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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니스타 운동의 위기 심화

빌마 누네스 데 에스코르샤

<시류에 거슬려> 2000년 7/8월호

원 제목 = (The Deep Crisis of Sandinismo)

 

선거에 패배해 권력을 잃은 아마도 유일한 좌파 정권이 아닐까 싶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기억하십니까? 이미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니카라과에서 활동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 세력이 선거 패배 이후 급격한 조직적, 윤리적 위기를 맞았으며, 이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답니다. 산디니스타의 전사인 글쓴이는 조직원의 민주적인 의견 수렴보다는 지도층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 문제, 지도부의 윤리적 타락, 법에 대한 경시, 현 정권과 타협 등을 지적하면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번역본은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jinbo.net)가 번역해 인터내셔널뉴스 105호에 실은 것입니다.


 

 

소모사 독재정권을 전복하고 혁명(1979)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통해 수행했던 투쟁은 인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산디니스타 활동가로서와 인권운동가로서의 내 활동을 구분짓는 것은 항상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인권을 위한 투쟁을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투사이다. 학생시절에 소모사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에 참여했으며, 봉기가 있기 훨씬 전에 민족해방전선에 투신했다. 1979년에는 투옥되기까지 했다. 대법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수감중이었으며, 혁명 정부는 아직 코스타리카에 있었다.

 

니카라과 인민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도록 사법부를 재조직하는 작업은 혁명 기간 동안의 내 인생 전부를 요구했다. 1980년대 내가 당에서 차지했던 지위라고는 내가 속한 현장위원회의 정치비서였을 뿐이다. 나는 현장의 투사였던 것이다. 민족해방전선 지도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어떤 연계도 없었다.

 

1990년 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미망에서 깨어난 이후, 그리고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당구조의 최전선에서 복무했던 이들을 포함, 많은 산디니스타 전사들이 탈당하거나 활동을 그만둔 이후에야 지도부는 그들이 이전에 간과했던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지도부는 나를 불러 임무를 맡기고 당의 공식적인 몇몇 활동들에 관여하도록 요구했다.

 

게릴라에서 정부로 (From Guerrilla to Government)

민족해방전선은 권력을 쥐고 있는 동안에도 결코 정치 정당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정치적 군사 운동으로서 무장투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게릴라 조직으로부터 한 나라를 통치하는 정부로 곧바로 나아갔던 것이다. 민주적인 지도체제와 참여 양식을 공고화할 수 있게끔 정치 조직을 건설하고 정당을 만들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일상에 짓눌렸기 때문인지, 혹은 그럴만한 의지가 없었는지 또한 아니면 최고 지도자들이 그런 것들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누가 알겠는가? 어쨌거나 미국의 침략 전쟁을 내세워 그릇된 하향식의 비민주적 지도체제를 끝없이 정당화하려 했던 것은 심각한 오류였다.

 

선거 패배는 또한 민족해방전선이 야당 구실을 수행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렇게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피냐타(piñata)"에 이르러 버린 패배는 민족해방전선 내부 부패 과정의 근본적인 중요한 단계를 대표하는 많은 후회스런 행위들을 은폐하고 있다. (피냐타는 국가 소유의 자산들을 개인적, 혹은 당적 이익을 위해 전용하는 민족해방전선 관료들을 지칭한다. -ATC 편주, 피냐타의 사전적인 뜻은 '생일잔치 등에서 쓰기 위해 과자같은 선물을 채워넣은 허수아비': 신기섭)

 

1980년대의 국가와 당 사이의 혼란을 돌이켜보면, 당이 받았던 많은 기부가 자동적으로 국가로 흘러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선거 패배 이후 민족해방전선의 재산들이 당을 생존하게 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생각은 국가-당 재산의 특정 부분을 당의 전면에 선 특정 개인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원래 당의 재산인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들은 곧 몇몇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게 되었다.

 

초기의 재산 재분배를 적법화하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뒤늦은 시도(아래에서 설명하다시피 토지 개혁 시기 벌어졌던 것이 그 예임-ATC 편주)인 85호 및 86호 법률은 또한 특정 개인들이 재산을 자의적 용도로 전용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 법들의 보호 아래 몇몇 최고위 지도자들과 중간직 당관료들이 자행한 직권 남용은 적법한 재산 재분배를, 특히 도시 지역에서 왜곡시켰다.

 

새로운 환경에 부합하는 정치 조직의 결여와 재산 재분배를 둘러싼 부패, 그리고 선거 패배 이후 스며들기 시작한 불안과 개인주의 등은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붕괴를 나타내주는 세 가지 토대이다.

 

1990년 이후 역대 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소원해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였다. 비록 전체주의나 나머지 인사들의 투명성 결여와 관련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지만, 뉴스 기사 속에서 그는 새로운 신자유쥬의적 경제 모델에 맞선 투쟁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현장과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행동들의 이면에 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당내에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속셈이 숨어있었음을 알고 있다.

 

혁명적 법률인가, 영원한 권력인가? (Revolutionary Laws or Eternal Power?)

나는 마지막까지도 민족해방전선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비판되던 하향식의 독재적 지도 체제가 혁명 시절 이후 계속 개발되고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혁명 시기 동안 사법부 및 법적, 제도적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던 나는 그러나, 형성중인 정부가 법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지 않으며, 사법적 절차라는 것도 거의 의미가 없음을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다.

 

다른 어떤 이유 중에서도, 혁명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혁명적 정부가 항상 권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대법원에서 로베르토 아르구엘로(Roberto Argüello) 판사와 나는 오류투성이인 많은 법제도의 변화들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가 언제나 맞닥뜨린 것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법 제도들은 혁명 자체가 탄생한 현실 법 체계 외부에서 만들어졌다. 법을 존중하고 현실 환경에 대한 그 적용을 옹호하던 우리 중 몇몇은 그런 태도와 결정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에 시달렸고, 형식에 구애되는 반동으로 비춰졌으며, 심지어는 거부되고 불신받았다. 우리의 혁명적 자질은 항상 의문시되었다. 더 철저한 법 준수를 확고하게 하려던 우리의 지속적인 시도는 끝없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내 선거 패배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만약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토지와 주택이 적법화되었다면, 그리고 소유권을 제때에 올바르게 인정해주었다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혁명 정부의 시도를 일정 정도 불법화시키고, 몇몇 사람들이 그 상황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부를 추구할 수 있게 만든 막바지의 그런 법들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1990년 이후 민족해방전선은 정치 정당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에는 그 첫 당대회(Congress)를 열었다. 당시 전국 집행위원회(National Directorate)는 내게 민족해방전선의 선거관리위원회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당의 첫 규약과 첫 강령을 승인하고 당대회가 뽑는 첫 번째 당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데 참여했다.

 

당대회에서 나는 또한 스스로 추천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향도 없었지만, 첫 번째 윤리위원회의 조정자로서 일할 것을 제안받아, 당대회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윤리위원회는 "피냐타"를 둘러싸고 이미 제기되고 있던 몇몇 당 지도자들의 행위에 대한 의문점들을 조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윤리적 위기 (The Ethical Crisis)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최고 지도부의 부패와 그 도덕적 붕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 온 것이다. 나는 윤리위원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런 현상을 바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윤리적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 민족해방전선의 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온갖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재산에는 뭐뭐가 있는가, 누가 그것들을 관리하고 있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등등의 질문들이었다. 혁명 국가의 일부 재산을 민족해방전선으로 이전시킨 데는 정치적 정당화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디니스타 개인 활동가가 집단의 재산을 사적 이익에 전용한 것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었다.

 

당대회는 엔리 루이스(Henry Ruiz)를 민족해방전선의 새로운 재정부장으로 선출했다. 재정부장은 당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위였다. 하지만 그는 명목상의 재정부장일 뿐이었다. 결코 당 재정을 책임질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재정을 둘러싸고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나는 재정없는 재정부장인 것이다."

 

우리는 윤리위원회 내에서 민족해방전선의 재정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고, 재정부장의 기능과 직위 수행력을 제대로 세우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시도에서 가로막혔으며, 전국 집행위원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정보를 제공할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자산 관리에 책임이 있는 그 어떤 지도자도 대의원 대회에서 결의된 바 있는 청렴 선언을 윤리위원회에 제출할 의지가 없었다. 알레만(Alemán) 대통령이 회계감사국(Office of Comptroller General)에 그의 재산 명세를 제출하는 것을 거부할 때, 그들은 어떤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질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우리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피냐타"에 점점 더 비판적이 되어가고 있는 국제적 연대와 국내적 여론의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윤리위원회를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민족해방전선의 재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우리는 목록에 오른 자료들을 조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적"이 그 정보를 볼 수 없도록 재정부장은 그 목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윤리위원회에 있는 우리가 마지못해서이기는 하지만 이런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 민족해방전선이 어떤 기업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재산도 없다는 다니엘 오르테가의 선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잡해 보인다. 1992년의 민족해방전선의 소유 재산을 기록한 최소한의 자산 목록에는 30개 이상의 대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에서 우리는 모든 층위의 산디니스타 동지들이 극도로 심각한 부패에 관련되어 있다는 제소를 다뤄야만 했다. 이들이 민족해방전선의 재산을 남용했다는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국 집행위원회에 정보를 요청했을 때, 그들은 언제나 방해를 했으며, 정보를 감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산디니스타 회의에서 위원회의 보고서를 발표해야 했을 때, 많은 동지들이 일어서서 내가 "그런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지도자들의 이미지를 손상하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우리는 윤리위원회에 제출된 혐의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을 기회도 없었으며, 우리가 몇몇 사건들을 대중에 공표해야 했을 때, 전국 집행위원회는 우리의 임무 수행에 항의하고 우리를 비판했다.

 

고무 도장 찍는 산디니스타 회의 (A Rubber Stamp Assembly)

처음 나는 상당한 인식과 동기를 가지고 윤리위원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당 생활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는 당의 강령과 규약, 위원회의 규정들에 따라 활동함에 있어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1994년 민족해방전선의 두 번째 당대회에서 위원회의 그 어떤 지위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위원회 활동이 내가 당에서 가장 좌절했던 활동이었다고 말이다. 당시 나는 최고 득표로 산디니스타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이론상으로 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산디니스타 회의에 참여하게 되자마자 나는 이 지도 구조가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단지 고무 도장을 찍고 이미 결정된 것을 지지할 뿐이었다.

 

때때로 그들은 우리 말에 귀를 기울였고, 우리는 우리 의견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점점 더 공고해져서 다니엘 오르테가는 자주 항의 시위때나 기자 회견장에서 어떤 결정을 공표하고 산디니스타 회의에 나와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우리들에게 말하고는 했다. 이러한 지도 체계는 민주적 체제와 당 체계에 진정한 참여를 열망하는 산디니스타 회의 성원들을 점점 더 미망에서 깨어나도록 했다.

 

양치기소년의 기만 폭로 (Crying Wolf about Fraud)

1996년 선거가 다가오면서 나는 민족해방전선이 다니엘 오르테가를 후보로 내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또한 민족해방전선 내외곽의 나에 대한 신임에도, 만약 당 권력층이 나를 반대한다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활동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많은 남녀 활동가들이 내게 민족해방전선의 내부 "협의(consultation)"에 나설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 "협의"는 당의 새로운 실험으로서, 구속력있는 진정한 예비선거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 기능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 나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 하나였으며, 두 번째는 민족해방전선 지도부가 떠들어대고 있는 민주주의가 과연 진실한 것인지 증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승리보다는 민족해방전선의 민주화와 더 큰 권리 및 참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나의 예비 선거 출마를 민족해방전선을 민주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용서할 수 없는 불경으로 보고, 지도자로서 그의 지위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는 최악의 무시로 간주했을 뿐이다. 그 "협의"를 겪으면서 나는 민족해방전선을 민주화하는 새로운 노력을 펼쳐야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해방전선의 1996년 선거 패배는 연속된 두 번째의 패배로서, 민족해방전선이 사법 제도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해 주었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협잡이 있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민족해방전선은 비록 아주 부분적이더라도 선거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장치를 활용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이 했던 모든 것은 선거 협잡에 욕설을 퍼붓고 떠들어대는 것뿐이었다.

 

변칙적인 선거 과정을 워싱턴에 있는 미주인권위원회에 제소한 것은 니카라과 인권센터(CENIDH)였다. 미주인권위원회는 일년 후 우리의 고발을 검토하고 심리를 열었다. 당시 우리는 위원회에 변칙적인 선거 과정을 드러낼 수 있는 정보와 증거를 민족해방전선에서 구했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보와 증거를 우리에게 숨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정보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협약의 전례 (A Precedent for Today's Pact)

1996년의 선거 기간 동안 당 체계의 활동은 전혀 조직적이지 않았다. 유일한 관심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고, 캠페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민족해방전선이 패배한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패배에 책임이 있는 것은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자신들이었는데도, 그들은 패배에 놀랐다.

 

그 패배는, 당 최고 지도부가 1990년 이행 협약을 통해 얻은 이익에 대한 분석과 함께 현재의 협약 체결을 불렀다. 당시 이행 협약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선거 패배가 있고나서 물러나게 된 산디니스타 정부와 비올레타 차모로(Violeta Chamorro)의 차기 정부 간에 체결됐던 것이다.

 

민족해방전선 지도부는 둘 간의 차이가 있지만 아르놀도 알레만(Arnoldo Alemán)의 새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지분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차모로와 체결했던 협약과 같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이제 1997년 1월 12일 알레만이 취임하고 이틀 후, 그와 오르테가가 처음으로 은밀히 만났으며 이후에도 여러번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거 협잡에 대한 격분이 여전히 남아있었는데도 그 날 산디니스타 최고 지도부와 알레만 정부간에 그 협약이 체결될 수 있는 첫 씨앗이 뿌려졌다. 이것은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정치적 윤리적 붕괴를 나타내주는 가장 최근 표식 중의 하나이다.

 

당 지도부가 인민들의 주장과 산디니스타 현장에서 유리된 지 수 년이 지났다. 그들은 이제 야당 구실을 포기했으며, 그들의 현실 권력 지분을 유지하고 여타 이익에 대한 접근권을 얻기 위해 소모사 스타일의 정부와 동맹하고 있다.

 

탁자 밑에서 오간 것 (What's Under the Table)

그 협약의 내용은 자유당과 산디니스타 최고 지도부가 법적, 제도적 변혁에 동의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밀한" 협약이며, 오르테가 형제와 그 동맹 세력들의 경제적 권력을 보장해주기 위한 발표되지 않은 거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억측이 아니다. 이 협약 이면의 진정한 동기는 다른 모든 것 중에서도 당의 지도부에게, 현재 협동조합들의 수중에 있거나 노동자자산지역(APT)의 일부로 형성되어 있는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재산들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협약 자체가 보여주다시피 새로운 사회주의 계획으로서 몇몇 산디니스타 이론가들이 추진했던 노동자자산지역 계획은 사실상 파묻혔으며,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들의 불신을 받았다. 그들은 그 계획을 실패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게 만들려고 꽤나 애를 썼다.

 

민족해방전선에 있어서 두 번째의 중요한 목적은 그 협약을 통한 입헌적, 선거적 개혁으로 권력에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협약은 혁명의 원칙 중의 하나인 민주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이 다원주의는 기본 법률에 공표되어 있던 것으로서 "무카쵸스(muchachos)"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이 권력을 쥐면서 함께 도입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손에 장총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법을 들고 왔다.

 

협약은 또한 민주 제도에 대한 공격이다. 이 협약에 개입된 두 그룹의 떳떳치 못한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협약은 사법부를 정치도구화하여 바로 자신들의 이익에 순응시키고, 특정한 방식으로 법 적용을 몰아갈 것이며, 이미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입법부의 정치도구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부패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이 나라에서 신뢰를 얻고 있는 유일한 정부 조직인 회계감사국의 기능을 정지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지도부의 최종적 위기 (A Terminal Leadership Crisis)

이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도 고통스런 일이다.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든 니카라과인들이 자기 스스로의 책임감을 상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진보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협약에 개입된 자들이 우리 스스로를 불경스럽게 다루도록 계속 그냥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협약은 민족해방전선의 내부 위기를 전적으로 새로운 수위로 가져왔다. 최고 지도부는 최종적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이 위기는 1998년 새로운 영역이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당시 "피냐타"에 대해 제기된 윤리적 질문에는 이미 지도부와 기층간의 유리가 반영되어 있었다. 기층의 투쟁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지도부는 크나큰 불신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전혀 다른 영역이 등장, 위기를 심화시켰다. 소일라메리카 나바에스(ZoìlamÈrica Narváez)가 그의 계부인 다니엘 오르테가를 고소한 것이다. 그녀의 성추행 고소는 정치 지도자로서 다니엘 오르테가의 신뢰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당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다니엘 오르테가 자신의 잘못이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 개인으로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고소인지 판단했어야 했다. 그는 고소의 사실 여부를 명확히 밝힐 수 있도록 책임있는 행동을 취했어야 했다. 대신 그는 침묵을 지켰으며, 전 민족해방전선에도 똑같이 행동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은 그 문제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소일라메리카를 믿지 말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에 따랐다. 비록 그들이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으며, 또한 그런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성 투쟁을 벌여온 산디니스타 여성들이 두려움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그 명령과 모든 것을 정치적 음모로 해석하려는 공식 담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믿기지 않는다.

 

다니엘 오르테가는 면책특권으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개인으로서 그리고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산디니스타 전사들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이다. 이 두 해 동안 그는 활동가들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이들에게 진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적으로라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민족해방전선 지도부의 전적인 도덕적 붕괴라는 흐름 속에서 이 악명높은 사건은 협약의 내용 안에 포함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혹자는 심지어 협약을 급하게 완성시키려 했던 데에는 자유당이 자신의 면책특권을 박탈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다니엘 오르테가의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한다. 협약이 고소 사건 훨씬 이전부터 추진되었지만, 다니엘 오르테가의 무책임으로 이 특정한 사건이 협약의 많은 교묘한 조처들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판은 내부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Criticism Must Come from Within)

현재 민족해방전선 전사들 사이에는 많은 고뇌와 이견,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훌륭한 동지들이 당을 떠나 산디니스타 혁신운동(MRS)를 건설했던 1994년의 고통스런 경험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쳐 준다.

 

공공연하게 당의 진로를 비판하는 모든 내부 그룹들 - 민족해방전선 좌파, 산디니스타 이니셔티브, 존엄성을 위한 산디니스타, 산디니스타 포럼 등과 다른 많은 그룹들 - 은 민족해방전선을 구하고 변혁시킬 투쟁, 그리고 당을 다시 한번 대중 투쟁의 담지자로 변모시킬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헤쳐나가야할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새롭게 부상했거나 협약을 좇아 자리잡은 상이한 비판 그룹들과 경향들 간에 여전히 은밀한 주도권 투쟁이 존재한다. 또한 단결에 대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한다. 분명히 처리되어야할 많은 일들이 존재하며, 가야할 여정은 멀기만 하다.

 

나는 지금 당장의 선결 과제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족해방전선의 변혁을 가로막는 요소들 중의 하나는 당 활동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이다. 신화가 깨지는 두려움, 보복이 강요한 침묵의 두려움, 또한 혁명이 많은 이들에게 제공해 준 물질적 수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등.

 

우리를 단결시키는 것은 민족해방전선이 현재 당을 유괴하다시피 하고 있는 최고 지도자들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산디니스타들의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실 민족해방전선은 단지 산디니스타들의 것만은 아니라 전 니카라과인들의 것이며, 당은 거기서 태어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니카라과와 세계 역사의 이 특정한 순간에 부여되고 있는 과제에 대응하고 나서는 것은 산디니스타 운동의 지상 명령인 것이다.

 

 

** 빌마 누네스 데 에스코르샤는 노련한 산디니스타 전사이며, 니카라과 인권센터(CENIDH)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 것은 엔보이(envoi) 사무실에서 이뤄진 대담을 요약한 것이며, 이 간행물의 허락을 받아 다시 게재한 것이다.

 

 

원문: www.igc.org/solidarity/atc/87Escorcia.html

번역: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2004/07/15 17:45 2004/07/1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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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