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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은 근대건축이다

  • 등록일
    2005/03/12 13:10
  • 수정일
    2005/03/12 13:10
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경제 성장이 안되는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구구절절 주옥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더군요. 그 중에서 "자연이 남아있다면 더 발 전할 수 있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슬럼은 근대건축"이다라는 소제목의 글을 뽑아봤습니다. 제가 손수 타이핑( - -;) 한 것인만큼 감동 두배 받아가시길...

슬럼은 근대건축이다

이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금 세계를 크게 신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탈신화화하려면, 혹은 신비화되어 있는 것을 보통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몇가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세계경제 시스템이라든가 세계화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세계경제는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고 진지하게 믿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세계화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계속 진행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 자본주의 산업경제 시스템은 지구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인간은 이 지구 위에 이미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테지요.

이것이 경제발전의 알맹이입니다. 우리들이 경제발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그것은 지구 위의 모든 인간과 모든 자연을 산업경제 시스템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미 수백년간 계속되어 왔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즉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세계적으로 등장한 단계로부터 헤아려 보아도 반세기 동안이나 그 일을 계속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은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옳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잘 돼가고 있는 곳은 발전돼 있다,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은 '발전도상국' 혹은 '아직 발전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으로 나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발전한 나라'나 '발전도상국'을 모두 발전이라는 과정이 만든 세계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만, 예를 들어 우리들은 건축을 생각할 때 고층빌딩이라든가 비행장이라든가 철근과 콘크리트라든가 유리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건물을 보고, 그것을 '발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근대건축의 이미지입니다. 또는 포스트모던 건축 쪽이 더욱 멋진 모양을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슬럼 사진을 본다거나 실제로 보러 가면 "이것은 아직 발전이 돼 있지 않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실제로 '남'('제3세계)의 국가의 슬럼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신축입니다. 슬럼에서는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곳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매우 근대적인, '발전된' 건축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블록이든가 플라스틱이라든가 베니어판 등, 주로 주워온 것이 많을지는 몰라도 첨단기술로 만든 건축재료가 많습니다. 슬럼이란 근대건축입니다. 슬럼은 현대건축으로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지금 포스트모던 슬럼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슬럼이란 경제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난 건축 스타일입니다.

슨대건축을 보려고 한다면, 거의 모든 '남'의 국가의 경우, 고층빌딩과 슬럼을 함께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냐 하면 그 대다수는 고층빌딩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청소부라든가 창문닦이라든가 부자의 하인이라든가, 모두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습니다.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는 유명한 '스모키 마운틴'이 사라졌다고 최근 들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하여 일본 텔레비전에도 나왔는데, 아마도 필리핀 정부가 그 나쁜 평판을 걱정하여 없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도 수많은 '남'의 국가들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모키 마운틴'은 마닐라의 모든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도쿄의 유메노시마 같은 곳인데, 최근까지 수천명이 거기서 살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속에서 나오는 가스에 절로 불이 붙어 늘 연기가 나오며 불이 타고 있기 떄문에 스모키 마운틴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건기에는 불길이 나오고 우기에는 따뜻합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수천명의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사는가 하면 주로 플라스틱을 모으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을 모아 무엇을 하느냐 하면 공장에서 매일 트럭이 와서 그것을 사가는 회사가 있습니다. 아이에서 노인까지 가족 모두가 플라스틱을 모으면 어떻게든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돈이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여 다른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수십년 전에는 없었던 첨단기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우 근대적으로 '발전돼서'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분명히 그들은 가난하지만 발전이 안돼 있기 떄문에 가난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제3세계 또는 '남'의 국가는 '발전되어'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발전되어' 그렇게 됐습니다. 발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가난하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이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완벽하게 물려있다, 그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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