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구해줘야할 라디카는 없었다

  • 등록일
    2006/01/17 16:49
  • 수정일
    2006/01/17 16:49
피자매연대에 달거리대를 만들어주던 라디카가
출입국에 붙잡혀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가 잡히기 바로 전에 어느 잡지에 기고를 했다고 해서
카피해 올수 없을가 여기저기 봐도 없더군요.
그런데 오늘 믹스터미널에서
http://mixterminal.net/rc/rc.html
라디카의 글을 만났습니다.

라디카가 잡혀간 날, 날개 다친 소중한 새 한마리를
옥상에서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손을 놓아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손가락에 조금만 더 힘을 주고 있었더라면 떨어지지 않을 새를
내 무관심과 방관으로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그후 내내 그저 무기력해져 있었습니다.
내 책임이 아닌데도 내가 미안하고 내가 죄스러웠습니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 '라디카 구출작전'이라고 명명된,
어쩌면 '허위의식'도 약간 섞인 그런 알량한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강인하고 낙천적인 여성을 내가 감히 "구하려" 했다니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었었던 게지요.
구해줘야 할 라디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을요.
그저 옆에서 함께 걸어가야했을 친구, 동지가 있었을 뿐인것을요.

요즘은 날마다 인도와 네팔의 지도를 펼쳐보며 그녀에게 가는 길을 가늠해보고 있습니다.
이번 2월 초에 방글라데시에서 자히드를 만나고 차로 유명한 인도의 다르질링
부근을 거쳐 네팔의 국경을 넘어갈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약 이틀을 덜컹거리며 가야 카투만두에 닿을 수 있겠죠.
라디카가 벌써 그립습니다.


라디카의 글

안녕하세요. 저는 13년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네팔인 미등록이주노동자 라디카입니다. 처음 한국에 올 때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몰랐습니다. 저는 한국 땅을 밟으며 2~3년만 고생하고 돌아갈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둔 가족이 있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미래 걱정 때문에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한국에 온 것 입니다. 저희 고향 네팔은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대부분 가난과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에 가는 게 미래의 부품 꿈 중 가장 행복한 생각 이였습니다. 그 꿈을 이루는 저는 그리도 가보고 싶던 나라 한국에 도착해서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너무나 좋았고 그 감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행복해 했습니다. 저의 행복한 감정이 가시기도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는 네팔에 있을 때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장에서 어떤 일을 할까? 그 일은 어떻게 해야 잘 할까?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을 할까? 문화를 극복하고 적응하기도 전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 안에 꽉 차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사장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살아온 날을 돌이켜 보자면 지금도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제가 살았던 네팔과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환경, 문화적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음식이 적응이 안됐습니다. 처음에 공장에서 일할 때 출근시간 정확하게 있지만 퇴근시간은 없었습니다. 새벽2~3시까지 일하면서 운적도 많았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인권적인 모독을 당했지만 참고 일만 했습니다. 그 때 나이가 21살 이였습니다. 지금까지 버텨온 건 아마도 고향에 있는 가족과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일한 것이 큰 힘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몇 년이 훌쩍 지나가자 이제 한국생활에 적응되어 불편하지 않게 살 정도가 됐습니다. 처음에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 한국 사람을 보고 신기했는데 이제는 저도 밥 먹을 때 김치는 꼭 있어야 됩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네팔음식보다 한국음식을 더 많이 해먹습니다. 특히 김치찌개 삼겹살 청국장은 제가 좋아하고 잘 해먹는 음식입니다.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 알게 됐습니다. 20대 초반에 와서 10년을 훌쩍 넘어 30대가 됐습니다. 한국에 친구도 조금씩 생겼고 한국의 지방 사투리까지 알게 됐습니다. 한국 문화도 배우고 재미있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2003년 7월 말부터 고용허가제가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4년 이상자 이주노동자들은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 때부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단속추방의 위협에 시달리며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곳곳에서 단속추방의 위협에 시달리는 친구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도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 됐습니다. 공장에 지속적으로 일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일을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이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짜증이 나는 화풀이를 이주노동자들에게 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과 공장 사장이 싸우면 그 불똥은 이주노동자들에게 튑니다. 사장과 싸우고 나간 한국 노동자들이 경찰에 신고하거나 혹은 출입국에 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출입국 직원에게 끌려간 이주노동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일 할 때뿐만이 아닙니다. 기숙사에서 한국 사람을 잘 못 만나면 쉬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늦게까지 술 먹고 밤새 소리 지르고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조용히 해 달라고 하면, 신고한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실제로 출입국 사람이 기숙사에 들어와서 끌고 간 적도 있었습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람을 피해 다니고 의심해야 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제 친구들은 친구를 만나러 가다가 혹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지하철, 버스 정류장 장소를 가리지 않은 채 잡혀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한국 땅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특히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미래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최근에 시민혁명으로 잘 알려진 자유와 박애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격리, 탄압, 차별 때문에 소요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저에게는 프랑스에 사는 친구는 없지만 독일에 살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있습니다. 독일에 있는 제 친구들은 저와 똑같이 관광비자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리고 2,3년 정도 일을 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와 같이 해외에 나가 있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 보면 한국에 있는 저를 비롯한 여러 이주노동자들보다 힘든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단속의 불안감 없이 맘 편히 일하고, 언제든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그 친구들이 저는 부럽습니다. 저는 한국에 온지 13년이 다 되어 가고 아들과 어머니 얼굴을 그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단속과 강제추방으로 인한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매우 많은 곤란함을 겪고 있습니다. 그 억압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리자’라는 생각들도 가끔씩 합니다. 실제로 자살을 하는 이주노동자 소식도 들려옵니다. 프랑스 사태를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물론 그런 심각한 사태까지 이르지 않겠지만 한국정부나 한국 사람들도 이주민을 위한 여러 준비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이주민들은 이주에 관한 한국정부의 정책과 법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미등록이주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들이 많이 있어도 사랑하는 한국 친구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힘들 때 힘을 주고 많이 도와주고 언니처럼 누나처럼 친구처럼 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현재 한국에는 여러 나라에서 여러 민족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40만이나 살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해서 한국 사람이 일거리가 없다는 말을 간혹 듣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이 기피하는 일들을 이주노동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 어렵고 힘든 일들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자로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

실제로 올해 가을 마석에서는 잡혀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탄 경찰차를 한국인 사장과 공장사람들이 막아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제가 일을 찾으러 나가 보면 공장 사장님들은 ‘당신이 일하는 건 우리도 좋지만 단속 들어와서 당신이 잡히면 우리는 괜찮지만 당신이 힘들다. 우리도 맘이 너무 안 좋고...’ 그런 이유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사장님들도 힘들다고 이야기 합니다.

한국정부가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단속하고 강제 출국시키는 것이 현 미등록이주노동자문제의 해결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단속하고 강제추방을 시키고 나면 다시 새로운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됩니다. 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6개월, 1년 있으면 이탈해서 다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됩니다. 이 불법의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단속과 강제추방이 해결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재 있는 노동자에게 일할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하기를 한국정부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 저는 건강이 매우 안 좋고, 단속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친구들과 몇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작은 대안무역과 함께 제가 만들고 있는 악세사리와 비즈공예를 파는 것입니다. 작은 대안무역은 강제추방 당한 친구들의 어려운 생활을 위해 그들이 본국에서 만든 물건들을 작은 형식의 무역을 통해 파는 활동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만드는 것을 누가 살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기쁨을 느낍니다. 물론 저에게 많은 돈이 되는 활동은 아니지만 한국친구들과 함께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피자매 연대와 함께 달거리대(대안생리대)를 만드는 일입니다. 처음에 제가 계속 일을 못해서 생활이 어려운 것을 듣고 피자매 연대에서 하나씩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시작했습니다. 저도 대안생리대에 대해 알게 되고 여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면서 서로의 활동을 연대하는 지점에 대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이 저와 한국인 친구들과 맺고 있는 연대입니다. 올해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이 작은 연대와 소통들이 저에게는 한국과 관계하는 또 다른 대안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점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 이 글은 라디카가 11월 말지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글을 쓰고 며칠 후 그녀는 단속에 걸려 네팔로 돌아갔다.



Text by: 라디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