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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서 펌]힐러리에게 암소를

  • 등록일
    2005/03/12 13:16
  • 수정일
    2005/03/12 13:16
약골이 퍼 놓은 글을 보려고 녹색평론에 들어갔다가 이 글을 읽게 됬습니다. 집에 가다가 꼭 이 책을 사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 미즈라고 하면 반다나 시바와 함께 <에코페미니즘> 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지요. 여성과 어린아이, 자연을 다소 물신화시켜 바라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감동적인 글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힐러리에게 암소를 - 세계화 경제를 넘어 '자급'의 삶으로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센

     이 글은 최근 국내에《에코페미니즘》의 공저자 중의 한사람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독일의 생태여성주의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마리아 미즈(Maria Mies)가 그 동료 베로니카 벤홀트-톰센(Veronika Bennholdt-Thomsen)과 함께 집필한 새로운 책 Eine Kuh für Hillary:Die Subsistenzperspektive(1997)의 영어판 The Subsistence Perspective:Beyond the Globalized Economy(1999)의 서문을 옮긴 것이다. "Subsistence Perspective"는 성장 . 개발 . 세계화 경제의 이데올로기의 지배 밑에서 지금 벼랑끝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에 필요한 진정하게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근년에 유럽, 특히 독일의 생태운동가들 사이에 관건적인 화두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이 새로운 개념이 근본적으로 제3세계 풀뿌리 민중의 삶의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열쇠말인 subsistence는 기초적인 생존수준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잠정적으로 '자급의 삶'으로 번역하였다.

  1995년 4월 북경에서 '유엔 세계 여성회의'가 열리기 몇달 전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였다. 그녀의 방문목적은 방글라데시 시골마을들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어온 '그라민은행'(Grameen Bank=풀뿌리 민중의 자립적 삶을 지원하기 위해 가난한 시골마을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소액의 사업자금을 무담보로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 . 운영중에 있는 은행 ― 역주)의 사업이 정말 소문대로 잘되고 있는지를 몸소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라민은행의 소액대출은 방글라데시에서 농촌여성들의 상황을 놀랄 만큼 향상시켜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클린턴 부인은 정말 이 여성들의 힘이 소액대출 때문에 커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라민은행이나 개발지원 기관들에게는 '여성의 힘이 커진다'는 것은 한 여성이 자기자신의 소득을 가지고, 얼마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마이샤하티 마을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그곳 여성들의 상황에 대하여 몇몇 여성들과 회견을 가졌다. 여성들은 대답하였다. "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수입이 있어요." 그들은 얼마간의 '자산'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암소, 닭, 오리 등이라고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이러한 대답을 듣고 클린턴 부인은 만족스러웠다. 마이샤하티 마을에서 여성들의 힘은 분명 커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하는 사람이 방글라데시 여성이 되고, 힐러리 자신이 대답을 해야 될 차례가 되었을 때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질문과 대답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어요?"
  "아뇨, 나는 암소가 없는데요."
  "아파, 당신은 자기 소득이 있어요?"
  "실은, 전에는 내가 직접 벌었는데요, 그런데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돈버는 일을 그만두었답니다."
  "아이들은 몇 있나요?"
  "딸 하나예요."
  "아이들을 더 갖고 싶진 않나요?"
  "네, 하나나 둘쯤 더 갖고 싶긴 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딸 첼시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마이샤하티 마을 부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참 안됐네! 힐러리 부인은 암소도 없고, 자기 소득도 없고, 아이도 딸아이 하나뿐이라는군." 방글라데시 농촌여성들의 눈에 힐러리 클린턴은 결코 힘이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암소 한마리와 닭 몇마리와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힘이 있다고 느끼는 방글라데시의 농촌여성들과 힐러리 클린턴 사이의 인터뷰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여성들이 어째서 힐러리에게 동정심을 느끼는가? 힐러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방글라데시의 농촌여성들은 단지 순진하거나 무지한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여성들은 클린턴 부인이 '부유한'나라에서 왔고,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위의 에피소드는 힐러리 클린턴과 방글라데시 마을 부인들이 갖고 있는 관점의 차이를 요약적으로 드러낸다. 이 여성들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각은 '밑으로부터의' 관점, 즉 자급의 관점이다. 이런 시각에서 세상을 볼 때, 모든 사물과 관계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특히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다. 그것은 좋은 삶이 가능하려면 돈이 많아야 되고, 물건이 많아야 되고, 사치품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좋은 생활은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와 세계도처의 부유계층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클린턴 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북반구의 부유한 여성들의 관점과 전혀 다른 것이다.
  아마도 방글라데시 시골에서의 그 회견은 클린턴 부인에게는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십중팔구 시골마을 부인들이 공손한 태도로 얼마간의 사업자금을 요청하고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남자의 아내인 자신을 우러러보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시골마을 여자들은 힐러리의 '위로부터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터뷰 동안, 그들은 부와 가난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수입상품으로 가득찬 슈퍼마켓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빈곤과 부와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드러내주었다.
  아마도 클린턴 부인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인가 결핍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자기 나라의 엄청난 부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 아직 갖고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자부심, 위엄,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능력 ―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우리는 그것이 '자급의 관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급의 관점은, 스스로의 생명(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며,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의 모태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자급의 관점이다. 우리도 힐러리 클린턴처럼 부유한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의 모델을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이런 형태의 '좋은 삶'의 욕구가 초래하는 파괴 ― 자연의 파괴, 외국인의 파괴, 민중의 자립과 존엄성의 파괴, 아이들의 미래의 파괴,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것의 파괴 ― 때문이다. 우리는 항구적인 상품, 서비스, 돈의 성장을 노리는 '위로부터의' 관점으로는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궁지에서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배적인 패러다임과의 근원적인 단절과 새로운 관점, 새로운 비젼의 모색이 불가피하다.

  우리가 자급의 관점의 윤곽을 그려나가려는 노력에 있어서, 방글라데시 농촌여성들은 우리의 스승이 된다. 그들이 힐러리 클린턴과 나눈 대화는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세계도처의 모든 사람들의 '좋은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생존을 확보하는 일이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부인들에게서 5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밑으로부터의 관점이다. 우리가 현실을 볼 때,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얻으려 할 때, 우리는 여성의 관점 특히 남반구의 농촌여성과 가난한 도시여성들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일상생활과 그 정치, 삶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들의 전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관점은, 사회 '꼭대기층'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삶의 이미지라고 하는 믿음이 얼마나 그릇된 망상인가를 알려준다. 이러한 망상에서 벗어나옴으로써 우리는 이런 식의 이른바 좋은 삶이라는 것은 오직 소수에게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서, 그것도 타자 ― 자연, 타인, 여성, 아이들의 희생 위에 가능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둘째,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자급의 관점은 돈, 교육, 지위, 특권이 아니라 기초적 생존수단, 즉 한마리의 암소, 몇마리의 닭, 아이들, 땅, 그리고 얼마간의 독립적인 현금수입을 확보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공동체 역량이다.
  셋째, 바로 이러한 독립적인 생존능력을 스스로 갖고 있다는 데 대한 깨달음이 마이샤하티 마을의 여성들에게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를 단지 그들의 '나이든 자매'로서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자부심과 위엄과 용기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은 남의 도움으로 빌어먹는, 비굴한 거지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발로 서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배운 네번째의 교훈은 이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엿보이는 정신자세는《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의 끝에서 프레데릭 엥겔스가 언명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그 지배계급이 속한 사회전체에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질문은 그 반대를 가리킨다. 즉,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들에게 좋은 것은 전체사회에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것은, 사회주의적이고, 성차별이 없고, 비식민주의적이고, 생태적이며, 정의롭고 좋은 사회는 지배계급의 생활양식 ― 예컨대, 모든 사람이 빌라와 캐딜락을 소유한 ― 을 모델로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급에 토대를 둔 기초적 생존양식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엥겔스의 유토피아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역사적 기획이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결국 붕괴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섯째, 우리는 세계를 '제1'과 '제3' 부분으로 나누는 정신분열 증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 여성들도 이러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들과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구분과, 이 구분에 따르는 갖가지 차별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힐러리 클린턴은 무엇보다도 '나이 든 자매'이자 한사람의 여성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그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본적 삶의 필요와 욕구 ― 즉, 자급적 삶의 수단('암소')과 얼마간의 독립적 소득(남편으로부터 독립된)과 아이들 ― 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급의 입장이 그들 자신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마을여성들과 같은 의견이다. '자급의 관점'은 이른바 개발도상국들과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들과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꼭같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새로운' 관점일 수밖에 없다. 이원적으로, 위계적으로 나뉘어진 두개의 경제는 더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물론 이른바 '경제'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도전한다. 만약 '경제'가 산업의 끊임없는 팽창, 상품의 생산 및 소비, 자본축적의 계속적인 확대를 목표로 한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경제'는 자급의 관점과 양립할 수 없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이 시스템은 경제를 조직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모델로서 장려되어왔다. 우리는 흔히, "대안이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부재'의 신드롬에 감염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이 책에서 새로운 '경제'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이것은 여성과 타인들과 자연에 대한 계속적인 식민화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경제시스템보다도 더 오래되고 동시에 더 젊은 경제개념이다. 이 새로운 경제는 생명과 이 지상에서의 삶의 산출과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경제 및 사회활동의 중심에 두지, 돈이라는 죽은 물질의 끝없는 축적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자급'이라는 개념은 보통 가난과 후진성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자급이 의미하는 것은 생존의 가장자리에서의 고된 노동과 삶뿐만 아니라 삶속의 기쁨과 행복과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 이런 식으로 '자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스스로의 것 ― 일, 문화, 자기자신의 능력 ― 을 과소평가하는 습관을 멈추고, 또 좋은 삶이란 '꼭대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물론, 자기자신의 것에 대한 이러한 과소평가의 습관은 강요된 식민화와 천격화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성들을 포함하여, 모든 식민화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되어왔다. 스스로 자신의 것을 낮게 보는 이러한 습관은 나아가서, 우리가 '따라잡기 개발'과 '따라잡기 소비주의'라고 부르는 또하나의 환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환상은 사회적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식민화된 사람들도 때가 되면 꼭대기의 사람들 수준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뒷받침되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점점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따라잡기' 경제모델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계화되고, 계속 팽창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경제의 밑바닥으로부터 보는 관점은, 어떤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절망감을 낳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으로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러한 삶을 위해 필요한 진정한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를 성찰하도록 도와준다. 방글라데시와 기타 다른 남반구 국가들의 농촌여성들은 백악관이나 그밖의 다른 부유한 세계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한 여성들이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등에서 억압자들이 떨어져나가는 일이다. 자기 사회내부의 가부장적 남성들, 다국적기업들,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이러한 국제자본의 후견인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자국내 관료들이 바로 그러한 억압자들이다.
  우리의 자립적인 삶에 필요한 진정한 힘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내부와 둘레에 있는 자연과의 협력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 힘은 돈이라는 죽은 물질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상호의존 속에 있지, 경쟁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주적인 행동에 있지, 수동적인 소비생활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너그러움과 함께 일하는 것의 기쁨 속에 있는 것이지, 개인주의적 이해관계와 시기심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이 힘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가 우리의 친척이라는 우리 자신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독자들과 우리 자신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지배적 경제시스템이 결코 어떤 불변의 자연법칙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수세기 전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대안부재'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더러 믿으라고 하는 것처럼 대안이 결코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급의 관점이야말로 대안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오늘날 이른바 경제의 세계화라는 것은 전적으로 새롭고 특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필수요건을 구성해왔던 식민화와 '원시적 축적'의 불가피한 연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이 계속되어온 식민화와 그 파장은 북반구의 산업국가들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은 북반구에 있어서의 점증하는 빈부격차뿐만 아니라, 지금 산업화된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금융 . 경제위기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갑자기, 북반구 산업국가들에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방글라데시의 농촌여성들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아직 커다란 양적인 간극이 있지만, 그러나 구조적으로 볼 때 북반구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은 남반구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과 더이상 다르지 않다. 이러한 갑작스런 깨달음 앞에서, 대부분의 북반구 사람들은 사실을 부정하려 들거나 아니면 공포를 느끼고 있다. 경제전문가들과 정치가들은 늘 그들에게 자본주의 이외에 대안이 없다고 말해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북반구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따라잡기 개발을 통해서, 남반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지속가능한' 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따라잡기 개발이란 것이 하나의 신화일 뿐이며, 한쪽의 부와 진보, 다른쪽의 빈곤과 퇴보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고, 둘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사람들은 지배적인 경제시스템의 안정성이라는 게 결국 대부분 허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갈수록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는 현실에 수반하여, 필연적으로 북반구에서조차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점점더 빈곤해지고, 일자리를 잃게 되어간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시아와 러시아의 금융 . 경제위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돈과 자본이 안전한 삶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못된다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토대는, 최근의 타일랜드에서처럼, 하루아침에 붕괴할 수 있고, 은행가라 할지라도 일시에 거지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금전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이 세계의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앞에 블랙홀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경제의 붕괴는 세상의 종말, 물질적 안전의 끝을 의미한다. 방글라데시의 여성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암소 한마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방글라데시 마을여성들 ―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을 대변하는 ― 의 시각으로 세계를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종말론적 절망의 기분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그런 절망감은 북반구의 소수 응석받이들의 사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절망감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특히 그들이 누려온 특권이 약탈에 기초해 있으며, 모두에게 좋은 삶이란 ― 즉, 자급적인 삶 ― 그러한 특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자급의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또한 외부나 위로부터의 힘으로부터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가진 힘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개인으로서 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급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 생태적, 경제적, 여성주의적, 반(反)식민주의적 관점에서 ― 또한 이 새로운 관점이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도처에서 시작되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나아가서 이 새로운 관점이 언젠가는 '모든' 기본적 사회관계 ― 남녀간, 세대간, 도농간, 여러 계급들 및 사람들 사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 ― 를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모든 경제 및 사회적 활동의 중심적 관심사가 죽어있는 돈을 쌓는 일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삶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면,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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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국가의 가장 완벽한 상태

  • 등록일
    2005/03/12 13:15
  • 수정일
    2005/03/12 13:15
19세기에 T.G Green은 전쟁이란 ‘불완전한’ 국가를 표현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이란 국가가 가장 완벽한 상태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전쟁은 국가의 건강함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중에 Randolph Bourne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가는 어떤 무리가 그와 비슷하게 조직된 다른 무리들에 공격적 혹은 방어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직체이다. 전쟁은 목적과 활동의 물줄기를 무리의 가장 낮은 수준, 가장 외떨어진  가지들로 흘려보낸다. 사회의 모든 활동은 중앙 정부의 군사 작전과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야말로 전쟁을 통해 국가가 평화시 그토록 열망하던 이상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태와 불경기는 사라지고 저항세력은 퇴장한다. 국가는 천천히 육중하게 그러나 가속화되고 통합된 힘으로 움직인다. 위대한 목적, 전시(戰時)의 평화로움을 향해...

출처: , Colin 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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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슐라 르귄의 <빼앗긴 자들>

  • 등록일
    2005/03/12 13:15
  • 수정일
    2005/03/12 13:15
어제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어슐라 르귄의 <빼앗긴 자들>이
번역되어 나온 걸 보았습니다.
원제는 . 장르를 따지자면  SF 소설.  
내용자체가 상당히 아나키적 아이디어를 많이 담고 있어서
영미권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읽는 것으로 알고 있구요..
작가가 아나키스트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거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오히려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라고도 하더라구요.

어쨌든 소설의 대강의 세팅을 살펴보면, 두개의 행성이 있는데,
하나는 고도로 문명화되고 기술과 자본, 사유 재산제가 지배하는
테크노크라시라고 할까요. 국가간에는 언제나 분쟁이 빈번하고
가진자들의 부유한 동네의 후미진 그늘에는 못가진 자들의 게토가 존재합니다. 마치 현대의 지구와 같죠.
이 행성의 옆에는 한편 100년전에 봉기했던 아나키스트들이
그 지구와 같은 행성으로부터 망명해 아나키적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불모의 행성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 과학자가 이 두 행성을 오가며 겪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가상의 두 공간을 설정하고 아나키즘을 실험하고 있는 인상을 짙게 풍깁니다.
문체는 SF이니 만큼 좀 건조하긴 하지만 유치하지는 않습니다.
결말이 다소 "계몽적"인게 흠이라면 흠일까...
딱딱하고 고루한 사상서나 기사투 문체에 싫증이난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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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녹색평론에서 펌)

  • 등록일
    2005/03/12 13:11
  • 수정일
    2005/03/12 13:11
녹색평론에서 펴내는 책 중에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간디의 물레와 바로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

머리말
  21세기의 상식을 위해서

  1775년에 토마스 페인이 그후 그가 쓴 것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게 된 책을 집필하였을 때, 국왕제를 부정하고 미국 독립을 옹호하는 그 책의 중심적 주장은 소수파의 견해였다. 책의 내용은 당시의 상식에 거꾸로 된 것이었지만, 그는 감히 그 제목을《커먼센스(Common Sense)》라고 불렀다.

  실제, 페인은 그 시대를 정확하게 읽었다. 책 출판 당시, 미국의 상식은 대전환의 한가운데 있었다.《커먼센스》는 수십만부나 팔리고, 미국 독립혁명의 사상선언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상식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변화하는 것도 있다.
  지금 우리는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식의 대전환, 즉 대다수 사람들이 '비상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사고방식이 주류의 상식이 되는, 새로운 상식을 위한 대변혁 직전의 단계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변혁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처음에 이 책에《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라는 제목을 붙여볼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본어로 '커먼센스'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말이 아니고, 일본어의 '상식'도 영어의 '커먼센스'의 의미와는 꽤 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출판사측과 상당히 오래 의논한 결과 현재의 제목으로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제목이?

  이 책은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 안전보장, 일본국 헌법, 환경위기, 민주주의 등, 여러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장은 각각의 문제에 대한 '상식'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정말은 현실에서 유리된 것이며, 21세기에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가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을 상식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제목은 협소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는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사고방식(이것은 경제학의 객관적인 결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이지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거야말로 우리의 눈을 진정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현실에서 유리된 현실주의'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소득배증론(所得倍增論)은 정부가 1960년에 제안했지만, 그것은 또하나의 깊이있는 풍요로움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의 대체물로서, 즉 그 운동을 깨기 위한 무기로서 제안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60년대 안보투쟁이 목표로 한 풍요로움은 경제적 풍요만이 아니라, 평화, 민주주의(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까지 포함하여), 사회적 평등, 정의 등이 포함된 것이었다. 소득배증론, 즉 사회의 풍요로움은 GNP에 의해서 측량된다, 라고 하는 빈약한 풍요를 구하는 논리는 당시의 민중투쟁에 대한 정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소득배증론은 이데올로기로서 괄목할 성공을 거두어 주류의 상식이 되었다. 보다 깊이있는 풍요로움을 겨냥하는 사상은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버렸다.

  "그것은 좋은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라든가, "싫어도 직업이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다" 등등, 우리가 흔히 듣는 이와 같은 상투적인 말들은 "소득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현실성이 있다"라는, 경제발전론의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발상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이 제목을 선택하였다. 경제발전론 = 소득배증론이 사회의 상식이 되어있는 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밖의 다른 테마에 관해서 깊이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면, 경제발전론은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해(思考障害)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에 대해, 이 책의 각 테마를 자유롭게, 또 냉정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를 머릿속에 비워놓자는 게 이 제목의 목적이다.

  이 책은 어떠한 독자를 상정하고 있는가?

  우선, '연구자'나 '학자'는 아니다. 이 책에는 연구논문 테마가 될 수 있는 문제가 더러 나오지만, 이 책 자체는 연구논문이 아니다.

  또,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이 책은 전쟁, 평화, 노동착취 등, 좌익의 전통적인 테마에 언급하고 있지만, 특히 좌익사상을 제공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

  물론 학자도, 좌익도, 우익도 읽어준다면 나로서는 기쁜 일이겠지만.

  대체, 어떠한 불가사의한 역사적 경위에 의해,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좌익'이라고 간주되기에 이르렀는가. 이 20세기의 가공할 전쟁을 경험한 이상, 사상과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 누구라도 전쟁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유감스럽게도 '죽음의 상인' '군국주의 정치가' 등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국의 정책에 반대하여 반전이나 군축을 희구하는 참된 목적은 자본주의 국가 쪽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만들고, 소련 쪽의 승리를 실현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냉전이 끝난 지금, '반전'이라는 당연한 감성은 오로지 좌익이나 무슨무슨 사상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러한 것이 다만 보통의 상식이 되어도 좋은 시대가 된 것은 아닌가.

  이 책에서 취급하고 있는 다른 테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어줄 독자로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상상한다.

과로에 지쳐 있는, 혹은 노동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샐러리맨이나 사무직 여성을 포함하여) 노동자.
자신의 밭이 공장화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농민.
'경제'(구체적으로, 앞으로의 취직)라는 요소가 자신의 교육의 자유에 장애물이 되어있다고 느끼고 있는 학생.
광고산업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는 소비자(특히 주부).
전쟁체험을 기억하고, 지금의 일본정부가 재군비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데 대해 충격을 받고 있는 노인.
전쟁을 체험한 바는 없지만, 앞으로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남북문제는 '남'의 문제라기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북'의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사람.
세계의 자연계가 사멸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는 사람.
왠지 모르게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생각해보면, 이 리스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이외에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의식을 갖게 될 때, 그 의식이 '상식'으로 변할 수 있을까.

   C. 더글러스 러미스 (C. Douglas Lummis)

  193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 졸업. 정치사상 전공. 1960년에 미해병대에 입대하여 오키나와에서 근무. 1961년에 제대 후, 버클리로 되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70년대 초 일본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함. 1980년에 도쿄에 있는 쓰다(津田塾) 대학 교수가 되어 2000년 3월 정년퇴임. 현재는 오키나와에 거주하면서 집필과 강연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래디칼 데모크라시》(코넬대학 출판부, 1996년, 영문판),《래디칼한 일본국 헌법》,《헌법과 전쟁》,《이데올로기로서의 영어회화》(東京:晶文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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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은 근대건축이다

  • 등록일
    2005/03/12 13:10
  • 수정일
    2005/03/12 13:10
더글라스 러미스의 책 <경제 성장이 안되는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구구절절 주옥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더군요. 그 중에서 "자연이 남아있다면 더 발 전할 수 있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슬럼은 근대건축"이다라는 소제목의 글을 뽑아봤습니다. 제가 손수 타이핑( - -;) 한 것인만큼 감동 두배 받아가시길...

슬럼은 근대건축이다

이 발전 이데올로기가 지금 세계를 크게 신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탈신화화하려면, 혹은 신비화되어 있는 것을 보통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몇가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세계경제 시스템이라든가 세계화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세계경제는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고 진지하게 믿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세계화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계속 진행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이 자본주의 산업경제 시스템은 지구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인간은 이 지구 위에 이미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테지요.

이것이 경제발전의 알맹이입니다. 우리들이 경제발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그것은 지구 위의 모든 인간과 모든 자연을 산업경제 시스템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미 수백년간 계속되어 왔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 즉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세계적으로 등장한 단계로부터 헤아려 보아도 반세기 동안이나 그 일을 계속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은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옳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잘 돼가고 있는 곳은 발전돼 있다,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받고 있는 곳은 '발전도상국' 혹은 '아직 발전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으로 나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발전한 나라'나 '발전도상국'을 모두 발전이라는 과정이 만든 세계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만, 예를 들어 우리들은 건축을 생각할 때 고층빌딩이라든가 비행장이라든가 철근과 콘크리트라든가 유리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건물을 보고, 그것을 '발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근대건축의 이미지입니다. 또는 포스트모던 건축 쪽이 더욱 멋진 모양을 갖추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슬럼 사진을 본다거나 실제로 보러 가면 "이것은 아직 발전이 돼 있지 않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실제로 '남'('제3세계)의 국가의 슬럼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신축입니다. 슬럼에서는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는 곳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매우 근대적인, '발전된' 건축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블록이든가 플라스틱이라든가 베니어판 등, 주로 주워온 것이 많을지는 몰라도 첨단기술로 만든 건축재료가 많습니다. 슬럼이란 근대건축입니다. 슬럼은 현대건축으로 옛날에는 없었습니다. 지금 포스트모던 슬럼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슬럼이란 경제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난 건축 스타일입니다.

슨대건축을 보려고 한다면, 거의 모든 '남'의 국가의 경우, 고층빌딩과 슬럼을 함께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냐 하면 그 대다수는 고층빌딩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청소부라든가 창문닦이라든가 부자의 하인이라든가, 모두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습니다.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필리핀의 마닐라에 있는 유명한 '스모키 마운틴'이 사라졌다고 최근 들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하여 일본 텔레비전에도 나왔는데, 아마도 필리핀 정부가 그 나쁜 평판을 걱정하여 없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도 수많은 '남'의 국가들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모키 마운틴'은 마닐라의 모든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도쿄의 유메노시마 같은 곳인데, 최근까지 수천명이 거기서 살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속에서 나오는 가스에 절로 불이 붙어 늘 연기가 나오며 불이 타고 있기 떄문에 스모키 마운틴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건기에는 불길이 나오고 우기에는 따뜻합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수천명의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사는가 하면 주로 플라스틱을 모으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을 모아 무엇을 하느냐 하면 공장에서 매일 트럭이 와서 그것을 사가는 회사가 있습니다. 아이에서 노인까지 가족 모두가 플라스틱을 모으면 어떻게든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돈이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여 다른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수십년 전에는 없었던 첨단기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우 근대적으로 '발전돼서'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분명히 그들은 가난하지만 발전이 안돼 있기 떄문에 가난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제3세계 또는 '남'의 국가는 '발전되어'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발전되어' 그렇게 됐습니다. 발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가난하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이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세계경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완벽하게 물려있다, 그런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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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비폭력(2)

  • 등록일
    2005/03/12 13:09
  • 수정일
    2005/03/12 13:09
어제 준비 모임은 약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대강의 논의 주제는
-폭력에 대한 정의를 둘러싼 여러 가지 논의 -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비폭력인가? 개인폭력과 사회폭력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의미있게 받아들이고 맞써 싸워야할 폭력은 무엇인가?
-방법론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즐기면서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폭력혁명에 대해서
-맑스주의나 여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어떻게 다른가?

그중 폭력 혁명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나키의 상황이란게 도대체 뭘까?  예를 들어 폭력 혁명이 일어나면
일순간에 소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던 권위와 권력의 체계가 모두 무너져 내린다.
그 때 아나키가 도래하는데,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 아나키의 상황을
다시 권력의 체제로 전환하려는 무리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는 마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이 다시 권력을 독점하고
또 다시 저항에 무너지고...하는 비극의 순환처럼 보인다.
이것은,  진정한 아나키란 다른 권력이 빨려들어오게 하는 진공의 상황이 결코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폭력혁명 하에서 잠시 반짝하는 아나키는 반드시 이러한 진공의 형태로 나타나
곧 또 다른 권력에 필연적으로 자리를 내어줄 수 밖에 없다.
혁명의 이러한 부정적인 면까지도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개개인, 잡민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도 내가 생각하는 비폭력 릴레이에 동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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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반대운동의 시대적 맥락이랄까 뭐랄까...

  • 등록일
    2005/03/12 13:04
  • 수정일
    2005/03/12 13:04
몇 주 전에 일본에서 교과서 재판 통신이라는 이상한 소식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인 즉슨, 일본의 우익세력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역사 왜곡 교과서를 반대하는 일본 운동가들의 소식지였던 것이었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한 일년 전 쯤에 할아버지가 내 주소와 싸인을 받아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는 대충의 내용만을 듣고 나쁜 일은 아나구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싸인했었다. 근데 요즘 일본 유사법제 제정 등등,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3년전 쯤인가 붕어군이 일본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군대반대 운동을 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 때야,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군대를 죽도록 가기 싫어했던 붕어군이 어떻게 하면 군대도 안가고 영창도 안가게 할 것인가에 관한 것에 집중되었다. 한편으로는 가메다씨를 비롯한 일본 친구들이 왜 이렇게 붕어의 군대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몸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려고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붕붕군이 그 특유의 이쁜 짓으로 일본에 가서 친구들의 사랑을 듬뿍듬뿍 얻어왔구나....라고만 생각하는 것에 머물렀다.(사실, 일본친구들의 붕붕에 대한 사랑은 눈물겨울 지경이다)

한편 나는 한국의 군대반대 운동을 하는데 일본 친구들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얻는다는 생각이 조금 꺼림찍 했다. "아니 일본놈들이 왜 한국 군대를 없애라고 지랄이지? "하는 한국인들의 즉자적인 반일감정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침 그 당시는 독도 문제로 한참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하여간 그후 이러저러한 뻘짓들을 벌여왔긴 했지만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 못한채 군대반대문제는 취직이니 연애니 하는 개인적 문제들로 잠시 내 머리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 동안 오태양, 나동혁 등등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들이 언론에 부각되면서 그 때에는 무서워서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군대반대가 이제는 당당히 공론화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게 단 삼년 동안에 벌어진 일들이다. (감동 ㅜㅜ)

요즘 한창 일본의 유사법제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때 일본 친구들이 군대반대 운동을 지원한 맥락은  바로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 군국화에 대한 저항이이었다.  일본은 패망이후 제정된 이른바 평화헌법(헌법 제 9조)에 따라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자위대는 명목상 군대가 아니고, 어떤 군사 재판도 금지되어 있다. 자위대가 만약 분쟁지역에 파병된다 해도, 그것은 적십자나 다른 민간단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 선다. 이러한 평화헌법을 사실상 사(死)법화 시킨 것이 바로 이번에 통과된 유사법제이다. 이제 일본은 전 국토와 사람들을 전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우리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국가"가 되자! 하는 것이 극우파들의 주장이다.) 조만간 일본도 징집제가 생길지 모른다. 왠만한 "보통국가"에는 다 있는게 징집제니깐...

그래서 이래저래 내게 있었던 일들을 종합해본 결과, 일본에서 날아든 교과서 재판 통신이나, 일본친구들이 붕어를 돕기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나 모두 이런 큰 맥락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군국화는 미국의 군국화와 맞물려있다. 미국은 일본 땅과 사람들을 동아시아의 패권을 위해 전시 동원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거다. 많은 논자들이 미국의 궁극적 대상은 중국이라고 얘기하고 북한은 미국이 미사일 방어체제 등의 군비 증강을 위한 핑게에 불과하다고 얘기한다. 백번 맞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결코 미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으며 북한발 핵위협을 끊임없이 조작해내는 기술이야 말로 최고의 군사 테크닉일것이다.

한편 북한에 대고 반핵을 부르짖는 보수세력들은 한반도에 있는 미국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의 하수인이며 그 하수인의 역할로 떨어지는 콩고물을 줒어먹는 자들에 불과하다.

"1991년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철수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남측 내 미군 기지에 약 1천7백20여 개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한반도 1백 평방킬로미터(경기도 수원시에 해당하는 넓이)당 한 개씩 혹은 동해에서 서해까지 2백 미터당 하나씩 핵무기가 배치된 셈이다. 이는 핵무기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네 배가 넘는 밀도로 세계 최고라고 한다. 파괴력 면에서도 1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낼 수 있는 히로시마급 핵폭탄의 1천7백 배에 해당하며 1억7천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위력인 것이다.” (한국민권연구소 김서원 상임연구위원이 『정세동향』 47호 ‘미국의 대북 핵공격 협박의 역사’에 발표한 내용이다. - 디지털 말에서 퍼옴.)

정말 끔찍하다. 한반도 국토의 이백미터 당 하나씩의 핵무기를 심어두었었다니... 이렇게 미국 핵에 의해 생존에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핵 반대만을 주장하는 보수론자들의 반핵은 똥꾸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개소리다.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죽고 다치는 건 고스란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몫인데, 그들은 미국의 군국주의를 두둔하며 눈가리고 아웅하고 있다.

군대가 없으면 우리나라를 누가지키냐구? 여지껏 한국을 "지킨건" "국군"이 아니라 "미군"이다. 한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커다란 전략의 일부분에 지냐지 않는다. 총알받이 정도나 될까...  따라서 한국의 군대에 대한 반대는 당연히 미국의 군대에 대한 반대이며 나아가 미국의 군사적 이익에 종속되어 있는 모든 군사 시스템, 전쟁에 대한 반대이다. 군대반대 운동은 단순한 국지적 반전이 아닌 글로벌한 비전(非戰)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게 내가 요즘에 내린 결론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제국"화되어 가는 글로벌 시스템(군사, 경제, 문화 모든 것의 글로벌 화)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결코 몇몇 나라들이 유엔에서 보여주는 반대의 제스쳐도 아니고, 국지적으로 고립되어 일어나고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도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글로벌리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민족주의라고 헛소리를 해대기도 한다. 먼지싸인 아카데미에 짱박혀서 그게 현실적인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전부 이상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문제는 그런 생각들이 이른파 진보, 좌파 등지에 퍼져 있다는 거다)

"인 터 피 플..."

국가간의 인터내셔널이 아닌 비전인터피플(혹은 비전잡민연대)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전쟁을 하는 자들 환경을 파괴하는 자들,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들, 이들 점차 통합되어 가는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맞설수 있는 것은 또한 세계 잡민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본다. 좀 더 시각과 행동반경을 넓히다보면 분명 군대반대운동이 대중화될 수 있는 지점까지 다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화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한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세계 잡민들의 군대반대 운동과 같이 연대해 가야지만 승산이 있다.  그것밖에는 없어 보인다.
http://www.digitalmal.com/bbs/board.php?code=bbs_peace_pds&page=1&id=675&mode=&type=read&position=여기 있는 글들을 소개한다는게 또랑으로 빠져버렸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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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에서 로맨스

  • 등록일
    2005/03/12 13:02
  • 수정일
    2005/03/12 13:02
매일같이 9시 퇴근 6시 출근의 지루하고 고된 일상에 오아시스처럼 여름 휴가가 찾아왔다. "이번 여름에 꼭 새만금을 가보리라"고 계획하던 차에 마침 멍청이로부터 부안 소식이 날아들고 오마이뉴스에서 부안 투쟁에 관한 짧은 비디오 스트림을 보고 나서 "부인이 먼저다"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 불과 이틀 전이다. "이곳은 마치 해방구와 같다"라는 멍청이의 말에 다소 로맨틱한 감성이 나를 사로잡았다고나 할까?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한다는 내 특유의 강박관념이 그 짧은 휴가를 이곳에서 보내라고 독촉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11시에 버스를 타고 부안에 도착하니 4시가 다 되었다. 시내는 곳곳에 플래카드와 깃발이 걸려있고 군데군데 몇명의 전경들이 도열해있을 뿐,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자본가와 권력가, 이른바 가진자들이고 환경 파괴를 고스란히 떠맡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라고  잠시 도다키 요시의 [환경정의를 위하여]의 서문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래서 환경운동은 단순히 환경문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그 문제에 얽킨 사회 불평등 관계를 함께 해결해 나아가야 한다고...그래서 환경운동이 아니라 환경정의운동이라고...

부안은 낡았다. 활동가들이 기거하는 성당을 가기위해 골목을 돌아서니 조그만 시계방이 눈에 띈다. 분침과 시침이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를 낡은 시계가 진열대에 먼지를 뽀얗게 맞으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그 옆에 어렸을 적에나 보았던 연탄가게. 같이간 캐나다 친구가 신기한듯 연탄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핵 쓰레기를 버리겠다는 곳이 청화대 앞마당도 아니고 날고 긴다는 자본가들의 주택가도 아닌 바로 이곳인 것이다. 가난한 이곳 주민들에게 대도시의 엄청난 에너지 낭비와 자본가들의 탐욕의 결과를 모두 받아안으라는 것이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그들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어여쁜 땅에 함께 핵을 묻으라는 것이다.

메이저 언론들이 조장하는 여론은, 사람들의 행동은 과격하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 님비(not my backyard)현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핵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화석연료의 고갈에 앞서 미래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겠는가, 그러니 부안이든 어디든 핵폐기장은 있어야 하지 않는냐, 정부가 그렇게 많은 돈을 지원하겠다는데 또 무슨 욕심이 있어서 부안사람들은 그렇게 과격하게 나오냐고... 한결같이 떠들어댄다.

정부 지질조사팀의 단 한차례 조사, 그리고 과학자들이라고 하는 비양심적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지질학적 안전성"에 대한 증거들... 그러던 와중 절대로 폐기장을 유치하지 않겠다던 군수 김종규가 부안 군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쥐새끼처럼(부안군민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어느날 아침 조간 신문에 정부관계자들과 함께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위도에 핵폐기장 건설 확정" 이라는 대문짝만한 타이틀과 함께.

이게 왠일인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칠 일이다. 한번도 그곳 주민들과 상의한 일도 없고 또, 군의회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지 혼자 이 일을 강행했다. 간이 배밖으로 나온 인간이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이번 결정이 전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군수의 그러한 배신행위 더 화가 나 있다."

"김종규는 무소속으로 그래도 꽤 인기가 많은 군수였다. 그런데 이번일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어떠한 "지도자"도 믿을 수 없다. 우리 주민들의 힘밖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기댈 언덕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절실히 깨닫는다."

라며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열에 달뜬 에로틱함 그 자체다. 그 사람 뿐 만이 아니었다. 8시가 되어 거리에 모인 수백명의 사람들 하나같이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곳 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 환호성,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모두가 흡사 축제를 여는 듯한 분위기에 스스로 취해있다.

"처음에는 김종규 한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었지만, 이제는 정부와 자본과의 싸움이다."

22일 경찰의 가혹한 탄압이 있은 다음부터 계속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주민 활동가의 이야기다. 그는 이미 새만금반대 운동을 통해 잔뼈가 굵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새만금처럼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 투쟁은 단지 '우리 지역에 양성자가속기(핵폐기물 재처리시설)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만약 핵산업에 대한 합리적인 중장기 대안이 제시되고 그 결과 정말로 꼭 핵폐기장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치할 의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굳이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핵산업을 추진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지 한수원의 권력유지를 위한 구실일 뿐이다."

한편 핵폐기장 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그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미래에너지 단지"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부안의 핵폐기장 건설을 시발로 전북을 이 "미래에너지 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라북도를 핵단지화하겠다는 거다. 앞으로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핵발전소만해도 무려 10여기가 넘고 그걸 전북에 고스란히 심겠다는 것이다. 왜 하필 핵폐기장까지 있는 전라북도에다 또 핵발전소를 건설하는가? 이미 핵폐기장이 들어섰으니 "더렵혀진 땅" 더 더렵혀지면 어떠리. 돈 한줌 안기면 그것으로 되지 않겠는가!

"다른 지역에 핵폐기장을 짓는다고 해도 우리는 반대다"

몇몇 주민들의 생각은 벌써 이만큼 나아가 있다. 그들의 생각은 "과학주의"를 뒤집어쓴 엘리트들의 핵논리, 대체 에너지 논리에 저항하며 이미 핵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에까지 닿아있다. 우리가 왜 궂이 핵에너지를 계발해야하는가? 결국 그것은 현사회의 에너지 낭비 경제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또한 그것은 나아가 계속해서 경제는 발전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그것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을 사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은 쩔 수 없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해야한다는 경제발전, 자연파괴 논리가 아닌가? 또 그 인간의 이익이란 결국 자본가들의 이익이 아닌가?
온갖 기만과 술책, 유혹과 탄압,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아무래 이곳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려고 하면 할 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손에 손에 건내는 촛불을 통해 자신들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연대감을 깨닫는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들밖에 없다.

이제 8시만 되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광장으로 모여든다. 내 옆에 선 캐나다 친구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어디서 왔냐, 왜 왔냐, (내 친구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인) 나이가 몇살이냐 등등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짜고자 내친구앞에서 "한국 사람들은 아주 성숙하고 순결한 민족이다"라고 뜬금없는 "민족 찬양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나에게 한번 놀러오라며 자기 집 주소까지 적어주었다.

10시쯤이 되자 시위대는 행진을 하기 시작해서 군청앞에 도착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바퀴벌레같이 갑옷과 투구를 쓴 다스베다의 군인들이었다. 멍청이의 말에 따르면, 방패를 뽀죡하게 갈아서 사람들을 찍는다는 1001부대 대원들도 전방에 도열해있다. 지난 토요일에 크게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문규현 신부의 형 문정현 신부의 모습도 보인다.

뭔가가 일어나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에 같이 구호를 외치던 중, 한 사람이 나와 이제 보다 긴 투쟁을 위해 우리의 힘을 비축해야하지 않겠냐며 집회해산을 제안한다. 그리고 모두 박수를 치며 다들 집으로 해산했다.

시위가 끝난 지금 나는 아직도 좀 유치하다싶게 로맨틱한 감정에 휩싸여 있다. 너무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촉촉해져버린 문장들은 내일 아침이면 다시 빳빳하게 말라버리겠지만 어쨌든 오늘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 나름대로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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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런 생각을...

  • 등록일
    2005/03/12 13:00
  • 수정일
    2005/03/12 13:00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맑시스트들이 존재하는 게 참 신기하다.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의 군대, 경찰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할 때도 있다" 또 시에틀 N30에 대해서 "전체 행사의 핵심 조직자는 분명한 결정에 도달하고 그 결정에 따라 활동하기는커녕 오히려 각 바리케이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했다. 그 결과 혼란이 빚어졌고, 혼란은 항의 행동 전체를 약화시켰다. 말할 나위 없이 경찰은 자신의 의사 결정을 ‘분권화’하지(분산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전역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처리해 항의를 분쇄했다."

 

결국 모든 시위대가 경찰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다는 건데, 시에틀 시위가 그토록 유명해지고 곳곳으로 퍼져나간 이유중에 하나가 일사불란하고 중앙집권적이지 않았기 때문인거 다 알지 않나? 사람들은 시위의 자발성에 흥분하고 경도되었다. 시위, 그것은 신자유주의를 향한 저항이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혁명인 것이다. 다시말해 단순히 수단과 과정이 아닌 시위, 그것 자체로 존재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어떤 것에 대한 수단과 과정 전략으로 파악한다면, 결국은 자기가 지향하는 사회를 위반하는 괴물(중앙집권이라는...)을 낳는 자가 당착에 빠진다.
그래서 아나키에선 의사결정, 토론, 모든 전략과 전술, 이른바 과정과 방법이라고 불려지는 모든 것이 아나키가 되기 모자란, 혹은 아나키가 아닌 것이 아닌, 다 아나키인 거다.

그래서 어떤 창조적인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만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것이다.
중앙집권이야 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편하지만,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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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의 바다와 갯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아나키즘과 맑시즘)

  • 등록일
    2005/03/12 12:59
  • 수정일
    2005/03/12 12:59

맑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방법론적 차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본다. 둘은 자연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다르다. 방법론의 차이는 보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새만금의 바다와 갯벌을 그 둘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추론하면서 둘의 자연관의 차이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맑시스트 자연관 - 계급투쟁 이전에 인간의 원초적인 투쟁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왔다. 자연과의 투쟁에서 어느정도 우위를 확보(산업혁명)하며 인간은 자기 동족인 다른 인간들과 개급투쟁의 역사를 이어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계급투쟁은 결국 아주 원초적인 자연착취의 위에 서 있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여성착취 위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자들의 자연착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똑같이 닮아간다. 그래서 구 소련은 미국의 생산성을 쫓아가기 위해 못지 않은 엄청난 환경파괴와 공해를 일으켰으며, 맑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경영자들 못지 않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선전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또 환경문제에 대해서 자연과 어울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맑시스트는 전적으로 새만금의 갯벌과 조개를 캐는 아낙네들의 편에 설 수 없다.(전략적으로는 설 수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재생산의 영역, 예를 들어, 가사, 육아, 나아가 비정규직(대부분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적 위치에 서 있다고 한다면 유사 재생산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등등의 영역에서 착취받는 "여성"의 입장에도 설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을 서로 소외시키면서 이루워놓은 휴머니즘, 생산주의와 궤를 같이해온 맑시즘은 결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국가자본주의(혹은 국가관리주의)로 귀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 - 인간은 자연과 공생하면서, 자연이라는 조건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이 자본화(상품을 위한 자원)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자연이 비록 자연 아닌 제2의 자연이 되었다 할지라도(미국과 캐나다의 울창한 산림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3세계의 열대림을 벌목하고 파괴하면서 보호되고 있는 그들의 자연은 자연이라기 보다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자본화된 제 2의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와 유대의 문제를 맑시스트처럼 폐기처분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새로이 발굴하고 발견해서 자연과 인간과의 투쟁이 인간과 인간의 투쟁으로 옮아온 역사를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관게의 회복과 더불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아왔던 역사를 자율적인 상호부조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도 한다.  따라서 아나키는 "인간은 자연처럼 쓰고 버리는 자원이나 도구가아니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휴머니즘도 아니고, 휴머니즘을 자연에 역투사해서 동물에 대한 물신화된 애정을 표해야하는 그런 종류의 동물보호주의도 아니다. 물론 숙명이나 운명 따위로 얘기되는 자연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연주의는 휴머니즘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역담론일 뿐이다. 아나키는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한다. 바다를 땅으로 만들어 금그어서 니것 내것 혹은 자본과 국가의 소유로 만들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금이 그어지지 않은 바다와 갯벌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역담론(혹은 대항담론): 아떤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담론이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맞서고자 하는 그 담론과 매우 닮아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같은 조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전제들(패러다임 혹은 에피스테메)을 공유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맑시즘 혹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의 경우 다위니즘에서 파생한 사회진화설의 적자생산에 기반한 제국주의와 똑같이 입각해서 부국강병과 산업화에 의한 독립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쟤들처럼 똑같이 힘을 길러 우리도 쟤들과 똑같이 되거나 앞지르자라는 논리.  발전이데올로기, 국민통합, 동아시아 중심국가설 등등. 그리고 가까운 예로 군대반대 운동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이 부르짓는 "우리도 미국처럼 군사력이 있어야 남들이 함부로 넘보지 않을 것 아니냐는 " 주장...

 

돕헤드 매닉의 주장을 크게 보아 동의는 하지만 맑스주의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혹시 맑스주의 한 분파의 생각을 너무 일반화시켜 모든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결코 '생산력 발전'이라는 잘못된 신화(이자 가장 대표적인 통치이데올로기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맑스주의자들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한다'는 말은 제게는 타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친 단순화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임금노동제도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시키는 제도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맑스주의자는 충분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 역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양한 현대 맑스주의 분파들 중에는 실제로 자본주의제도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조화와 공생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이 아나키스트에게만 독특한 것도 아니죠.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를 들면 제가 아는 '참여불교'쪽의 주장은 이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삼보일배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나타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들은 아니었잖아요?

하여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착취와 폭력과 반대하며 탈권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관심을 나타내며 실천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사실입니다.
2003/08/06 x  
  매닉 맑시스트에 대한 일반화라는 비판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 분파에 대한 매닉의 무지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의 분화가 워낙 복잡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점도 있죠. 혹시 그러한 친환경적 맑스주의(에코맑스주의가 있으려나...)가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다만 저는 맑스 저작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것에 입각한 사적 유물론이 가지는 자연착취적인 측면, 자본주의에 대한 역담론으로서 자본주의와 자연에 대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맑시스트들도 새만금공사에 충분히 반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입장에서 어떠한 맥락화에 따라 반대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제도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맑시스트의 경우에도 혹시 (잘은 모르겠지만) 환경문제 또한 계급해방으로 해결된다고 하는 그러한 환원주의가 아닌지...의심이 갑니다.
또한 '참여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저도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주장이 아나키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전적인 서구 아나키스트들은 맑시스트들과 비슷한 자연관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어차피 근대의 산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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