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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6
    떠나는자와 죽은자의 서글픔이 사무치는 날입니다.
    간장 오타맨...
  2. 2008/11/16
    일박 3일 지리산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왔습니다.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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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결혼이민자의 남편 - 도종환 시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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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11/16
    태국이주노동자 수위트씨 병마를 이겨내세요.
    간장 오타맨...
  5. 2008/11/16
    오산FM 건설을 위한 지역공청회
    간장 오타맨...

떠나는자와 죽은자의 서글픔이 사무치는 날입니다.

  • 등록일
    2008/11/16 01:11
  • 수정일
    2008/11/16 01:11

 

이철수의 집 - 오늘 보낸 편지中  "누구에게나 이런 날이 오겠지요."에서...

 

오늘 태국이주노동자 故 수위트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저는 참석을 하지 못하였답니다. 태국 이주노동자 아누차의 산업재해요양신청이 있어서 참석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참석을 하면 너무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아 참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 대면한 故 수위트씨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아 참석을 망설이다. 이내 일을 끝마치고서 사무실에 와 그냥 멍하니 컴퓨터만 바라보았답니다. 그리고 계속 울리는 핸드폰의 문자메세지만을 그냥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떠나는 것이 서글펐을 故 수위트씨 그래도 동행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어 서러움이 덜 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꽃의 거름이 되어 돌아온 故 수위트씨의 모습을 영정으로나마 저녁에 보았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故 수위트씨와 함께하였던 이들의 서글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임종을 병원에서 맞이하여 서러움과 서글픔은 조금 덜 하였겠다 싶습니다.

친한 이들이 함께한 그자리가 아마도 꽃의 거름이된 故 수위트씨의 노여움 또한 조금은 가라앉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故 수위트씨는 꽃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산자는 살아야지요.

어제 저녁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이주노조와 경기이주공대위 동지들과 함께 화성외국인보호소 앞에서 네팔미등록이주노동자 슈바스씨 병원치료와 강제퇴거 저지를 위한 정문 지킴이 활동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새벽 3시까지 어두움이 잔득 깔린 화성외국인보호소에 3시까지 차량과 혹시 모를 슈바스씨 강제퇴거가 될까 불침번을 썼습니다.

 

새벽 3시 잠이 들어 이내 잃어나 보니 아침 8시 일정이 있어 사무실로 버스를 타고 나왔습니다.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산업재해최초요양신청서를 제출하러 간 자리 계속 핸드폰에서는 문자메시지가 울립니다.

 

슈바스씨를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강제퇴거 시키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계속되는 문자메시지 그리고 핸드폰 통화.... 다급한 현장상황을 핸드폰 통화를 하는 도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나 현장에 갈 처지가 되지 못하여 그냥 제발 오늘 강제퇴거가 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1시간 후 슈바스씨가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끌려나와 인천국제공항으로 갔다는 소식을 문자메시지를 통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의사분들과 민변 변호사님이 당뇨병 투병으로 치료가 필요하기에 일시보호해제를 신청하였지만 서울출입국관리소에서는 절대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법위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법앞에 사람은 낮아지는 존재인 것이 현재 제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인 것은 알았지만 생사의 위험으로 위태로운 슈바스씨가 이주노조활동을 하였고, 화성출입국관리소에서 7개월간이라는 장기간 체류하였다는 이유로 강제퇴거를 하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떠나야하는자..... 자신의 권리와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 인권을 위해 스스로목소리를 내는 의로운 자가 떠나야 하는 사회... 과연 올바른 사회라 할 수 있을까요.

 

법은 사람이 지켜야 할 필요한 규범이지만 생명의 소중함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듯 법이 생명이 위태로운 자들에게 근엄하게 군림해서도 결코 하여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법과 규범이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구분만 합니다.

왜 이들의 처한 현실에 대해 귀를 기울이거나 개선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없는지 아쉬운 대목입니다.

 

우리와 더불어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결코 등안시되거나 멸시받아서는 안된 소중한 생명들이며, 우리가 품어주어야할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해 더더욱 필요한 지구촌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이며, 한국경제를 이끌거나 발전시켜나갈 민간대사이며, 한국의 숨은 홍보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어떠합니까?

검은색 피부라서 무섭다. 우리보다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서 좀 하찮게 여기지 않았는지...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주노동자 결코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우리와 함께 지구촌을 가꾸고 서로 나누고 소비하며 함께 어울어져나갈 우리의 친구이며, 민간사절단 입니다.

 

이주노동자 친구들이 한국이라는 사회에 대해 분노, 노여움, 악의가 없도록 우리는 노력하여야 합니다.

 

오늘 떠나는자와 꽃의 거름이 된 자를 생각하며 잡스러운 생각이 밀려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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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박 3일 지리산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왔습니다.

  • 등록일
    2008/11/16 01:09
  • 수정일
    2008/11/16 01:09













겨울철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에 갔다왔습니다.

 

매년 일년에 여름, 겨울 지리산 산행을 하는데 작년에는 하도 일이 밀려 여름산행을 다녀오지 못하였습니다.

 

유일할 탈출구가 산에 올라 별과 산과 하늘을 보며 그동안 가두어 두었던 짐들을 하나둘 훌훌 털어버리고 오는데 작년 여름에는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대산에 갔다 온 것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무박3일 조금은 무리였지만 초보들 산행코스로 잡았습니다.(삼정리 지리산 자연휴양림- 벽소령 - 세석산장 - 백무동(한신계곡 하산))

 

1월 20일 오후 7시 30분 오산을 출발하여 경부를 타고가다가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88고속도로를 타고 함양에 내려서 함양 - 삼정리(지리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였습니다,

 

눈비가 온다고 걱정반 우려반이었는데 산 아래는 진눈깨비가 휘날리고 있었으며, 경찰차가 나와 혹시 있을 사고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목적지인 지리산 자연휴양림에 12시 40분 도착하여 사진을 찍은 후..... 벽소령으로 산행을 시작하였답니다.

 

벽소령으로 오르는 길... 산행의 준비가 덜된 아이들이 걱정이었는데 걱정이 곧 현실 우려로 나타났습니다. 등산화를 신고 오지 않는 아이들이 신발에 눈이 들어가 차갑다며 아우성을 하며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몸이 비대한 아이는 숨이 찼는지 계속 뒤쳐저 아이들이 눈 내리기는 길에서 추위를 견디며 뒤쳐지는 아이 때문에 고생한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눈내리는 길을 걸으며 산 공기와 산의 정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흡족한데.... 아이들은 저와 정반대 인것 같습니다. 눈이 내려서 좋지만 추위 때문에 불평불만을 하면서 계속 언제가면 도착하냐고 보챕니다. 

 

그렇게 4시간을 걸어서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입산금지를 무시하고 올라와 벽소령 산장지기에게 무진장 혼이 나고 모포를 받아 얼린 몸을 녹이며 잠을 청했습니다.

 

눈이 그치겠지 싶었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눈이 왔습니다.

산에 올라온 이들이 우리 일행을 보고 어떻게 산행을 할 것인지 근심어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이들하고 세석산장까지 갈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임시로 비닐봉투를 구해 양말 밖에 신게하고 아침을 간단히 배낭에 가져온 컵라면과 햇반 그리고 핫초코 햄으로 간단히 요기(물을 뜰 수 있는 곳이 100m 하산하여야 하는데 눈이 길을 막아 내려갈 수 없어 눈을 녹여서 라면 물과 커피 핫초코 물을 만들어 요기를 함.)하고 오전 10시 30분 늦은 시간에 세석으로 갔습니다.

 

21일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

온 산하가 눈으로 덮여있으며, 산 전체 나무에 눈꽃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눈 내리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일렬행렬로 가는 것 때문에 참 좋은 것 같았습니다.  

 

눈을 맞으며 눈꽃들을 보면서 가는 산행길.... 걱정이 앞섰지만 공부방 아이들이 갈 걸어주어 경치를 구경하며 잘 걸었습니다. 힘들어 하는 아이들 불평도 잦아들고 산행을 하면서 주변 경치가 좋았는지 주변을 살피면서 산행을 하였답니다.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 아이들에게는 조금 힘이 부친 길이였습니다.

산고개를 오르락 내리락을 여러번 반복해야 하고 오르막이 제법 높아 눈길에 미끄러지거나 다리에 눈이 들어가 차갑다는 아이들이 속출하였습니다. 그래도 산이 우리를 허락하였는지 주저앉는 아이들이 없어 아이들을 보채거나 호통을 치며.... 산길을 걸었답니다.

 

그렇게 걷기를 4시간.... 세석산장을 알리는 푯말이 보였습니다.

불과 몇백미터 남았다는 푯말에 아이들은 어느새 기운이 솟구쳤는지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고 미끄럼을 타며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세석산장.... 오후 3시에 도착한 세석산장에서 아이들은 배고프다며 취사장으로 와서 라면과 햇반을 먹고 세석산장으로 줄행랑 쳣습니다.

 

아이들이 눈밭에서 눈싸움도 하고 산 구경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아이들은 피곤해서 그런지 좋은 경치를 뒤로하고 그냥 산장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내 맘이 너무 앞선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보여 줄 욕심이 앞서 아이들이 야속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뒤로 하고 저만 가져온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냥 산 구경을 하였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아이들이 하나둘 나왔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아이들에게 눈싸움 하지 않고 놀면 밥이 없다고 위협을 하였더니 다들 나가서 눈싸움을 하고 놀기를 하더군요. 그러고 한 30분이 경과했을 때 배가 고프다며 라면과 햇반 그리고 스펨을 해주면서 아이들에게 요기를 시켰습니다.

 

밤에 별은 여전히 뜨지 않고 눈만 야속하게 내리더군요. 아이들에게 별들을 보여주며 마음의 높이를 가져다 주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눈만 하염없이 펑펑내렸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눈이 내리는 곳에서 뛰어놀며 그렇게 밤을 보냈습니다.

 

같이간 선생님들과 제가 가지고온 참이슬 1.8리터짜리 소주만을 그냥 하염없이 잔을 부어라 마셔라 하며 들이켰답니다.

 

산장에 들어가 아이들이 잠이 오지 않은지 이리저리 모여 이야기를 합니다. 야간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이 있는지 이런 아이들의 동심에 대해 얄굽게 야단만 치더군요. 잠을 못청하더라도 아이들에게 그래도 조금 조용하면 어떻겠니 라고 이야기 해주었으면 되려 저희가 더 미안했는데.... 일찍 잠을 청하면서 아이들의 신나는 분위기를 산통을 깨놔서 산행을 하는 아저씨가 밉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일박을 하였답니다. 다들 어떻게 잤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세석산장에서의 밤을 피곤과 눈싸움에 지쳐 그냥 보냈답니다.

 

22일 아침 한신계곡으로의 하산....

 

아침 6시 세석산장에서의 등산인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잠에서 깨어 담배를 피우러 옷을 챙겨입고 나갔습니다.

 

여전히 아침이라기 보다는 동이 터오기 전이라 밤의 기운이 온통 산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찬 공기였지만 참 시원하고 정겹게 다가와 세석평전을 물끄럼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산장에 들어가 짐을 챙기고 세석산장 취사장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들과 먹을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아랫 계곡에 가서 물을 기르고 아이들이 먹을 햇반을 코펠에 데우고 있었습니다. 1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이 오지 않아 다시금 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꿈나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꿈나라의 포근함에 방해가 될까봐 일어나서 짐을 챙기는 아이들에게 아이들이 늦기전에 깨워서 데리고 오라는 말만 남기고 나갔습니다.

 

취사장의 풍경은 시장통을 방불케 하였습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의 분주함이 산장 취사장을 온통 시장으로 뒤범벅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전 눈이 내리기전에 올라온 등산객들이 적어서 참 공간을 넓게 이용하여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배낭에 있는 먹거리들을 모두 꺼내서 음식거리를 준비하였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부식은 햇반과 햄, 밑반찬, 라면이 다였습니다. 그래도 시장기가 돌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이 먹을 거리가 없는 것을 감지한 옆에 있던 등산객이 밑반찬을 주면서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라고 저희에게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음식을 먹고 산 하행을 준비하였습니다.

 

백무동으로.... 눈이 많이 내려 내심 고민이 많았습니다. 과연 하산이 가능할까? 그래도 계획을 맞추기 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한신계곡 하행길로 향했습니다. 눈이 길을 온통 희미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산은 좀처럼 저희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것 같아 내리막길에 서서 심호흡 단단히 하고 내려갔습니다.

 

30센치 이상 쌓인 눈을 걷어내면서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내려가야하기에 스페치를 두르고 눈길을 뚫고 하행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불평 그리고 즐거운 비명들이 섞여 즐겁게 하행을 하였답니다.

경치와 고드름에 눈을 빼앗긴 아이들은 힘들다는 불평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내려가면서 본 통나무길 구름다리를 보면서 아이들은 와 산이 좋다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만의 생각일까요.

 

내려와 백무동 가게에서 라면과 막걸리 한잔하고 산행의 즐거움을 저버려야 했습니다.

지금도 산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드네요.

 

즐거운 산행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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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결혼이민자의 남편 - 도종환 시인 글

  • 등록일
    2008/11/16 01:09
  • 수정일
    2008/11/16 01:09
여성 결혼이민자의 남편

                                                                                      도종환


11일 하인스 워드가 미국으로 돌아간다. 어머니 김영희씨와 함께 서울 명예시민증을 받고 눈물을 흘리던 그의 순박한 얼굴을 보며 나는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애틋한 연민의 감정이 더 많았다. 우리가 이중문화 가정의 자녀를 처음 대한 것은 전쟁과 참혹한 가난의 끝에서였다.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인 아이들이 주변에 생겨났고 그들은 늘 놀림의 대상이었다.

“너의 고향은 아가야/ 아메리카가 아니다./ 네 아버지가 매섭게 총을 겨누고/ 어머니를 쓰러뜨리던 질겁하던 수수밭이다./ 찢어진 옷고름만 홀로 남아 흐느끼던 논둑길이다./ 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 탱크가 지나간 날의 흙구덩이 속이다.”(정호승, 〈혼혈아에게〉) 이 시에서처럼 그렇게 아픈 역사의 캐터필러가 지나간 자리 옆에 그들은 있었다.

주한미군 흑인병사였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간 김영희씨는 도착 1개월 만에 남편과 헤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 30년, 김씨는 공항에서 기내식 만들고, 버거킹에서 햄버거 굽고, 밤에는 청소 일을 하며 혼자 아들을 키웠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곁에 남편은 있지 않았다. 아들이 2006년 슈퍼볼 최우수선수가 되어 환향한 그 곁에도 물론 없었다.

지난해 외국인과 혼인한 사람이 4만3천여 명으로 2004년과 대비하여 21.6%나 늘었다고 한다. 100쌍 중 13.6쌍이 외국인과 혼인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남성이 외국 여성과 결혼한 비율이 35.9%나 된다고 한다. 이들 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도 있지만 많은 결혼이민자가 의사소통,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차이, 생활 습관 차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들은 심청이들이다. 자신과 가족의 가난을 해결하고자 한국으로 온 제3세계 여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땅은 용궁이 아니라 인종모순, 계급모순, 성모순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인당수 한복판이다. 공양미 삼백 석 값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이들을 데려온 한국인 남편은 같이 살면서도 자신감과 확신이 부족하여 자주 아내를 의심하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부인이 돈을 목적으로 한국에 왔고 언제 도망갈지 모른다는 의혹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폭력이나 폭언, 경제적 학대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다.

여성 이민자가 이주여성인권센터를 찾아와 한국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려고 애쓰는 동안 이들의 남편이 비자 신청권이나 국적 취득권만을 무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남편도 아내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어떻게 아내가 문화·사회·경제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야 한다. 이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있고 이들이 학교를 들어오고 있다. 시골 학교는 이들이 교실을 채워가고 있다. 이들이 인종과 문화에 따른 차별과 소외와 집단 따돌림을 겪으며 성장할까봐 어머니들은 전전긍긍하는데 아버지들은 앞에 나서기를 주저한다. 외국인 여성과 사는 것에 대한 자의식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얽매여 아내와 자식을 책임지는 데서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이들이 워드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김영희씨 말대로 “사랑은 피부색과 상관이 없다.” 워드가 태어난 병원 건물에 “하인스 워드, 당신이 태어난 병원입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펼침막이 걸린 걸 보았다. 오늘도 이땅에 수많은 여성 결혼 이민자의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들 하나하나도 자랑스럽고 소중한 아이여야 한다. 그들이 30년씩 차별과 편견과 눈물 속에서 살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나라와 사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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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이주노동자 수위트씨 병마를 이겨내세요.

  • 등록일
    2008/11/16 01:08
  • 수정일
    2008/11/16 01:08

1월 18일 오후 오산서울병원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한통화 왔습니다.

태국 미등록이주노동자 한분이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후 4시 급하게 외국인서포터즈로 활동하고 있는 태국 여성결혼이민자 와라폰씨를 데리고 오산서울병원으로 갔습니다.

 

먼저 오산서울병원 원무과 김계장님을 만나 경위를 들은 다음 수속을 밟았습니다.

우선 주치의의 진료 소견서를 받고 황급히 응급실로 향하였습니다.

빼작마른 체구에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수위트씨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회사 사장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수위트씨의 집에 방문하여 데리고 왔다고  말을 듣을 수 있엇습니다. 

수위트씨의 병세를 응급실 간호사에게 다시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병명은 뇌수막염이라고 하면서 정밀진찰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위트씨는 하루종일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뇌신경을 자극해 허리가 아파서 통증으로 잃어나지 못하여 병원에 오게 되었다고 통역을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신을 가다듬고 경기도립의료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하고 수위트씨를 센터에서 가져온 차량에 탑승시켜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계속 어지럽고 몸이 좋지 않아 부축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원병원 응급실에서도 추위를 탓는지 이불을 덮고 이름모를 약물을 호스에 연결하였습니다.

담당주치의가 금요일 퇴근을 하여 응급실 당직의사가 수원병원 신경외과 담당주치의와 전화통화를 하더니 입원수속을 밟아 주었습니다.

 

병실이 없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2인실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동행한 일행은 수위트씨를 응급실에 놓고 기다리기를 4시간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그 시간이 저녁 11시.... 부인 또한 연락을 받고 병원에 왔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수위트씨는 고맙다는 인사만을 하고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와라폰씨에게 연락을 하라고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금요일 입원을 시키고 저희는 돌아왔습니다.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병원에서 수위트씨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위독하다고....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안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수위트씨 친구와 부인이 왔습니다.

혹시 수위트씨가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을 맞게 되지 않을까? 가족은 불안함과 어찌할바를 몰라 센터로 찾아왔습니다.

 

센터에서 운영위원장과 와라폰 그리고 존스갈랑씨가 친구들과 부인을 데리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의견이 분분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견이 설왕설레하다 해결지점을 보지 못하고 의견을 조율하였습니다. 부인과 친구들은 저희 내용이 불안하였는지 어찌 하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던 일을 마치고, 수위트씨 진행 경위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함께 의논을하였습니다.

 

일단 수위트씨 병세에 대해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 신경외과 주치의의 소견을 듣고 판단하기로 합의를 하였습니다.

 

혹여 뇌수막염으로 의식을 되찾지 못한다면 황급히 수위트씨 고향으로 가기 위한 수속을 밟자고 이를 위해 일단 1월 27일 태국대사관 이동대사업무 때 대사관 직원과 대사에게 이를 알리고 지원을 받을 방법을 강구하자고, 그리고 안되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수위트씨 비행기 운송료를 모으고 치료할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였습니다.

 

부인은 먼 타향에서 남편이 혹시 임종을 맞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의사 소견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희망을 갖자는 이야기를 하고, 화요일 수원의료원으로 부인과 통역 그리고 상담자들이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직 희망을 놓기에 이르다는 생각과 이억만리 타향에서 와 고생한 수위트씨의 삶에 대한 연민의 정이 느껴졌습니다.

 

희망을 놓기에 아직 일렀습니다.

부인에게 괜찮다는 이야기만을 하였습니다.

오늘 병원 중환자실에 면회를 갔다오고 안정을 취하자고, 그리고 치료를 받으면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자고.... 말을 하였지만 불안한 마음은 저 또한 감출수 없습니다.

 

7년간 한국에서 일하였다는 수위트씨..... 지금 경기도립의료원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은채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국미등록이주노동자 수위트씨가 부인과 친구들을 위해 내일이라도 벌떡 잃어나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작년 12월 31일 기사에서 봤던 아산에서 복막염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는 태국미등록이주노동자 소식이 지금 제 머릿가에 맴돕니다.  

 

희망을 갖고 다음주 화요일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으로 가봐야 겠습니다. 

 

수위트씨 부인과 태국에 자녀를 위해 꼭 병마를 이기세요.

힘내세요.

얼른 잃어나세요.

부인이 수위트씨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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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FM 건설을 위한 지역공청회

  • 등록일
    2008/11/16 01:07
  • 수정일
    2008/11/16 01:07

 

오산FM 건설을 위한 지역공청회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서는 2006년 이주노동자와 여성결혼이주민들에 대한 지역사회 인식개선과 지원을 위한 사업으로 영상미디어센터 Mediact의 지원을 받아 관악FM과 공동으로 이주노동자 인터넷공동체라디오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로 작게나마 2006년 7월 소출력라디오방송팀과 관악FM과 공동으로 3평 남짓한 공간의 라디오방송 스튜디오를 만들었으며, 2006년 11월 19일 오산이주노동자라디오방송국(OMWRadio)를 스리랑카, 네팔, 인도네시아 인터넷라디오방송을 개국 하였습니다.


 2007년 5월부터는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관악FM과 공동으로 소출력공동체라디오방송 기술 및 운영교육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결과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지역사회에 아시아 문화를 알리고 다가서기 위한 라디오방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이에 현재 준비된 필리핀,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을 주축으로 지역공동체라디오방송국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를 관악FM과 공동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오산노동자문화센터(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서는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지역공동체라디오방송이 결코 한 단체가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닌 말 그래도 지역공동체 즉 지역 풀뿌리 시민․노동․사회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가는 방송국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역 풀뿌리 시민․노동․사회단체들과 함께 지역라디오방송국 건설을 위한 공동체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에 오산노동자문화센터(오산이주노동자센터) 이사․운영위원․회원 그리고 지역의 풀뿌리 시민․사회․노동단체들이 참석하여 함께 만들어가는 방송국을 건설하는 작은 초석을 만들고자 하오니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오산FM은 지역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나눔과 연대를 위한 방송국을 지향하고자 합니다. 다시한번 참석을 요청  드립니다.


                                  - 지역 공청회 식순 -


1. 오산이주노동자센터 인터넷라디오방송 경과

2. 오산FM 추진배경 및 사업방향

3. 오산FM 추진계획

4. 오산FM 건설에 따른 의견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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