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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

<제트 매거진> 2000년 5월

원 제목 = (The Suicide of New Left Review)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이론지 <뉴 레프트 리뷰>가 2000년 1월호를 계기로 전면적인 지면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편집인 페리 앤더슨은 "갱신(Renewal)"이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승리를 거뒀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좌파 세력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현 체제에 대한 순응도, 그렇다고 막연한 변혁의 희망도 아닌 "타협없는 사실주의"를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반박 글에서 러시아의 좌파 지식인 카갈리츠키는 변혁을 포기하는 리뷰의 자살 선언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맞서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는 비현실적인 비판이라고 일축합니다. 카갈리츠키의 글은 이김정씨가 번역해주신 것입니다. 참고로 앤더슨의 글 갱신 한글 번역본은 여기 (http://copyle.jinbo.net/reader/lr6-45.hwp)에 있습니다.


 

 

40년간, 뉴 레프트 리뷰는 전세계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뉴 레프트 리뷰의 논문들은 좀 더 성공적이거나 그렇지 않기도 했고, 그 관점들의 피상적 급진주의나 무력한 중도주의로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영어를 읽는 모든 좌파들에게 뉴 레프트 리뷰는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정보원이 되었다. 새로운 명사들이 그 페이지를 통해 등장했으며 발표되었던 입장들을 중심으로 한 근본적인 중요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발행되었고 대다수 저자들은 영국이나 미국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뉴 레프트 리뷰는 다른 국가의 저자들에게도 열려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본질과 접근법,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국제적인 발행물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이 저널은 더 이상 없다. 물론 또 다른 저널이 같은 이름으로 발간되지만 이 간행물들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180도 다른 개념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2000년 1월부터 뉴 레프트 리뷰는 편집인을 바꾸고 장정과 호수 체계를 달리했다. 우리 앞엔 포스트모던한 양식의 제1호의 작은 연습책이 있다. "두번째 시리즈 (Second Series)"라는 부제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40년간 살아남은 다음, 세번째, 네번째의 시리즈가 또 있을 것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념의 변화는 의미심장한 "갱신"(Renewal)이란 제하의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서문에서 선언되었다.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의 뒤를 이어 편집을 맡은 페리 앤더슨은 뉴 레프트 리뷰에 새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뉴 레프트 리뷰의 창간도 함께 했다. 편집진의 구성도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피의 수혈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혀 반대의 이야기이다. 우리 앞엔 그저 그들의 기획과 이데올로기를 바꾸기로 결정을 내린 똑같고 오래된 집단이 있다.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정치가들의 상승세를 따라 이 새로움이란 말이 유행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에 신좌파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구현된 "구좌파"와 구별되는 아주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 정치적 선명성은 신, 구 좌파의 공통점을 분명히 하는 구실을 했다.

 

21세기 전환점에서 상황은 바뀌었다. 새로움이란 발상은 다른 모든 생각의 대체물이, 또 어떠한 긍정적 자기동일성의 상징적 대체물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양심에 따라서도) 새로움이라는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주문이 된다. 새로움에 근거한다면 무엇이든 정당화되지만 새로와 진다는 것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게다가 새로움이 "궁극적인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건 더 중요한 점이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어떤 것은 다시 새로운 것이 된다. "새로운" 기획이나 "새로운" 생각에 대한 언급은, 그 기획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혹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숨김없이 선언할 정치적, 지적 용기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그가 논설에서 신중하게 경고했듯이 페리 앤더슨이 토니 블레어의 지지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앤더슨의 관점에서는 블레어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블레어나 슈뢰더 그리고 유사한 "신 사민주의자"들은 전세계적인 범위의 신자유주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증명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이전에 뉴 레프트 리뷰의 초기 설립자들을 고무시켰던 세계를 변혁하는 오래된 기획은 효력을 잃었다. 세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근본적 변화에 대한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회는 통합의 과정을 겪고 있다. 좌파에게 남은 것은 이 과정을 지켜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뉴 레프트 리뷰도 떠오르는 상황에 순응하여 오래된 전통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세련된 영국 신사인 페리 앤더슨은 머드 6가의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서 좌파 기획의 붕괴에 대해 축 쳐져 논하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의 이상과 급진적인 과거를 부인하지 않을 만큼의 지적 정직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의 붕괴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그가 뉴 레프트 리뷰의 첫번째 시리즈와 함께 1960년대의 기획을 묻어 버릴 준비가 되었지만 그의 서문에는 한 절, 한 문장의 정치적인 자기 비판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 좋다. 페리가 다른 젊은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영국의 사회적 사상과 정치적 생활을 혁명화하려던 시도와 그리고 지금,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전복시키려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무슨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는가? 어떤 특별한 고통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가? 서구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론 말고 실제로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가? 아무도 감옥에 갇히거나 분노한 군중 앞에 세워지진 않았다. 그들의 가정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그들의 도시도 폭파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신 것도 아니고 수지가 안 맞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출판사에 공짜 책을 구걸하려고 굽실거릴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동구나 제3세계에서는 일상적인 경험의 일부이지만 번영하는 서구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떤 것도 학문적 엘리트들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앤드슨에겐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상의 역사,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유행이 지난 사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매력을 잃었고 그리고 사르트르는 잊혀졌다. 새로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자는 회한도 없이 이것에 대해 쓰고, 마치 성공한 여성이 자신이 학생시절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던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급진적 과거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러워함이 없다. 시대는 변했고 패션도 그렇다. 유토피안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와 혁명의 희망에 대한 평형추로 페리는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uncompromising realism)"를 내어놓는다.

 

이 현실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쓰레기 같은 진실이라도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나왔다면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좌파 운동의 붕괴를 승인하는 것 이외에 그 논설은 아무런 실재적인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거긴 아무런 분석도 없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반성이나 세계화의 모순과 역학에 대한 이해의 노력도 없다. 이 "분석"은 월 스트리트 저널과 그 경제학자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그 주류 논설을 그대로 요약하는 데까지 갔다. 잘 봐줘도 이것은 전형적인 학교 훈련을 떠올린다. 전체를 읽은 다음 네 말로 바꾸어 말하라. 이 경우 영감의 주요한 근원이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학교의 주석자들이고 페리는 그들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좌파는 그가 보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제안할 능력이 없다. "대조적으로 이 시대에 직접적으로 정치 건설 분야를 지휘하는 우파는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와 어디에 멈추어 있는지에 대한 한가지 풍부한 전망을 제시한다. 후쿠야마(Fukuyama)와 브레진스키(Brzezinski), 헌팅턴(Huntington)과 예르긴(Yergin), 루트웍(Luttwak), 프리드만(Friedman)이 계속 뒤를 이으면서. 이들은 유일하고 강력한 하나의 명제를 학문 영역의 독자들이 아닌 폭 넓은 국제 공공 대중을 위한 유창하고 인기 있는 문체로 써내는 저술가들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이 확신에 찬 양식은 좌파에서는 어떤 대응물도 찾을 수 없다."(19쪽.)

 

이것은 어떻게 앤더슨의 말이 러시아 공산당수 겐나디 쥬가노프(Gennady Zyuganov)의 발언을 반복(과장함 없이 말 그대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적이고 반 마르크스주의자적인 태도에서 이런 방법으로 "근대성"을 세우려 내놓았던 발언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논쟁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팅턴이 앤더슨보다 더 나은 문체를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난 어떤 차이도 모르겠다. 본질은 어쨌거나 다른 데 있다. 우리는 누가 더 많이 책을 찍어내게 하는지나 누구의 문장 구조가 더 멋들어진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좌파는 주석자나 대중 인기 영합자로 모자란 적이 없다. 실제로 관련된 것은 어떤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이론적 토론이다. 그리고 여기서 후쿠야마와 헌팅턴은 무력하다. 20년 전에 어떤 지식인도 브레진스키가 심각한 이론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제 그는, 헌팅턴, 절반은 잊혀진 후쿠야마와 나란히, 지식인의 정신적 선도자 경지에 거의 다다랐다. 이 저자들이 누리는 성공은 사상가로서의 어떤 장점과는 무관하다. 이것이, 이 현상이 사회학적이고 문화학적인 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유다. 이것은 고찰되고 쓰여질 필요가 있는 주제지만 앤더슨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게다가 그는 그런 어리석고 "유행에 떨어진" 토론을 그의 저널에 허락할 생각도 없다.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는 최소한의 비판적 사고조차 없는 곳에서 구성된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지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더슨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조차 필요 없고 그저 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적에 대한 세련되고 신사적인 형태의 무조건적인 항복이다. 페리는 그의 칼을 부수어 버리고 승리자의 자비에 완전히 무룹꿇었지만, 진짜 신사답게 위엄과 양식을 갖추고 했다. 그는 물론 승리한 적들이 이 "의용군대"로 무엇을 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이론가는 자발적으로 그의 "상아탑" 속에 갇혔다. 바깥에 남겨진 우리들은 그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 생각은 실제의 운동과 마주칠 경험이 완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태어나며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된다. 좌파 운동은 위기에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급진적인 행동과 비판적 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다. 필요한 건 잘 구축된 전략과 최종 분석에서의 원리를 갖춘 견해와 윤리적 기초이다. 이 대신 페리는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의 주석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논의하고 앞으로는 저자들이 좌파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남아있는 건 오직 이름을 뉴 레프트-라이트 리뷰(New Left-Right Review)로 바꾸는 일 뿐이다. 신사가 노동조직가나 거리의 투쟁가가 될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비록 아주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이 20년 전에는 가능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좌파"의 교수들에게 거리에서 경찰관들과 한 데 어울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합당한 자신들의 책무, 비판적으로 생각하기에 바쁘기만 하다면 만족할 것이다. 우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견해에 근거해 판단하기 위한) 우파와의 지적 연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근본적 접근법의 완벽한 논리적 귀결이다.

 

페리는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위기(러시아의 채무 불이행,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봉기, 그리고 1999년 가을 미국 시애틀의 거리에서 그들의 힘을 보여준 새로운 좌파 대중의 운동에도)를 간신히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이 현상들을 고찰한 저자들에 대해 조롱을 덧칠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좌파 상당 부분의 배신이나 겁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훨씬 첨예해질 것이다. 배신은 1914년 제2차 인터내셔널의 항복 문서에서 보듯이 역사적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윤리적 성격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예프게니 슈발츠의 일화들 중에 하나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사악한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누가 당신들을 탁월한 학생이 되도록 강요했는가? "갱신된" 좌파들은 신자유주의의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좌파의 갱신은 필수불가결한 일로 보인다. 잡종 블레어-슈뢰더-쥬가노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갱신자"들과의 단호하고 타협하지 않는 결별과 문자 그대로 우리 눈앞에 군집하고 있는 대중 운동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대체 이데올로기의 필요는 중대하다. 급진주의와 저항은 이론적 근거를 얻어야 한다. 지금은 지식인들이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적기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영향을 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페리의 논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결론부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정치적 옳바름으로 더 많은 비서구쪽의 투고를 환영한다고 선언하다. 여기서 다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구" 뉴 레프트 리뷰가 비영어 사용권과 비서구의 대표자들에 대해 페이지를 충분히 열어주는 데 실패했다고 헐뜯고 있다. 그러나 책꽂이의 "구" 뉴 레프트 리뷰 소장 목록에서 하나 꺼내어 보는 것으로 현실이 이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뉴 레프트 리뷰는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남한, 인도와 아프리카의 저자들을 포괄했다. 그러나 반면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이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불가피하다. 왜 비서구 사람들이 그들 존재의 필수적 문제에 관한 노골적인 무관심을 보이는 저널을 위해 글을 써야하는가? 왜 대서양권 내부 그룹의 지식층에 속하지 않는 저자들이 그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저널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가? 페리는 앵글로-색슨 문화 지식인들의 지적 나르시시즘을 애도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의 끝간 데를 보여준다. 진정한 신사는 물론 외국 학자들의 사상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우리 외국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수사를 해야하는 역을 할당받았고, 더 나쁜 것은 이미 만들어진 문화적 문맥 속에 집어넣어져 "문명화된 토착민"의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전혀 아무런 지적인 요점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이 전혀 서구 지식인들과 차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외국 저자들의 글을 싣는가? 소련의 옛날 농담에 이런 게 있다. 인사팀장이 이야기하길 "우리가 라비노비치에게 일자리를 주었다고 그가 더 이상 유태인이 아니길 기대하지는 마라." 똑같은 이야기다.

 

만약 주변부 저자들의 글을 싣고자 한다면 그들이 서구의 전 급진주의자들의 허약함과 허영심에 그리 감명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진 마라.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잡지의 개념과 세계관이 국제주의여서 서구에서 발행된다는 것에 따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처음부터 그들의 완전한 지역적 발행물이라는 특성을 받아들인다. 황량한 미국의 대학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몇백명 되는 전 급진주의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이러한 저널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유럽과 미국의 급진적인 문화의 최고를 대표했기 때문에 비서구 좌파들에게도 뭔가 가르쳐줄 것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널이 더 앵글로색슨적일 때 다른 나라의 우리들은 더 흥미를 발견했다.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는 페리의 서문으로 판단할 때, 이코노미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의 논설들을 "그들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제공할 듯 싶지 않다. 그러나 원본이 있는데 왜 다시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 담론은 문화들 간의 대화와 공통점이 없다. 나는 현대 중국 영화에 대한 유행하는 프랑스 비평가의 태도를 찾아내기 위해 영국의 저널을 읽는 데는 흥미가 없다. 이건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문화의 사회학에 흥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점은 단순히 이런 거다. 이미 수십개의 저널이 이 분야에 대해서 더 잘 분석하고, 더 상세하고, 더 전문적으로 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와 지식의 매개가 없다는 것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현대 마르크스 이론과 정치적 분석의 국제적 저널이었고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페리의 관점에서는 이 기획은 죽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건 아니다. 수백만이 틀리고 한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편집자 스스로가 신나게 승리에 차서 원래의 기획을 묻어버렸는데 우리가 왜 뉴 레프트 리뷰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페리 앤더슨이 이전의 뉴 레프트 리뷰와 다르게, 그것을 공격하고 새로운 저널을 만들 필요를 느낀다면 차라리 기존의 발행물을 폐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더 정직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유지한 주요한 이유가 친숙한 상표명을 고수하려는 생각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으로 앤더슨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적 지적인 좌표를 뉴 레프트 리뷰의 영향하에 형성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인간적 모욕을 주었다. 옛 이름을 새로운 저널로 그대로 이전함으로써 페리는 우리의 공통의 과거와 공유한 역사의 일부를 훔쳤다. 이것은 더 이상 용서될 수 없다. 제호와 장정이 바뀐 것은 좋다. 이것은 그의 직업적인 정직함을 보여준다. 상당한 수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이것은 신호가 될 것이다. 친숙하고 아주 사랑 받던 저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부모가 그것을 죽였다. 새로운 저널은 월 스트리트 저널의 구독자들 중에 새로운 독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 www.zmag.org/suicidenlr.htm

번역: 이김정

2004/07/15 16:47 2004/07/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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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카갈리츠키에 대한 답변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2/09 11:20

    타리크 알리(Tariq Ali) 2000년 5월 원 제목 = (The Third Period In Outer-space: A Brief Comment On Boris Kagalitsk's Suicide)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이론지 가 2000년 1월호를 계기로 전면적인 지면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편집인 페리 앤더슨은 "갱신(Renewal)"이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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