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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꿈-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2004년 10월9일 숨을 거뒀다. 말년에 그는 지옥으로 향하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광야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앙숙인 하버마스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2004년 5월엔 프랑스의 진보적인 월간 매체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년 기념식에서 유언과도 같은 연설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말은 "비록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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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과거의 계몽과 앞으로 올 계몽(Enlightenment past and to come)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11월호

 

2004년 10월9일 숨진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작업은 최근 벌어진 일들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난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년 기념식에 우리가 그를 초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행사는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그가 이날 행사에서 한 연설을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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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50돌을 맞아 그 무엇보다 국제적인 범위에서, 반 세계화의 깃발 아래 모인 사회 운동 세력들이 참고하는 핵심 매체가 됐다는 게 너무나 기쁘다. 물론 이 사건이, 냉전시대의 승리자들 (아이엠에프[국제통화기금], 오이시디[경제협력개발기구], 더블유티오[세계무역기구] 같은 사악한 약어들로 대표되는 것들)을 제거할 거대한 혁명이 눈앞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반 세계화 운동 세력과 전세계 일반 대중들의 지속적인 압력이 이들 기구를 약화시키고 개혁을 강제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똑같은 강도의 압력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들 곧 유엔(국제연합)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기구에도 개혁을 강제할 것이다.

 

1954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호 사설에서 위베르 뵈브-메리는 전통적이고 애국주의적이며 심지어 국수주의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을 썼다. 그는 "국제 관계의 평화적인 진전에 힘쓴다"는 게 우리의 공통된 임무인 상황에서 "(여기에 봉사하는) 신문의 고향은 너무나 당연히 파리여야 하며 언어는 프랑스어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

 

그 이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진정으로 국제적인 출판물이 됐다. 18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됐고 전세계에서 참고하는 잡지로 평가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잡지는 파리에 터를 잡고 있다. 나에게, 이 점은 뿌리깊은 유럽인 성향(Europeanness)을 보여준다.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대륙에서 이 잡지만큼 자유롭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잡지가 성공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상상이 안된다. 이는, 우리 유럽인들이 독특한 정치적 의식과 의무감을 갖는다는 걸 암시한다. 물론 이 말이, 이 잡지와 이 잡지가 지지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유럽 중심적이거나 프랑스 중심적인 전망에 얽매여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보다는 도리어, 이 잡지는 반세계화 운동에서 유럽의 구실을 상기시키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와 중국의 떠오르는 힘, 그리고 아랍/이슬람의 신권 정치 사이에 낀 유럽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유럽 중심적인 지식인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지난 40년동안 나는 이와 정반대에 해당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믿는다. 한치의 유럽 국수주의도 없이, 그리고 우리가 지금 파악하는 모습으로서의 유럽연합에 대한 한치의 신뢰도 없이, 오늘날 유럽이 의미를 갖는 그 지점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걸 말이다. 여기에는 계몽의 전통이 포함된다. 또 과거의 전체주의적인 범죄행위, 대량학살, 식민주의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과 이 사실에 대한 겸허한 인정도 포함된다. 유럽의 전통은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걸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유럽이라는 존재가 단지 단일 시장으로 축소되도록 그냥 둬서는 안된다. 단일 통화, 신국가주의적 집단 또는 군사 세력을 뜻하는 것이 되도록 그냥 둬서도 안된다. 하지만, 마지막 지점에 가면 나는 유럽이 공통의 방위력과 외교정책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동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런 힘은 유엔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유엔이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불량배 국가인 아메리카와 타협하지 않고, 아메리카의 일방적 편의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가운데 자신들의 결의를 실행할 수 있는 유럽에 기반을 둔 기구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창간 50돌 기념호인 지난 5월호에 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 옮긴이)가 쓴 사설 '저항'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이 지지하는 것, 반대하는 것 하나 하나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게 한가지 있다. 시장에 덜 지배되는 유럽을 지지한다는 대목이다. 나로서는 이 말이, 단지 다른 초강국과 경쟁하는 데 만족하고 마는 유럽을 뜻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초강국들이 원하는 걸 하도록 그냥 두고 보는 유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리는 유럽은 유럽을 반세계화의 요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헌법과 정치적 태도를 지닌 곳이요, 자신의 추진력과 대안 정신이 전세계로, 예를 들면 이라크 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도 뻗어나가는 근원지가 되는 곳이다.

 

과거 계몽 정신의 자랑스런 후손이자 새로 다가올 계몽의 전령으로서의 유럽은, 세계에 대해 자신의 정치가 단순한 이분법적 반대 이상의 어떤 더욱 세련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리라.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의 혐의를 받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정책, 특히 아리엘 샤론이 주도하고 조지 부시가 지지하는 정책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팔레스타인이 자신들의 권리와 땅과 국가를 위해 벌이는 정당한 투쟁을 지지하는 게, 자살 폭탄 공격을 지지하는 걸 뜻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이 지지는, 시온의 장로들의 의례라고 할 형편없는 거짓말에 힘을 실어주는 (슬프게도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유대 선전선동에 동의하는 걸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부상하는 것과 이슬람 혐오증이 떠오르는 걸 동시에 우려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샤론과 그의 정책들이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부각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가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불러모으는 구실로 이 현상을 이용해먹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사담 후세인과 그의 정권에 동조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부시, 체니, 럼스펠드, 월포이츠의 정책을 비판하는 게 가능하다. 또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용감하게 목청을 높이는 아메리카인,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합한다는 것 때문에, 반아메리카주의자라고, 반이스라엘주의자라고, 반팔레스타인주의자라고, 이슬람 혐오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이 것이 내 꿈이다. 내가 이런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다. 내 꿈은, 라모네가 말한 것처럼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꿈꾸는 데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내 꿈은 다른 세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이룰 힘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이 꿈은 전세계 수십억의 여성, 남성과 내가 공유하는 꿈이다. 비록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영어 번역본: http://mondediplo.com/2004/11/06derrida

번역: 신기섭

2004/12/14 00:13 2004/12/1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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