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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 등록일
    2004/10/05 21:41
  • 수정일
    2004/10/05 21:41

** 이 글은 공장생활 프로그램으로 제출될 나의 생애 라이프 스토리를 써본 것입니다. 이 공간에 써 내려갔던 글과 내가 어린시절 기억이 닿은 생각들을 써내려 간 내용입니다. 그냥 올려놓아 봅니다.

 

@ 어린시절...
어린 시절 전남 영암 시종면 구산리 1리(원구산)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내가 3살적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시어 내 동생들(남들은 이복동생이라 한다. 그래서 동생들의 성은 정씨이고 내 성은 김씨이다. 커서 생김 세와 키가 달라 다른 분들이 물어 볼 때 제일 난처한 질문이다.)을 낳으셨다.

 

난 유년시절 그냥 시골 들판을 뛰어놀기를 좋아하였던 철부지였지만, 늘 어머니에게 짐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나로 인해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하였던 기억이 내 눈에 선하다. 눈물도 많이 흘리셨고, 나로 이해 가슴 졸이는 날이 만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내 유년시절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그 이유는 외가 집에서 나를 친가로 보내라는 삼촌들의 성화와 양아버지 친척들에서 받았던 설움이었을 것이다. 참 내가 어려 어머니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함이 어린내 마음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유년시절 나를 이끌었던 것은 아마도 어머니 다음으로 누나였다. 누나는 나에게 늘 자신감을 주는 존재였으며, 나와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늘 내편이 되어주었던 존재이다. 지금도 내편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면 늘 누나와 상의를 한다. 누나는 나에게 어머니와 같은 또 다른 존재이다. 내가 커가면서 늘 누나의 그늘에서 안식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준 존재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나마 나의 유년시절은 풍성하지는 않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재혼한 것 이외에는 별 다른 가정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았다. 다만 낮선 친척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만 제외하면 시골에서 농사 일 도와가며 초등학교까지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내었다.

 

양아버지와 난 대화가 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그냥 시키는 일 이외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그냥 아버지 빈자리를 묵묵히 채워주는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몸이 아파서 고생하시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이해해주시는 분이다. 지금은 병원에 오고가고 하시느라 제대로 가보지 못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 고마움을 간직하시게 해주신 분이다. 내가 지금 이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 또한 그분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마음 한쪽 늘 고마움의 대상이신 분이다.    

 

산과 들에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많았고, 놀이문화가 많았다. 아이들과 소나무에 올라가 치타가 되어보기도 하였고, 강가에서 멱감(수영)으며 놀고, 산과 들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그리고 농사일은 뭐 이리도 많은지 소여물 줘야지,... 닭과 돼지 밥 줘야지..... 놀고 뛰고 일하고 정말 정신없이 자연과 벗 삼아 일상생활을 하였다. 지금 초등학생 1학년  아이들에게 학교를 가기 위해 15리(6Km)거리를 도보로 등교하였다.. 그나마 난 학교 친구들 중에 그리 멀지 않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최고로 멀리 오는 친구는 한 25리(10Km)를 걸어오는 초등학교 같은 반 급우가 있었다. 이렇듯 나와 내 동네친구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시골에서 이렇게 학교를 다녔다. 읍내나 면 중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도보로 학교를 다녔다. 대중교통 수단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대중교통 수단이 아예 없었으니까? 길은 구불구불... 저수지를 지나서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개천을 넘어서 도착한 학교면 중심은 나에게 신천지였다. 신기하게 많았으니까... 촌에서 살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촌에서 살아도 5일장 날은 정말 분비는 날이다. 먹 거리도 풍성하고 그 시골 동네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이 직접 재배하거나 채취한 것이나 기른 것들은 교환하고 분주하다. 또 가을운동회는 면 전체민의 축제의 장이다. 하하 재미난 것들이 많았다.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인생의 길잡이인 선생님을 만나 막연히 공부해야겠다는 고민을 갖게 됨.
5학년과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김인호 선생님을 만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됨. 그 당시 깡촌에서 보기 어려운 세계명작동화 100권과 세계위인전 100권을 전부 통독하게 하였다. 이 때 나도 그 위인처럼 큰 인물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졌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사람이 살아가면서 최우선적으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소리를 무척 많이 들었다. 이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늘 회초리보다 마음으로 가르쳐준 내 스승 중 가장 기억이 남는 인물이다. 

 

내 유년시절 이렇다 할 이야기는 별로 없다. 다만 남들과 같이 산과 들로 들과 산을 벗 삼아 이리저리 뛰어놀던 시절 친구가 있어 좋았고, 삶은 그리 풍족함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던 유년시절. 하늘의 구름을 보며 감탄하구 쏟아지는 별빛이 있어 좋았던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기억이 납니다. 

 

@ 중학교 서울 상경
초등학교는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고장에서 살았고, 이 곳 면소재지에 위치해 있는 시종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중학교를 유학 왔습니다.

서울 상경... 외롭고 낮선 공간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학년을 거의 혼자 보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형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누나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나는 광주로 학교를 가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외가 집이 서울에 있어서 부모님은 광주보다는 서울이 낮다고 판단하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촌놈의 서울상경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님 왈 니 중학교 여기서 다니면 농사꾼밖에 못될 것 같으니 서울 가서 서울 물 좀 먹고 공부 좀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서울에서 형과 누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로 외가에 늘 주말마다 눈도장 찍으러 가야했고, 외숙모는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늘 불시에 검문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형과 누나 나는 늘 외가의 감시 속에서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도시락은 외숙모가 종종 저녁에 와서 싸주고 가셨다. 반찬은 떨어질 만하면 외숙모가 갖다 놓아서 먹을거리는 늘 풍성했습니다. 쌀은 집에서 올라오지 과일도 집에서 올라오지 부족함이 없는 유학생활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촌놈의 상경.
비둘기호를 타고 여행을 가거나 시골에서 올라와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비둘기호는 통일호와 무궁화호와 다르게 역마다 다 썼다. 그래서 비둘기호는 말 그대로 비둘기 집과 같이 시골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기차였습니다.

 

언제든가 방송에서 기차 안에서 시암 닭이 있고, 참기름, 시골할머니와 아낙네들의 개나리 짐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시는 어른신의 풍경.. 광고를 본 기억이 난다. 거의 그랬다. 시골 인심은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줄 농산물이 가득히 싸가지고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추억저편 잊혀 지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공부시키기 위해 소를 많이 키우셨다. 난 그런 소 키우는 일이 싫었습니다. 내가 소 여물을 쓸어야하고 여물을 주어야 하기에 참 싫었습니다. 마냥 놀고만 싶었던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서울로 뜨고 이건 내 동생 몫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없는 살림에 소(오늘따라 우리 집 누렁이가 기억난다. 시골에 상경하여 공부중인 형과 누나 학비를 내던 날이면 어김없이 누렁이 새끼 송아지를 장에 나가 파는 날이다. 누렁이는 음메 음메~~~~ 소리를 내가며 자기 자식이 팔려 감을 알고 그 큰 눈동자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 모습은 연중행사였다. 누렁이가 낳은 새끼들은 몇 마리 남기고는 거의 팔려나갔다. 매년 자식을 낳고 팔고 하기를 반복 누렁이의 생명탄생은 우리의 공부에 죄다 사용되었습니다. 참 고마운 우리 집 소. 지금은 죽어 없지만 참 고맙다. 부모님은 형들과 누나 나까지 공부시킨 누렁이를 잡아먹지 못하고 우리 집 뒷산에 묻었다. 소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집안 농사일에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자신의 노동력을 주었고, 자신이 생명분신인 자식을 우리에게 기꺼이 헌납하였던 누렁이. 아니지 우리가 강제로 빼앗은 것이 맞겠지. 그런 누렁이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까지 없었으면 어떻게 형, 누나, 나, 동생까지 대학커녕 고등학교 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렁이와 부모님에게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서울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시골에 비해서는 좋았습니다. 시골 생활보다 안락하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형이 애지중지해 하는 라디오가 있어 좋았던 시절입니다. 이 라디오를 들으면서 밤에 공부도 하고 노래도 듣고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나는 외국 노래를 접하게 된 계기로 서울로 상경하여 중학생이었던 때였다. 형은 거의 대학생이라서 술 먹는 날이 많아서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았고, 누나는 집에 돈을 보태기 위해 과외를 해서 학교를 파하고 온 집에는 거의 나 혼자 있었다, 간혹 외숙모(외숙모가 오는 날이면 나는 외숙모를 따라서 외식을 하였다. 서울에 뭐 이리도 맛난 것이 많은지... 외숙모는 우리들에게 어머니 존재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우리 막내 여동생을 낳아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였다. 막내여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이는 13살차...^^)가 오면 반찬과 도시락 꺼리를 가지고 오시는 날 이외에는 거의 혼자였다. 난 라디오가 중학교 1학년 때 제일 친한 친구였다. 친구가 생겼어도 라디오와 친구사이는 끝질 못했다. 좋은 노래도 듣고 가슴 아픈 사연 많이 들었다. 중학생인 내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글들의 사연이 많았는데. 가슴 뭉클함은 이해와는 상관없이 내 가슴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라디오 많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때 개인적으로 낭만적 삶을 영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을이면 제 자신에게 엽서를 쓰든가 아니면 친한 친구들에게 엽서 한 장을 사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된 지금 저는 낭만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제는 매료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사춘기적 열망을 낭만과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뢰와 희망을 가지면 저의 개인적 안위를 불태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 짓게 하지만 그 당시 저의 인식과 사고는 오로지 저 개인을 향해 있었습니다.

 

@ 고등학교 생활
고등학교는 별 탈 없이 다녔다. 다만, 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가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고등학교 내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에서 제가 원하는 과에 입학하지 못하면서 저는 자의반 타의반 화학 선생님이 되는 꿈이었다. 유난히 난 화학과목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초등학교 5, 6학년 은사이신 김인호 선생님의 영향도 컸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사춘기다 이성 친구 사귀기 분주할 때 저는 저의 꿈을 먼저 이루기 위해서 학교와 학원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친구는 거의 반 급우 아이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는 몇몇 반 급우 빼놓고는 없습니다. 이에 제 선택을 위해 고등학교를 보내었던 것이 지금 살아오면서 후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공부보다는 친구 사귀는데 열중하였어야 하는데... 친구 사귀기도 보다 공부에만 전념하여 많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 때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거의 학원과 학교를 오가는 기억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남들과 달리 시골에서 어렵게 보내주는 돈으로 공부를 해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꼭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효도하여야겠다는 막연한 생각...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편하게 살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나보다 낮은 이들을 봐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때 취한 태도 때문에 종종 같은 반 급우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대학기간
서울에 있는 대학입학.... 원하던 화학과는 떨어지고 2지망으로 지원한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호남향우회(호남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의 모임)에 가서 저는 호남향우회 회장 겸 우리과 선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는 수 없이 들어오지 않아 과에서 거의 볼 수 없었고, 다만 선배들의 말로는 운동권 선배이고, 참 멋있는 선배라는 말을 들었던 선배입니다.

이 선배가 자신의 동아리에 오면 늘 술을 융성해 대접해주겠다는 말이 화근이 되어 저는 이 선배가 있는 사회과학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동아리에 가입하고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전 술 얻어  먹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런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 선배가 군대에 입대하고 얼마 후 의문사 하였다는 소식과 이 의문사 대책위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운동에 입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작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선배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같은 조직내 있던 선배들 반 이상이 운동을 정리하고 자신의 길을 걷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저희 동아리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 3편, 출판사 죽산에서 출간한 조직논쟁 편에서 나오듯이 CA그룹(제헌의회)에 속해있던 사람들이며, 87년 범민주단일후보와 민중후보론으로 갈라진 CA그룹 소수파였습니다. 선배들의 대부분이 다수파였고, 그나마 소수파였던 선배는 이전 백태웅(가명 이진경)과 박기평(가명 박노해)가 결성한 노동해동을 모태로한 ND(민족민주운동그룹, NDR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기반한 남한에서 러시아형태의 이 단계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혁명을 주창하던 맑스-레닌그룹입니다.

현장에 나갔던 선배나 비합운동을 하였던 선배 대부분의 정리는 저를 또 동아리에서 혼자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90년 후배들을 받았습니다.

 

정파조직의 범람은 제가 속한 학교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후배들과의 논쟁.. 그리고 분리....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서울에 있는 타 대학으로의 입학 그리고 새롭게 이전 조직적 끈을 갖고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곳 또한 자유로운 공간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저는 학생운동을 넘어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92년 총선... 민중당의 출현과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을 위해 결성된 학생선거투쟁연합(이하 학선투련)에 결합하면서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김철수(서울대 신문과 77학번) 선배의 선거캠프에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의 역할은 응봉도 조직책이었습니다. 총선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가 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선거투쟁에 결합하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습니다.

 

잊혀 지지 않는 노동자... 저는 진정한 노동자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동자의 역동성을 알았습니다. 당당한 그분들... 왜 노동자가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하는지 늘 길거리 유세를 통해 서울 성동구 주민들에게 알려나갔습니다. 늘 힘찬 나날들이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지 자명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노동자 형과의 대화 현장의 어려움을 알았고, 노동자들의 처한 주객관적 조건을 일정정도 알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길거리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게 하였는지 몸소 느낄 수 있는 계기였죠. 그분들의 사고는 분명하였습니다.

 

선거는 그러나 우리 예상과 다르게 4000표 득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많은 득표하였다는 위안으로 92년 뜨거웠던 총선투쟁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92년 백기완 민중대통령후보선거본부(이하 백선본) 결합하여 92년 총선의 아픔을 딛고 민중후보를 알리는 작업을 12월 겨울 동대문 나눔의 집이 위치한 서울시립대 근처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때 나는 동기들과 함께 벽자보 붙이러 동대문 일대를 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추운 겨울 벽자보 붙이는 손이 얼어 손을 마구 비벼대며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들... 춥지만 마음 따스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림 백선생님이 머리를 휘날리며 연설하던 기억.... 그리고 그 때 백선본 만원후원회 조직을 위해 팔던 책...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누가 백성노릇을 할꼬”라는 책... 정주영의 아파트 반 값 선언 등... 그러나 3당 야합으로 출마한 김영삼이 문민정부라는 정부를 출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93년 총액임금분쇄 투쟁 현장...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문민정부를 자처하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재 유지되는 연봉제 개념의 총액임금제를 시행할 것을 공표하자 노동자들은 일제히 한양대로 집결하여 이 투쟁에 대한 저지 및 임·단협 쟁취를 위한 투쟁을 하였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그 당시 전노협 깃발을 내걸었던 수많은 노조들의 힘찬 함성은 87년 각성된 노동자를 벗어나 역사의 주체로 노동자가 위치해 주었음을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94년 사랑의 열병을 알았습니다.
같은 동아리 후배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연애는 혁명의 적이라 늘 선배들에게 못이 탈토록 들었던 제가 동아리 여 후배가 내 가슴에 들어오더군요. 참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좋아했지만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늘 보고 싶지만 보고 싶단 말 할 수 없는 심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용기 내어 삐삐 문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정중히 거절당하였을 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연애를 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알겠더군요. 왜 빨리 말하지 못하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아리더군요. 이 고통이 한 2달간 가더군요. 내 생애 누구를 그토록 마음에 두어본 적이 처음이었던 만큼 시간이 오래갔습니다. 거의 그 2달간 학교 후배 선배 동기들 날 위로해주기 위해 같이 활동하는 이들 애간장 태우게 하였습니다. 저의 짝사랑은 2달간의 위로기를 거치고 막을 내리고, 전 이 충격에서 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감정이 생기기 이전 제가 먼저 그 고리를 잘라버리게 되더군요. 아픔이 크긴 컸던 것 같습니다.   

 

95년 후배의 죽음...
군대에 입대한 후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후배 집에 방문하였습니다. 어찌된 일이냐고,... 그러나 부모님은 시신도 확인하지 못하고 화장되어 있는 함을 들고 왔다고 아무도 왜 죽었는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더라고 저희에게 말해주시더군요. 눈시울이 붉어지시면서... 그러나 저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국방부에 탄원서도 내보고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목청 높여 왜 쳤지만 공염불입니다. 사진 한 장 없이 사고사로 죽었다란 말만 국방부와 사단관계자는 말하더군요. 95년 후배하나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96년 조직사건으로 수배 및 구속
사회주의학생연합 사건으로 수배 및 구속이 되었습니다. 실형 2년에 자격정지 2년의 형량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이감되었습니다. 교도소를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그곳이 갖고 있는 폐쇄성과 그 곳이 갖고 있는 고립에 대한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잡범이 아니라 정치사범으로 들어간 이들에겐 그나마 그 공간이 자신을 가꾸거나 신심을 쌓은 공간이었습니다.

 

교도소도 군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춥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선 사람내음이 간절합니다. 매주 누군가의 면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하는 것 또한 도통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왔다면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세상사를 알 수 있어 짧은 만남이지만 매우 유의미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수복을 입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말이 갖는 의미는 다른 사람이 갖는 의미와 사뭇 다릅니다. 늘 기대되는 날입니다.

 

후배들이 면회를 오면 학교소식을 접할 수 있고, 가족들이 오면 그동안 가족들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해 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지만 교도소에서 수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그 자연스러운 것이 그리움으로 점철 될 때가 많습니다. 그리움에 목마르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 미치도록 사뭇 칩니다.

 

문자를 잊지 않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인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인지 그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곳의 시간은 군대에서 말하는 시계가 꺼꾸로 돌아간다는 것처럼 하루하루 시간이 손살 같이 흐르지 않습니다.

 

저 마다 죄목은 다르지만 서로 아픔을 가지고 이곳에 온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자본주의에 맞닿아 있는 곳이라 돈이 있는 놈들은 호의호식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궁핍하게 연연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가 박탈당한 것도 억울한데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천대받는 것은 사회나 교도소나 다름없습니다.

 

면회를 자주 오는 이들은 당연히 영치금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한 가닥 한 이들 조폭이나 정치 관료들은 교도소장이 특별대우를 해줍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들어나는 곳 그곳이 교도소입니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지만 정녕 돈없고 뺵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는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며, 통용되는 사회도 아닙니다. 돈이 없다는 것으로 멸시받아 분을 삭이지 못해 범죄를 저지른 이가 부지기 수 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을 이 곳에서 절실히 느낍니다. 그러나 이곳 수의를 입고 함께 생활하는 이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죄라는 행위로 인해 법 집행을 통해 형 집행을 받고 있으나 형 집행은 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비러 붙는 간신배와 같은 존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청소반장 요직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소장의 특별배려로 맡아서 진행하였습니다. 청소반장은 다른 사람들보다 교도소 내 이동이 조금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운동할 시간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많고, 종종 교도관이 버린 담배꽁초를 가지고 피워가면서 담배가 주는 희로애락에 농락당하기도 하지만... 자유에 갈망은 끝이질 않더군요.

 

저는 1년하고 조금 넘는 기간을 교도소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몇 년 아니 반평생을 지닌 사람들을 보면 참 가슴이 뭉클합니다. 

 

@대학 졸업시기의 고민
제가 운동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 부문운동이 확장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상황이었지요. 운동의 사회적 확대가 미진한 상황이었다고 개인적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은 정치사회적 명확성과 합목적성은 있었습니다. 거대한 담론도 아니었으며 참 소박하지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이었죠. 유신철폐, 근로기준법 준수,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주의 쟁취, 민주노조 사수, 노동해방, 전노협 건설,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노동자민중의정치세력화, 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년도를 거듭할수록 사회적 정치투쟁에 대한 정치적 각성과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보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운동이 확장되지 않았던 시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전형적 운동방식이고, 당면 운동에서 군부독재에 의해 필연적으로 파생된 문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 는 저의 짧은 소견으로 보았을 때 89년을 정점으로 한 이념운동의 르네상스시대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을 까요. 명확한 타도의 대상이 있었고, 이를 통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해결해야할 절박한 심정에 대한 전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학생들은 학생 나름 데로 군부 탄압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이 7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주요한 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계급성이기보다는 운동이라는 지형에서 투쟁하고 실천하는 단위가 그들뿐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개인적 판단을 가져봅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판단이 들더군요.

 

89년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좌파라 통칭하는 운동단위에게 있어서 시련과 모색이라는  명제를 던져주는 참혹한 고통의 시작 기였습니다. 그 수많았던 강단좌파들은 하나둘 모델 사회주의 실패를 보면서 자신의 이론적 업적과 이념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들은 포스트주의의 선봉장으로 대거 이탈하였습니다. 이외에 모델 사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고의 티토즘을 차용하거나, 이탈리아 그람시, 프랑스의 알튀세르. 헝가리 루카치 등 다양한 사상가들에 대한 활동에 대한 사상에 대한 접근적 시도가 한창 남한 좌파운동의 부흥이라는 미명하게 진행되던 시기이도 합니다. 맑스와 레닌 책도 다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들 책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모색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더욱더 맑스-레닌주의에 귀착하여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이 기류는 막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갑갑한 현실이었습니다. 90년대 중초반과 후반에 나온 노래들을 보시면 다 서정적이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최면에 빠진 노래가사들을 접할 것입니다. 96년 말 97년 초 노동악법철폐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기 이전까지 모든 운동단위들은 모색이라는 미명하에 수없는 단체들이 형성되고 없어지고 다른 형태로 운동을 보존하는 활동들이 주를 이루면서 운동을 이끌어갔습니다. 참 혹독하게도 유의미한 단체들이 운동적 전망과 비전이라는 혹은 이론적 자기 도그마에 빠져 수 없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또 다른 자양분을 만들었습니다. 시민사회운동의 형성.... 경실련의 출현과 참여연대....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초기 이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바라본 저로서는 초기 그 당시만 해도 그들 활동에 대해서 그리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제 판단 준거는 그들 운동은 명확히 개량적이고 계급대중에 대한 이해를 복무하는 운동이 아니기에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메이저 운동을 자청하면서 모든 사안에 있어서 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실천적 활동은 미약하였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만큼 우린 대중 활동공간에서 멀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장기인 조직화, 교육, 정치투쟁은 위기이니 시련이니 모색이라는 자신의 도그마에 빠져서 수렁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노동법개악저지투쟁 이전까지는 이러하였습니다. 우리는 97년 초반의 힘을 갖고 대중 활동에 대하여 힘찬 전진의 발판은 마련하였지만, 장기인 조직화 선전선동, 투쟁은 이전에 비해 많이 거세되었습니다. 지금 민주노총이 버티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97년 투쟁과 비정규직, 이주, 장애, 여성노동자와 중소영세사업장투쟁, 장기투쟁사업장의 투쟁 신심으로 버티고 있다 판단이 듭니다. 우린 우리스스로 자랑찬 노동자임을 간혹 망각할 때는 없는지... 민주적 회의체인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조합원의 이익집단이라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규정받는 것은 이전에 비해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투쟁이 많이 약화되었기에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직접적 공세를 받고 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엄연히 이익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이익집단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목소리를 내는 가장 민주적이고 조합원 대중들과 호흡하는 대중조직입니다. 이전 전투적 노동조합론, 민주적 노동조합론, 자주적 노동조합론 등 노동조합을 둘러싼 노동조합 대중운동론은 정치세력화가 미약한 우리 지형에서 가장 유용한 무기였고, 해방구였고, 투쟁의 구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90년대의 무수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을 빼앗기거나 스스로 잃어버리도록 방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임이 노동조합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를 이끌었던 활동단위의 근시안적이고 자신의 이념적 토대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 도그마에 빠져 송두리 채 우리 스스로가 팽개친 것입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습니다. 선배열사들이 자신의 몸을 사르며 지키고자 하였던 그 공간은 많이 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도 있겠으나 과거에 비해 많이 변하였습니다. 발전적으로 변화 하였나 결코 발전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전에 비해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저는 판단이 듭니다. 

 

@ 공장생활
제가 근무하던 곳은 남동공단 다성이라는 대우자동차 차체 부속을 제조하던 업체로 스폿(점) 용점,  산소용접, 프레스를 주로 하는 업체로 레간자, 라노스, 누비라 차체 생산라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야 맞교대로 근무로 근무하면서 노동현실의 어려움을 몸소 느꼈습니다. 노조를 건설하려고 들어갔는데 중소영세사업장의 어려움만 몸으로 느끼고 나왔죠. 정확히 말해 현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이란 짧은 현장생활을 마감하였습니다.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고, 몸이 피곤해서도, 아니면 생산현장의 열악한 노동현실 때문에 퇴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전 구속경험이 있다 보니 남동경찰서 정보과에서 나와 위장취업 심사에 걸려 짧지만 소중한 경험을 마감하여야만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현장에서는 아이엠에프로 인해 상여금이 대폭 삭감되고 년차 수당이 없어 졌습니다. 저는 남자라 일당 13,000원으로 계약(정규직의 경우도 일당을 계약하고 현장에 취업해야함, 중소사업장의 경우는 부지기수임.)하여 월(주 44시간 노동기준 기준) 39만원의 기본급에 잔업수당, 야근수당, 특근수당을 보태야 월 80만원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현장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의 현실이 아직 변화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대공장의 경우는 기본급과 상여금의 수준이 높이 책정되어져 있기에 높지 않은 임금이라 말하지만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임금입니다.

 

상여금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이 문제시 되는 것은 여성노동자의 경우 저보다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보다 숙련되고 오랜 기간 노동하던 어느 늙은 여성노동자(경력 10년)의 일당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저보다 500원이 적은 일당으로 노동을 강요받고 있더군요. 그분은 설날, 추석을 빼고(제가 1년 현장생활을 겪을 때 노동한 시간)매일 나오시는 분이었는데, 월급봉투를 보니(국민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고용보험, 갑근세 제외, 잔업 68시간- 주간 노동의 경우 매일 10시 야근과 포함한 시간 임. 여성노동자의 경우 출근시간이 오전 8시인데 수동 스폿(점) 용접기를 정비하기 위해 현장 근무를 위해서 오전 7시까지 출근해야 함.-, 특근 4일 포함)하고 72 만원을 수령하더군요. 이게 노동의 현실이라 생각하니 암울하더군요. 저야 대학이라도 나와 마음만 먹으면 공무원 시험, 고시 등 다른 방법으로 돈 벌 수단을 찾을 수 있는데, 그 분들은 이 월급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삶의 목적이 형성 되었습니다


@ 운동적 바램
시민사회운동세력은 스스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어가며 자신의 운동영역을 계급적 기반에는 복무하지 않았지만 형성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담론들이 형성되면서 운동에 있어서 동일성은 많이 희석 되었습니다. 이전 이론의 빈약함에서 그런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정보의 홍수에서 우린 지킬 것과 계승할 것에 대한 많은 사안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새로운 이념 모색과 위기극복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발전 동력은 정리하지 못한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원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당시에 대한 활동들은 회자하지만 그 회자는 술안주가 된지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습니다. 활동가들의 치열함은 존재하나 그 회자가 술안주로 전락한 지금,,,,, 우리의 진단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을까요. 단적으로 구호는 과격하되 실천은 부재한 우리의 모습에 전 서글픔이 밀려옵니다.

 

부문운동의 발전은 또 다른 운동의 원동력을 낳았습니다. 이런 원동력에 우린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사회내성폭력, 노동자계급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정보통신 및 미디어 전략), 평화와 인권, 빈민, 소수자(장애, 이주, 여성, 성적소수자, 비정규직 등) 운동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존재하였지만 운동이라는 대의에 의해 그들의 목소리는 무마되거나 사장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조직발전과 운동발전이라는 우스운 논리 앞에 무력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계급성과 노동자계급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지금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입니다. 노동자계급운동에 복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운동은 이전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운동적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민주노조 쟁취이니 독재타도이니 이러한 사안에서도 우린 그들의 상황에 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었어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나서기 이전에 하였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서는 모습에 부끄러움이 들어서 어디론가 숨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민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 그들이 가져왔던 운동사회 내에서의 억압과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라는 이중적 탄압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알 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지금 운동의 동력인 이들이 아직도 사회적으로 그들의 지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제 희망을 우리가 말해야 할 때입니다.
파편화되어지고 전문화되어진 현재 우리의 모습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동의 대상의 명확성과 사회적 공익성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우린 천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연대가 단체 간 연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안별 투쟁을 통하여 우린 우리 스스로의 단위가 규정한 운동범주에 머물지 않고,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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