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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의 바다와 갯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아나키즘과 맑시즘)

  • 등록일
    2005/03/12 12:59
  • 수정일
    2005/03/12 12:59

맑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방법론적 차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본다. 둘은 자연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다르다. 방법론의 차이는 보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새만금의 바다와 갯벌을 그 둘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추론하면서 둘의 자연관의 차이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맑시스트 자연관 - 계급투쟁 이전에 인간의 원초적인 투쟁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왔다. 자연과의 투쟁에서 어느정도 우위를 확보(산업혁명)하며 인간은 자기 동족인 다른 인간들과 개급투쟁의 역사를 이어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계급투쟁은 결국 아주 원초적인 자연착취의 위에 서 있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여성착취 위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본주의자들의 자연착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똑같이 닮아간다. 그래서 구 소련은 미국의 생산성을 쫓아가기 위해 못지 않은 엄청난 환경파괴와 공해를 일으켰으며, 맑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경영자들 못지 않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선전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또 환경문제에 대해서 자연과 어울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맑시스트는 전적으로 새만금의 갯벌과 조개를 캐는 아낙네들의 편에 설 수 없다.(전략적으로는 설 수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재생산의 영역, 예를 들어, 가사, 육아, 나아가 비정규직(대부분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적 위치에 서 있다고 한다면 유사 재생산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등등의 영역에서 착취받는 "여성"의 입장에도 설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을 서로 소외시키면서 이루워놓은 휴머니즘, 생산주의와 궤를 같이해온 맑시즘은 결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국가자본주의(혹은 국가관리주의)로 귀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 - 인간은 자연과 공생하면서, 자연이라는 조건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이 자본화(상품을 위한 자원)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자연이 비록 자연 아닌 제2의 자연이 되었다 할지라도(미국과 캐나다의 울창한 산림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3세계의 열대림을 벌목하고 파괴하면서 보호되고 있는 그들의 자연은 자연이라기 보다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자본화된 제 2의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와 유대의 문제를 맑시스트처럼 폐기처분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새로이 발굴하고 발견해서 자연과 인간과의 투쟁이 인간과 인간의 투쟁으로 옮아온 역사를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관게의 회복과 더불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아왔던 역사를 자율적인 상호부조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도 한다.  따라서 아나키는 "인간은 자연처럼 쓰고 버리는 자원이나 도구가아니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휴머니즘도 아니고, 휴머니즘을 자연에 역투사해서 동물에 대한 물신화된 애정을 표해야하는 그런 종류의 동물보호주의도 아니다. 물론 숙명이나 운명 따위로 얘기되는 자연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연주의는 휴머니즘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역담론일 뿐이다. 아나키는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한다. 바다를 땅으로 만들어 금그어서 니것 내것 혹은 자본과 국가의 소유로 만들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금이 그어지지 않은 바다와 갯벌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역담론(혹은 대항담론): 아떤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나온 담론이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맞서고자 하는 그 담론과 매우 닮아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같은 조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전제들(패러다임 혹은 에피스테메)을 공유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맑시즘 혹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의 경우 다위니즘에서 파생한 사회진화설의 적자생산에 기반한 제국주의와 똑같이 입각해서 부국강병과 산업화에 의한 독립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쟤들처럼 똑같이 힘을 길러 우리도 쟤들과 똑같이 되거나 앞지르자라는 논리.  발전이데올로기, 국민통합, 동아시아 중심국가설 등등. 그리고 가까운 예로 군대반대 운동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이 부르짓는 "우리도 미국처럼 군사력이 있어야 남들이 함부로 넘보지 않을 것 아니냐는 " 주장...

 

돕헤드 매닉의 주장을 크게 보아 동의는 하지만 맑스주의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혹시 맑스주의 한 분파의 생각을 너무 일반화시켜 모든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결코 '생산력 발전'이라는 잘못된 신화(이자 가장 대표적인 통치이데올로기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맑스주의자들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하며 아나키스트들은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한다'는 말은 제게는 타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친 단순화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임금노동제도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시키는 제도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맑스주의자는 충분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 역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양한 현대 맑스주의 분파들 중에는 실제로 자본주의제도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완전한 조화와 공생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이 아나키스트에게만 독특한 것도 아니죠.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를 들면 제가 아는 '참여불교'쪽의 주장은 이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삼보일배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나타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아나키스트들은 아니었잖아요?

하여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착취와 폭력과 반대하며 탈권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관심을 나타내며 실천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사실입니다.
2003/08/06 x  
  매닉 맑시스트에 대한 일반화라는 비판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 분파에 대한 매닉의 무지라고 생각합니다. 맑스주의의 분화가 워낙 복잡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점도 있죠. 혹시 그러한 친환경적 맑스주의(에코맑스주의가 있으려나...)가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다만 저는 맑스 저작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것에 입각한 사적 유물론이 가지는 자연착취적인 측면, 자본주의에 대한 역담론으로서 자본주의와 자연에 대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맑시스트들도 새만금공사에 충분히 반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입장에서 어떠한 맥락화에 따라 반대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제도를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맑시스트의 경우에도 혹시 (잘은 모르겠지만) 환경문제 또한 계급해방으로 해결된다고 하는 그러한 환원주의가 아닌지...의심이 갑니다.
또한 '참여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저도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주장이 아나키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전적인 서구 아나키스트들은 맑시스트들과 비슷한 자연관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어차피 근대의 산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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