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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5/21
    서울시의원 윤동환 무소속 후보를 적극 지지합니다(2)
    마돈나
  2. 2010/05/14
    관악바선거구 이명애 구의원 후보를 지지합니다
    마돈나
  3. 2010/05/06
    홍대에서 낚고 싶은 20대
    마돈나
  4. 2010/05/04
    급진은 점진이다(4)
    마돈나
  5. 2010/04/30
    진보활동가의 성적강박이라...(139)
    마돈나

서울시의원 윤동환 무소속 후보를 적극 지지합니다

 

저는 서울시 강동구 주민입니다.

지역현장의 활동이 뜸한지라, 지역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멀었답니다.

하지만, 윤동환 후보 때문에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연예인 하면 포퓰리즘의 대표주자로 기존 정당에서 입질하던 부류였는데 스스로 무소속 후보자로 나섰군요. 

무소속이라 맘에 들고, 공약도 맘에들고, 흠 잘생겨서....(오세훈 지지하는 아줌마부대와 같은 취급 당해도 좋아~ ㅎㅎㅎㅎ)

다음은 기사에서 퍼왔어요.

 

윤동환 후보 블로그 http://blog.naver.com/wakeupyoon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95261?cloc=rss|isplus|total_list

 

윤동환 서울시 의원 무소속 출마 “민주주의 국민은 주인” 출사표
[2010-05-21 12: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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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김유경 기자]

탤런트 윤동환은 서울시 강동구 출신으로 오는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서울시 의회 의원 후보(서울시 강동구 제2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고 21일 밝혔다. 

윤동환은 21일 뉴스엔과 전화통화에서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중요한 것 같다. 낮은 투표율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사람들은 선거에 관심이 없다"며 "스스로도 반성하고 직접 참여해 보자는 생각에서 출마를 결심했다. 뒤늦게 시작해 준비가 많이 안된 상태이지만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동환은 "민주주의는 국민의 주인이 되는 정치인데 실제로 얼마나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당선이 된다면 서민들을 위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입장을 나타냈다.

윤동환은 "솔직히 당선이 될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당선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윤동환은 당선이 된다면 서민들을 위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윤동환은 사회 복지 면에서 동 단위의 마을 도서관 확충, 서울 시내의 공원 내에 잔디와 벤치 등 시민들의 향유 공간을 더 확보하기, 학교 무상 급식, 아동 수당 지급, 기초생활수급자 최저 생계비 인상 등을 제시했다. 

특히 윤동환은 "영세한 예술인, 공연 단체 등을 위해 나라에서 저가 혹은 무료로 우수한 단체에 공연 및 전시 장소를 제공하도록 하는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며 "예술인 최저 생계비 보장으로 많은 서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고 언급했다. 

윤동환은 이번 지방선거 출마에 관련해 다큐멘터리 제작도 하고 있다. 윤동환은 "옆에서 다큐촬영을 하고 있다. 일주일간 찍고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잘 모르겠다"며 "오픈 시나리오다. 실패할 수도 있고 당선이 되면 성공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윤동환은 MBC '주몽'의 현토성 태수 양정 역, KBS 2TV '추노'의 용골대 역으로 잇달아 출연해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다. 윤동환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몰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에서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

김유경 kyong@news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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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바선거구 이명애 구의원 후보를 지지합니다

관악구의원 예비후보 이명애 관악구 바선거구(난곡동, 난향동)

 

관악구 난곡지역에서 20년간 주민운동을 해온 명애언니가 구의원 출마를 결심했네요.

관악주민연대와 난곡주민도서관 '새숲'에서 활동해온 명애언니는 주민운동계의 '내공녀'로 통한답니다.

 

이런 구의원 한명쯤 구의회에서 일할 수 있다면 살맛나는 지역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만, 기성정치인이 만들어 놓은 정치판에 대한 불신이 걱정입니다. 무관심의 정치는 이렇게 보물같은 신예정치인을 배출하는데 걸림돌이 되는군요.

 

정당공천제인 현행 선거제도에서 시민후보로무소속 출마도 아슬아슬하고

예비후보기간동안 직계혈족만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모순으로 인해

싱글의 외로운 선거운동을 옆에서 맥없이 보고있자니 은근 부화도 치밉니다.

 

결혼한 사람만(혹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선거운동에서 유리한 더러운 세상~

 

여튼, 그래도 지자제 19년이 되는 시점에서 마음을 다해 지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할 따름입니다. 거의 종교수준인가? ㅋㅋㅋ

 

선거기간동안 건강하고

많이많이 걸어서 뱃살도 빼고

꼭 당선되시길 바랍니다.

 

이명애 후보 블로그

 

http://blog.naver.com/happymong68

 

한겨레 신문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96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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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 낚고 싶은 20대

20대 모인 자리에 30대인 나는 갔다. 두리반도 궁금하고, 이택광씨랑도 인사를 나누고자 갔다.

(이택광씨에게 할 말이 있었음) 왠걸. 인사는 커녕 발디딜 틈도 없어서 그냥 맥주 한캔 까고 왔다.

마침 책도 저렴하게 판매하길래 후원도 할겸 두어권 구입했다.

 

바람은 좋았다. 공사장 앞마당 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자니, 참 낭만적이다.

운동의 현장은 짧은 시간, 짧은 순간 조직원 간 낭만적인 시간과 추억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그곳에 발을 못뻬게 만들기도 한다.

 

역시 홍대다. 젊은 친구들의 재기발랄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좋은 바람에 순수한 비린내도 풍긴다.

아, 저들을 낚고 싶다.

 

오래된 주민운동의 현장, 아직도 치열한 지역의 현장. 치열했으나 현재 먹고사니즘에 정신을 빼앗겨 정체된 운동의 현장에서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20대.

 

여기엔 있었다. 난, 좋은 바람에 그들의 풋풋함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만을 하다 돌아왔다.

20대 주거도 문제지만, 아직도 판자촌에서 사는 주민들이 있고. 그곳에서 한국사회의 부동산 정책과 재개발 정책의 구린내 나는 배설물이 모여진 비닐하우스촌의 주거문제는 계속해서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난 정말 그들을 낚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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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은 점진이다

 

찰리채플린 [모던타임즈]

 

 

"야, 선동하지마"

"난 파란마음이야, 붉게 물들이지 말라고"

 '선동'이라는 단어가 내 싸다구를 날린다.

 

교재에 '선동'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부정적인 반응이 예상되어 주춤했다. 활동가조차도 선동이라는 단어에 질색한다.

 

진보그룹에서조차 선동은 어느새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전제한 버림받은 자식이 되어 버린 셈이다.

선동이 도대체 왜 나쁜가. 

 

선동은 잠재된 가능성,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일깨우고 참여하게 하는 동기유발의 의미를 포함한다. 주로 그 방식은 문건(성명서, 논평), 혹은 연설을 통한 것이었다. 한명씩 앉혀놓고 일대일로 관계맺기 하는 조직화를 선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뭐랄까 집단적인 움직임을 추동하는 의미랄까.

 

신념을 교환하고 움직이게 하는 '선동'은 왜 나쁘게 받아들여질까. 상당부분 진보그룹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보는 나는 나름 생각을 정리해봤다.

 

선동은 자기인식이 작동하기 전에 감정을 울리는 측면이 있다. 가슴 깊숙히 자리잡은 분노를 끌어올려 울컥하게 만드는 연설을 들어보라. 당장 옆에 있는 돌멩이라도 주워 저항하고싶은 맘이 절로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그 저항이 아무런 해결책(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을 내놓지 못할 때, 아니면, 흠모에 마지 않던 선동가가 엉뚱한 선택을 해서 지탄을 받을 경우, 선동에 온전히 가슴을 내어 준 대중은 차갑게 돌아서기 마련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과를 책임지는 자발성의 결여다.

 

'선동'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람을 모을 수는 있었지만, 대중이 선동가 혹은 선동한 그룹에 대리책임을 묻는 의존적인 운동문화를 만들어 온 주범이기도 하다.

 

결국, 선동은 급진주의자에게 필요한 방식이었다고 본다.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은 마찬가지지만, 온건 개량주의를 부정하는 급진주의 말이다. 한국사회는 급진주의가 대세였다. 발등에 불은 반사적으로 비벼 꺼야 했기 때문이다. 행동하고 성찰할 새도 없이 숨가쁘게 행동과 행동을 거듭해야 했던 지난 몇십년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한국의 질적 진보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내가 만나는 친구, 가족, 이웃은  시민권에 있어서 법이나 제도를 근거삼아 권리주장에는 강해졌지만, 세상에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변화는 질문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술자리에서 민증을 까는 것부터 시작하고,  무엇을 전공했는지 묻는가(전공과목을 열심히 하지 않은 운동권이면서). 질문의 수준이 고작, 나이, 대학, 직장, 급여수준... 그 다음부터는 질문과 상관없이 나이많은 사람이 어린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다 그런건 아니지 물론)

 

흥분을 가라앉히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건, 자의식이 부족하다는 뜻일게다. 운동권도 교양에 젖어 질문하지 않는 이가 많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슨 진보란 말인가.

 

우리는 그간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예민하게 살펴야 할 것들을 놓쳐왔다. 선동은 KTX를 타는 티켓이었고 민주주의라는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했지만 대중 인식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의 대안은 조직화다.

한명 한명이 변화하고 그들이 모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화 운동이 한때는 온건 개량주의라고 비난을 받던 때도 있었다. 그동안 급진은 소수 엘리트였고 그들만 티켓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지에 내리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 탓을 운동권에 푸념하기도 했다. 적대시하기도 했다. 뭔가 너흰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간개념상 빠르다 느리다를 본다면 조직화 운동은 온건이다.

하지만, 누구나 급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조직화 운동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점진적인 조직화 운동이 급진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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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활동가의 성적강박이라...

두번째 살림을 차린 진보넷 블로그. 이곳에서 우연히 진보활동가들의 성적 강박과 미시파시즘이라는 글을 접했다. 뭔가 그럴싸한데 읽고 나면 설득력이 없기도 하고 주제 자체는 군침이 흐르길래 [공돌이 엔지니어이자 인문좌파와 인문우파 사이에 그네를 타는 친구]에게 보냈더니, 그가 잘근잘근 씹어놨다.  그 본문을 올려본다. 

 

 

그럴듯한 글에 대한 비판

이 글이 보이시나요?
전에 보니까 비공개로 해도 로그인한 팀블로그 구성원에게는 글이 공개되는 듯해서요.

마돈나님이 알려주신 글을 읽다가 왠지 불편해서 따져봤어요.
원문은 여기 -> 진보 활동가들의 성적 강박과 미시파시즘 (http://blog.jinbo.net/insidecontradiction/?pid=36)

읽다보면 제법 그럴듯합니다만, 비논리적인 부분이 심하게 밟혀서 잘근잘근 씹어보려 합니다. (혹시 원글의 저자가 찾아와 맘상할까봐 비밀글로)



통상 활동가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이념에 따라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일하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들 단체가 구성원들의 정서까지 담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해서 이들이 어떤 사안으로 인해 단체나 그 속에서의 인간관계에서 소외될 때 입는 상처 역시 일반사회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구성원의 정서까지 책임지는 조직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그나마 기대하고 활동할만한 조직이라면 종교단체를 들 수 있겠으나 강한 자아를 지녀야 할 활동가에게 단체가 정서를 담보해준다라... 뭔가 어긋난 듯 싶다. 활동가가 단체에서 입는 상처가 일반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크다고 하겠다면 자살률 통계라도 들이대야 타당하다. 그 바닥이 좁다거나 이직이 어려워서 벗어나기 힘들다 등의 이유라면 이해하겠다.


단체 내에서 사적 인간관계는 흔히 하위개념으로 치부되곤 하지만, 조직에서 개별 공간으로 이동한 각 개인들의 삶에서 이런저런 관계들의 이미지는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부정적 이미지의 무의식에 심적외상(心的外傷 psychic trauma)이 동반될 경우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혹은 동성이 동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띄게 되고, 이것이 조직으로 문제가 확대될 경우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까지 동일시되어 배타시 하게 된다.

이 글의 백미다. 그럴듯한 글 만들기의 표본이라 하겠다. 이미지, 무의식, 심적외상 등을 섞으니 결론이 뭐든 제법 그럴듯해진다.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혹은 동성이 동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띄게 되고'라는 문장을 보자. 여기서 적대시하지 않을만한 건 개나 고양이 등 인간 이외의 존재다. 혹시 모르겠다. 동성이나 이성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 생각해보니 있다.  내 생각이 짧았다. 해당 문장의 의미는 '엄마, 아빠 빼고 다 싫어.'가 되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을 떠올릴 수 있으니 어머니, 아버지는 안된다.)
뭐가 됐든 성욕과 연결시키고 싶은 글쓴이의 맘은 알겠으나 차라리 상식적으로 쓰는 편이 낫다. "관계가 틀어지면 사람이 싫어지고 사람이 싫어지면 그 사람의 사상이나 조직도 싫어진다."식으로 말이다. 폼나는 단어 나열보다 재미는 없어도 훨씬 탄탄하다.


활동가들 중에는 유난히 독신이 많은데 이들의 비혼율은 아마도 40%를 상회하는 일반인의 그것보다도 훨씬 높을 것이다. 따라서 외면적으로는 자발적인 성적 억압에 익숙한 듯 하지만 지속적으로 긴장된 이들의 성적 생활패턴 또한 신경증을 비롯한 각종 성격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해법으로 일상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오르가슴이지만 파트너가 이념을 공유하지 않는 한 성사되기 어렵다. 또 이들의 관성화된 대인기피증이나 열악한 경제적 환경은 ‘성적 접근권’을 취약하게 하며, 내면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미시파시즘이 이들의 성적 자유를 강력히 규율하는 건 심각한 문제다.

마구 끼워맞추니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섹스를 하면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다는 얘긴가? 내가 낸시랭이랑 예술하다가 함께 올레~ 하면 난 신자유주의자야? 그리고, 미시파시즘이 성욕의 억압에서 기인한다고 하면 모를까 이건 원인이고 결과고 나발이고 닭과 달걀의 관계라는 주장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내가 멍청하거나 글이 하나마나한 소리이거나.


이런 연유에서 진보진영은 때때로 자신들이 해야 할 사회적 과제를 무책임하게 방기하곤 한다. 예컨대, 지난 3월 29일 일본에서 발생한 한국인 이주성노동자 피살사건(30대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일본 가나자와시 니보초 도로변에서 몇 주일 동안이나 방치돼 있던 여행가방 안에서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은 성매매 특별법에 의한 풍선효과로 인해 해외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은 한사코 입을 닫았다. 

논리적 비약이 버블제트 물기둥 타고 승천하신다. 우선, 살해당한 여성이 성매매 특별법의 풍선효과로 일본에 갔다는 설명에 역학적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에는 풍선효과를 감당할 여유가 넘친다. 널린 게 아름답게 빛나는 안마방 간판인데 일본까지 뭐하러 가나? 세계화로 나아갈 정도면 풍선효과가 아니라 나비효과다. 게다가, 일본 정부에서 범인을 풀어준 것도 아닌데 진보진영에서 뭘 어쩌라고.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며 위령제라도 할까?



앞의 문장으로 올라간다.
때때로 진보진영 내에서 이념이 아닌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가 생기면 관련자들을 대부분 품성론으로 예단하지만 그 외 심리적인 요인들도 적지 않은데, 특히 이런 경우 대다수 진보단체에서 손을 놓게 되는 게 문제다.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과학 외에 심리치료 등에 필요한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준비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진보단체가 됐든 어디가 됐든 중요한 건 인문, 자연과학에 대한 파편적 지식보다 과학적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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