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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으로 알아보는 동티모르

스티븐 샬롬, 노엄 촘스키, 마이클 알버트

<제트 매거진> 1999년 9월

 

오랜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학살의 현장 동티모르, 그 역사와 학살의 배경, 미국 등 서구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등을 문답으로 정리해놓은 글입니다. 이 글 하나로 동티모르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모두 해소될 것입니다. 류석원님이 번역해 주신 것을 약간 손봤습니다.



 

 

1. 1975년 이전까지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무엇이었나?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것이었다. 즉, 그 지역내의 민족주의자들이 좌익이었던 곳에 대해서는 (베트남에서처럼) 유럽의 식민통치 강화를 지원하였던 반면에,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 좌익적이지 않았던 곳(예를 들면, 인디아)에서는 미국과 경쟁하는 세력의 독점적 지배권을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들의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다지 (미국에) 순응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의 도움도 받는) 영국군은 역시 미국의 도움으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이 복귀하는 길을 트기 위해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적대적 행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1948년에 수카르노(Sukarno) 휘하의 인도네시아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이 좌익의 쿠데타 기도를 분쇄하자, 미국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카르노와 화해하도록 네덜란드군에게 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국은 수카르노가 위험한 중립주의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허약한 민주 정부를 전복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 -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최대 비밀공작 - 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은 당시 대중적 기반을 갖추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대항할 세력으로 군대를 육성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가 약 5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르는 공산주의자, 좌파 의심자, 평범한 농민들을 학살한 끝에, 수카르노를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수하르토(Suharto) 장군을 앉히는 군부 쿠데타를 함으로써, (미국의) 이러한 전략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쿠데타를 환영하고 자카르타에 무기를 쏟아부었으며, 심지어는 그들에게 공산당원들의 리스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군부는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학살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연구에 따르면, "학살된 사람의 수를 놓고 보면" 1965년부터 1966년까지의 인도네시아 대학살극은 "20세기 최악의 대량 학살의 하나로 기록된다." 미국은 수하르토 정권과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2. 인도네시아가 침략하기 이전 동티모르는 어떤 곳이었나?

 

17세기부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티모르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이 작은 섬은 매릴랜드주(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의 주 = 옮긴이)보다 약간 크며, 필리핀 남쪽 1,000마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쪽 400마일 정도에 있다. 결국에 두 식민지배 세력은 티모르를 분할하여 서부는 네덜란드가 차지해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옮긴이)의 일부로 편입시켰고, 동부는 포르투갈이 차지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가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자 서티모르는 이 신생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동티모르는 1970년대 중반 곧 포르투갈이 자신의 식민제국을 결국 해체하기로 결정한 때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동티모르는 종교, 언어, 수백년의 식민지 역사의 경험 등이 인도네시아와는 다르다.

 

3. 어떻게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개입하게 되었나?

 

포르투갈이 동티모르를 통치하는 동안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에 대한 공격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할 뜻을 선언하자, 수하르토 정권은 이를 자국의 영토와 천연자원을 확대할 기회로 봤다. 1975년 당시 동티모르의 인구가 70만명이었던 것에 비해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1억3600만명이었던 사실로 볼 때, 동티모르는 손쉬운 목표물로 보였던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처음에 동티모르 지역 내의 쿠데타를 지원함으로써 동티모르의 독립을 막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네시아는 치안유지를 핑계삼아 1975년 12월 동티모르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 선전문구 - 이는 서구 언론이 자주 반복한 것인데 - 는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내전"(civil war)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인도네시아가 침략하기 이전에도 잠깐 내전이 있긴 했다. 하기야, 최근 25년 동안에도 나치가 유럽을 정복했던 것과 같은 '내전'이 있긴 했으니까.

 

4. 인도네시아가 1975년 12월 침략할 때 미국은 어떻게 기여했나?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략하기 전날 밤,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미국 외무(국무)장관은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를 만나고 있었다. 키신저는 나중에, (그 회동에서) 동티모르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실상 미국 정부는 수하르토에게 침략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인도네시아 군대가 침략 때 쓴 무기의 90%가 미국제였으며(침략의 목적에 군사지원을 하는 것을 미국 국내법이 금지하고 있음에도), 대 게릴라용 군사장비를 포함한 무기 공급이 비밀리에 늘었다.(이 점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해석할 때 꼭 명심해야할 것이다.) 미국은 또한 침략자를 외교적으로 지지했다. 미 유엔 대사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Daniel Patrick Moynihan)이 그의 자서전에서 자랑했듯이, 그는 국제기구가 인도네시아의 침략에 대처하는 데 무기력하다는 점을 국제연합안에 성공적으로 확신시켰다. 스스로 인권대통령임을 선언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정부에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훨씬 더 늘었다.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10억달러어치가 넘는 군수물자를 판매했다.

 

5.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인도네시아의 침략 및 이후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은 약 20만명의 동티모르인들을 죽음 - 대량 학살과, 굶주림과 질병에 의한 죽음 - 으로 내몰았는데, 이 숫자는 동티모르 인구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숫자이며, 전체 숫자로 볼 때 근대사 최대 유혈사태에 속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도네시아 군대는 고문과 강간, 대규모 강제 이주에도 개입했다.

 

6. 인도네시아의 1975년 침략에 대해 국제사회는 어떻게 반응했나?

 

인도네시아의 침략은 국제법과 자결권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침략을 비난하고, 인도네시아에게 동티모르에서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국제연합 총회는 동티모르를 자국의 27번째 주로 포함시키는 인도네시아의 합병안을 거부했으며, 동티모르인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유일한 예외인 오스트레일리아를 뺀 어떤 국가도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나라에서는 도덕성과 예의를, 인도네시아와 긴밀한 경제관계를 맺을 때 얻는 이익과 인도네시아의 많은 인구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압도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1억 8천만명이 살고 있고, 평균 연령이 18살이며, 이슬람교의 음주 금지조치가 내려져 있는 적도상에 있는 나라-를 생각하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 것같다." 코카콜라사의 회장이 1992년에 이렇게 말했다.) 또 인도네시아 군부에 무기를 팔 수 있을거라는 기대와 동남아시아에서 작은 규모에 속하는 나라(동티모르 = 옮긴이)와 관계를 맺는 것보다 가장 큰 나라(인도네시아 = 옮긴이)와 연합함으로써 얻는 지정학적 이득 역시 도덕성과 예의를 압도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원은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인도네시아에 군사적 원조를 했고, 유일하게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동티모르 근해 석유매장을 나눠 가질 것을 기대하면서. 영국은 최근 인도네시아에 대한 최대 무기수출국이었으며, 일본은 최대 경제원조 및 해외투자국이었다. 캐나다는 경제 및 군사분야 모두에서 원조를 실시해왔으며, 네덜란드와 독일 역시 주요 무기 수출국이었다.

 

7. 티모르인들은 그동안 어떻게 저항했나?

 

티모르인들은 진정으로 고무적이고 용기있는 투쟁을 벌여왔다. 그들은 압도적인 적들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비폭력 저항을 만들어 냈으며 수동적인 저항을 벌였다. 학생들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무기를 직접 들기도 하고, 게릴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시위에 참가하거나, 조직원들을 숨겨주는 식으로 말이다. 인도네시아가 끔찍하게 억압하면서 동시에 많은 자국민을 동티모르로 이주시켰지만, 동티모르인들은 계속 자결과 자유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8. 그동안 동티모르 외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대가 어떻게 진행되었나?

 

한동안은 작고 외로운 목소리만 울려퍼졌다. 예를 들어, 아놀드 코헨(Arnold Kohen)은 처음부터 줄곧 동티모르에 대한 연대행동의 중심에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에는 동티모르에 주의를 환기시키려 노력한 작은 단체들이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그 숫자와 행동은 늘어났다. 1991년 발생한 딜리(Dili) 대학살 - 인도네시아 군대가 평화적인 장례 행렬을 공격해 270명 이상이 학살된 사건(좀 더 정확한 자료를 살펴보면, 사망 271명, 실종 250명, 부상 3백82명으로 집계되었다. - 구수환, 월간 말 1998년 10월호, 148쪽 = 옮긴이) - 에 대한 상당한 분노의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살은 미국의 자유기고 언론인 에이미 굿맨(Amy Goodman)과 앨런 나이른(Alan Nairn)(그는 최근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숨질 지경까지 갔었다), 그리고 학살장면을 비밀리에 찍은 한 영국 텔레비전 카메라기자에 의해 공개되었다. 종교단체와 인권단체들은 활발히 움직이게 되었고, 동티모르 행동연대(East Timor Action Network)가 찰리 샤이너(Charlie Scheiner) 주도로 구성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많은 나라에서 견고한 조직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동티모르 문제는 마침내 주류 언론에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언제나 정확한 내용은 아니더라도. 동티모르 활동가들의 열성적인 로비활동으로 미국 의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점점 더 제한했다. 종종 미국 정부가 이를 교묘히 피해가기는 했지만. 1996년에 대외적으로 동티모르를 대표하던 호세 라모스 오르타(Jose Ramos Horta)(그는 당시 동티모르 저항국민회의(CNRM) 의장이기도 했다 = 옮긴이)와 동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인 카를로스 필리페 시메네스 벨로(Carlos Filipe Ximenes Belo) 주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동티모르 사태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9. 최근 실시된 국민투표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며, 또 그 결과는 어떠했나?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대중집회 이어지고 경제위기와 거대 부패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B. J. 하비비(Habibie)는 총선과 동티모르의 장래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 요구를 받아들였다. 인도네시아 총선에서 제1 야당 지도자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 52살인 그는 수카르노의 맏딸로 현재 인도네시아 민주투쟁당 당수이다. = 옮긴이)가 승리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11월에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하지만 그 이는 10월20일 대통령 선거에서 하비비가 사퇴했음에도 당선되지 못했음 = 신기섭), 인도네시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안전기구(national security apparatus)를 해체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동티모르의 장래를 묻는 국민투표의 조건에 대한 협상에서, 국제사회는 결국 인도네시아의 기본 원칙을 따르기로 합의하였다. 국민투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실시하기로 하였다. 국제연합은 수백명의 비무장 선거감시요원들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지만, 이들에게는 준군사조직("민병대")의 행동을 멈추게 할 수단이 없었다. 이들 민병대는 인도네시아 군대가 조직했고, 군대의 지시와 직접 개입 아래 대규모 테러를 저질러왔다. 특히 그들의 특공대(코파서스, Kopassus)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훈련을 시킨, 무자비한 폭력과 잔인성으로 악명높은 군사 조직이다. 클린턴 정부는 국제연합이 (이 지역에서) 더욱 실질적인 힘을 확보하도록 압력을 넣기는커녕, 선거감시요원의 파견을 사실상 늦추었다. 국제연합은 테러가 계속되자 국민투표를 몇차례 연기했다. 이 테러는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에 남는 쪽에 투표하도록 위협하기 위해 군대가 저지른 것이 명백하다. 1999년 8월 30일, 놀라운 용기를 과시하며 동티모르 인구의 대부분이 투표에 참여하였고(투표율은 98.6%로 집계되었다. - 문화일보 98년 8월 31일자 1면 = 옮긴이), 5명 가운데 4명이 독립을 찬성했다.(찬성률은 78.5%로 집계되었다. - 한겨레 99년 9월 7일자 11면 = 옮긴이)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주민들을 협박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는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으며, 이로 인해 수십만명이 집을 떠났고, 집계된 수치는 없지만 확실히 수천명은 숨졌으며,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10. 국민투표 이후 지금 인도네시아와 민병대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인도네시아 군부가 노리는 것은 들고 일어날지 모를 (다른 지역)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그 대가는 너무나 심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과시하려는 것같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수하르토가 권력을 쥔 1965년∼66년 학살 당시에도 바로 이런 과시를 했는데, 온 나라를 협박하는 이런 행위는 몇년동안 계속됐고 그 이후에도 여러번 반복됐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서방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현재 인도네시아의 여러 곳에서는 (연방)탈퇴주의(secessionist, 사전에는 분리주의적 또는 연방탈퇴주의적이라고 나오는데 바로 뒤의 separatist와는 뜻을 구별해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임 = 신기섭)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달리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은, 나치 지배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이 "분리주의적"(separatist)이라고 불린 것과 같은 의미로 "분리주의적"이라고 불린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동티모르의 독립이 다른 분리주의 운동을 촉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같다.

또, 자카르타의 민간 권력을 약화시키고 수하르토 퇴진 이후에도 군대가 지배권을 틀어쥐려는 의도도 있을 것같다. 단순한 보복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티모르인들은 지난 25년동안 엄청난 용기와 완벽함으로 저항하였기에 이제 학살과 파괴라는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군부와 수하르토 일가가 동티모르의 천연자원 대부분을 강탈했으며 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티모르 협곡(Timor Gap)의 석유 재산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11. 국제연합의 구실은 무엇인가?

 

국제연합의 구실을 말하는 것은 약간 오도하는 것이다. 국제연합은 추상적인 실체로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세계 국가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도 거의 힘이 없다. 그 대신 주로 미국을 뜻하는 강대국들이 권한을 주는 경우에 한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국제연합은 평화유지군을 자체 상비군으로 둘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작전마다 군대를 파견할 의지가 있는 나라들을 찾아야 한다. 국제연합은 미국이 분담금을 계속 미납하고 있기 때문에 극심한 자금부족에 시달린다. 동티모르에 파견된 모든 평화유지군들은 아마도 국제연합군이 되지 못할 전망이다. 미국 의회가, 국제연합 평화유지군 활동을 미국 정부가 승인하기 앞서 15일간 유예기간을 두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워싱턴이 그런 활동에 소요되는 자국의 분담금을 내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향력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장 크지만, 총회나 경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기구에서는 식민지 해방시기 이후 제 3세계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은 국제연합을 약화시키고 주변화하는 것이다. 국제연합은 국제 문제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야 하나, 미국과 다른 주요국가들의 정책은 국제기구를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결정자의 관점에서 볼 때, 국제연합은 한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국제연합이 희생양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동티모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학살은 지난 4반세기동안 그 곳에서 벌어진 잔혹행위들을 막을 책임을 미국과 서구 강대국들이 저버렸다는 데 직접적인 원인이 있으나, 국제연합은 아마도 그 비난을 대신 뒤집어쓰게 될 것 같다.

 

12. 국민투표 실시 이후, 현재 미국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 미국이 노리고 있는 것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현재의 권력관계를 무너뜨릴 위험을 최소화하고 특히 대중의 자각과 반대의 확산으로 나타나는 방해를 최소화하면서, 미국 기업 및 정치 엘리트의 힘과 경제적 이익을 키우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무자비한 독재자들과 친분을 지속시키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잔학행위를 열렬히 편들지 않는다면 모른 척 하되,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불안과 불복종을 독재자가 과도하게 유발했다고 결론이 나는 시점에서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래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의 군부가 대중시위 억압 문제로 분열할 것같아 보일 때까지 이란의 샤(the Shah) 왕조를 지지하였으며, 레이건 대통령은 필리핀에서 군부가 분열하고 수많은 민중이 거리로 나섬으로써 미국의 이해가 위기에 처할 때까지 마르코스(Marcos)를 감싸안았다.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은 대중적 폭발이 자국의 경제적, 지정학적 이익을 위협할 것처럼 보일 때까지 수하르토를 지지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일 경우에 한해서만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정책을 - 무기공급과 훈련과 외교적 지원을 통해서 - 지지하였다. 동티모르 문제가 전면에 떠오르지 않는 한에서 워싱턴은, 자카르타에 자율권을 주는 데 만족해 했다. 그러나 이젠 잔학행위에 관한 뉴스가 억제될 수 없게 되었다. 몇몇 용기있는 언론인들과 독립적인 감시자들, 그리고 몇몇 국제연합 직원들은 동티모르를 외면하길 거부하였으며, 활동가 연대조직이 이 사태를 널리 알려냈다. 이것으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에 대한 테러리즘을 계속 관용으로 대하는 미국 정부의 대가가 더 커졌다. 하지만 워싱턴은 여전히 인도네시아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키며 인도네시아 군부와 유대관계를 지속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13. 미국이 동티모르에서 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구실은 어떤 것인가?

 

미국과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군수산업이 많지 않아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무기 공급자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미군과 합동훈련을 하고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합동훈련은 1999년 8월 30일 국민투표가 있기 바로 일주일 전에 실시되었다.

또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미국과 다른 선진국, 그리고 이들 부자 나라들이 좌지우지하는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런 원조가 중단된다면, 인도네시아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말라버릴 것이고 국내 자본은 해외로 도피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도네시아는 미국 정부와 다른 서구 선진국들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에게 국제평화유지군을 받아들이도록 만든 압력같은 것을 동티모르에서 학살과 파괴를 중지하도록 강제하는 데 썼다면, - 그리고 이런 압력은 여전히 사용될 수 있다 - 이것은 평화유지군 파견보다도 훨씬 더 동티모르인들의 생명에 결정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여전히 평화유지군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며, 평화유지군은 인도네시아의 테러 위험이 여전한 서티모르로 옮겨가는 동티모르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못될 것이다.) 평화유지군은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산속으로 숨어들어 굶어죽을 위험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대량지원이 필요하다.) 또 해산하라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는 민병대를 제지하는 데도 유용한 구실을 할 수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를 죄고 있는 그러한 압력이 일주일전, 또는 2주전에 잔학행위를 멈추는 데 활용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로 하여금 민병대를 해산하게 하고, 그들의 테러를 중지시키는 데 6개월 전에 그러한 압력이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25년전 바로 그 당시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하도록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으며, 1975년 12월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미리 막도록 사용될 수도 있었다.

 

14. 미국은 동티모르에서 뭔가 긍정적인 일을 할 것인가?

 

미국 정부는 인도적 관점에서 행동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행동에도 기꺼이 관용을 베푼다. - 심지어는 반기기도 한다.

하지만 때때로 미국의 엘리트들은,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을 때의 사회적 대가가 급격히 커지면 긍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을 수도 있다. 폭발하는 인도주의적 요구들을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고려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중단시킨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인들의 저항과 미국내의 분열로 전쟁을 지속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중단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대중적 압력이 가해져 학살을 계속 부추기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이 상승하는 때에 한해서, 동티모르에 대하여 긍정적인 일을 할 것이다. -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끔찍스러운 부정적인 일을 그만둘 것이다.

이제 미국의 동티모르 정책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나, 미국의 정책을 좀 더 폭넓게 바꾸려는 사람에게나 전략은 똑같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도덕적 설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미국 정부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이해관계를 변화시킬 환경을 창출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조건(미국의 정책을 바꾸려면 필요한 것 = 신기섭)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들(엘리트들 = 신기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위협할 반대(세력)를 조직하는 것이다. 계획적인 티모르의 대량학살극을 부추기거나 방관함으로써 미국 엘리트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그들의 돈궤짝이 두둑해진다면, 또 이런 행동(의 이익 = 신기섭)을 상쇄하는 비용이 없다면,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전략에 입각한 대중 운동이 현재의 고요함과 일상적인 거래를 위협하기 시작한다면, 또 이런 운동이 성장하고 확대되어서 동티모르 사태 뿐 아니라 이런 사건의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조직 문제를 위협적으로 제기한다면, 그것은 진짜 위험한 비용이며 미국의 엘리트들은 그것을 매우 잘 이해한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나? 많이 알려고 노력하라. 다른 이들을 교육시키려 노력하라. 다른 의견을 가시화하려는 노력들을 도우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와 위원회에 기부를 해 재정적으로 돕든, 조직화에 필요한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든 말이다. 이 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티모르 사태건, 코소보건, 걸프전이나 니카라과 사태나 베트남 전쟁이건 답은 똑같다. 기업에 맞서 파업을 승리로 이끌려고 할 때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뒤집거나, 차별에 맞서는 적극개입행동을 유지하고자 (또는 우선적으로 승리하려고) 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외정책을 추구할 때도 답은 같다. 미국의 엘리트들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당신이 중단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행위의 사회적 비용을 급격히 높여서, 스스로를 누그러뜨리는 것 외엔 그들이 선택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원문: www.zmag.org/CrisesCurEvts/Timor/qanda.htm

번역: 류석원

2004/07/15 17:55 2004/07/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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