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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론》으로 보는 조선의 공산주의자 정약용

  • 등록일
    2013/06/08 18:52
  • 수정일
    2013/06/08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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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제개혁(田制改革)의 필요성

누군가가 전지(田地) 10경(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의 아들은 10명이었다. 그의 아들 1명은 전지 3경을 얻고, 2명은 2경을 얻고, 3명은 1경씩을 얻고 나니 나머지 4명은 전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울부짖으며 굴러다니다가 길바닥에서 굶어죽는다면, 그 사람은 부모 노릇을 잘한 것인가?
하늘이 일반 백성을 내고 먼저 그들을 위해 전지(田地)를 마련해서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도록 하고, 이미 또 그들을 위해 임금을 세우고 목민관(牧民官)을 세워서 임금과 목민관으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그 산업(産業)을 골고루 만들어서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임금과 목민관이 되어서 그 여러 자식들이 서로 치고 빼앗아 강탈해서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을 팔짱을 낀 채 눈여겨 보면서도 이를 금지시키지 못하여 굳세고 힘센 자는 더 차지하고 힘없는 자는 떠밀려서 땅에 쓰러져 죽게 한다면, 그 임금과 목민관이 된 사람은 바야흐로 임금과 목민관 노릇을 잘한 것인가?
그러므로 그 산업(産業)을 골고루 만들어서 다 함께 잘 살아가도록 한 사람이 참다운 임금과 목민관이다. 그 산업을 골고루 만들어서 다 함께 잘 살아가도록 하지 못한 사람은 임금과 목민관의 책임을 저버린 사람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지(田地)는 대략 80만 결(結 : 영조(英祖) 기축년[1769] 우리나라 8도의 현재 개간된 논은 34만 3천 결이고, 밭은 45만 7천 8백 결이다. 간사한 관리가 빠뜨린 결수 및 산전(山田), 화전(火田)은 이 숫자에 들어 있지 않다.)이고, 인민(人民)이 대략 800만 명(영조 계유년[1753] 서울과 지방의 인구가 730만이 조금 못 되었다. 당시에 빠진 인구 및 그동안 낳아서 불어난 인구가 마땅히 70만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인데, 가령 10식구(食口)를 1호(戶)로 쳐본다면 매양 1호마다 전지 1결(結)씩을 얻은 다음에야 그 재산이 고르게 된다.
지금 문관(文官), 무관(武官) 등의 귀신(貴臣)들과 지방의 부자 가운데는 1호당 곡식 수천 석(石)을 거두는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100결(結)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바로 990명의 생명을 해쳐서 1호를 살찌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부자로 영남(嶺南)의 최씨(崔氏)와 호남(湖南)의 왕씨(王氏)같이 곡식 1만 석(石)을 거두는 자도 있는데, 그 전지를 계산해 보면 400결 이하가 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3,990명의 생명을 해쳐서 1호만을 살찌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정(朝廷)의 윗사람들이 마땅히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태주어서 그 재산을 고르게 하는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힘쓰지도 않고 조급하게 서두르지도 않고 있다. 이것은 임금과 목민관의 도리로써 그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2. 정전제(井田制), 균전제(均田制), 한전제(限田制)

앞으로 정전(井田)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정전은 시행할 수가 없다. 정전이란 한전(旱田)에만 시행하는 것이다. 수리(水利)사업이 이미 잘 일어나고 멥쌀, 찹쌀이 이미 맛이 있으니 수전(水田)을 버릴 수 있겠는가. 정전이란 평전(平田)으로 하는 것인데, 벌써 벌목(伐木)하여 산골짜기가 벌써 개척되었으니, 그 비탈진 나머지 전지를 버릴 수 있겠는가.
장차 균전(均田)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균전은 시행할 수가 없다. 균전이란 전지와 인구(人口)를 계산하여 고르게 나누는 것인데, 호구(戶口)의 늘고 줄고 하는 것이 달마다 달라지고 해마다 달라지므로, 금년에는 갑의 비율로 나누고 명년에는 을의 비율로 나누게 됨으로써, 아무리 계산이 밝다 해도 그 털끝만한 차이점을 살필 수 없을 것이며, 전지의 비옥하고 척박한 구별은 경(頃), 묘(妙)에 한계가 없을 것이니, 이를 고르게 할 수 있겠는가.
장차 한전(限田)을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전은 시행할 수가 없다. 한전이란 전지를 사되 몇 이랑까지에 이르면 더 이상 살 수 없으며, 전지를 팔되 몇 이랑까지에 이르면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남의 이름을 빌려 더 사서 보탠다면 누가 알겠으며, 남이 나의 이름을 빌려 더 팔아 줄인들 누가 이를 알겠는가. 그러므로 한전은 시행할 수가 없다.
비록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정전(井田)은 회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유독 이 균전(均田)과 한전(限田)에 대해서만은 사리에 밝고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들도 또한 좋다고 말하니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의심스럽다.
또한 무릇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짓도록 하는 일은 진실로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그 세상 사람이 모두 다 농사를 짓지 않는다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지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면 이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균전(均田)과 한전(限田)은 장차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도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한 전지를 얻도록 하고, 공업(工業)과 상업(商業)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한 전지를 얻도록 하게 된다. 무릇 공업과 상업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한 전지를 얻도록 한다면, 이것은 바로 세상 사람을 이끌어 놀고 먹기를 가르치는 일이다. 세상 사람을 이끌어 놀고 먹기를 가르치고 있다면 그 법은 진실로 진선진미하지 못한 것이다.

3. 여전제(閭田制)의 좋은 점

이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얻도록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면, 여전(閭田)의 법을 시행하여야만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여전(閭田)이라 하는가. 산골짜기와 하천의 지세를 가지고 경계를 그어 삼고는, 그 경계에 포함된 것을 여(閭 : 주(周)나라 제도에 25가(家)를 1여(閭)라 한다. 이제 그 이름을 빌려 대략 30가(家)에서 드나듦이 있게 하되 또한 반드시 그 율이 일정하지는 않다.)라 이름하고 여(閭) 셋을 이(里 : 「풍속통(風俗通)」에는 50가(家)를 1리(里)라 하는데, 이제 그 이름을 빌렸으나 반드시 50가(家)로만 하지 않는다.)라 하며, 이(里) 다섯을 방(坊 : 방(坊)은 읍리(邑里)의 이름으로 한(漢)나라 때 구자방(九子坊)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나라 풍속에도 또한 이것이 있다.)이라 하고, 방 다섯을 읍(邑 : 주(周)나라 제도에 4정(井)을 읍(邑)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군(郡), 현(縣)의 소재지를 읍(邑)이라고 한다.)이라고 한다. 여(閭)에는 여장(閭長)을 두고 무릇 1여(閭)의 전지는 1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그 전지의 일을 다스리게 하되, 서로간의 경계가 없도록 하고 오직 여장(閭長)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한다.
매양 하루하루 일할 때마다 여장은 그 일수(日數)를 장부에 기록해 둔다. 추수(秋收)가 끝나면 무릇 오곡(五穀)의 곡물을 모두 여장의 당(堂 : 여(閭) 가운데에 있는 도당(都堂)이다.)에 운반하여 그 양곡(糧穀)을 나누는데, 먼저 국가의 세(稅)를 바치고, 그 다음은 여장(閭長)의 녹봉(祿俸)을 보내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에 의해 분배한다. 가령 곡식을 수확한 것이 1천 곡(斛 : 10두(斗)를 1곡(斛)으로 한다.)일 경우 그 장부에 기록된 일한 일수(日數)가 2만 일이면 매양 하루당 양곡 5승(升)을 분배하게 된다.
한 농부의 예를 들면, 그 부부(夫婦)와 아들과 며느리의 장부에 기록된 일한 일수가 모두 800일이면 그 분배된 양곡은 40곡(斛)이 되고, 또 한 농부의 예를 들면, 그 장부에 기록된 일의 일수가 10일이면 그 분배된 양곡은 5두(斗)뿐인 것이다.
노력을 많이 들인 사람은 양곡을 많이 얻게 되고 노력을 적게 들인 사람은 양곡을 적게 얻게 되니, 그 힘을 다하여 많은 양곡을 타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그 노력을 다 기울이면 토지에서도 그 이익을 다 얻게 될 것이다. 토지의 이익을 일으키면 백성의 재산이 풍부해지고, 백성의 재산이 풍부해지면 풍속(風俗)이 순후해지고, 효(孝)․제(悌)가 세워지게 될 것이니, 이것이 전지(田地)제도에서 제일 좋은 방법이다.

4. 여전제(閭田制)의 시행 방법

여기에 여(閭)가 하나 있는데 30가(家)가 같이 한 여(閭)로 되었다. 여장(閭長)이 “너는 너 전지를 갈고, 너는 저 전지를 김매거라” 하여 할 일이 이미 나누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쟁기를 짊어지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한 집터를 주시기 바랍니다” 고 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여(閭)의 전지는 더 넓어지지 않았고 1여의 백성은 일정한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백성이 이로움 따라가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전지는 넓은데도 인력(人力)이 모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전지는 좁은데도 곡식 소출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며, 가을에 양곡 분배가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안 뒤에야 쟁기를 짊어지고 처자를 데리고 와서 한 집터를 받기를 원한 것이다.
그리고 또 여(閭)가 하나가 있는데, 20가(家)가 같이 한 여로 되었다. 여장(閭長)이 “너는 저 전지의 잡초를 불사르고, 너는 저 전지에 거름을 주거라” 하여 할 일이 이미 나누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쟁기를 짊어지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저 살기 좋은 곳으로 가겠습니다” 하고 떠나가겠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또한 그의 소원을 들어줄 뿐인 것이다. 백성이 해로움을 피해 가는 것은 불이 습기를 피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전지가 좁아서 인력이 남아도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가을에 양곡 분배가 적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안 뒤에야 쟁기를 짊어지고 처자를 데리고 떠나서 저 살기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택리(宅里)가 고르게 되고, 위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전지(田地)가 고르게 되고, 위에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의 빈부(貧富)가 고르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자주 왕래하게 되리니, 이렇게 되면 8, 9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전지가 고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백성을 전지로써 경계를 삼게 하는 것인데, 마치 양(羊)을 우리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이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하는 것은 새나 짐승이 서로 쫓아다니는 것과 같다. 백성들로 하여금 새나 짐승처럼 서로 쫓아다니게 하는 것은 바로 어지러움의 근본이다.
그렇지만 이를 시행한 지 8, 9년이 되면 백성이 대략 고르게 될 것이고, 이를 시행한 지 10여 년이 되면 백성이 크게 고르게 될 것이다. 백성이 크게 고르게 된 연후에야 호적(戶籍)을 만들어서 그 가옥과 주거를 등록(登錄)시키고, 문권(文券)을 만들어서 그 이주(移住)에 대한 일을 관리하여, 한 백성이 오는 데에도 그를 받아들이는 데에 그 제한을 두고, 한 백서이 가는 데에도 그를 들어주는 데에 절차를 두어, 전지는 넓으나 사람이 적은 곳은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람이 적은데도 곡식 소출이 많은 곳은 역시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며, 전지는 좁은데 사람이 많은 곳은 떠나는 것을 들어주고, 사람은 많은데 곡식 소출이 적은 곳은 역시 사람이 떠나는 것을 들어준다. 이와 같지 않은데도 옮겨 다니는 사람은 떠도는 나그네가 되어 갈 데가 없을 것이니, 나그네가 되어 갈 데가 없게 되면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을 것이다.

5. 선비의 역할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田地)를 얻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얻지 못하게 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얻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얻지 못하게 된다. 공업(工業)을 하는 사람은 그의 기구(器具)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고, 상업(商業)을 하는 사람은 그의 물화(物貨)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니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선비(士)는 열 손가락이 모두 유약하여 힘든여 일을 할 수 없다. 밭을 갈 수 있는가, 김을 맬 수 있는가, 잡초(雜草)를 불살라서 전지를 일구겠는가, 거름을 주겠는가. 그 이름이 장부에 기록되지 못한즉 가을에 곡식 분배가 없을 것이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아아, 내가 여전(閭田)의 법을 만들려는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이다.
대저 선비란 어떤 사람이며, 선비는 무엇 때문에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고 남의 힘으로 먹고 사는가. 대저 그것은 노는 선비가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전지의 이로움이 다 개척되지 못하게 된다. 선비가 놀고서는 곡식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면 또한 장차 직업을 바꾸어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다.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일을 하게 되면 전지의 이로움이 개척되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일을 하게 되면 풍속(風俗)이 순후(淳厚)해지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일을 하게 되면 난민(亂民)이 근절될 것이다.
그러나 선비가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 농사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직업을 바꾸어 공업(工業)이나 상업(商業)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아침에는 나가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부민(富民)의 자제(子弟)들을 가르쳐 주고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실업의 이치를 강구하고 토지의 적성(適性)을 분별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고, 기구(器具)를 만들어서 인력을 덜게 하고, 곡식을 심고 가꾸는 일과 가축(家畜)을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서 농사를 돕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이러한 사람들은 그 공로가 어찌 팔을 걷어올리고 힘들여 일하는 사람에게 비교할 것이겠는가. 이런 사람의 1일 노역은 10일로 기록하고 10일의 노역은 100일로 기록하여 그 양곡을 분배해 주는 것이 좋다. 선비에게 어찌 분배가 없을 수 있겠는가.

6. 전세(田稅) 감면과 그 효과

전지(田地)에서는 10분의 1을 세(稅)로 받는 것이 법이다. 세를 가볍게 하여 10분의 1을 다 받지 않는 것은 맥국(貊國)의 도(道)이고, 세를 무겁게 매겨 10분의 1 이상을 받는 것은 걸(桀)의 도(道)이다.
현재 곡식 100두(斗)를 수확하는 전지에 대해서 국가에 바치는 세는 5두에 불과하니 이는 20분의 1을 받아가는 것이고, 사가(私家)에 바치는 세는 50두이니 이는 바로 10분의 5인 것이다. 이리하여 국가는 대맥(大貊)이 되고 사가(私家)는 대걸(大桀)이 되었으므로, 국가는 가난하여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고 백성은 다 털려 없어져 먹을 것이 없으니 이는 대체 무슨 법을 따른 것인가.
전지를 겸병(兼倂)한 호가(豪家)들을 없애고서 10분의 1의 세법을 시행한다면 국가와 백성들이 함께 부유해질 것이다. 그러나 10분의 1의 세는 쉽게 말할 수 없으니, 장차 연사(年事)의 풍년과 흉년을 살펴서 그 세를 올리고 내릴 것인가. 이것은 오직 정전(井田)제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요, 여전(閭田)제도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보고 곡식 수확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몇 해 동안의 중(中)을 비교하여 일정한 것으로 삼고, 그 총액(總額)을 일정하게 하여 증가하거나 경감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직 큰 흉년(凶年)에만 그 세(稅)를 임시로 빌려 주었다가 큰 풍년(豊年)을 만나서 수효를 맞추어 배상(賠償)하고 보충하게 한다면, 국가에서는 일정한 수입이 있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공납(公納)이 있게 되어 모든 어지러움이 함께 가지런해질 것이다.
흉년에 백성들이 세의 감면을 한없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영구히 감면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풍년이 들 경우 보충하고 상환하여야 될 것을 안다면 세금 감면받는 것을 끝없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세금 감면받는 것을 끝없이 바라지 않는다면 간사와 거짓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산이 무너지고 둑이 터져서 먼 훗날에 이르도록 개간(開墾)되지 못할 것에 대해서는 영구히 세금을 면제해 줄 뿐이다. 그러나 물을 대고 황무지(荒蕪地)를 개간하며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뽑아내어 전지로 만든 것도 또한 장차 몇십년 만에 한번식 등록(登錄)을 시킨다면, 저 산이 무너지고 냇둑이 터져서 영구히 세금이 감면된 것도 또한 배상하고 보충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세(稅)가 이미 10분의 1인데도 국가의 재용(財用)은 이미 배가 증가되었으니, 녹봉(祿俸)도 넉넉하게 주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제 이미 사가(私家)의 겸병하는 전지가 없어졌는데도 또 따라서 그 녹봉을 박하게 준다면 나라에는 관리(官吏)가 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를 수 있으며, 또 족당(族黨)을 구휼(救恤)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노복(奴僕)을 양육하고 제택(第宅)을 높게 짓고 의복(衣服)과 말(馬)을 화려하게 갖출 수 있도록 한 다음에야 조정(朝廷)에서 벼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7. 군제(軍制)와 호포제(戶布制)

옛날에는 군사(兵)를 농민(農民)에게 소속시켰는데, 지금 여전(閭田)의 법을 시행한다면 그는 군사제도를 정하는 데에 더욱 편리할 것이다.
국가의 군사제도에는 두 가지의 용도가 있는데, 한 가지는 대오(隊伍)를 편성하여 국가 변경(邊境)의 변란에 대비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군포(軍布)를 거두어서 경성(京城)의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대오에 편성된 군졸은 항상 맡아 거느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장수와 병졸이 서로 익숙하지 못하고 서로 쓰임이 되지 못하니, 어찌 그것을 군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여(閭)에는 여장(閭長)을 두어 그를 초관(哨官)으로 삼고, 이(里)에는 이장(里長)을 두어 그를 파총(把摠)으로 삼고, 방(坊)에는 방장(坊長)을 두어 그를 천총(千摠)으로 삼고,(이장(里長)은 대여(大閭)의 장이 이를 겸임케 하고 방장은 이장 중에 현능(賢能)한 사람을 가려서 이를 겸임토록 하되 녹봉(祿俸)은 겹쳐 받지 못한다.) 읍(邑)에는 현령(縣令)을 두어서 그로 하여금 절제하게 한다면, 여전제가 정해지는 데 따라 군사는 그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전지를 가져서 각기 그 개인의 일을 사사로이 처리하기 때문에 기강(紀綱)이 서지 않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 호의 10명의 생명이 여장(閭長)에게 매달렸으므로, 1년 내내 분주하게 따라다니면서 여장의 절제를 받게 되니, 이들로써 군사를 삼으면 전진하고 후퇴하는 것이 군율(軍律)과 같이 된다. 왜냐하면 평소부터 가르치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대략 1여(閭)의 백성을 가지고 그 비율을 셋으로 나누어서, 그 한 부분은 호정(戶丁)을 내어 대오를 편성하는 데 응하게 하고, 그 두 부분은 호포(戶布)를 내어 군수(軍需)에 응하게 하여 역정(役丁)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그 호포를 가감하게 한다면, 장정(壯丁)을 찾아 모아서 충군(充軍)시키는 폐단은 또한 금방 없어질 것이다.
근년에 정승 이병모(李秉模)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중화부(中和府)에다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한 결과, 부민(府民)들이 서로 모여서 부르짖어 울므로 그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대저 국가에서 법을 시행할 적에는 귀하고 가까운 지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국가의 명령이 비천하고 먼 곳으로부터 시행된다면 서로 모여서 부르짖어 울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니,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겠는가. 여전(閭田)의 법을 시행하여 효제(孝悌)의 의리를 펴고, 학교의 가르침을 본보기로 삼아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잘 섬기도록 한다면 호포(戶布)의 법은 저절로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www.sunslife.com/bbs/zboard.php?id=3004&page=46&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asc&no=2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