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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참세상 편집팀 2012.01.05 16:31
▲ 이윤엽, 나규환, 전미영 작가의 용산참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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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3주년이 된다.
또 다른 용산참사를 막기 위한 수많은 과제들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용산참사 열사를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용산참사 3주기 추모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투쟁에 함께했던 제 단체와 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구성된‘용산참사 3주기 추모 준비위원회’는 추모 주간 일정을 1월 15일부터 1월 20일까지라고 밝혔다.
추모주간이 시작되는 15일 오전 10시에는, 용산참사 현장 남일당 방문 및 개발지역 순회 일정이 예정되어있으며 16일 오후 1시에 홍대역 카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용산다큐 상영회가, 17일엔 국회 앞에서 강제퇴거금지법 발의 기자회견이 예정되어있다.
이어 18일 오후 3시에는 cy씨어터에서 용산참사 관련 공개 좌담회, 오후 7시엔 북 콘서트 및 출판기념회, 19일엔 동시다발 릴레이 1인 시위를 비롯 오후 저녁 7시엔 서울역에서 '용산 3주기 추모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20일 오후 12시에는 마석모란공원 열사묘역에서 용산 3주기 추모제를 여는 것으로 추모 주간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다.
이원호 용산참사 3주기 추모 준비위원회 사무국장은 <참세상>과의 통화에서 "도시개발의 피해자인 생존 철거민들의 즉각적인 사면 및 석방"을 요구했다.
또한 "1월 15일부터 시작되는 추모 주간에 서울시장이 직접 참여하여 입장을 확실히 밝혀줄 것을 공식 요청"했지만 현재 답변이 없는 상황이라 전했다.
추모주간은 용산참사 열사들을 추모하고, 진상규명 및 3년 가까이 억울하게 구속되어 있는 철거민(참사 생존자)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용산참사 재발방지를 위한 강제퇴거금지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추모주간 일정 |
- 15(일) : 남일당 방문 및 개발지역 순회 - 10시~ / 용산참사 현장
- 16(월) : 용산 다큐 상영회 - 1시~ / 홍대역 카톨릭청년회관 CY 씨어터 - 17(화) : 강제퇴거금지법 발의 기자회견 / 국회(예정) - 18(수) : 공개 좌담회(용산참사 3년...) 3시~ / CY 씨어터 북 콘서트 및 출판기념회- 7시~ / CY 씨어터 - 19(목) : 동시다발 릴레이 1인시위견 용산 3주기 추모대회- 7시~ / 서울역(예정) - 20(금) : 용산 3주기 추모제- 12시~ / 마석모란공원 열사묘역 |
주장] '기독교정당' 추진하는 대형교회 목사들, 부끄러운 줄 아시라
<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1/0823/IE001340804_STD.jpg">
▲ 김홍도 목사는 8월 21일 주일 '한국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이라는 제목설교에서 "반공사상, 국가관이 투철하고 용기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최근 언론 보도에 의하면,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등 한국의 보수대형교회 목사들을 내세운 우파 성향의 기독교 정당 결성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반공·친미를 표방하고 있으며, 기독교 정당 결성을 위한 준비단계로 포럼을 주도한 청교도영성훈련원장 전광훈 목사의 발언을 보면 그 단체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종북좌파들과 반기독교 세력들에 의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용기 목사와 김홍도 목사 등 원로들이 기독교를 표방해 정당을 준비하려는 이들에 대해 사전 정지작업을 해주면 내가 나서기로 했다."
교회국민운동본부가 배포한 포럼 홍보물에는 '종북좌파들의 국가 부정과 적화 통일, 수쿠크법과 이슬람의 비정상적 포교, 북한의 인권문제, 동성연애법, 인터넷언론들의 교회 공격, 교회 부패와 세속화, 전교조, 교과서의 기독교 왜곡 등 10개 주제를 놓고 포럼을 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신들의 하나님은 반공·친미 이데올로기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선은 '반공·친미'인 듯하다.
분명 그들에게는 하나님보다 '반공·친미'가 우위에 있다.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들은 이웃까지도 종북좌파로 몰아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포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10개의 주제 중에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라는 주제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그 주제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가 무엇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기독교정당을 만들어 정치적인 힘을 갖겠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의 교회의 세속화요, 교회가 세속화되어간다는 말은 바로 교회의 부패와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다.
혹시, 그들이 말하는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그들과는 다른 길에 서서 나름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을 세속에 물든 이들로 치부하려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그들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과 진보교단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하자, 교회가 정치에 관여한다고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해댔는가?
무임승차로 민주주의의 열매를 실컷 따먹고는 그 사이에 자기들 배만 불려 대형교회를 이루더니만, 고작 한다는 짓이 정권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란 말인가?
당신들이 하는 짓들로 한국교회는 물론이요,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지고 있는데 정녕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당신들밖에는 없는 것 같다.
허긴, 당신들이 그렇게 신봉하고 섬기는 하나님이란 '반공, 친미, 돈', 이 삼박자가 아닌가?
그런 당신들에게 뭘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img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0/0622/IE001210160_STD.jpg">
교인들이여, 무지에서 벗어나라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이런 짓을 하면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기반은 무엇인가?
대형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교인들인 것이다.
그들의 맹목적인 신앙은 반공과 친미와 돈에 미친 목사들이 주입한 바도 있지만, 그런 헛소리에 "아멘!"이나 해대고 헌금하는 무지한 교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수준 미달의 목사가 대형교회를 이루고, 교계의 원로라고 칭송을 받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형교회의 메커니즘은 철저하게 잉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업의 마케팅과 다르지 않다.
대기업에서 컨설팅을 하듯 대형교회도 수많은 예산을 들여가며 전문업체에 컨설팅을 의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기업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렇게 만든 1차적인 책임은 목사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양산해내고 지지해주는 것은 교인들인 것이다.
제발, 그 무지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구원의 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일 터이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인 한국의 보수대형교회, 그런데 그들은 확신에 차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신들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은 '반공, 친미, 돈'이니 진짜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겠지만, 당신들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얼마 전처럼 무상급식 투표 같은 거 하라고 독려하고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이나 만들겠다고 할 때도 아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어먹지 않겠지만, 당신들이 성서의 정신에 따라 재해석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 성서적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정당을 만들기 위해 열리는 포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10주제('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다뤄도 좋을 것 같다)말고,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포럼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토목사업(4대강, 한강르네상스, 평창동계올림픽, 제주해군기지 등)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보전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인권유린의 문제(서울역 노숙자강제 퇴거, 한진중공업 문제,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 희망 없는 한국의 보수대형교회와 그런 유사단체들을(한기총, 뉴라이트 등)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아마도 이것이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라는 주제의 영역에 들어갈 것이다)
- 한국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거나 교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한 목사들의 명단
조롱받는 한국교회, 조롱당하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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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서울시 주민투표를 앞두고 곽노현 교육감을 물리쳐야 한다는 문자가 뿌려졌다.
ⓒ 윤근혁 곽노현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조롱을 당하고 있다.
그 조롱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받는 거룩한 조롱이 아니라, 아무리 좋게 봐주고 눈감아주고 싶어도 더는 참을 수 없어 내뱉는 조롱인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한국교회를 조롱받게 만들고, 하나님을 조롱당하게 하는가? 바로 기독교정당같은 것들을 만들겠다고 하는 보수대형교회와 목사들, 반공, 친미의 최전선에 서 있는 각종 보수 기독교단체들, 부자들 편만 드는 강남 교회들, 설교가 아니라 '보수반공 시국강연'에 버금가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과 아멘으로 화답하는 이들, 기독교은행 설립을 적극지지하며 교인들을 끌어 모았던 목사들이 아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하고 회개해야할 교회는 자기 몸 불리기에만 연연해 왔고, 그들의 바람대로 성공했다.
어느 정도 몸집이 커지자 이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뒷받침하는 껍데기로 남은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약육강식의 논리와 강자독식의 논리(대형교회가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통폐합하거나 작은 교회 교인들 쓸어모아가는 일 등은 대형마트가 소형마트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반성서적인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되어버렸다.
그것의 일상화된 현실은 이번 서울시 무상급식관련 투표를 하기 전 보수대형교회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투표를 독려했던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대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치적인 행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교계에서는 재정적인 후원과 분담금을 많이 내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이젠 그들의 말이 곧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말처럼 되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의 말에 토를 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독교정당에 대한 것 역시도 이들의 협조가 없이 물밑작업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면에 나서든 나서지 않든 그들은 세속정치에서도 교계정치에서의 단맛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라.
당신들이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을 부끄러워 말고,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라.
기독교정당? 기독교은행하고 같은 꼴로 가려고?
얼마 전, 기독교은행 설립과 관련해서 사기를 친 강보영 목사가 구속되었다.
검찰의 수사결과가 나오면 얼마나 추잡한 일들이 기독교은행 설립과 관련해서 있었는지 밝혀지겠지만, 문제는 그 당시 기독교은행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보수단체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반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들도 피해자라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은행, 그것은 성서의 정신과도 어긋나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었지만, 그 핵심 고리에 '돈'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상치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기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기독교은행에 이은 기독교정당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당의 목적은 '정권의 획득'이다.
그러니까, 이제 기독교가 정치권에서 정치적으로 일정 정도 힘을 발휘하겠다는 것이고, 한국교회의 교인 숫자에 비추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계산하는 듯하다.
그들의 계산법이 황당하기도 하지만, 이미 지난 총선에서 패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총선에서 비례대표의 가능성을 점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일 년과 합한 지난 4년의 시간은 한국의 보수대형교회의 모습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에 이전보다 더 많은 표를 얻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꿈은 정교일치에 있는 듯하니, 그들에게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주어진다면 한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불행해질 것이다.
기독교정당의 의미,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찾는다면, 이런 움직임 자체가 한국교회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보여주는 표징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보수 대형교회 목사님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아마도 그들은 어떤 연유에서건 언론에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어야 힘이 넘치는 노출증 환자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황당한 일들을 하는데 버젓이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아니면, 전혀 의식이란 것이 없어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일지도. 자신들 스스로 교계의 지도자라고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그 밑에서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측근들에게야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냥 객관적으로 그들과 별반 상관없는 나 같은 평범한 목사의 눈에는 그들이 목사로 보이질 않는다.
아니, 신앙적인 양심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독사의 XX들아!" 하고 외치던 예수의 분노의 일성이 터져 나온다.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철면피들. 보수 대형교회 목사님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당신들 때문에 정말 목사라는 것이 창피해 죽고 싶을 때가 있어요.
덧붙이는 글 | 김민수 기자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입니다.
이곳을 찾아오시는 동지들중에 아시는 분들도 꽤나 있지 않나 해서 어줍잖은 글을 올려봅니다.
노동운동판에 "숲속홍길동"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상현이라는 동지가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항상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투쟁하는 동지들 동영상으로 연대하던 동지였는데 며칠전에 죽었다네요.
발견당시 목을 맨 상태였고 거주하던 원룸에서 며칠간 안보이고 이상하니까 아마 집주인이 신고를 했던 모양입니다.
어제 발견했는데 사망한지 3~4일 정도 됐다고 합니다.
방에는 온통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 아마 극심한 경제적고통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것 같습니다.
저랑 술 먹을때마다 자살하는 동지들을 많이 비판했었는데 결국 자신이 이래버리니 환장하겠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를 우선시하지 않고 말하자면 먹고사는데 연연하지 않고 운동하기가 거시기 합니다.
이 동지는 그저 순수한 연대활동을 했던 것이지요.
뭐 투쟁사업장 동지들 현장에 가서 영상연대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그래 살았는데 이래 갔습니다.
멀리 한진중공업에서는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고 연대해 달라고 아우성이 빗발치는데 저는 이 친구 편하게 마지막 가는 길 편하게 보내주려고 시신이 발견된 인천에서 서울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고 그저 수주 한병먹고 컴앞에 앉아있는데 홍길동이랑 술먹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많이 먹었죠..........근 10년을 알고 지냈으니까요.
다투기도하고 (제가 술먹을땐 좀 직설을 하는 편이라 많이 불편해 했습니다) 또 풀어지고 .......... 2009년 용산 연대집회 갔다가 버스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을 때도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와준 동지였습니다.
수술 끝나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 초췌한 영상을 올려주기도 했고 2006년 이랜드 투쟁 때 상암점에서 경찰놈들한테 코를 얻어 터져서 코피가 줄줄나는 영상을 하필이면 PD수첩에 기고해서 저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도 많이 받게 한 동지입니다.
이 동지 홈피에 마지막 쓴 글이 바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원이라도 이만원이라도 좋으니 제발 돈좀 보내주세요."
저야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금전적인 능력은 완전히 꽝인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 보내줬다는 그래서 급한 불 끄고 다시 운동하겠다는 문자를 받은게 엊그제 인데 도데체 왜 죽었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아 하여튼 그렇게 갔네요.
동지들 우울증 조심하십시오.
현장에서 죽는 사람들 죄다 우울증 때문입니다.
심정에 이상이 생기면 지체말고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가뜩이나 비도와서 더 우울한데 우울하 이야기 하나 올렸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31년 전, 그러니까 1980년 5월에 몇 줄씩 검은 띠로 문장이 지워진 채 발행되곤 하던 신문이나 사회안전과 국가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국보위의 노고를 치하하는 방송에서 광주의 소요는 고정간첩과 거기에 휘둘리는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군이 성공적으로 간첩과 폭도를 소탕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광주의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해서 사회안전과 국가안보를 지킨 공을 내세워 그해 가을,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도시에 흐른 피를 제물삼은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싸움이 길고도 험하게 이어진 것이. 처음에는 소문이었다.
간첩도, 폭도도 아니라더라, 일반 시민들이었다더라, 만삭의 임산부를 어찌 했다더라, 어린 학생도 무참히 당했다더라, 총만 쏜 것이 아니라더라, 대검으로 막 쑤셔댔다더라...
외국기자의 비디오에 의해 밝혀진 5월 광주의 진실
그러다 은밀히 외국 기자가 촬영한 비디오가 돌았고, 사진전이 열렸다.
처음에는 지하공간에서, 나중에는 학교며 교회, 성당, 시민모임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곳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생생한 ‘영상’으로 눈앞에 되살아나면서 아무도 제3자가 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거리에서 진실을 본 자, 불의를 참을 수 없는 자들이 ‘물러가라’고 외치다 또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는 전국 방방곡곡 모든 도시가 ‘광주’가 되고서야 결국 군사독재는 끝났다.
군사독재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그해 5월, 광주’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한 도시를 제물 삼아 권력을 잡았던 이에게 죄를 묻기보다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으로 뭉개버린 정치놀음은 총탄과 대검날 못지않게 역사와 진실을 난도질했다.
‘광주 비디오’와 ‘광주 사진’을 통해 영상의 힘을 알게 된 저들은 한사코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했고, 그래서 5·18이 영화나 드라마로 다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오! 꿈의 나라' 상영 집요히 막은 권력의 '공륜'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5·18에 대한 최초의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1989년)가 16mm독립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사전 제작신고 및 사전 심의 규정을 어겼다며 불법으로 몰아 상영을 막고자 기를 쓴 것도 당연하다.
영화를 제작한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는 “16mm 영화가 제작신고나 사전심의 없이 공공장소에서 공연되어 왔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탄압하는 것은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의 대중적 공개를 방해하려는 의도이며 영화인들은 이 탄압이 민족영화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결연한 투쟁으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수호할 것을 다짐”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규정을 빌어 벌어진 상영금지 공작은 집요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499_495.jpg">
영화 '오! 꿈의나라' 포스터
그 공륜은 1996년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기관이라는 판정을 받아 영상물등급위원회로 이름과 역할이 바뀌게 되었고, <오! 꿈의 나라>는 ‘표현의 자유’ 를 위한 영화 운동의 선례로 남게 되었다.
<오! 꿈의 나라>의 각본은 <선택>의 홍기선 감독과 <알 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이, 연출은 <접속>의 장윤현 감독,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감독,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의 장동홍 감독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500_496.jpg">
영화 '부활의 노래'
이렇게 여전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던 시기인 1990년, "한국영화에 닥쳐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화진흥과 창작자유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강하고 자주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는 계속 영화인의 책임으로 남습니다." 라는 인식을 가진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 독립 프로덕션 '새빛 영화제작소'를 만들고, 첫 영화로 만든 이정국 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5·18에 대한 최초의 35mm 극영화이자 정식 제도권의 스크린에서 상영된 영화다.
그러나 여전히 심의라는 암초에 걸려 <부활의 노래>는 무려 28분13초가 싹둑 잘리고서야 극장에 걸렸고, 관객은 상처투성이로 만듦새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의 영화를 보려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서야 공륜 재심에서 무수정 통과되었지만 이미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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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하사탕'
'박하사탕'·'화려한 휴가' 대중적 성공 뒤의 아쉬움…'박제화' 아닌 현재진행형 그려야
이렇게 가위질을 일삼던 공륜이 퇴출된 해인 1996년, 영화가 비로소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만들어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멀티플렉스 이전 시기에 서울 관객 21만을 불러들여 5·18에 대한 영화로는 처음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47만, 그리고 2007년에 개봉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는 무려 730만이라는 흥행 성적을 기록하면서 5·18은 영화 소재로서의 대중성을 키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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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려한 휴가>를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카와 함께 보았다.
아직 만 15세가 안되었던 조카는 사회 시간에 배웠던 5·18을 꼭 영화로 보고 싶다며 보호자인 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보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서는 “마음 아프긴 하지만... 좀 아쉽고 뭔가 부족해.” 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저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걸 영화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저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잖아.
혹시 <26년>이라는 만화 봤어?
난, 영화가 그 만화 정도는 얘기 하는 줄 알았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학교에서도 배웠는데,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데 대해서 영화같은 건 뭔가 말해줄 줄 알았지.”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오! 꿈의 나라>에서 <화려한 휴가>까지 5·18에 대한 영화들은 모두 ‘그해 5월, 광주’를 재현하는데, 그러니까 과거를 그려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꽃잎>의 주인공은 뒤늦게 친구의 여동생을 찾아 떠나고, <박하사탕>은 아예 영화 자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화려한 휴가>는 광주비디오와 사진으로 이미 보았던 딱 그때 그 장소를 소환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동선을 따라 공간을 그려낸다.
아직 영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아직 5·18이 과거 속에서 박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때 그 시절을 겪지 않았던 세대가 더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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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
석연치 않은 '당선작 없음'의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
그렇기에 ‘5ㆍ18 관련 소재를 영화화함으로써 대중적 파급효과가 큰 영화를 통해 5ㆍ 18 정신의 승화를 꾀하고, 세계적으로 보급하여 새로운 관심과 관점을 유도하고, 국내외 영화 팬들에게 5ㆍ18정신 내면화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2006년 5ㆍ18기념재단이 1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5ㆍ18민중항쟁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를 크게 벌였다가, 96편의 응모작 가운데 한 편도 당선작을 내지 못하는 일도 생겼던 것이리라.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한 재단 측의 심사평은 대부분의 응모작이 5ㆍ18을 다큐 형식으로 재구성하거나, 현재를 시점으로 5ㆍ18 당시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어떤 형태로든 5ㆍ18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작품들인데, 안타깝게도 이 두 성향의 작품들이 5ㆍ18민중항쟁이라는 소재의 중압감을 극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 또한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시나리오 공모 자체가 없던 일이 된 것은 공모 자체의 진정성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조카가 얘기했던 만화가 강풀의 <26년>의 영화화가 발표되었다.
<26년>은 인터넷을 통해 연재된 웹툰이었다. 5·18로부터 26년이 흐른 시점에서, 남겨진 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으며, 무엇 때문에 여전히 고통 받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또 무언지를 그려낸 <26년>은 아니나 다를까, 곧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워낙 원작 만화가 강풀이 <아파트>, <순정만화>, <바보>를 비롯해 최근 조용하지만 뚝심있는 흥행기록을 보인 <그대를 사랑합니다>까지 발표하는 만화마다 바로바로 영화판권이 팔려나가는 인기있는 작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26년>은 연재 당시 일일 조회 수 200만 건, 매회 댓글 2천여 건 이상을 기록했던 화제작이었으니 영화화가 안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img src="http://www.mediatoday.co.kr/news/photo/201105/95309_82503_5711.jpg">
강풀의 '26년
화려한 라인업의 탄탄한 이야기 '26년'은 누가 엎었나
<천하장사 마돈나>로 이름을 얻은 신예감독 이해영에, <미녀는 괴로워>로 당시 충무로의 캐스팅 일순위로 떠올랐던 김아중과 <주먹이 운다>를 비롯해 숱한 작품에서 개성 강한 연기를 보인 유승범이 캐스팅되었다는 기사를 보며 영화가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가는구나 생각했다.
원작 만화가 발표된 후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보태 <29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는 영화에 대해 한동안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샴푸 광고 모델인 김아중의 계약 조건이 긴 생머리를 유지한다는 것인데, 영화 설정 상 짧은 헤어스타일의 역할을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미리 걱정하는 기사까지 있었더랬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설명도 없이 <29년>은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가 왜 취소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5·18 당시 시민군의 아이들이 자라, 당시의 최고 권력자를 심판하려 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정권이 바뀌면서 만들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공륜은 없어졌지만, ‘절차로서의 검열’이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으로서의 검열’은 여전히 작동 중이라는 것을 <29년> 해프닝은 분명히 보여준다.
아쉽게도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했지만 5ㆍ18민중항쟁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로 탄생할 수 있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더니 슬그머니 발을 뺀 5ㆍ18기념재단도, <29년>이라는 영화 프로젝트를 아무런 해명없이 엎어버린 영화사도,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영화계도, 그리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남의 집 불구경하듯 무심한 우리 사회도 모두 ‘검열’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인 검열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 사회는 30년이 지나도록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며, 그 빚에 대해 어린 세대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
물려줄 것이 없어서 이런 빚까지 떠넘기는 것도 부끄럽지만, 그 빚에 역사가 이자까지 붙여 더 무거운 짐으로 불려나가고 있는 것을 모르쇠하는 것은 더 참담하다.
그들의 ‘화려한 휴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초대와 2대 3대를 해 자신 이승만 대통령과 5,6,7,8,9대를 해 드신 박정희 대통령 두분의 동상 건립 논의가 분분하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고 기염을 토하기도 하셨고 성미급한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동상 시안을 선보였다가 그분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이북의 그 분의 포즈와 너무 닮았다고 해서 파토가 나는 일도 있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오래 살았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들의 행적에 심한 유감이 있으나 굳이 그분들이 좋아 죽겠다고 동상을 세우겠다는 분들의 마음을 끝까지 반대할만큼 맘이 굳건하진 못한 바, 나는 조건부로 그분들의 동상 건립을 찬성하기로 한다.
그래서 전 세계에 세워진 유명한 동상이나 조각상의 모티브를 빌어 내 의견을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입상보다는 좌상이 적합하다.
고령으로 돌아가신 그가 힘들게 서서 아래를 굽어본다면 얼마나 다리가 아프시겠는가.
그리고 우매한 민중들의 봉기만 아니었더라도 그의 후임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자식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비운의 러닝메이트 이기붕씨와 사이 좋게 앉아 계신 것도 좋을 것이다.
바로 아래의 투 샷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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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동상의 정체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명장 악비묘 앞에 위치한 진회의 상이다.
진회는 명장 악비에 역모를 씌워 죽인 간신이다.
그래서 악비묘에 참배하는 이들의 침샘에 침이 고일 때 처분하는 용도로 지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이승만 이기붕 상의 위치도 4.19 묘지 앞이다.
나이 여든에 대통령 한 번 더 해먹어 보겠다고 발악하시다가, 그에 항거하여 일어난 백성들에게 총알밥을 안겼던 이승만 대통령과 "총은 갖고 놀라고 준 건 아니잖나?"고 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동상이 저 포즈로 4.19 묘지 앞에 세워진다면 나는 그 동상에 황금을 칠해도 좋고 러쉬모어 국립공원의 바위산 얼굴들처럼 커도 좋다.
내 딸의 돼지 저금통 배를 갈라서라도 그 동상 건립 위원회의 위원으로 등재할 것이며, 그 동상지기라도 되어 저분들의 얼굴을 닦고 또 닦을 것이다.
행여 공해나 먼지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자기들 때문에 죽어간 꽃다운 영령들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무릎을 꿇는 것은 흉물스럽지 않으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참 맘씨 좋은 거 하나는 알아주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기억력 사라지는 건 붕어와 초를 다투는 대한민국 백성이라지만 어쩌랴 나 역시 단군의 자손인 것을..... 최적의 장소는 4.19 장소요 최적의 포즈는 저것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인정이 있지 않으냐는 호소에 따라 마음을 고쳐 먹는다.
제 2안으로 나는 다음 포즈의 동상을 추천한다.
http://pds19.egloos.com/pds/201104/20/96/a0106196_4daecb4c5c487.jpg
그렇다.
핀란드의 영웅 파보 누르비의 동상이다.
그는 1924년 7월 10일 파리 올림픽대회에서 영웅으로 등극한다.
15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1시간 뒤 열린 5000m 결승에서도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이틀 뒤에는 폭염을 뚫고서 크로스컨트리 개인, 단체 부문을 독식했고, 체력이 거덜난 3,000m마저 제패하는 경이적인 위업을 달성한다.
노령의 이승만 대통령이지만 나는 이 포즈로 동상이 세워져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뜀박질이야 이 박사가 당연히 늦었겠지만 6.25 가 발발한 이후 비호와같은 서울 탈출은 길이길이 기념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6월 27일 새벽 3시 귀신도 모르게 경무대를 떠난 대통령은 철마야 나 살려라 대구까지 피난을 갔다가 "이건 너무 간 거 아닌가?"하고 대전으로 유턴을 했고 그곳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방송을 했다.
"서울 시민 여러분 국군이 반격하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6월 29일 용감하게 수원까지 올라가서 맥아더와 회담을 하신 노 대통령님은 7월 1일 아아..... 그 노구를 이끌고 빠른 경부 축선이 아니라 호남행 줄행랑을 치신다.
이리역에 도착하셔서 무려 8시간을 대기하신 끝에 목포까지 가셨는데 변장을 하셔서 그 누구도 용안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다.
그러고도 지치지 않는 철인같은 체력을 과시하신 각하는 목포항에서 배를 타셨고 마침내 7월 2일 수천 킬로미터의 장정을 끝내시고 부산에 안착하셨다.
누르미가 나이 일흔이었더라면 저 대장정을 소화할 수 없었으리. 누르미 할애비라도 그리할 수는 없었으리. 그 놀라운 스피드와 지구력을 상징하고 기리기에는 핀란드 올림픽 스타디움 앞에 세워진 누르미의 동상처럼 지축을 울리고 달리는 노구의 각하를 우뚝 서게 해야 할 것이다.
비문은 이것이 적합할 것 같다.
"기차야 기다려라. 배야 내가 간다. 부산이 어디메뇨 서울 시민 안심하라"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다.
손가락 들어 "임자 저 탤런트 이쁘구만"이라고 지칭하는 포즈의 동상 시안은 이미 폐기되었다.
http://pds22.egloos.com/pds/201104/20/96/a0106196_4daecf69d627b.jpg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도 있다고도 하고 북한의 아무개를 닮았기 때문에 찝찝해서 그랬다고도 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무려 18년 반 동안 대한민국을 주무르신 관록이 있지, 그 동상은 절대로 저토록 평이할 수 없다.
인류 문화사에 남는 걸작품이 되어야 각하의 위명에 맞을 것이며,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었던 그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어야 나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티브 중의 하나로서 나는 이 조각상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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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라오콘이다.
트로이의 목마의 위험성을 부르짖다가 바다에서 나온 큰 뱀에 감겨 아들과 함께 죽어가는 비운의 제사장 라오콘의 최후를 담은 이 조각상은 실로 인류 전체의 찬연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이 정도 스케일을 원한다.
뱀은 상징일 뿐이다.
민중의 저항일 수도 있고, "야수가 되어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변신일 수도 있다.
고통에 사로잡혀 "나는 괜찮아!"를 부르짖는 각하의 비장한 몸 오른쪽에는 기타를 든 여가수가 있어야 하고, 그 왼쪽에는 청초한 여대생이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발 아래는 시바스 리갈 공병이 굴러야 하고 석상 뒤 보이지 않는 곳에는 장렬하게 화장실에 숨었다가 총맞고 죽은 차지철이 마지막 몸을 숨긴 변기가 아스라히 모습을 드러내리라.
또한 각하의 파티에는 항상 두 명의 여인이 초대되어 좌우로 앉은 바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왼쪽의 여자가 남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의 여자가 남았다고 각하의 채홍사들이 증언했던 바, 이날은 미처 각하의 용안이 기울어지기 전에 사단이 났으므로 머리가 어느 쪽으로 치우져서는 곤란할 것이며, 라오콘 석상의 표정이 보여주는 그 놀라움과 비탄, 충격과 공포가 골고루 버무려진 얼굴 또한 조각가의 손 끝에서 창조되어야 하리라.
이 정도 동상이 우리 앞에 세워진다면 다시 언급하고 약속하며 누가 못믿겠다면 변호사 친구 녀석을 불러 공증이라도 하겠거니와 나는 저 동상들의 건립 위원이 되어 얼마 안되는 모든 사재를 기부할 것이다.
이것만은 마누라도 못막는다.
저 동상들이 우뚝 서서는 날 나는 마누라에게 맞아죽은 고혼이 되어도 창공을 떠돌며 기뻐 손뼉치고 그 동상의 어깨들에 깃들 것이다.
나는 그분들의 동상 건립을 찬동한다.
스포트라이트
누군가에게 애니메이션에 대해 물으면, 그 반응은 참 다양하다.
피규어가 죽 늘어서 있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20대 초반의 남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초등학생들이 오후 6시 정도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보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등을 예로 들면서 발달한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문화콘텐츠’가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유망 산업처럼 여겨지는 요즘은 특히 원소스 멀티유즈가 가능한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드러진다.
대한민국을 ‘세계 5대 문화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발표에도 애니메이션은‘핵심콘텐츠’의 하나로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기획-연출-작화-완성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획단계에서 주인공의 그림과 성격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각본이 나오면 연출단계에서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작화단계에서는 ‘원화’와 ‘동화’의 두 파트로 나뉘어서 그림이 그려진다.
완성단계에서는 배경을 넣고, 채색을 하고, 촬영과 편집과정을 거친다.
크게는 전 단계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을, 작게는 작화단계에서 ‘원화’와 ‘동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애니메이터라고 부른다.
애니메이터
금천구 가산 디지털단지 내에 있는 한 애니메이션 회사를 찾았다.
주로 미국 회사의 하청을 받아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 회사다.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에는 연출과 작화가 이루어지는 방들이 모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채색이나 배경작업, 편집 등이 이루어지는 방들이 모여 있다.
제작과정에 따라 공간배치를 해둔 듯하다.
원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은 책상 다섯 개로 가득 차있었고, 각각의 책상은 칸막이가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책상 한 편에 컴퓨터가 놓여있다던가, 가족사진이 하나 붙어있다던가 하는 점은 여느 사무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책상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캐릭터 설정 자료들이나,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타임 테이블이나, 라이트박스밑에서 조명광선이 올라오는 작업대 등은 확실히‘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애니메이션계에 투신(?)하여, 이제원화 감독을 맡고 있는 김유성 씨의 책상에는 파란 해파리 괴물 캐릭터가 붙어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자동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소리가‘드르륵’들린다.
“네, 이 방에서는 원화를 그리고 있어요.
원화는 스토리보드에 적혀 있는 대로 캐릭터가‘연기’를 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시면 되죠.
여기, 견본 캐릭터를 바탕으로 해서, 캐릭터의 표정이니, 동작이니 하는 것들을 직접 그려내는 겁니다.
동화는 원화와 원화를 부드럽게 연결해주는 그림들이지요.”
김유성 씨는 커피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설명부터 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터들은 크게 ‘원화맨’과 ‘동화맨’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무래도 상황에 맞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그려야 하는 원화맨 쪽이 보다 숙련된 노동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래서 애니메이터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은 2년에서 3년 정도 동화 일을 배운 후에야 원화 일을 시작할 수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회사에 원화맨이 10명 정도라면 동화맨은 50명이 넘게 있는 구조라서, 원화맨이 되었다가 다시 동화맨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단다.
한 달에 작업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김유성 씨는 고개를 갸웃한다.
“애니메이션 일은 전체적으로‘이거다!’하고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작업량도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니까. 보통 네다섯 명의 원화맨들로 이루어진 한 팀이 한 달에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보시면 될 거에요.
10분 분량이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나? 음, 회사에 따라 또다른데, ‘카툰네트워크’는 7000~10000장, ‘니켈로디언’은15000장 정도가 들어가죠.”
동작이나 표정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따라서 필요한 원화의 수도 바뀐다고 했다.
7000장이니, 15000장이니 하는 것들은 원화와 동화를 합한 수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애니메이터들은 어느 정도의 수입을 얻을까.
“우리 원화맨들은 좀 잘나가면 월 250에서 300정도는 벌수가 있어요.
비수기를 고려한다고 해도 연봉 3000정도는 어떻게 벌 수가 있는데. 동화하는 친구들이야 많이 힘들 거예요. 그 친구들, 한 달에 100은 가져갈 수 있으려나?”
김유성 씨 옆자리에서 ‘드르륵’ 연필을 깎던 원화맨 한 분이 말했다.
그 ‘잘나간다는’ 원화맨들도 경력이 20년은 족히 되는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그리 벌이가 좋은 직업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은 계약서도 없이 일해요.
회사에서는 우리를 프리랜서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냥 비정규직 노동자죠. 이 애니메이션이 좀 웃긴 게, 제가 일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그림의 단가가 다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예전에는 진짜 잘나가는 직업이었지만, 요즘은 정말 빠듯합니다.
그게 한국에서는 창작을 하지 않고, 외국에서 하청을 받아오는 OEM방식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외국 회사가 작품 단가를 높이지 않으니까.”
애니메이터들의 글을 찾아 읽다보면 유난히‘창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창작’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반짝거리는 눈빛으로‘창작에 대한 꿈은 모든 애니메이터들이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게 힘들다보니까, 쉽게 나설 수가 없어요.
창작하는 애니메이터들은 진짜 밥 굶으면서 일한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아이들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죠.
그래서 요즘은 3D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고 있어요. 3D를 하면 혼자서도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거든요.”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조금씩 창작 쪽에 관심을 보이고 있단다.
중국이나 동남아가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들면서, OEM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회사가 수익을 얻기는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자신이 힘들게 만든 애니메이션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이제 창작을 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며 웃었다.
나이 마흔 먹은 아저씨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2의 삶
“어서 오세요, 우리 가족의 축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유성 씨를 만나고 온 다음 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박현주 씨를 만났다.
그는 오랜만에 휴일을 맞아 두 딸과 함께 외출을 나온 참이었다고 했다.
근처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오후를 보내는 것이 박현주 씨 가족의 작은 ‘축제’라고 한다.
작달막한 키에 선한 인상을 가진 박현주 씨는 불쑥 나타난 불청객을 앞에 두고 조곤조곤한 어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심슨 가족’, 한국의 RPG 게임인 ‘포가튼 사가’의 작업에 참여했던 베테랑 애니메이터였다.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한 것은 25년 전이었어요. 와, 참 오래했구나…. 그때는 애니메이터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고 했고, 저도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무척 많았었죠.
남편이랑도 회사에서 만났어요.
남편은 원화 일을 하고, 저는 동화 일을 해 왔어요.”
동화를 25년 동안 했다는 박현주 씨의 이야기에,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보았던 동화맨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업실에는 두 줄로 작은 책상들이 촘촘하게 놓여 있어 그 가운데를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동화맨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부지런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맡은 분량을 완성하면 입구 쪽에 앉아 있는 작업감독에게 가져오고, 다시 일을 받아서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흡사 ‘공장’을 보는것 같았다.
“동화맨들은 그렇게 일하죠. 다행히 저는 일을 오래하다 보니까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시간이 곧 돈으로 연결되는 애니메이터 일이잖아요. 일거리를 받아와서는 하루 종일 그리고 있어야 했어요.
아이들을 돌볼 시간도 없었죠. 한 달에 보통 1000장 정도 그렸나?
그것도 한 달 동안 여유 있게 1000장을 그리는 게 아니라, 며칠 만에 몇백 장을 그려내서 가지고 가면 또 일을 받아서 며칠 안에 몇백 장을 그려가는 식이에요.
전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회사의 방영 스케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일이 불규칙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나마 일이 계속 있으면 다행이죠. 비수기에는 일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할 때가 많았죠.”
김유성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쉽사리 믿을 수 없었던 것은 20년 동안 단가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20년이라면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계산하기도 아찔해지는 긴 시간이 아닌가. 그래서 박현주 씨에게 이를 다시 물어 보았다.
“네, 제가 일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동화 한 장당 단가는 거의 비슷해요.
IMF니 뭐니 해서 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돌면‘고통분담’의 차원에서 단가가 도리어 떨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요.
미국 일은 선이 단순하니까 장당 600원 정도를 받았구요,
일본 일은 선도 복잡해서 장당 1200원 정도를 받았어요. 그래도 받는 돈은 비슷해요,
일본 일은 단가가 비싼 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한 장을 잡고 30분 넘게 씨름하는 일도 자주 있죠.”
떨어질 줄은 알아도 올라갈 줄은 모르는 임금과 나빠지기는 해도 좋아지지는 않는 노동환경 속에서 박현주 씨가 오랫동안 애니메이션 일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멋진 창작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한국 애니메이터들이 가장 많이 듣는 비판이 실력이 없어서 남의 나라 작품이나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판하기 전에 실력을 키우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저는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에게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전 세계 곳곳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다해왔어요.
미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할 것 없이 말예요.
한국의 애니메이터들은 지금 전 세계에서 어떤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고 있는지, 그런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란 말예요.
좋은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크죠.
혹시 ‘오세암’이라는 애니메이션 아시나요?
그 애니메이션을 보면 캐릭터의 움직임이 어색한 부분이 많아요.
스님이 산을 올라가는 장면에서 가방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그건 제작비가 부족하다보니까 충분하게 동화를 넣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어요.”
그렇게 자신이 하려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박현주 씨였지만, 작년 말 애니메이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떨어지는 단가와 불안정한 수입으로는 네 명 가족이 먹고사는 데에도 빠듯해진데다, 20년 넘게 일하면서 쌓인 피로감이 팔에 부담을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곧장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지만, 그림만 그릴 줄 아는 45세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을 한 것이 후회가 되었어요.
신물 나는 애니메이션 판, 꾸역꾸역 참으면서 일해온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죠. 그러다가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만두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지난 4월, ‘명인만두’의 수습사원으로 들어간 그는 이제만두 가게 직원으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다.
일이 무척 고되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해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고 나름의 보람도 느끼고 있노라고 말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잠시볼펜을 내려놓고 있는 나에게 박현주 씨는‘이 집 아이스크림이 참 맛있다’면서 한 스푼 먹어볼 것을 권했다.
자신의 젊음을 오롯이 바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하게 된 일이 아무리 즐겁고, 보람이 있다고 해도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는 아쉬움이 사라질 리가 만무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괜스레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꿈을 향하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간간히 흩뿌리던 날, 이번에는 용산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만나본 두 명의 애니메이터로부터,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들었던 의문은 왜 그들은 그런 조건 아래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조건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용산역에서 철도 웨딩홀 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 위원장인 유재운 씨다.
“이 동네가 원체 복잡해놔서요.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꽤 어울리는 회색 개량한복 차림을 한유재운 씨는 휘적휘적 걸어서 허름한 건물 3층으로 들어갔다.
작은 사무실에서 몇 명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단체의 사무실이라면서, 그는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서 앉을 것을 권했다.
우리는 무릎을 마주하고 앉았다.
애니메이터에게 관심을 보여주어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면서 자료를 주섬주섬 챙겨오고, 달큰한 커피도 한 잔 타온다.
앞서 인터뷰했던 김유성 씨의 선배이기도 한 그는 99년 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래 애니메이터들의 노동조건을 위해 투쟁해왔다.
오랫동안 투쟁활동을 해와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듣는 사람이 다 시원시원해 질 정도다.
“네, 애니메이터들 많이 힘듭니다. 우리들 노동조건이야 더 말하면 가슴만 아플 뿐이지요.
단가 이야기니, 철야를 밥먹듯이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셨을 겁니다.
노조 처음 만들고 했을 때는 단가로 싸우고, 노동조건으로 싸우고 했지만, ‘문제는 구조다’라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외국의 하청을 받기만 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인터뷰에 응해 주었던 애니메이터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였다.
외국 기업의 하청만 받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왜 한국은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고, 하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는 애니메이션 산업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 상당부분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
애니메이션은노동 집약적이면서도 대규모의 자본을 요구하며 투자 위험도가 높은 산업이다(주 : 신병현,‘ 애니메이션 산업의 노동과정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산업노동학회). 인건비가 많이 드는 산업이다 보니, 애니메이션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나라들은 한국이나 중국, 동남아 등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에 하청 생산기지를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국은 무려 40여 년 전부터 하청 애니메이션 생산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25분짜리 일본 애니메이션 한편을 만들기 위해서 드는 비용은 3억 3천만 원 정도이다(주 : 2004년 제작된‘건담 SEED DESTINY’기준). 애니메이션 한 시리즈 당 25편 정도임을 감안하고 보면, 제작비용은 80억 원을 훌쩍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서 만든다고 해도, 그 성공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가 자체 제작을 나선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한국은 하청 애니메이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한국 애니메이터들이 상당부분 제작에 참여했죠. .
외국 기업이 하는 일이라고는 기획단계 정도입니다.
반대로 한국의 창작 애니메이션은 말라가는 겁니다. 한국에 300개 정도 애니메이션 회사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 중에 창작을 하고 있는 회사는 심형래 씨의‘영구아트무비’를 비롯해서 몇 군데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하청 위주의 애니메이션 산업이 애니메이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일까. 유재운 씨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 하고 마시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청은 그 대금이 꽤 복잡하게 들어옵니다.
제작 진척 정도에 따라서 30%, 30%, 30%, 10% 이렇게 지불이 되죠. 또 하청이라는 게 한 회사가 다른 회사에 주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청을 받은 큰 회사가 또 작은 회사에게 하청을 주기도 해요.
이러다 보니까 어느 한 군데에서 돈이 안 들어오면 여러 회사의 애니메이터들은 한꺼번에 임금체불이 되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 돈이 들어오면 먼저 체불된 것부터 갚게 되는 과정이 몇십 년 계속되다보니 임금체불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죠.
또 있어요.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의 애니메이션 회사들과 경쟁을 하려면, 애니메이터들의 인건비를 일정수준 이상으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요즘 단가가 떨어진다고 하죠? 그럴 수밖에요.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받는 수준의 단가로 하청을 받아 오거든요.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애니메이터가 그 뭐냐, ‘후리랜서’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그것도 참 몹쓸 거지요.
우리는 법적으로‘개인사업자’라는 겁니다.
회사와는 도급계약을 맺은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연금도 못 받고, 퇴직금도 못 받고, 4대 보험 보장도 못 받았어요.
‘ 개인사업자’들은 법적으로 회사에서‘해고’된 것이 아니라 계약이 종료된 것으로 처리된다는 점 때문에 애니메이터들은 쉽게 쫓겨나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판도’가 바뀔 때마다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가끔은 일이 넘쳐나서 며칠 밤을 새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동안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할지를 몰라서 종이컵만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애니메이션에 나온 거대한 괴물 로봇이 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구조’라는 괴물 로봇과 8년 동안 싸워온 그는 어떻게 싸움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일까.
“애니메이터들이 노조를 중심으로 기업과 계약을 하는 방법이 있지요.
노조가 기업과 애니메이터 간에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업에서 일이 들어오면, 노조는 그 단가를 일정 수준 이상이 되도록 협상을 하고, 협상 후에 애니메이터에게 일을 넘겨주는 겁니다.
하청 구조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도, 이렇게 하면 애니메이터는 자신의 생계를 충분히 꾸려 나갈 정도의 일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이 노조활동에 많이 참여한다는 선행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유재운 씨는 구조 자체를 바꾸기 위해 모범적인 창작 애니메이션 회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노조에 속한 애니메이터들이 중심이 되어서 회사를 꾸리는 것이다.
작품 제작 계획을 모두에게 공개해서 각 애니메이터들에게 돌아갈 이익을 명시하고, 경영에도 애니메이터가 참가하는 방식의 회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우선은 자본금이 적으니, 작은 사업부터 시작할 생각이라고 했다.
몇 명의 애니메이터들이 뜻을 모아캐릭터를 만들고 웹툰을 그리는 회사를 차릴 예정이란다.
“실력 하나는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애니메이터들이 모인 이 회사를 잘 운영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어서, 한국 애니메이션에 가능성이 있음을 보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업들이 창작에 투자를 시작하겠지요.
애니메이션의 창작이 많이 이루어지면, 애니메이터들의 임금도 한국 상황에 맞게 현실화될 것이고, 우리들도 그렇게 원하던 ‘창작’을 마음껏 할 수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더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모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구조’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 로봇’을 상대하는 일이니,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이 잘 되면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애니메이션 한 편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일년에 도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나요.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그 사람들이 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우리의 삶이 이렇게 힘든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괜찮지 않습니까? 하하.”
김유성 씨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 ‘천진한’ 웃음을 유재운 씨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스태프 롤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으로 빵 한 조각을 씹으면서 어제 받아두었던 애니메이션을 켰다.
발달된 인터넷(!)의 영향인지, 일본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은 불과 몇 시간 뒤면 한국에서 받아볼 수가 있다.
어느덧 25분짜리 애니메이션 한 편이 끝나고, 엔딩 테마곡이 흘러나왔다.
캐릭터들의 멋진 일러스트 위로, 작품을 만든 스태프들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자 4글자로 이루어진 일본인들의 이름 사이사이에 영어로 적힌 한국인의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취재해왔던 사람들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지만, 내 머리 속에서 그 숱한 애니메이터들의 노동을 다시 떠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자신의 손으로 멋진 애니메이션 하나 만들어 보겠노라는 꿈을 안고 애니메이션 판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인터뷰를 했던 모든 사람들은 혼자서 일을 하는 애니메이터의 성격상, 하나로 뭉쳐서 무엇인가를 해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애니메이터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꿈’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
애니메이션 노동조합의 게시판에 적혀 있던, 그리고 내가 애니메이터 취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어느 애니메이터의 이 한마디 문장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대, 꿈을 향하고자 하면 그대 앞의 억압에 저항하라.”
유재운 씨는 겁이 없군요”“네?”“간뎅이가 부었어요”“아 네~!”(뒷머리 긁적긁적…)무슨 이야긴고 하니 며칠 전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가 일어났다.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간과 늑막이 부어서 폐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호흡곤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불과 두 달 전에 치질수술을 받은 터라 집사람 걱정이 컸던가 보다. 노동운동 한답시고 잘 먹지도 못하는데 술은 쉬지 않고 매일 먹어대니 견디다 못한 내 몸이 파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라면서 여태껏 약한 몸 때문에 부모님 속 엄청 썩이고도 모자라 이제는 내 아내까지도 내 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나는 태어나길 여덟 달 반 만에 태어났다.
이른바 ‘팔삭동이’가 바로 나다.
너무 미숙아라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그러니까 들어간다 하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여서 그냥 집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윗목에 밀어 놓고 죽기만 기다리는데 몇날 며칠이 가도 겨우겨우 숨만 쉬면서 몇 달을 살아 있더란다.
1년 후 출생신고를 하는 바람에 나는 친구들보다 주민등록상으로는 한 살이 적다.그리고는 다섯 살 때 트럭이랑 누가 이기나 박치기를 하는 바람에 또 한 번 죽다 살아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한강대교에서 원효로로 빠지는 다리목에서 거꾸로 떨어졌으나(약 5미터 정도) 팔만 부러지고 살아났다.
그리고는 별 탈 없이 지냈는데 대학 1학년 때 폐결핵을 앓게 됐다.
그리고는 그 해 연말에 연탄가스를 징하게 먹어서 오른쪽 반신불수가 됐다.
그래서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병역6급을 받았다.6급은 장애인들이 받는 급수인데 키 174cm, 폐결핵 말기에, 반신불수에, 몸무게 42kg이 나의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학교는 제적당했다. 삼수를 한답시고 다시 입시준비를 하다가 결국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결핵요양소에서 1년 살다가 나와서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놀다가 개나 키울까 했었는데(식용으로) 어찌어찌 하다가 애니메이션을 하게 되었다.
일 하다가 피가 쏟아지면 얼른 입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고는 다시 일을 하고…. 물론 남들 모르게 말이다.
한번은 세 명이 철야를 하는데 또 피가 터졌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고 있는데 옆방에 선배 하나가 들어와서 일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술 좀 적당히 먹어라 임마.” 아마 옆방에서 누가 기침을 하면서 무언가를 토하고 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아까 내가 입 틀어막고 뛰쳐나가는 걸 본 모양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남은 죽겠다고 피를 토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느긋하게 볼일을 보면서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충고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라. 그때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산업이 호황기였다.
일반적으로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제3세계 후진개발도상국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는 게 인건비 우위의 법칙이 아닌가?
그래서 한때 호황을 누리던 신발, 가방, 가발, 의류는 요즘 다 작살나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때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담배인 ‘솔’이 500원일 때 동화 한 장당 500원을 받았다.
지금 제일 비싼 담배가 2,000원인데 동화 한 장당 750원을 받는다.
상대적 빈곤이 엄청나게 심화되었다는 이야기다. 대기업 과장들의 월급이 약 50만 원 할 때 애니메이터들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약 200~300 정도가 되었다.
물론 잘나가는 사람들 이야기지만 아무리 못나가도 그들의 절반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 호황을 지금은 후발 도상국인 베트남 내지는 필리핀, 중국에서 누리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향수를 못 잊는 우리나라 애니메이터들이 그들 나라에 파견을 나가서 우리의 노하우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들 나라에서 귀족처럼 살고 있다고 들었다. 매국노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IMF 때 늘어난 환차익으로 강남 일대에 큰 건물을 사들인 회사도 여럿 있다.
원래 OEM(주문자 상표 제작 부착방식)이라는 게 먼저 선 계약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환율이 낮을 때 한 계약이 환율이 올라가 버리니 떼돈을 벌 수밖에…. 현장 노동자에게 오히려 고통분담 차원이라며 단가를 깎는 파렴치범도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노태우의 재입학 조치로 복학을 했다.
그리곤 애니메이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졸업을 했다.
재입학하기 전 1987년도에 애니메이션노조 건설 시도를 했었다.
물론 그때는 말단 애니메이터였고 다른 애니메이터들도 그리 불편함이 없었으니 당연히 실패했다.
그래서 감독이 되기 전까진 노조에 노자도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애니메이션 처음 하던 그때 애니메이터는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이 됐었다.
그리고 야근하면 야근비, 철야하면 철야비, 철야 시 주변 여관을 잡아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았다.
물론 초과수당과 보너스도 지급되었다.
지금은 보험은 온 데 간 데 없고 야근과 철야는 알아서 기고, 잠은 회사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잔다.
초과수당과 보너스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세월은 흘러 나의 실력을 인정받고 나서 내 밑에 후배들이 많이 생긴 다음 1999년 7월 31일에 노조를 건설했다.
그 이름하야 ‘전국 애니메이션 노동조합’!
왜 전국 조직을 만들게 됐느냐 하면 단사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는 몇 번 있어 왔는데 만들려고 시도하면 일거리와 사람들을 옆 회사로 전부 옮겨버리니 노조 건설을 시도한 사람들만 병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전국조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만들고 나서 한 일은 별로 없다.
단지 이전에는 부당노동행위가 발생하면 벙어리 냉가슴만 앓다가 포기하는 예도 있었고 하다못해 체불이 발생해도 근로자인정을 못 받으니 민사로 해결하게 되는데 질질 끄는 민사에 질려버려서 포기해 버리는 예가 빈번했다.
그러나 이제는 형사고발이 먼저 들어가게 되니까 사용자들도 약간은 겁을 먹는 것 같다. 가장 큰 효자라고나 할까?
애니메이터에게 퇴직금을 발생시킨 사건이다.(무려 5년 동안 법정투쟁을 통해서 승리한 일대 사건이다) 그 전에는 부당노동행위가 발생하면 내가 지방노동사무소에 가서 싸워서야 민원접수가 됐었는데 이제는 그냥 된다.현재 노조는 큰 싸움을 준비 중이다.
그 싸움은 아직 밝히지 못하겠다.
기분 나쁜 독자는 우리 애니메이션 노조 사이트에 부지런히 들어오시라!
언젠가는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꽤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일단 민주노총 공공연맹 문화예술 노조 애니메이션 노조 지부장을 하고 있고 민주노총 서울본부 남동지구 협의회 의장도 한다. 그리고 결합하는 단위로는 서울본부 비정규 특위, 민주노총 특수고용 대책회의, 전국 비정규 대표자 연대회의와 남동지구 미조직 비정규 특위장을 겸임하고 있다. 자랑이 아닌 우리의 열악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한 인간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비정규직 동지들은 나보다도 더 많은 일들을 혼자서 해내고 있다.
불쌍하지 않은가? 혹은 대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동지들의 힘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야만 노동자는 하나가 될 수 있고 노동해방 세상도 앞당길 수 있다. 항상 먼저 가신 열사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항상 불만이다. 이렇게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책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한 술 밥에 배부르랴! 이렇게 걸어가라고… 그저 묵묵히 걸어가라고 과학이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리 할 밖에….
지난해 말, 전북 장수중학교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오전에는 학생들과, 오후에는 학부모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제 강의에 앞서 교장선생님이 저를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오늘 퀴즈를 두 개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 퀴즈입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사람들은 당연히 “이순신”이라고 답했습니다. “나대용 장군”이라고 답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망치 두드려서 땀 흘려가며 거북선을 만들었을까요?
거북선을 직접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교장선생님의 질문은 누군가 “목수요.”라고 답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북선은 목수가 만들었습니다.
목수를 요즘 말로 하면 ‘노동자’입니다.
그러니까 거북선은 노동자가 만든 겁니다.
자, 이제 두 번째 퀴즈입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노동자일까요? 아닐까요?”
아무도 답을 못하자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노동자가 맞습니다.
바로 며칠 전 뉴스에도 프로야구선수들이 선수노조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는 기사가 나왔잖아요.
프로야구 선수들도 노동자입니다.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저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해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하종강 소장님을 소개합니다.”
세상에, 그런 교장선생님이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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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모습. (ⓒ장수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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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부모들에게 강사를 소개하고 있는 교장선생님. (ⓒ장수중학교)
강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를 사주겠다고 하셔서 함께 학교 현관을 나서는데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저... 차가 없습니다. 소장님 차를 좀 얻어 타도 되겠습니까?”
“아니 무슨 교장선생님이 또 차가 없어요?”
내가 힐난하듯 농담을 하자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정부에서 자전거 등록제인가를 시행할 예정이라고 해서, 제가 지금 군청에 장수군 1번을 배정달라고 신청해놓고 있는 중입니다. 하하...”
식당으로 가는 길에 장수가 고향인 논개의 사당 ‘의암사’가 보였습니다.
“논개 사당에 가 보셨냐?”고 해서 “아직 못 가봤다.”고 했더니, 잠깐 들리자고 해서 들렸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장수에 부임해서 보니, 친일파 화가 김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화가 사당에 걸려있더랍니다.
독재정권 시대에 정부가 만든 ‘표준영정’들 중에는 친일파 화가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특히 세종대왕 표준영정은 친일파 화가가 자신의 젊은 시절 얼굴과 거의 같게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친일파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있는 셈입니다.
교장선생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논개 초상화를 친일파 화가가 그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생각으로 마을 유지들과 모임을 만들어, 논개 초상화를 바꾸는 데 또 몇 년이 걸렸답니다.
문화관광부장관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일이어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논개의 성인 ‘주(朱)’ 씨 집안 여성들의 체형과 얼굴 모습을 조사해 만든 새 초상화가 논개사당에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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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개사당에 견학나온 청소년단체 회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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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논개 초상화와 새로 바뀐 영정. 예전의 전형적인 미인도 모습보다 새로 바뀐 초상화가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 학교에는 ‘교장실’도 없었습니다.
맨처음 저에게 연락한 선생님은 “학교에 도착하면 우선 교장선생님을 만나라.”고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교장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교육사랑방’이란 팻말이 달려있는 방에 교장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방은 학교에서 가장 마음 편한 공간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몸이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제 강의 중간에 나간 학생들이 그 방에 모여서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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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학교에 출석하지 않는 ‘놀토’에 진행됐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교육은 선택”이라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석을 부르지도 않았고 그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한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설득해서 ‘선택’하도록 했고, 대상 학생과 학부모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습니다.
일제고사와 체험학습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이유로(언론은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고 표현하지만 학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한 것이니 ‘거부’가 아니라 ‘선택’이 맞는 표현입니다) 교육당국으로부터 두 번이나 징계를 받으셨던 김인봉 교장선생님, 그 분이 지난 5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오늘 아침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 한 분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좋은 사람들을 너무 빨리 데려가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지만, 솔직히 원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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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열 몇 살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동백꽃처럼 낙화하고 무덤조차 없는 아이들의 뼛가루가 황사처럼 날리는 땅.
이 척박한 땅에서도 봄은 과연 만인에게 평등했는가.
새끼들하고 발 뻗고 누울 게딱지만한 집을 지키겠다고 살인범이 되어 세 시간의 물대포와 최루탄에 생쥐처럼 끌려 내려오던 철거민들.
그들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위에서 빛나던 햇살은 얼마나 따사로웠는가.
월남전 파병용사에 해외 산업역군에 60평생 일만 해 온 늙은 노동자가 외친 "서러움이 뭔지를 알려거든 나를 보아라" 그 외마디 절규에 600명을 연행하고 마흔두 명을 구속시키는 걸로 화답했던 참여정부의 곤봉과 군홧발 위에도 햇살은 자애로웠는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빈 학교에서 한 달 6-70만원으로 당직을 서며 혼자 라면발을 건져 올리는 경비용역 아저씨들의 젓가락질 위에도 햇살은 온화했는가.
급식종사원인 엄마와 학생인 아들이 아침마다 가는 목적지가 같건만 단 하루도 함께 등교해 본 적이 없다는 신발공장 해고노동자 정희.
매일 아침 엄마에게 등을 돌린 채 뛰어가는 아들의 그 작은 등에서 잔인하게 부서져 내리던 햇살은 얼마나 찬란했는가.
그 아들을 불러세워 함께 가자 단 한번도 얘기할 수 없었다던 정희는 "난 다시 태어나면 우리 재경이 학교에 선생으로 태어날 거야. 그래서 하루만이라도 재경이 손잡고 학교에 같이 가보는 게 소원이야"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마저 서럽던 못난 에미의 눈물 위에도 햇살은 눈부셨는가.
그 정희를 제가 처음 만난 건 그 아이 열두살 때였습니다.
열세살 아래는 취업이 안 되니까 이름도 두개였고 나이도 두가지였던 소위 생계형 위장취업자였던 아이.
목표량 달성이 생명보다 중요했던 공장에서 부산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들어 조장에게 터진 날 밤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보면 영어를 몰라 미싱사한테 엉뚱한 라벨을 갖다줘서 목덜미까지 손가락 자욱이 선명했던 그 아이가 쭈그려 앉아 울고 있곤 했었습니다.
그 아이의 꿈은 미싱사가 되는 거라 했습니다.
우리가 최대한 아낄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 20분이 전부였던 시절. 밥을 굶어가며 미싱을 배워 마침내 장군처럼 미싱을 타게 된 정희는 열네 살 때 이미 미싱바늘에 찍혀 손톱 두개가 없었습니다.
대학생하고 연애를 하면서 기숙사 삼동에 그 소문이 파다해져서 영웅처럼 의기양양하던 영자를 보면서 정희의 소원은 대학생하고 연애 한 번 해보는 걸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우리들 사이에선 영자처럼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고 헷세나 니체같은 책들을 미싱바늘 갈듯이 서로 바꿔가며 끼고 다니다가 밤엔 베고 자고 그랬습니다.
교복 입은 또래들을 보면 처음엔 눈물이 나다가 나중엔 저절로 욕이 나온다던 그 공순이들이 군복 입은 사람들을 보면 처음엔 무섭다가 나중엔 저절로 욕이 나오게 된 게 87년 꼭 이맘때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거리에서 만난 건 영자의 돈도 빼앗고 몸도 빼앗고 꿈마저 짓밟은 사장보다 더 나쁜 대학생이 아니라 또는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 대학생 회수권을 들고 버스에 올라서는 파마 잘나오는 미장원 얘기 부츠 세일하는 얘기나 늘어놓던 한심한 대학생이 아니라 최루탄이 안개처럼 뒤덮인 거리를 질주하던 진짜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준비물을 안 챙겨갔다고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운다고 모내기 하는 날 결석했다고 코피가 나도록 줘패던 수많은 박정희들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라던 믿어지지 않는 말씀들을 하시던 여러분들 참스승들이었습니다.
그후로 우리들은 더이상 읽지도 않는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도 않았고 안내양하면서 삥땅해뒀다가 남의 버스 탈 때 마패처럼 내밀곤 하던 몇 년이 지난 대학생 회수권도 비로소 버릴 수 있었습니다.
16년전 오늘.그 아이들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십니까?
정문 앞에서 부터 쫓기고 쫓기는 숨바꼭질 끝에 부산대학교 기계관 앞에서 마침내 하늘을 향해 오르던 전교조 부산지부의 깃발을 보며 그 아이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16년전 오늘.
선생님들을 그렁그렁 눈물 매달고 지켜보던 그 아이들의 수천마리의 새들의 비상처럼 터져나오던 갈채소리를 아직도 기억 하십니까?
그때 그날 신용길 선생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읽어가시던 축시를 들은 이후 정희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라 했습니다.
준재를 두고 떠나시는 그 오죽한 순간에도 눈을 세상에 남겨 전교조 합법화의 그날을 보리라던 꼭 신용길 선생님의 현신 같았던 조직.
1500명의 선생들을 학생들마저 폭력혁명의 도구로 삼는 좌경 용공 의식화 교사로 내몰고도 꺾을 수 없었던 조직.
학부모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 정문 밖으로 끌려 나가는 선생님들을 울며 불며 따라오며 선생님들을 돌려달라고 목 놓아 울던 아이들을 가졌던 참 행복한 조직.
그 조직을 아이들로 부터 분리해내는 게 이제는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으로 너무나 인텔리스러운 방식의 구조조정이 교원평가제입니다.
수백만개의 사업장은 말할 것도 없고 금융 철도 통신 전력 도로 건설 운송 다 휩쓸어버린 신자유주의자들의 오직 단 하나 마지막 남은 미션. 학교입니다.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비정규직이니 환영식도 없고 수시로 짤려나가니 환송식을 할수도 없는 수많은 현장들.
아무도 노젓는 법을 나누지 않고 친구의 노를 몰래 부러뜨려 놓아야 내가 강물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은 결국 그 강의 끝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망망대해로 이어져 혼자 탄 뗏목으로는 난파할 수밖에 없다는 걸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짤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짤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짤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짤릴 때 동생들은 '헹님은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 잡았네' 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이 짜릿한 러시안 룰렛 게임.
이미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지만 아직도 내가 비정규직이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전선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전선이 돼버린 이 스릴 넘치는 치킨 게임.
급식종사원 당직경비 영양사 사서 각종 보조의 이름으로 불리는 학내 비정규직들에게 익숙해진 우리들은 머잖아 하청교사 용역교사에게도 서서히 익숙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미션의 임파서블은 거기까지 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관리자거나 희생양이거나 두 종류만 키워내면 되는 학교에서 아무도 참교육을 말하지 않는 그때까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밀어내는 것도 자본이고 이제 와서 아빠 힘내시라고 노래불러주는 것도 자본이고 집도 사고 차도 사야 하는데 당신이 아프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주는 것도 자본이고 사고가 나면 남편보다 먼저 달려와 주는 것도 자본이고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자본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본은 이제 안아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공평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영역이 그것들도 죽는다는 사실이었는데 황 박사의 생명 연장의 꿈은 결국 자본 연장의 꿈이 될 것입니다.
상위 10%에 비해 하위 10%의 사망율이 다섯배가 높은 나라에서 노무현이가 보톡스 맞듯이 쌍꺼풀 수술하듯이 줄기세포 갈아 끼우고 죽지도 않고 러시아로 행담도로 삽질하러 다니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건희 명예박사 사건 일명 이명박 사건으로 존재감을 뿌듯하게 확인한 이건희 하고 똑같은 게 수십개 수백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정형근이가 호텔방에서 묵주하고 바꾼 난자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같은 것들을 아예 프레스로 찍어 낼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저는 벌써 소름이 끼칩니다.
동지여러분. 아이들을 일진이라고 때려잡던 소탕작전은 마무리 됐습니까?
사립학교법 죽어라 반대하는 한나라당 떨거지들. 학생과 교사를 좌경과 건전으로 분리해 좌경학생을 격리조치하고 좌경교사를 감찰하라는 신선한 발상이 화수분처럼 샘솟아 오르는 교육인적자원부.
천성산에는 철도를 놓고 아이들의 머리에는 고속도로를 내서 살기 좋은 새마을을 만들고 싶어 환장을 한 아직도 건재한 수많은 이 땅의 박정희들.
진짜 일진은 그것들 아닙니까?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동료들간의 왕따를 조장하고 폭력으로 나와바리를 유지하는 그들이야말로 우리시대 진정한 일진들 아닙니까?
이 일진세력들을 그대로 둔 채 교원평가제가 시행되면 아이들은 저절로 영악해지고 선생들은 알아서 비겁해질 겁니다.
아이들은 꿈을 잃어가고 선생들은 영혼을 잃어가는 학교에서 중간고사 끝난 나른한 봄날의 4교시. 선생님께 첫 사랑 이야기를 조르는 아이들도 더 이상은 없을 테고 그 아이들에게 진달래를 불러주는 친구 같은 선생님도 더는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을 상대로 첫 사랑의 황홀한 꿈을 꾸는 아이들도 없을 테고 선생님들은 더 이상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학교가 아닌 아파트 옥상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점점 많아질 테고 그때 우리는 아이들의 책상만이 아니라 옆자리 선생님의 빈 책상위에도 하얀 국화꽃을 올려놓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밖에는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여러분들.
나는 그 아이들은 담싹 안아주고 싶어 다가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아이들.
그럼 어쩌시렵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밤새워 메일을 쓰는데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는 아이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보내기' 대신 '취소'를 누르며 긴 밤을 서성거릴 때. 그 뜨거운 마음들을 다 어쩌시렵니까?
쏟아내지지도 않고 내려놔지지도 않은 채 자갈처럼 구르며 온 가슴을 헤집고 다닐 결국에는 상처가 될 그 걷잡을 수 없는 사랑들을 다 어쩌고 사시렵니까?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한 열세 살 때부터 홀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오빠.어린동생 둘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글재주가 유난했던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똑똑하면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혹시 아십니까?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리는 저주를 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게시판에 그림이 걸려 있던 기억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혹시 상상해보셨습니까?
미경이의 글재주는 작업시간에 빵 먹었다고 조장한테 터지고 온 날. 구비 구비 서러운 일기를 써내려가는데 밖엔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놓고 공장 옥상에서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외마디였습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그 유서를 왼쪽 팔뚝에 볼펜으로 비명처럼 새겨 넣고 갔습니다.
그 미경이를 신용길 선생님의 바로 앞자리에 묻으면서 신선생님께 부탁했습니다.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으나 살아서는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미경이가 선생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수만 벌의 옷을 만들었지만 단 한 벌도 그 옷의 주인일 수 없었던 미경이의 소원은 제비꽃 한복을 입어보는 거 였습니다.
여기저기 터지고 부러진 스물두 살 몸뚱이 여며서 그 옷을 수의로 입혀서 보냈습니다.
비록 눈으로 보실 수는 없더라도 제비꽃 향기가 나는 아이가 있거들랑 시도 읊어주시고 문학도 가르쳐 주시구려.
미경이 같은 아이들이 가진 꿈을 살아서 이룰 수 있는 무상교육. 전 그게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 2005. 6.10
2010.03.29.월요일 정치불패 Schizo
대통령 이명박 (면제)
나라꼴 잘 돌아간다 ㄲㄲ "전쟁나면 미국으로 ㅌㅌ 하면 됨ㅋ 우왕ㅋ굳ㅋ" 이러고 있었을듯... |
이런 개 쓰발놈들을 봤나! 나도 면제지만 나는 그 때 키 174cm, 몸무게 42kg에 폐결핵말기에 반신불수였기에 장애인으로 면제 받았다.
이런 놈들이 무슨 대책회의를 한다고 설치고 있다냐?
한준위는 그렇다치고 죽은 어민과 실종된 어민들은 어떻할거야 이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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