의 돈을 갖고 도망간다.  돈이 없는 그녀의 희망은 더이상 그녀의 아메리칸 드림의 길위에 있지 않다. 그녀의 무모한 희망은 그녀의 판타지를 만들어냈고, 그 판타지와 함께 살았으며, 그의 남자 친구와 Fairvale에서 그 판타지를 찾아냈다. 이런 종류의 위험한 충동적 행위는 열심히 일하고 양심적인 사람들 조차 난처하게한다. 노먼 베이츠가 그녀에 대해 말한것 처럼, 모두가 가끔씩은 조금씩 미쳐간다.

 

마리온의 상사는 그녀가 그 돈을 은행에 입금시킬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온은 명백하게 그녀의 일에 대해 충성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상사에 의해 인격이 더럽혀 지기 전에 마을을 떠나지도 않았다. 히치콕은 그녀의 충동적 행동과 도둑질이 단죄를 받게 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한다 (또한 그는 그 작업상황을 세밀화 하는것에 흥미가 있었다). 학자들은 희한하게도 <사이코>에서 관음증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른이들에 의해 관찰된 마리온의 많은 씬들이 있다. 그러나 보는것과 보여지는것은 다른,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으며, 그것은 정신분석학, 학자와 일반적으로 압축된 문화에 들러 붙어 있는 변태적 성에 관한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이들을 감시하는 것은 살기 위해 일한다는 것의 일부분일 뿐이다. 마리온의 공간에 대한 캐시디의 의도적 침범이 명백한것 처럼, 살기 위해 일하는 이들-삶을 위해 소유하려는 이들에 반대되는-의 삶에 대한 모든 국면에 접근하는 것은 노동계급 존재의 전형적 특징이다. 프라이버시는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보장되지 않으며, 그것은 부자들의 것이다.

 

상사에 의해 ("두통"때문에 사무실을 나온 뒤) 그녀의 차에서 보여지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상의 Fairvale로 가려한다. 자제력을 잃은 감정의 통제에서, 그녀는 폭풍우에 길을 잃는다. 노먼 베이츠에 들어가보자. 그녀는 밤을 보내기 위해 한 모텔, 베이츠의 모텔에 들어간다 (경찰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해서 모텔에 묵는다). 소년같은 노먼은 그녀가 돌아가기 전에 그녀를 환대하며 식사를 위해 그의 오싹한 응접실로 초대한다. 교란케하는 말로, 그는 사람은 판에박힌 일상적 존재에 새장처럼 갇혀있으며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불행과 무의미에 관한 허무주의적 이론을 설명한다. 그는 마리온처럼 탈출하려 하는 사람들을 비꼰다. 그는 그의 새장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먼의 말은 이 영화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다. 이는 자포자기와 적개심의 선언이다. 당신이 탈출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탈출구는 없다. 희망이 없음을 받아들여라. 저항은 효과가 없다 라는... 그가 그녀를 그의 응접실로 안내하는 친절함과 솔직함은 거의 진정한 감정이 아니다. 그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얼굴의 뒷면에는 존재감에 대한 무의미라는 사악한 믿음이 존재하고, 그러므로 나아가 당신이 힘을 가졌는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믿음, 캐시디가 real estate를 얕보는 생각이 존재한다. 이는 히치콕의 <로프 rope>에서 친구를 살해하는 부자의 젊은 남성에 의해 설명된다. 이는 자본주의 내에 잠복해 있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이다. 그러한 제도에는 "친구"란 없다. 오직 당신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할수 있는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노먼의 괴변은 마리온의 미친 꿈에서 벗어나도록 그녀를 흔들어댔다. 그녀의 거대한 충동적 행위는 가장 큰 실수 였다. 그녀는 피닉스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녀는 돈을 돌려 줘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전보다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모텔방으로 돌아오자 많은 생각이 든다. 영화사상 처음인, 마리온이 화장실 물을 내리는 장면은 학문적 무거운 호흡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그녀의 삶이, 화장실에서, 그 관 아래, 구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녀는 좌절을 극복할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한편, 노먼은 마리온을 염탐한다. 그의 비밀 오줌구멍을 통해, 그는 그녀가 샤워하는 동안 벗은 몸을 본다. 그리고 노먼은 살인자의 면모를 입고는 미지근한 물속에서 긴장을 풀고 있는 그녀를 놀래킨다. 그는 이 아름다운 반항하는 여성을 난도질해 죽인다. 샤워실에서 그녀가 완전히 저항할수 없을때-벗었고, 혼자이고, 피곤하며, 아무일도 없을것이라 생각하며 (아마도 해는 입지 않을 것이라는), 긴장을 풀고 있던 때-그녀를 죽인다. 이 장면에서 주요한 점은 그녀가 완벽하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저항해 싸울수가 없다. 그는 그녀의 저항력이 가장 약할때, 그녀를 공격했다. 이는 정말 끔찍한 순간이다. 이는 당신이 죽음에 닥쳤을때 당신이 얻는것이다. 그것은 일을 그만 두고, 당신의 좌절감이 순간적으로 당신을 미치게 하고, 복권-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판타지적 돈을 주는 마술시장-에 당첨된것 처럼, 매혹적으로 자유를 약속하는 충동적 행위를 행하도록 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손에 복권을 들고있게 하는 그 꿈 말이다. 

 

<사이코>는 돈에 관한, 빈곤, 좌절, 그리고 소유의 특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살기위해 일하는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일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놀라운 영화에 대한 학문적 토론은 마리온 보다 노먼에 대해 더 흥미를 느낀다.-여성주의적 분석의 등장은 이 영화에서 노먼을 넘어서서 마리온과 남녀차별에 관심을 이동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반가운 인식의 확장은 마리온의 '계급'신분, 그녀의 노동 상태, 그리고 캐시디라는 인물과의 충돌에 주목하는것에 실패했다. <사이코>는 단지 남녀차별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는 계급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예를 들어, Sarah Street는 "히로인으로써의 마리온과 우리를 동일시 하는 것은... 그녀가 도둑질을 할때 더욱 강해진다. 이것은 그녀가 훔친 돈이 세금납부를 교묘히 빠져나가는 부자의 돈이라는 것이 주요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리온의 '범죄'는 단지 도둑질 뿐만이 아니라 명백히 가부장적 기능을 가진 돈을 훔친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다시 돌아가, 여성주의적 요점은 '계급'적 관점과 통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토론되어야 할 어마어마한 히치콕에 관한 토론점들이 있다. 특히 <사이코>에 말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노만의 경제 상황과 소상인계의 끔찍함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제적 힘에 종속된 사람으로 스스로를 여기지 않는다.-때때로, 비평가들은 경제 시스템에서의 노먼의 일자리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함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Garry Leonard는 "특히 베이츠 모텔은 한 사람이 추상적인 시장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덫에 걸려들 수 있는지에 관한 그대로의 예시이다."라고 <Monsters and Mortgages: The Horror Movie as Prime Economic Indicator>에 언급했다. "시장 시스템"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경제시스템에서, 특히 실패하고 있는 비즈니스계에서, 노먼의 쁘띠 부르주아라는 신분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매료되는 많은 사람들의 전형이다.-아니, 노먼은 정신분석적 해설을 위한 훌륭한 표본-얼마나 불충분한지는 중요한것이 아니다-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설명된다.-John Orr는 <Hitchcock and Twentieth Century Cinema>에서 "베이츠는 전체적으로 정의(definition)를 교묘히 잘 피해간다"라고 언급했다. Raymond Durgnat는 "히치콕의 첫번째 관심사는 노먼의 '내적' 심리가 아니라 노먼의 '실질적' 생각과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히치콕은 그의 영화에서 마지막에 정신과 의사가 긴 설명을 할때, 노먼의 첫 정신 감정을 제공한다. 히치콕은 검열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러한 장면을 넣어야만 했다. 사실상 그것이 만족스러운 장면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 자체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가 본 마지막 장면, 늪에서 건저진 차에서 멀어지고, 노먼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웃는 장면을 보면 말이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는 스스로 행복하다. -그러나 노먼의 성적 이상을 넘어선 강박증은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갖는다. 마리온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그녀의 소외와 그녀의 반란에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관심이 넘어온다는 의미 말이다. 미친(왜 미쳤는지 누가 알까?) 노먼에 대한 관심의 이동은 마리온의 가치를 강등시키다. 그것은 반란의 동기와 캐시디에 주목하지 않게 한다.

 

히치콕은 우리에게 부자들을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캐시디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부자이다. 그의 '영주의 권리'인 자랑과 투박함은 마리온의 불운한 저항을 유발하는것들이다. 특히 캐시디에 관한 중요한 사실, 즉 그의 '계급'적 지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캐시디는 부, 자본의 체현이다. 맑스의 말을 따면, 그는 "사회적 상징"이다. <사이코>는 포착하기는 어렵지만 명백하게 계급 투쟁에 관한 영화, 스토리를 전적으로 전유하는 계급 투쟁 영화이다. 즉, 그것 없이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계급 투쟁"이라는 단어는 고딕 스릴와 '필름 누아르'적 촬영기법을 사용한 멍청한 도둑과 살인자 (혹은 둘, 셋, 넷)에 관한 영화를 조금은 과장하는것 같다. 게다가, "계급 투쟁"이라는 단어가 현재 들려질때, 그것은 보통 그의 적을 향해 단지 욕이나 퍼붓는 것이다. 현재 전 인류의 지배자의 시각에서 봤을때, 그 용어는 부자-자본의 소유주-가 가치가있다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징조를 의미한다. 그래서 시민화와 생존의 근간을 위협 하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마리온이 한 일이다. 마리온은 본성이 혹은 원래 직업이 도둑은 아니다. 그녀는 자본의 소유를 도용했고, 그것을 욕심에서 필요로 재분배했다. 그녀는 그 행동이 미친짓 일지라도, 진정한 정의로서, 힘에 의해 강요되는 부의 정의에 맞섬으로써 그렇게 행동 했다. 그렇게 행동함에 있어서, 그녀는 전형적인 결정적 범죄-자본 주의 사회에서 존재하는 가장 끔찍한 열망인 부의 소유를 전유하는-를 범했다.

 

계급 투쟁은 살기위해 일하는 이들이 자본 소유주들에 맞서 싸우며 벌어진다. 잉여 가치의 착취는 끊임없는 압력과, 강요, 침략을 요구하기 때문에-그렇지 않으면 잉여가치를 착취할수 없다-계급 투쟁은 항상 발생한다. 노동 세계는 '강요'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의 마리온 크레인들-뿐만 아니라, 사실상, <사이코>를 본 거의 대부분의 관객-이 존재하는 곳이다. <사이코>에서 돈은 단지 추상물이나 상징, 예를 들면 이 영화에서 많이 논의된 라캉의 "기표 signifier", "남근중심적" 이정표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력'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힘, 자본의 힘이다. 동기부여는 단순히 개인적이고 사적인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관계의 기능이다. 계급-지배력의 효과는 거대하고, 미세하고,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하다. 단지 사적인 동기로써 사람들의 희망과 열망을 해석하는 것은 그들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계급적 배경에 주목하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계급을 둘러싼 소외에 대한 계급적 배경이 빠진 합리적이지 않은 설명은 발견되는 것이다.

  
만약 자본의 침략이 지속적이지 않으면, 자본은 원하는 것을 얻을수 없다. 그러나 계급 침략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비용 편익 분석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덜 저항하고, 계급 침략에 더 적은 비용이 들어간다. 최대한 효과적으로 잉여 착취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침략은 그 스스로는 변장해야만 한다. 환상을 발생시키고 배포하는것이 자본의 첫번째 기능이다. 그것은 "소수의 부와 특권은 자연 법칙이며, 선천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믿음을,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선택하며, 현 체계가 효과적이며 공정하다는 믿음을 퍼뜨려야만 한다. 혹은, 그 체계에 있는 것이 모든것이기 때문에, 만약 별로 공정하거나 효과적이지 않아도, 문제될것이 없다는 생각을 퍼뜨려야 한다. 그러므로 단지 효과적인 체제인것이 아니라 '오직' 그 체제뿐이다. 다른 어떤것에 대해 생각하는것 조차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개인적 관심을 갖게 하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어떤 체제가 존재 한다는 생각을 지우는 것이 자본에게는 더 좋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반적 믿음이다. 어떤 "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가장 현실적이거나, 자연적이거나, 혹은 현존하는 탁월한 시스템이다. 그것은 아마도 항상 거기에 있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항상 존재할것이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돌봄까지 취급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현실"이다. 자본주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잘못이 발생하던 그것은 사고이거나 멍청한 희생자들과 함께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들"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리온 자신의 훼손과 죽음은 그녀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부자의 돈을 들고 도망갔다면, 당신의 권리를 박탈 당한다. 어떤 일이든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계속 이야기 하면, 자본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본 스스로에 의해 요구되는 것 보다 어떤 방법으로 행동하는, 혹은 마리온 처럼 자멸하게 하는 그들의 권력에 대한 여러 환상들을 심어준다. 어떻게 이러한 길들이는 작업이 가능했는지는 칼 맑스, 엠마 골드만, 안토니오 그람시 부터 E.P. 톰슨과 피에르 부르디외에까지 이르는 모든 진보적 사상가들의 관심을 증폭시켜왔는지 의문점이다. 우리는 아마도 '어떻게' 이 방법이 가능했는지 이해할수 없을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했다. 억압의 효과들 중 하나는 당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사이코>에서 캐시디는 만화적으로 "자본가"로서 그려진다. 그는 커다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초기 자본가들의 표시였던 카우보이 모자는 독점기업을 상징하는 모자로 바뀌었다) 으스대며 걷는 커다란 남자다. 이는 그의 친구, 마리온의 멍청이 상사 "로워리 씨"와는 전혀 다르다. 반면에 마리온은 권력이 없다. 그녀는 또한 고립되어있다. 그녀의 책상 위에, 히치콕은 커다란 아무도 없는 사막 사진을 걸어 놓았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사막에 있다. 거기에는 어떤 연대의식도 없다. 그 사무실의 다른 노동자는 신뢰를 받지 못한다. 꼭 그녀의 남자 샘이 그의 노동력을 파는 철물점에서 그의 동료를 믿지 못하는것 처럼, 다른 잔인한 일터에서 보여지는 우리들 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사회적 씬, 즉 공동체 혹은 상호 조력의 장면은 없다. 모두가 <사이코>의 체제에서 개별화되고, 다른 이들로 부터 분리되었다. 캐시디를 제외하고 모두가 덫에 걸려들었다.-지역 경찰은 모든것이 괜찮은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상황을 오해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공동체"는 그 경찰이 일요일 오전에 교회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제한되어 있다. -캐시디는 "행복"을 포함해서 그가 원하는것을 산다. 그는 말한다. 자본의 기적을. 사회의 한 막대기에 부가 축적되는 것은 다른 것들에게는 궁핍을 축적시키는 것이다. 그 부자 남자의 이목을 끄는 소비에 의해 자극되어, 마리온은 그녀를 강타한 충동을 조절할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반란은 파멸이다. 그녀는 원래 책임감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기에 도둑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히치콕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미친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평범하다"              

 

<사이코>는 스릴러, 호러 영화이다. 물론 "잔혹" 장르의 창시자이며, 센세이셔널한 장면과 기괴한 비꼼을 가진 영화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계획적으로 평범한(평범한것보다 조금은 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의 현실 문제들을 다룬다. 이 영화의 기괴하고 멜로 드라마적인 특징들은 이 영화가 또한 보여주는 것으로 부터, 소외와 절망의 사회적 배경속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의 삶을 조정하는 어떤 것을 찾는 그들의 투쟁으로의 관심을 이동시킨다. 선택하는 자유의 캐시디 이데올로기와는 반대로 그러한 지배력은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도달하지 않는다. 반면 이 세상의 마리온들과 샘들 보다 더 뛰어난 이들은 비록 일을 하지 않더라도,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번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이들의 삶에 대한 거부권 마저 가졌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그들의 변덕에 비유를 맞춰야 한다. 마리온의 충동은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복잡하다. 반면, 그녀는 그녀의 남자와 행복을 찾기를 원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 '캐시디에 강타를 날리는 것이다' 혹은 더욱 중요한것은 그 곳에는 다른 캐시디들도 존재하기에, 개인적으로 캐시디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집-명확하게는 캐시디가 그의 10대 딸에게 선물한 집-이라는 기본적인 것들을 갖지 못하는 좌절감을 받아들이는것 보다, 그가 행사하고 그가 나타내는, 그리고 그녀가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오만함과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캐시디는 단지 개인이 아니다. 그는 '계급'이다. 마리온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그녀의 억압자들에게 효과가 없는 행동들을 제외하면, 마리온의 반란은 그녀를 억압하는, 그러나 그녀가 저항할 수 없는 체제에 대항하는 보이지 않는 혁명이다. 늪에서 썩은 몸을 건져낸 뒤, 같이 건져진 그의 돈 대부분을 캐시디는 돌려받을 것이다. 하지만 냄새가 좋지는 않을것이다.  

 

To may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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