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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난 걱정거리가 생긴다.

태생적으로 추위에 약하게 태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민감한 대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자주 배가 아프고, 조금만 기름지거나 매운 음식을 먹으면 바로 화장실로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오늘 점심을 좀 맵게 먹었더니 여지 없이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얼마 전 과음까지 했기 때문일까 속이 쓰리다.

나도 누구처럼 위장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blue christmas가 예상되는 날이다. 우울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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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춰보다.


♪ 모던쥬스 - 버스정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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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곳을 들춰보게 된다.

 

쉼 없이 어디론가 달려온 거 같았는데, 막상 돌아보니 그대로 출발점인 거 같아서일까?

다시 어디엔가 푹 빠져버리고 싶은 기분과 막막함.

 

게다가 날씨는 때맞춰 얼마나 쓸쓸한가?

 

텅 빈 버스정류장에 찬바람 맞으며 혼자 서 있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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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비밀은 있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감독 - 장현수 / 주연 - 이병헌 추상미 최지우 김효진


도발적인 포스터의 키 카피가 말해주듯이 시종일관 아찔한 영화다.

실제로 보면 키가 170cm 될까말까 하다는 이 남자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을까?
세 자매가 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 그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헤매는 모습들을 보면
이 영화를 본 뭇 남성들은 저마다 저런 생각들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나도 저런 경험 한번 해봤으면...'하는 부러움이 가슴 한켠 자리잡지 않았을까?
반면 여성들의 머릿 속에서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육두문자들이 맴돌았겠지.

자매라고는 하지만 닮은 구석이라곤 그다지 찾아지지 않는 세 여자와
그 세 여자의 마음을 모두 빼앗아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색다른 소재의 이 영화는
세 여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모습들이 차례차례 이어지면서 관객들의 흥미마저 자극한다.
그 세밀한 심리 묘사와 솔직 담백한 표현들. 순간순간 아찔한 장면들.
거기에 영화 중간중간 곳곳에 숨어있는 코믹적인 요소들.((탁재훈이나 막내의 러브스토리 등))
이 정도면 거의 흠잡을 수 없는 구성이었다고 하겠다.
이 영화를 위해 트레이닝 받았다는 김효진의 재즈 보컬도 양념삼아 볼만하다.

하지만 결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세 자매를 농락한 것이나 진배 없는 한 남자가
이 가족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 것으로 묘사된 엔딩은 의아하기 그지 없다.
한 가정을 휩쓸고 간 한 남자 때문에 새롭게 가족의 의미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이 어찌 개연성 없는 결론이란 말인가?
근래 본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흡족한 영화였다는 것과,
앞서 입이 마르게 칭찬한 참신한 구성에 큰 박수를 보내며 만족하는 수밖에...

지금와서 새삼 궁금해진 건, 
세 자매를 떠난 그 남자는 또 다른 딸부잣집을 찾아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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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장르는 환타지뿐이던가?

 

할 일 없는 ‘아줌마’들이나 방바닥에 배 깔고 킬링타임을 위해 보는 것이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구시대적이고 마초리즘적인 발상은 이제 너무나 명백하게 틀린 말이 되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드라마에 열광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겠는데, 그 이유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아이러니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하나는 필자를 비롯한 많은 드라마 시청자들이 자신의 일상과는 매우 동떨어진 상류층 인사들의 사랑놀음에 열광하면서 그런 럭셔리한 생활을 동경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 사랑놀음 안에는 반여성적인 요소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지만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기야…’라는 유행어와 함께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가난한 무명 영화인의 딸이 재벌가의 후계자를 만나 이른바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다는 줄거리의 이 드라마는 출연 영화의 잇따른 흥행성공으로 그야말로 ‘신데렐라’의 자리에 오른 김정은과 그 간 영화배우로서 탄탄한 자기만의 이미지를 구축해 온 박신양의 출연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초긴장의 드라마 시청률 전쟁에서 이 드라마가 승리하기까지는 샤프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박신양과 어리숙하면서도 귀여운 김정은이 쳐대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많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뭘까? 본인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며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기주가 강태영을 ‘애기야…’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강태영이 윤수혁과 한기주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보면서 여성이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음을 읽어내기 보다는 그렇게 불리워지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슷한 시간대의 타사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이다. 호화로운 휴양 리조트를 전세계적으로 10여개씩 소유하고 있는 재벌가의 아들과 젊은 나이에 한 기업의 실장 자리에까지 오른 엘리트 사이에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전문대 레크리에이션과 출신의 샌드위치 배달원의 이야기 역시 앞의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드라마에서 매 회마다 보여지는 열대 휴양지에서의 생활들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소시민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 여행사의 G.O.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저런 재벌가의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드라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또 다른 방송사의 드라마 역시 고졸 출신의 인터넷소설 작가와 인기스타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 역시 인기 젊은 이들 사이에서 인기 급상승 중이고,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호화로운 집과 자동차는 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길거리를 지나는 20대 여성들은 허리띠 대신 스카프를 말아 매고 있거나 긴 파마머리를 옆으로 묶고 커다란 머리핀을 달고 있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매듭이 굵은 넥타이와 더블버튼정장이 유행이라고 한다. 물론 이 전에도 드라마 속 연예인들을 따라하는 것은 주요 패션 트렌드 중의 하나였지만 근래의 이런 드라마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대사 한마디, 머리핀 하나, 넥타이 하나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인생의 허무함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 있어 표준 미덕일지는 모르나 허황된 꿈을 쫓아 젊음을 허비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터. 물론 그 드라마의 시청자들이 모두 허황된 꿈을 쫓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모두 허황된 꿈을 쫓는다 해도 그 잘못을 모두 그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 조금 과장하자면 앞의 드라마들의 장르는 모두 환타지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상위 10%를 차지하고 있는 계층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할 것이다. 왜 이렇게 드라마의 장르가 단순화됐을까? 이 질문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 만드는 사람 모두 자신들에게 던져야 할 질문일 것이다.

드라마 할 시간이다. 궤변은 이만 접고 드라마나 보러 가야겠다....^^*

<한림 웹진 @say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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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수업

 

신부수업

 

감독 - 허인무 / 주연 - 권상우 하지원

 

나름대로 한 때 카톨릭 신자였음을 상기시켜준 영화.

어쩌면 그래서 더 이 영화가 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 기대만큼 실망을 준 영화.

 

원래 종교라는 것이 다분히 폐쇄적이기에 특정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게다가 수녀나 신부의 생활과 관련된 영화들은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관음적 즐거움마저 관객들에게 주기 때문에 이 영화는 기본 성적은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권상우리는 희대의 스타마저 기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러한 이점들을 제외한 영화 신부수업은

좋은 점수를 받을만한 요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극적인 연결고리도 부족하고, 극의 진행 또한 빠르다보니 보는 관객들은 답답할 뿐.

독신으로사는 것은 물론 '하느님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신학교 과정까지 마친 주인공이

갑작스레 나타난 한 여인에게 사랑을 느껴 마음을 돌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길게 잡아도 한달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시간동안

그 여인에게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느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더욱 더 비관적으로 보자면 도대체 그 둘은 서로의 무엇에 반해 사랑하게 됐을까?

 

시골 촌구석 성당과 서울 한복판 남산을 왔다갔다 하는 설정 또한 현실감을 떨어트리고,

카톨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더욱 더 답답했을 영화.

게다가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이 장면, 저 장면 짜집기를 한 듯한 각각의 신들.

 

잠시 잠깐 옛 생각에 젖어들게 했다는 것 외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영화였다.

티티엘 카드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4000원에 보게 해준 춘천시 육림극장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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