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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에 대한 흥미있는 안내서

<자본의 두 얼굴> (부제: 이진경의 마르크스 재해석에 대한 반론)
(김동수 지음, 한얼미디어, 2005, 1만9800원)

 

정체를 알기 어려운 사실상 무명의 저자인 김동수라는 이가 이진경이라는 유명 작가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비판한 책을 내놨다고 했을 땐 그냥 '흥미롭군'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책이 자그마치 590쪽에 달한다는 걸 알고는 놀랍기도 했지만 도저히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품질이 보증 안되는 두꺼운 책을 읽는다는 건 너무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 문제에 관한 한 신뢰할만한 <진보평론> 2005년 여름호에 서평이 실린 걸 보고,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모두 읽는 데 한달이 걸렸다.

 

읽으면서 든 첫번째 생각은, 자본론에 대한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경이로운 책이라는 것이다. 나로선 이진경의 자본론 해석이 맞는지(게다가 난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아니면 김동수의 해석이 맞는지 평가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본론에 대해 김동수가 얼마나 해박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더 놀라운 건, 이진경에 대한 집요하리만치 꼼꼼한 비판과 이 비판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대한 인용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해박함뿐 아니라 마르크스가 비판한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 인용의 범위 또한 다양하다. 이는 일러두기에 표시해놓은 58권의 인용 도서 목록만 봐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와 헤겔은 물론이고 네그리, 알랭 바디유, 앨런 소칼, 헨리 조지, 박노자까지 다양한 국내외 학자들이 인용되고 있다.

 

이 책의 주장은, 이진경이 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별하지 못해서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박제화시켜, '자본'의 장식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이진경의 주장이 사실 들뢰즈의 주장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며 자본론을 넘어선 게 아니라 해체해서 마르크스가 그렇게 비판한 고전파 이전으로 돌아가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진위는 알길 없다. 다만 이진경이 마르크스의 글들을 아주 편의적으로 인용하고, 때로는 완전히 반대의 뜻으로 인용하는 게 부지기수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김동수가 반박을 위해 제시하는 이진경의 인용문 앞뒤 부분과 인용문 맥락이 김동수의 창작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아마 그건 가치와 사용가치일 것이다. 저자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것이기 때문이다.

  • 가치: 상품에서 자연적인 속성을 제거하면, 노동생산물이라는 공통의 사회적 속성만이 남게 된다. 이 경우 노동은 구체적인 성질을 잃고, “추상적인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이제 노동생산물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정량, 또는 지출된 일정량의 노동력이 대상화(체현)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인데, 마르크스는 이를 가치라고 불렀다. 가치의 양은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29쪽)
  • 사용가치: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자본론 1권 43쪽)의 유용한 성질이 그 물건을 사용가치로 만들어주는데, 어떤 물건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물건 자체가 사용가치이기 때문이지, 거꾸로 상품이기 때문에 사용가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용가치인 상품은 교환되는 물건이며, 다양한 종류의 다른 상품과 다양한 비율로 교환된다.(22쪽)
  • 가치와 사용가치: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을 '구체적 유용노동'이라고 부르고,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을 '추상적 인간노동'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상품의 이중성(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이 노동의 이중성(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인간노동의 통일)으로 나타난 것이다.(32쪽)

 

내가 이해한 바를 요약하자면, 가치는 인간만이 창출할 수 있는 것이며 (공기나 물 같은 자연이 지닌 것은 사용가치다) 상품 생산에 투여된 인간노동으로 측정된다. 반면 사용가치는 물건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이 바로 사용가치다. 저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교환을 전제로 한 자본주의 상품은 만드는 사람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다. 사용가치 곧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이라면 자신이 소비하지 남에게 팔지 않을 것이다. 소비하고 남은 것만 팔 수도 있는데, 이렇게 남은 것 또한 그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다. 이미 욕망이 충족되고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상품이 자신에게 사용가치이기 때문에 산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살 이유가 없다. 그러니 사용가치는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정량이 대상화된 것'인 가치와 전혀 다른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몇가지 개념에 대한 설명을 더 소개한다.

  • 잉여생산물과 잉여가치: 잉여노동의 결과물은 단순히 사용가치로서의 잉여생산물일 수도 있고, 잉여가치일 수도 있다. 전자는 부역의 형태로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중세에서는 간단히 관찰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가치법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 신분적 강제가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자신의 창고에 쌓아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판매를 위해 생산한다. 즉 그의 관심은 잉여생산물이 아니라 잉여가치이다. 이것의 존재와 발생방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연구가 <자본론>으로 집대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진경은 잉여생산물과 잉여가치를 구별하지 않는다.(200쪽)
  • 잉여가치: 사실 노동의 대가가 온전하게 지불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잉여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동은 판매되지 않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노동의 대가라는 관념을 버릴 때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가라는 관념을 버리고 노동이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판매되는 것임을, 자본가의 잉여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의 결과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따라서 잉여가치는 등가교환의 기초 위에서 성립한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을 해명하였다.(177쪽)
  • 절대적 잉여가치: (필요노동시간을 넘어설 때까지-인용하면서 덧붙임) 노동일의 단순한 연장에 의해 획득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자본의 본성을 드러내는 최초의, 단순한 표현으로, 증식에 대한 자본의 요구는 그 직접적인 형태에서는 언제나 노동일의 연장으로 나타난다.(216쪽)
  • 상대적 잉여가치: 노동력의 가치하락으로 인해, 따라서 필요노동시간의 감소에 의해 확보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불렀다.(222쪽)
  • 특별잉여가치: 개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생산성의 향상 등에 의해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특별잉여가치이다. (생략) 따라서 총체로서의 자본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수행하는 일을 각각의 자본가들은 개별적으로 수행한다. 특별잉여가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특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별잉여가치는 한 사업장에서는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사회 전체의 일반적 방식으로 확산되고, 그 결과 싸게 생산된 개별생산물의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차이가 없어짐에 따라 소멸한다.(223쪽)

 

<진보평론> 서평자가 지적했듯이, 이 책의 의도는 이진경 비판이었지만 본 의도와 상관없이 자본론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가 됐다. 이 책만으로도 <자본론>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론>이 담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가 경제 현안을 판단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다만 웬만하면 이 책을 읽은 뒤에 <자본론>을 직접 읽음으로써 저자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런 책이 큰 관심거리가 안되는 우리 풍토가 안타깝다. 요즘 잘 나가는 유명 작가를 노골적으로 비판, 비난하는 데다가 <자본론>을 나름대로 파악해서 아주 쉽게 해설하고 있는 책인 데 말이다. 어떤 이유로건 관심거리 또는 논쟁거리가 되어야 마땅한 책이다.

2005/09/26 13:51 2005/09/26 13:51
8 댓글
  1. 自由魂 2005/09/26 15:50

    저도 이 책을 사 놓고는 아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100페이지 읽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자의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는데 지쳐 포기했죠.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가지고 논쟁을 할 것을 제안했었는데 그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쉽네요. 시간 나는대로 좀더 차분히 공부해 볼만한 책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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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5/09/26 17:21

    딱 맞는 말씀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자의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다가" 저는 오기로 끝까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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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미류 2005/09/27 15:46

    올해 안에 읽어야지 생각만 하는 중이었는데 한달이 걸려서 읽었다니 내년으로 넘겨야 하려나 봅니다~ ^^;;
    여기 소개된 내용으로는 이진경의 어떤 부분을 비판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이진경이 위에서 설명한 수준의 가치와 사용가치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이해한 수준에서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가치'가, 노동생산물이라는 데에 따르는 본원적 속성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 조직된 노동의 결과물이라는 데에 따르는 속성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자본론 해석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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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05/09/27 18:00

    제 관심사항은 가치와 사용가치의 정의이지 이진경에 대한 김동수의 비판이 아니어서, 김동수의 구체적인 비판을 쓰지 않았습니다. 책의 앞부분만 조금 봐도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지금 기억하기로는 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가치만 논한다는 식이었습니다. 가치 부분은 앞쪽에 나오는 데다가 이진경이 잘못 알고 있다는 게 너무 많이 나와서 잘 기억이 안납니다.^^ 그리고 한달이 걸려서 읽은 건 제가 할 일이 많아서지, 이 책이 어려워서는 아닙니다. 이 책은 개념 중심적이어서 딱딱하긴 해도 어렵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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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gaudium 2005/10/11 00:35

    이 책은 자본론 뿐만 아니라, 헤겔과 마르크스의 연결 고리에 관한 좋은 입문서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저도 김동수의 이진경 비판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사실 이진경 이야기 나오는 부분은 건너뛰고) 읽었는데요, 아주 유익했습니다. 어차피 이진경은 대가 행세하느라 이 책과 논쟁하지 않을 듯으니 저자와 면식있는 분이 저자에게 이진경 관련 부분은 빼고 정리된 책을 하나 더 쓰시라 권해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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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05/10/13 19:24

    gaudium님, 이진경 부분을 빼고 다시 정리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연결 고리는 저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읽었는데, 역시 아는 게 많으면 보이는 것도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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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gaudium 2005/10/13 22:10

    marishin/ 이 책은 한국인이 쓴 책이므로 양자의 관계에 관한 서양인의 책과는 문제의식이 다르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저자가, <<자본론>>의 이해에 요구되는 고전파, 헤겔, 마르크스에 관한 일반적 설명을 전개하고, <<자본>>을 분석해나가면서 그러한 일반론을 상술하는 책을 펴낸다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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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marishin 2005/10/13 23:37

    gaudium님, 저자에게 메일을 보낼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관심이 가는 저자여서 연락을 취해볼까 생각했었는데,“몇명 안될지 모르지만 이 땅의 독자들을 위해서 공부한 결과를 베풀어주시라”고 제가 한번 부탁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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