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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0)

그러고 보니 웹상에서 방점 찍을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그 밖에도 이탤릭체라든지, 진한 글씨체 같은거... 귀찮으니.. 위의 잡다한 효과들은 한글파일이나 PDF로 만들었을 때 확인하길..-_-; 제2장 두 개의 편지, 두 개의 탈구축 형식화의 제 문제에 대해서는 이하, 가라타니 코진이 80년대 전반에 행했던 일련의 작업, '내성과 소행(內省と遡行)', '隱喩としての建築(은유로서의 건축)', '言語. 數. 貨幣(언어. 수. 화폐)'를 참조하는 것으로 하자. 따라서 여기서는, 이른바 '탈구축'이 '형식화의 자괴(自壞)' 운동 그 자체, 즉, 어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 그 내재적 역설로 도달하는 사고의 운동이라는 것을 확인해 둔다. 가라타니가 밝힌 것처럼, 그 운동은 형식적으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다. 실제 앞 장에서도 다룬 것처럼, 드 만에 따르면 '탈구축'이라는 것은, 텍스트를 오브젝트 레벨(콘스터티브)로 읽는가, 메타레벨(퍼포머티브)로 읽는가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정불가능성을 이용해서 텍스트의 최종적인 의미를 공중에 매달아 두는 전략 밖에는 없다. 그리고 '탈구축'은 그 결정불가능성을 통해서야 말로, 텍스트의 개방성이나 타자성을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라타니에 따르면, 데리다의 작업은 결국, 형식화를 밀고나감으로써 부정적(네거티브)으로 '외부'를 출현시키는 이런저런 운동의 한 변주로 해석된다. 그는 85년의 텍스트 '轉回のための八章(전회를 위한 8장)'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철학이 '내성'에 시작된다고 하면, 현상학은 그것을 미저화(微低化)하고 있다. 데리다가 만난 것은, 우리들이 거기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지만, 또한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저 패러독스이다. 그는, 하이데거처럼, "철학" 이전의 사고로 귀착하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철학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반전시켜 가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 데리다는, 현상학에 있어서의 명증성이 '자신에 대한 현전', 즉,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음성은 의식이 있다>>('聲と現象(음성과 현상)'). 이것은, 서구에 있어서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읽혀져 버렸지만, 그는, 단순히 철학 또는 현상학이, 배우는=듣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그런 태도로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현전'에 앞장서는 흔적 없이 차연의 근원성으로 소행한다. <<이런 흔적은, 현상학적 근원성 그 자체 이상으로 <근원적>이다 --- 만약 우리들이 <근원적>이라는 이 말을, 모순없이 보지하는 것이 가능하고, 다시 그것을 소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음성과 현상). 다시 소거되는 것이라고 해도, 이 근원적인 차연은, 우리들을 또다시 '신비주의'로 쫓아 내는 것이 된다. 데리다는, '초월론적인 것은 차연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때, 차연이 초월화되는 것이다, 라고 해도 상관없다.(1) 가라타니는 여기서, 하나의 주체(주관)으로부터 출발하는 방법 일반을 '내성'이라고 명지하고 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을 자괴시키는 것으로 근원적 차연을 발견하는 데리다의 방법은, 최종적으로는 차이의 신비화. 초월화로밖에 귀결될 수 없다. 본 장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가라타니의 이 비판은 일면으로는 완전하게 올바르다. 실제, 후설과 소쉬르의 비판으로부터 시작한 데리다가, 자신의 작업이 갖는 가라타니적 의의를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데리다론은 가라타니의 이 일절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데리다에 관해서 또 다른 물음,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후기의 그는, 중층적인 지구(地口)와 암연의 인용으로 가득 찬, 소위 '間 텍스트성'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과 같은 텍스트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라타니가 인용했던 '음성과 현상'적인 철학 비판, 즉 전기의 형식적인 작업 후에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1) '內省と遡行' 講談社學術文庫, 88년, 293-29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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