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운동은 존재하나 사람은 없는 현실

  • 등록일
    2004/08/03 16:27
  • 수정일
    2004/08/03 16:27

노동운동 그리고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지금.... 운동은 남아있으나 그 당시 구호를 외치던 이들이 없는 지금... 운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든다.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성에 기인하여 운동의 동력을 받았던 80년대가 저물고 90년대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무엇에 쫒기는 듯이 운동에 대해 모색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이것저것 모색하였다.

모색은 발전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동지들을 하나둘 현장에서 멀게하였다.

 

무수한 담론들 노동운동의 위기, 운동의 정체성, 운동이란 무엇인가? 등등 다양한 담론들 속에서 각자 다른 길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치열하게 살았던 자들이 하나둘 정치권에 들어가는 것도 보았고,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이 변절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만하는 행태에 분노도 해봤고, 현장노동자들은 믿고 따라던 지도부의 결단에 의해 처참히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질 당하는 것도 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서서히 서서히 우리들을 좀 먹었다.

 

지금 난 운동이라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지 향유하고 있는 것인지 헤깔린다.

 

하루에도 매일 날라오는 메일들을 확인하면서 이 세상의 치열함을 느끼지만, 그 기자회견문에서 나는 또한번의 좌절을 느낀다.

 

그 좌절은 다름아닌 투쟁동력의 형성과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기 못하는 나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대중주의는 대중추수주의로 흐르는 무오류성으로 변질될 수 있으나 대중이 없는 운동 또한 없다는 것은 우린 익히 잘알고 있다. 과거 학교를 다녔을때 복학생 선배나 과 동기들은 운동을 하는 나에게 일정정도의 부채의식이 있었기에 자신이 나서지 못하는 길에 서 있는 나에게 심정적 연대와 물질적 풍요를 배풀어 주었다. 그때 난 그들에 대한 따스한 배려가 있었기에 지금도 제가 속한 공간에서 둥지를 틀고 운동이라는 끈을 부여잡고 있다. 그 때는 그랬는데 왜 그 사람들은 대중속에 모습을 들어내지 않을까?

 

아마도 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에 대한 불신보다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전체 공유지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자기만족적 운동에 그치고 있으며, 이에 대중보다는 손쉬운 전문적 운동에 매진하여 여론형성과 이슈투쟁이라는 단기적 처방으로만 운동을 이끌고 있기에 그들과의 접점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판단을 해본다. 운동이라함은 원래 장기적 플랜이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과연 이러한 장기적 플랜이 있는가? 없다면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한 것을 만들기에 너무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와 불협화음으로 이러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에게서 대중이란 무엇인가? 대중이라 함은 막연한 대중이 아닌 노동자 민중들은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는지 우린 인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지보다는 벌어지는 사안에 우린 파뭍혀 주변의 소소한 움직임들에 대해 그냥 관성적으로 흘려보내고는 있지 않은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89년 정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가 이후 체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직후 나의 선배들은 하나둘 운동이라는 것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소시민으로 직장에 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소시민선배들이 작년 대선에서 노무현 지지를 위한 노사모 회원이 되어 386세대라는 닉네임을 갖고 대중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의아해 했다. 그러나 그들과 술한잔 하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운동에 목말랐다 그러나 운동에 대한 부채의식과 패배감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동력을 형성해내기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노무현을 중심으로한 온/오프라인 활동이 전국적으로 진행되면서 같은 동질성을 갖는 선배/동기/후배들을 만나게 된것이다, 그들은 물찬제비를 만난 것처럼 이리저리 신명나는 한마당에 동참하였다. 내가 그토록 저주하는 386이라는 닉네임을 필두로 내세우면서..... 그런 그들이 이해는 가지만 그들은 왜 위기이니 모색이니 이런 운동에 대한 무수한 담론과 수식어를 후배에게 던져주고 떨어져 나갔는가?  희망이 없다면 희망을 만들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 그들이 오늘따라 더 미워진다. 그들이 만들어준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의 선봉장이 되었고, 친미자주라는 이상한 수식어를 만들어 국익과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 한다. 죽음을 담보로한 평화가 얼마나 가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고민한다. 과연 이 남한이라는 땅에서 혁명이라는 깃발이 나부낄 수 있을지....

혁명이라는 깃발은 나부끼지 못하더라도 혁명이라는 그 운동성이 존재하였으면 한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그 만던 조직은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다들 간판과 깃발을 내리고 사라졌다. 몇안되는 좌파진영의 운동가들이 자신들의 입장과 내용을 갖고 고전분투하고 있는 지금.... 운동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대중과의 간극은 점점더 벌어지고 있는 지금... 그리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3권 투쟁이 밥그릇 논쟁으로 비화되어 폄하되는 현실....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운동이라는 거대담론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초심만은 잊지않고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접하게된 정파가 나의 뜻과 무관하게 실천활동을 하면서 받아들여졌지만 난 결코 이런 과정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좌파라고 자임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행동을 하고 있지도 못하다. 다만 내가 좌파적 지향성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고 대중과의 접점속에서 실천활동을  마르크스와 레닌을 접목시킨 이론적 토대에 대한 이념적 성향을 갖고 있다, 남들은 구좌파라 하지만 난 신좌파보다 구좌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내가 구좌파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사회주의 이행기에 대한 자본주의 세력의 총공세에 의해 무력화되었지 스탈린주의의 무오류성과 관료주의로 퍠배하였다 보지 않는다. 스탈린의 행위에 대해서는 역사적 평가가 되어야 하지만 그에게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의 원죄를 모두 쒸우는 행위 자체는 현시대 사회주의자들의 면죄부를 얻기위한 조건충족밖에 되지 않는다 판단이 된다.  난 그래도 러시아혁명의 역동성과 그 혁명의 승리가 지금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있으며, 그들의 원칙 또한 철저하였기에 구좌파를 고수하고자 한다. 그들의 강령은 틀림이 없었다. 다만 냉전과 경제적 고립이 사회주의권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으로 작용하였기에 그들의 역사적 투쟁이 지금은 잠시 단절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좌경으로 매몰되고 이념적 운동이 쇄퇴기에 놓였있다는 지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조직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고, 투쟁하지 않으면 우린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난 대중들을 조직하고, 함께투쟁하고, 함께 교육하는 신명나는 운동을 상상해 본다.

 

무수한 담론보다는 간결하고 설득력있는 슬로건을 내걸고 우리 세샹을 한번 바꿔봅시다.

 

길재가 고려의 패망을 보면서 쓴 한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어즈버 대평성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닌가라 생각이 됩디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